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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

1. 성경 (벧전2:1 ~ 10)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1)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2)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3)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4)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5)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7)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8)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9)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사도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가르쳤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중생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만일 성령 안에서 산다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 25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땅히 우리는 성령 안에서 행하여야만 한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 한 번 부름을 받은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요지이다. 사도는 그의 말 가운데서 같은 은유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갓난 아이와 같은 생활을요구한다. 이 말씀으로 그는 우리가 옛 사람과 옛 사람의 일을 벗어버렸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일치된다.

 베드로는 여기서 '갓난 아이'를 날로 후패해져 가는 노쇠한 육체와 대치시키고 있다. 또 그는 '젖'이라는 말로써 영적 삶에 대한 모든 감수성을 포함시키고 있다. 사도가 열거한 악들과 순전한 말씀의 젖 사이에는 대조를이루는데, 사도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악독과 외식은 세상의 부패에 집착하는 자들에게 속하고, 또 이 모든 악들을 흡수해 버린다. 한편 갓난 아이에게 속한 것은 모든 악에서 벗어난 거짓없고 순전한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잠시 동안에라도 그들은 시기에 물들고 서로 중상하는 법을 알게 되며 궤휼을 배우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온갖 악에 마음이 굳어져 버린다. 갓난아이들은 그들의 나이 탓으로 아직 시기가 무엇인지 궤휼이 무엇인지, 또 그와 같은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그 다음에 사도는 육체에 속한 옛 사람이 탐닉했던 모든 악들을 강한 음식에 비교한다. 젖은 단순하고 순진한 갓난아기에게 적합한 삶의 수단이므로 여기서 중생한 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버려야 할 모든 것들의 완전한 목록은 아니다. :사도들은 옛 사람에 관하여 말할 때 그 옛 사람의 모든 성품을 지적해 주는 악들 가운데 몇몇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갈5:19)라고 말하나, 그 말씀에서 모든 것을 다 열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몇 『가지 보기들에서 마치 거울을 통해 보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에서 나오는 무수한 악의 덩어리를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전 생애를 개혁시키는 일에 관하여 말한 다른 귀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도는 다만 몇 가지 보기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나 우리는 그 보기들만을 가지고도 그 전체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여기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바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곧 '악독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과 같은 과거 생활의 일들을 다 버렸으니 이제부터는 그와 정반대의  일, 즉 순전하고 신령한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촉구하여 새로운 윤리가 새 삶에 뒤따르도록 하고 있다.

 

"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  본 귀절은 에라스무스의 번역에 따라 '젖은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것이다' 라고 해석되고 있다. 사도는 이 표현으로써 마치 우리에게 그가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이 귀절이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고전1420)고 한 사도 바울의 말과 일치되는 것으로 본다. 사도가 지금 지각이 없고 무지로 가득한 어린 아이를 찬양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적절히 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순전하고 신령한 가정을 사모하라고 명한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무슨 목적으로 '로기콘' 과 '아돌론' 이라는 두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알게된다. 순전함과 신령함 혹은 기민한 지각은 분명히 서로 반대되는 것이나 순전한 것이 단조로운 것이 되고 궤휼이 신령한 것 대신에 끼어들어 올 것에 대비하여 두 단어는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루면 그리스도께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10 : 16)고 하신 말씀과 일치가 된다. 그 밖의 다른 문제는 잘 해결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어린 아이와 같기 때문에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전31;2).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러한 귀절들에서는 어린 아이에 비교된 자들이 항상 초심자로 남아 있어서 신앙의 도리에 무지하고 기초적인 요소들에만 집착을 하고 보다 차원이 높은 하나님의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젖'은 보다 단순한 교수법을 가리킨다. 곧 종교의 기초 교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듯 하는 교수법을 뜻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와 마찬가지로 이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계속해서 배워나가는 그리고 결코 그 진리를 아는 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기본적인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육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때 거듭난 맛을 보여주는 새 삶의 양식을 뜻한다. 그와 같은 의미로서 아이는 어른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장성한 사람과 대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바울이 에베소서4장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온전한 사람"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과 옛생활에 대치되고 있다. 더우기 중생한 갓난아이는 영구적인 아기이므로 베드로는 젖을 하나의 영구적인 자양물을 추천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이 자양물을 공급받아 자신들이 자라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  사도는 시편 34편 8절의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말씀을 언급한다. 그는 이 맛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영혼이 오직 그 안에서 참 안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의 권면의 근거를 이끌어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는 그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4. 사람에게는~~~~~예수에게 나아와" ;  본절은 단순히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을 언급한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고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은혜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만일 플라토가 이것을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바라보고 자기의 것으로 확언했을진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우리야말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음이 명백하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그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과 연결시키 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준엄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한 그를 두려워하고 피하려 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의 사랑을 신자들에게 알리시는 순간에는 그들이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잊고 서둘러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다.

 

사도는 또한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무슨 조건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하는지를 보여주며, 곧 우리가 그를 우리의 터와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초석으로서 이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하여 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그에게 헛되이, 혹은 아무 목적 없이 주신 것은 하나도 없음을 입증해 주신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다는 것을 인정함에 있어서 공격을 예상한다. 이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를 멸시하기까지 하므로 이같은 이유로 우리마저도 그를 무시하게 될는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이 도처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무지한 자들이 그 복음에서 멀리 떠나 그 복음을 고백하는 자들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지 않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세상의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그의 가치와 존귀를 유지하고 계시므로 그를 조금도 경히 여길 분으로 생각지 말 것을 경 고하고 있다.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  그 동사는 직설법인 동시에 명령법도 될 수가 있다. 이는 헬라어에 있어서 그 동사의 어미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뜻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지 간에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하나의 영적 성전으로 거룩히 구별하 여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그가 부르심의 목적으로부터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적절히 추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가 전체 신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 의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합하고 상호간의 사랑으로 굳게 연합되어 전체가 한 성전 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각자가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안에 거하시는 하나의 성전인 것이 사실이므로 모두가 다 서로 연합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성전을 이루어야 한다. 이 일은 모두가 다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자기의 의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동시에 각기 무슨 은사를 받았든지간에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를 "산돌"과 "신령한 집"으로 지칭함으로써 이미 그리스도를 산돌로 지칭했던 바와 같이 사도는 우리와 옛 성전 사이에 하나의 대조를 암시하고 있다. 이 대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 설명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와 동일한 목적이 사도가 '신령한 제사'에 관하여 덧붙이고 있는 말 뒤에 숨어 있다. :예표보다도 원형이 더 뛰어난 것처럼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훨씬 더 뛰어난 것들이다. 이는 우리가 모세가 율법 아래서 제정한 옛 성막과 그 모든 제도들이 예표해 온 하늘의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  의심은 반드시 나태를 동반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의 행하는 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우리에게 보통 격려와 자극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세번째 격려가 있다. 곧 사도는 그의 권면 가운데서 :두려움이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할 것에 대비하여 우리의 드리는 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선언한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실로 가공적인 숭배의식에 .열광적으로 도취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그들의 마음을 중독시켜서 자신들의 행위를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들의 양심이 진단을 받기에 이르기만 하면 그들은 주저하기 시작한다. 누구든지 자기가 헛되이 수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온 마음을 드려 충성스럽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음은 실로 분명한 사실이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인다. 우리의 제사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순결성을 결코 갖추고 있지 못 하다. 우리의 자기부인은 결코 온전할 수가 없고, 우리의 기도에 대한 열심은 결코 신실해야 할 만큼 신실할 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선을 행할 만큼 열심을 내고 또 부지런할 수가 없다. 우리의 행위는 불완전할 뿐이며 여러가지들로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행위들을 호의로 받으신다. 베드로는 여기서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열납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심과 우리 믿음의 부족을 직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행위가 그 자체의 탁월한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납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행위 자체만을 놓고 볼 때에는 아무것도 아니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주 관대하게 평가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노력에 훨씬 더 열심의 불을 힘있게 붙여줄 것이 당연하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전치사는 '드리다'는 동사와 적절히 연결될 수가 있다. 이는 그와 유사한 귀절로서 히브리서 13장 15절의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는 말씀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똑같이 남아있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제사장~~~~~" ;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 거룩히 구별하사 그 안에 거하시며 경배를 받으실 성전으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신다는 것은 하나의 특별한 명예가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우리를 자극하여 하나님을 보다 신실하게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이중적인 명예를 로마서12장 1절에서 언급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릴 것을 지적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지 않는 한 그에게 '아무것도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그에게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기도와 감사와 구제와 그밖의 신앙적인 의무들이 따르게 된다.

 

"6. 경에 기록하였으되(경에서 포함되어 있으되--칼빈 사역)" ;  동사 포함하다 (페리에케인)를 그리스도에 연결시켜서 그것을 '포옹하다' 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이 연합하기 때 문이다. 그런데 이 뜻은 사도가 의미하는 바에서 전혀 벗어나 있다. 그리스도가 다른 자들보다 뛰어나다는 해석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가 없다. 베드로 는 단순히 성경의 증거를 인용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그가 덧붙이고 있는 바가 성경에 있는 것을 성령께서 가르친다는 것이거나 혹은 (결국 같은 말이 되겠으나) 그것이 성경 안에 포함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이 귀절은 앞절을 아주 적절히 확증해 준다. 이는 우리가 사소한 이유로 혹은 거의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또 어떤 자들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는 거치는 돌이 되어 불쑥 나타난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위엄과 존귀가 뛰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악은 거의 언제나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또 오늘날에는 특히 더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거짓된 견해들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우기 사람들의 배은망덕과 불신앙이 그러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도처에서 멸시를 당하고 계신다. 이와같이 그들은 서로간에는 존경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마땅히 돌려야 할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된 말씀을 상기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세상의 경멸과 거절로 말미암아 우리가 참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첫번째 귀절은 이사야서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절망적인 악을 공격한 다음 마지막으로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사28 :16).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없이는 교회의 건물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도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고전3:11) 다른 터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 전체가 그의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즉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돌아서기만 한다면 자기의 서 있는 곳이 벼랑 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건축물의 전체 중량이 얹히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지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건축물의 치수를 재고 기준을 정하는 바 시험의 돌이라 칭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그리스도를 견고한 주춧돌이라 칭한다. 이 주춧돌 위에 전체 중량이 다 얹히게 보도된다. 그리스도는 전체 건축물의 유일한 터이실 뿐 아니라 그 건축물의 기초가 되사는 머릿돌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서 특별히 그의 현재 논증에 가장 적절한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는 존귀와 가치가 무한한 택함을 받은 돌아요, 또한 우리가 그 위에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끌어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아무리 멸시한다 할지라도 우리 는 그를 멸시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아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이라 칭 함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어떤 이들이 모퉁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서로 구분되는 두 개의 벽으로서 유 대인과 이방인을 연결시키는 뜻으로 사용하신 듯이 통해석하는 의미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 우리는 그 건축물의 중량이 그리스도 위에 얹히기 때문에 그 가 모퉁이 돌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이 단순한 설명으로 만족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가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음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는 시편 78편 69절에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 이 지으셨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 한분만 자기 교회를 택하 시고 또 건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그 교회를 건축하심에 있어서 사람들의 수고와 사역을 사용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하나님 이 교회가 참된 자기 자신의 작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부정하게 하지는 못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기초가 도시 것은 그가: 아버지에 의 해서 이 목적으로 세우심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퉁이 돌을 하나님께서 시온에 두셨다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 리의 믿음이 그리스도를 굳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과 선지 자들에게로 나아가야만 한다. 비록 이 돌이 세상 끝까지 확대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먼저 그 당시 교회의 터가 있는 시온에 자리잡아야만 했 다. 아버지께서 그의 교회를 회복하실 목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 돌 을 교회에 두셨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그 말을 오 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들만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야만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온이 아닌 곳에는 기초 반석을 두실 수 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시온에서 시작하여 이제 온 세상에 확대되었 으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것임이니라"(사23)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는 곳도 또한 시온에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이것은 시 편 기자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내어 보내시리니" (시1100 : 22)라는 말과도 일치된다.

 

"저를 믿는 자는~~~~~~~" ;  이사야 선지자는 '저를'에 강조점을 모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일반적으로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선언하는 것이 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의 대상으로(in scopum fidei) 그리스도를 신 것이 분명하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오직 그만을 바라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자기가 전적으로 의지할 분으로 모시지 않고서는 아무도 바로 민을 수가 없다.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 곧 하나의 약속이나 혹은 권면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본문의 미래 시제는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로 번역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 있어서 미래 시제는 자주 명령법으로 받아 들여지는 수가 있다. 본문을 명령법으로 받는다면 '믿는 자로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라'가 될 것이다.그러므로 그 의미는 곧 '마음에 동요됨이 없이 조용히 너희 소망을 굳게 붙들고 너희 감정을 억제하기를 주께서 그의 약속 성취하시기를 기뻐하실 때까지 하라' 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다른 곳에서 또한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30 :15)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독법이 베드로의 해석에 더 가까운 것같이 보이므로 나는 그 해석을 취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곧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니 그가 흔들리거나 치우치지 않는 것은 견고하고 영원한 터를 갖고 있음이라' 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타락의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하나의 값진 진리이다. 부끄러움을 당한다(pudefieri)는 것은 두려움을 당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베드로는 비록 그가 헬라어 역본을 따르고 있으나 이사야 선지자의 진정한 의미를 보전하고 있다.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그가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돌로 선언하셨으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도 역시 보배로운 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음으로 시인해야 하는 분, 또 그가 실제로 자기를 입증하신 분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결론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보배로운 돌이시므로 그는 신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보배로운 돌이 되신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진가와 그의 뛰어나심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사도의 목적은 불경건한 자의 무리들이 가해오는 공격을 대처하는 데에 있었으므로 그는 즉시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또 다른 절을 덧붙이는데, 그 취지는 곧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할지라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존귀는 빼앗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으로 시편 118편 22절의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지명하신 위엄을 계속 유지해 나가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여기서 언급 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유의해야만 한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리스도가 모퉁이의 머릿돌로서 그 건축물을 유지하리라는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은 끝내 헛 수고로 돌아갔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참으로 그리스도와 좀 더 연관성 있는 귀절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귀절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 귀절을 해석하신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도(마21 : 42) 역시 입증되고 있다. 이 말씀은 또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벌써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해석은 .조상들로부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해져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메시아에 관한 말씀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점에 관하여 더 이상 길게 논하지 않겠다. 우리는 다윗이 이와같이 자기 세대에서 버림을 당함으로써 그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전반부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건축자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이것은 다윗에게서 처음 예표된 사실이다. 이는 다윗이 권세 있는 자들 에게 조정죄를 받고 잃어버린 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와 동일한 일이 그 리스도에게서도 이루어졌다. .이는 교회를 다스리던 자들이 온갖 .힘을 기울 여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교회의 형상이 오직 제사장들과 장로 들과 서기관들 안에서만 분명히 드러났던 바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원수 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연약한 자들은 큰 혼란에 빠질 수 가 있을 것이다. 이같은 공격에 대처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이 일은 바로 다윗의 증거에 의해서 예언되었던 사실임을 .상기시켜 표준다. 비록

 

이 훈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만 베드로는 특히이것이 적용되어야 할 바로 그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노안에서 최고 권세의 자리를 스스로 취하는 자들은 가장 고질적인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악질적으로  지독하게 박해한다.

 

교황은 자기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가 얼마나 지독하게 그리스도를 핍박하는가를 보고 있다 이 비참한 고광경은 순박한 자들과 무지한 자들을 놀라게 한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분명히 다윗의 예언했던 바가 이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자들이 이 예언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역사 우리의 믿음에 대항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가 매일매일 공강화되어 중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이런 일은 다윗이 지적한 예언을 따르자면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려진 돌멩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는데, 그것들은 소위 고위 성직자들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일본임으로써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정치적 혹은 영적인 지배를 언급할 때 흔히 건축의 다운유를 사용하므로 다윗도 역시 교회를 통치할 책임과 권세를 부여받은  자들을 '건축자들로 지칭한다.

 

그러나 그들이 건축을 올바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건축자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그 권세만 휘두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지칭하고 '있다. 여기 서 직분을 맡은 자들이 항상 하나님의 진실하고 충성된 [종은 아니라는 결론 이 나온다. 그러므로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교회의 영구 활통치자나 되는것 처럼 계속 최고 권세를 차지하는 것은 이중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째로 교회를 다스리는 그들의 지분은 제국을 다스리는 헬리오가발루스(Heliogab: alus, 218~222 A. D. , 로마의 황제)의 직분보다 결코 더 정당하거나 더 합 법적인 것일 선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그들이 뻔뻔스럽게 요구하는 바를 허 락하여 주며, 그들이 바로 일부르심을 받았다고 인정해 기준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윗이 교회의 일상 통치자들에 관하여 선언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이라기 보다는 돼지우 리를 짓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다음 부분은 자기의 권세와 위엄을 차랑하 는 이 모든 쓸모 없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그의 자리에 모실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  비록 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건축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전혀 자리를 내어드 리지 않을지라도 신자들에게는 하나의 견고하고 영구한 기초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재확인해 줌으로써 사도는 이제 형벌이 불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에 놀라게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이사야의 증언을 인용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에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실 것을 선언하고 있다(사8:14). 그것은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곧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바울도 역시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롬9:3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군의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밝히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보응이 선 언되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초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거침과 걸림이 될 것이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의 굳건하고 견고함이 그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모든 신자들 을 지탱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준엄함도 역시 지극히 강한 것 이어서 그를 거역하는 모든 자들을 파하여 갈기갈기 찢어놓으실 것이다. 이 는 이 둘 사이에 중도가 있을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 위에 건축을 하든 지 아니면 그를 거역하든지 어느 한쪽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거치는 돌이 되는 경위를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거치는 돌이 되는 것 은 사람들이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이다. 이것은 바로 유대 인이 저지른 죄였다. 이는 비록 그들이 기꺼이 메시아를 영접하겠노라고 고백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메시아를 그들에게 보내셨을 때 그들이 그 를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도 역시 마찬가지 행위를 저 지르고 있다. 그들은 복음의 교리를 지탱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 의 단순한 이름만을 경배하고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복음에 계 시된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말씀을 거 부하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완고하고 강 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파멸이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경책이 그리스도에게로 전가될 것에 대비하여 유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초로 제 공되셨으므로 그가 보거치는 반석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본래 직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을 짓기에 합당하도 록 하시는 것인데, 불신앙이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다툼으로 이끌어감으로 그들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 '걸려 넘어지게↖된다는 것이다.러위해서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베드로는 이므로 ' 충돌의 성격을 밝히기하는 불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  이 귀절은 뒤 가지로 해석될수가 있다. 여기서 유대인들을 언급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일반적인 해석다. 베드로는은 곧 구원의 약속이 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기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도 동일하게 적합하다. 곧 바로가|하나님'을 거스르는 위치에 세움을 입었다는 |말씀(출9 16)과 같이 [그들이불신양.편에 서기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불신자들이 바로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정해진 것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이 후자의 의미를 취하려는 것은 본문에 삽입되어 있는 불변화사 και(카이)지만 만일 첫번째[견해를 취하게 된다면 그것은 호된 책망이 될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 특별히 그들을 위해 정해진 구원을 거절한 불신앙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들이 믿기로정해졌다는 말로써 사도는 '다만 그들의 외적인 부르침을 언급하고 있을?뿐이다. 그들이 그들에게 전파된 말씀을[ '거절함으로써 l 사람들의 배은망덕한 행위(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가 충분히 입증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민족 모두에게 맺으신 일반 언약을하신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여기서 신자들이 불신자들의 행위에 낙심하여 (자주 그러하듯이) 믿음에서 떠날 것을 대비해서 신자들을 그들과 분리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구별하신 자들이 불경건한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므로 베드로는 여기서 존대를 받고 영예를 누릴만한 신실한 자들에게 부르심을 입은 목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상기시킨다. 사도가 신자들에게 부여한 것은 모세가 옛 백성에게 부여했던 것과 동일한 고상한 명칭들이었다(출19:6). 그러나 사도의 목적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존귀를 되찾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들에게 이 놀라운 복의 세상적인 .맛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증거를 주신 것이 사실이다.

 

렇다면 그 의미는 마치 사도가 옛적에 모세는 너희 조상을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칭하였으나 .이제 이 모든 고귀한 명칭이 더욱 정당하게 너희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너희는 너희에게서 그 명칭들을 빼앗아가는 불신앙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동안에 대부분의 백성이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도는 암시로써 믿는 유대인들이 나머지 유대인들보다 훨씬 적으나 그들을 서로 비교하고있다. 사도는 마치, 참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며오직 그들만이 하나님께서 하나의 특수한 특권으로 그의 온 민족에게 베푸신 축복들을 계속 유지해 왔다고 말한다.

 

사도는 그들을 택하신 족속"이라 칭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자들은 지나치고 그들만을 특별한 방법으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거룩한 나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여 자기에게로 돌리셨고 그들로 하여금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는 그들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혹은 기업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의 백성을 삼으시고 그에게 헌신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의미로 받는다. 이 의미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19:5)라고 한 모세의 말씀에 의해 입증된다.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 이 말은 모세의 말과 분명히 그 순서가 뒤바뀌고 있다. 모세는 '제사장 나라'로 칭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같으므로 베드로가 뜻하는 바는 이러하다. 모세는 너희 조상들을 거룩한 나라로 칭하였으니 이는 모든 백성의 말에 의하면 왕같은 자유를 누렸다는 것이고, 또 그들 중에서 제사장들이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지위는 서로 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으니 그 뛰어난 직분으로 너희 각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나라의 시민으로, 그리고 그의 제사장직에 참예하는 자로서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비록 너희 조상도 지금 너희의 가진 바와 비슷한 직분을 가졌었으나 그들보다 너희가 탁월하다. 분리의 담, 곧 막힌 담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무너진 뒤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 나라와 민족 중에서 불러 모으시고 그가 자기 백성을 삼으시는 모든 자들에게 이 고상한 명칭들을 부여해 주신다.

 

이러한 유익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와 나머지 인류 사이에는 생각해야 할 하나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무한하신가 하는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는 그가 본래 부패한 우리를 성결케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악과 수치 밖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으신 때에 우리를 택해주셨다. 그는 무가치한 쓰레기같은자들 중에서 우리를 그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그는 비천한 자들에게 제사장직의 명예를 주시며 사단과 죄와 죽음의 노예들에게 왕같은 자유를 가져다 주신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  사도는 여기서 우리를 자극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신중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요지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같이 무수한 은총을 베푸셨고 또 끊임없이 그러한 은총들을 나타내시는 것은 우리를 통해서 그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덕이라는 말로써 사도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지혜와 선하심과 권능과 의와 그밖의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이 덕을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전체 삶을 통해서 선전해야만 한다. 이 교리는 매일의 묵상 주제가 되어야만 하는 동시에 우리는 또한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이 바로 우리를 통해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는 그 말로써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성을 확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길에서 빛을 찾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무지의 구렁팅이와 흑암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러내신 것은 더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기 이전의 처지가 어떠한 처지인가를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사60: 2)라는 뜻이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빛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후에 흑암에 빠졌던 것이 틀림없다. 이 주제에 관하보다 충분한 것을 알고자 한다면 에베소서 제 2장의 주석을 보면 좋을 것이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  사도는 그의 주장을 확증하기 위해서 호세아서에서 한 귀절을 인용하여 그것을 의도한 대로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이 버림을 당하였다고 선언하고 나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들에게 장래의 회복에 관한 소망을 주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것이 그의 시대에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는 유대인들이 찢겨진 몸의 지체들처럼 사방에 흩어졌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예배드리는 것을 잊어버렸으며 부패한 이방인들 속에 뒤섞여 있었다. 그들에 관해서는 다만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는 것이다. 로마서 9장 26절에서 바울도 역시 이 예언을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곧 그것은 유대인들만의 우위성을 자랑할 근거가 되었던 여호와의 언약이 파기된 때부터 그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보통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 아닌 자들을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차별없이 적용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실 근거거 되는 그의 은혜로우신 언약이 보다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가 덧붙인 것이다. 그는 마치 '주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사 우리를 은혜로 받으신 것 외에는 그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를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백성 아닌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멀리 있던 자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