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벧전1:13)

1. 성경 (벧전1;13 ~ 20)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3)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4)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5)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6)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8)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19)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은혜의 위대성과 탁월성을 근거로 하여 사도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를 더욱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는 권면을 끌어들인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욱 풍성 하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맥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 는 앞에서 복음이 우리를 초청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주 고상하므로 하늘 에 있는 천사들조차도 그것을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했었다. '세상에 있 는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분명히 우리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가 우리를 그에게로 초청하 시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 고 온 세상과 모든 장애물들을 물리쳐서 자유로운 몸으로 그리스도를 향하 여 위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 사도는 그의 이런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굳 게 붙어 있을 것과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그들에게 가져올 '은혜를 예비 하고 사모하며 온전히 바랄 것을 권면한다. 그러므로 이 권면의 전반부는 그들의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 들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그 후반 부는 그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변화되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굳게 불들 것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이것은 .옛 관습에서 취해온 하나의 은유이다. 옛 사람들은 긴 겉옷을 입었기 때문에 허리를 동이지 않고서는 불편해서 여행이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말은 일을 하기 위해서 혹은 어떤 사업을 위해서 허리를 동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에게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서 자유롭게 하나님께로 나아갈 것을 명한다. 마치 사도가 정욕을 억제하고 금할 것을 명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에 관해서 지나치게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독자들은 사도의 참 뜻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베드로가 허리를 마음과 연관시킴으로써 이중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의 말이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 3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우리의 마음이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염려와 헛된 욕망들에 얽매여 있어서 위로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릇 이 소망을 갖기를 참으로 원하는 사람은 우선 세상의 얽매인 것들을 자신에게서 벗어던지고 자기 마음의 허리를 동여서 헛된 욕망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와 동일한 목적으로 사도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근신하라' 는 말을 덧붙인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일에만 절제를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근신까지도 명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생각과 욕구를 제어해서 이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누구든지 이런 유혹에 뛰 어들 때에는 그것을 맛만 본다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에 취하고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잊고 말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복음의 교리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직은 그를 거울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볼 뿐이므로 그 완전 한 계시는 마지막 날로 연기된다는 것이다.  전자의 의미는 에라스무스에 의해서 채택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번째의 의미가 이 귀절에는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의 목적은 우리를 이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 목적에 가장 적합한 것은 곧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돌린다면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또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못박히게 될 것이다. 그 밖에도 베드로는 바로 앞에서 그 표현을 사용하여 이 의미를 지적하였다. 사도들이 전치사 (엔)을 'εis(에이스)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본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긴 여행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기다리시며 너희에게 그 은혜를 가 져다 주심이라'.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구원이 그의 안에 감취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질 때까지는 이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소망 중에서 기다릴 필요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가 인내로서 기다리지 못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베 푸신 그의 은혜가 헛되이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히 바랄지어다" ; . 사도는 헛된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바라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참되고 신실하게 바라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비록 그들이 은혜에 관하여 어떤 소망은 갖고 있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요동하므로 그들의 소망에는 견고함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고 말씀함으로써 그들보다 속히 그 은혜를 받도록 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실지라도 그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가까이 임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일 이처럼 우리 앞에 너그럽게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할 경우 우리의 배은망덕한 죄는 얼마나 중한 것이 될 것인가?  이 말은 특별히 우리의 소망을 자극시키기 위한 것이다.

 

"14. 너회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  사도는 먼저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특권과 영예로 부르심을 입었으며,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제 그의 순종하는 자녀로 삼으신 목적으로 입양하셨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입양의 선물은 값없이 거저 얻는 것인만큼 비록 순종이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다른 자들과 구분지어준다.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를 명하여 이 세상의 사욕을 좇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할 때 그 순종의 범위가 어디까지 미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과 율법에 순종하여 그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타락한 자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변화를 받아 옛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평생에 그들 앞에 두어야 할 목표, 곧 거룩함과 의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할 목표를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 육체의 모든 감정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또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이 그 에 대하여 적대적이므로 베드로는 세상을 단념하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분 명히 성경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실 일에 관하여 언급할 때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 사욕과 함께 멸한 바 된 그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전 알지 못할 때에~~~~" ;  사도는 알지 못할 때에"라는 말로써 그들이 그 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부르심을 받기 이전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여 기서 모든 악의 근원은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도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알지 못한다 는 뜻이 아니다. 이는 무지만이 죄의 원인이라고 한 플라토의 주장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양심이 아무리 그들의 불신앙을 착책망할지라도 '그들은 흑암에 처한 소경처럼 길을 잃 고 방황한다. 이는 그들이 정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참 빛 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 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강하지 못한 곳에는 흑암과 오류와 공허가 가득하고 빛과 생명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불경건한 자들 로 하여금 그들이 범죄할 때 자기의 잘못을 의식시키고 그들의 심판자가 하 늘에 있다는 것과 그들 안에서 심판하는 자를 깨닫도록 해주는 일을 무능하 게 만들지는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빛의 나라이므로 그에 게서 떠난 자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소경이 되어 깊은 구렁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아 더 이상 사욕에 끌려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 므로 누가 자기의 새로운 삶 가운데서 무슨 진전을 보였든지간에 그는 하나 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그만큼의 지진전을 보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베드로가 항상 율법에 진숙하였고 [또 유일하신참 하나님을 예배 하여 자라온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을진대 마치 그들이 이방인들이나 되는 것처럼 어찌 그들에게 무지하고 눈이 멀었다고 책망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 문이 생기지만 그리스도 없는 지식은 모두가[지극히 무익하다는 사실이 여 기서 아주 분명해진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 라는 사람들이 헛된 자랑을 지적하고자 했을 때, 그는 그들이 "머리를 붙들 지 아니하는지라"(골2 :19)라는 한 마디로 .잘 표현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하였는데, 그들은 무수한 타락에 몰두함으로써 눈에 수건이 가리어져 율법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고후3 그들을 훈련하 고 가르친 것은 하나의 참된 빛이었으나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에 게 숨기어져 있는 한 그들은 빛 가운데서도 소경이나 마찬가지이다. 만일 베드로가 율법을 문자 그대로 선포했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지혜인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는 한, 그들은 이교도들과 같이 어두 움에 처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더 그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분투노력해야 하겠는가!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  사도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 은 그 목적으로부터 논증을 이끌어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우리 를 특별한 백성으로 구별하여 세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모든 더러 운 것들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시사도는 모세가 자주 반복했던 문장을 인용한 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면에 이방 족속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들이 그 이 방 족속들로부터 사악한 행실과 수없는 부패의 요소들을 쉽사리 받아들일 염려가 있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주 그들을 자기에게로 불러 주위 를 환기시키셨다. 그는 마치 너희는 나로 더불어 행하여야 하나니 너희는 나의 것임이라.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불결에 오염되지 말지니라 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역시 사람을 보고 그들의 일반 생활방 식을 쉽게 모방한다. 주께서 그의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구별하시기 (전에는 이와같이 우리가 일반 사람들에게 이끌려서 온갖 악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 히 일어난다.

 

우리에게 그와 같이 기록하라 고 명하는 말씀에는 동등한 비교가 암시되 어 있지 않다. 우리는 마땅히 조건이 허락하는 한 이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 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목표에는 아 직도 훨씬 미치지 못하므로 우리는 매일 더욱 더 분투노력해야만 한다. 우 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듣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께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이니라 라고 하시는 말씀을 덧붙이 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도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우리가' 우 리 삶의 전 부분에서 이 거룩한 행실의 향기를 풍기도록 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지극히 적고 가장 보잘것없는 일들에서도 주님은 자기[백성들 로 특히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실천하도록 훈련시키고 다른 이들보다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사실을 잘 안다.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너희가,아버지라 부른즉~~~~~" ;  여기에 하나님 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은 곧 자신을 그의 자녀로 고백하는 자들이다. 이 『사자께서 에 아브라함과 것은 모세가 창세기 48장 16절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 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씀에서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다. 여기의 부른다 와 칭한다 는 말은 프랑스어에서 reclamer(르끌라메)로 사용되었다. 사도는 그가 앞서 말한 '순종하는 자녀같이 를 다시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순종해야 할 것인가를 아버지의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며, 사도는 말하기를 그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사람들처럼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 버지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며(삼상16:7) 그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 (렘5:3).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된다(롬2 2)고 말할 때, 그가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그곳에서 하나님이. 헛된 겉치레에 고속아 넘어가시기를 바라는 위선자들, 곧 외식하는 자들을 공 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곧 우리가 단순히 외모로만 하나님께 순 종하여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는 그가 외모를 보고 기뻐하는 죽을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속 중심 을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손과 발을 위하여 율 법을 제정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영적인 의도 요구하신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라는 말로써 사도가. 공로나 상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행위의 공로나 구원의 원인, 혹은 동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개인의 자격 이나 신분을 내세울 입장이 못되며, 다만 진정한 ,마음의 신실성에 대해서 관 심이 기울어지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구점에서 믿음은 행위를 포 함한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의 양심의 신실성에 따라 판단하시므로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추론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가 하는 것이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두려움'은 벌을 받지 않고 적당히 넘겼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때 어느덧 기어들어 오는 부주의와 반대된다. 하나님의 눈은 아 주 예리하셔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므로 우리는 주의깊고 소홀 함이 없이 그와 동행해야만 한다. '사도는 우리의 생을 가리켜 "나그네로 있 을 때"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본서의 서두에서 유대인들을 가리켜 말한 나그네와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모든 경건한 자들은 다 이 세상에서 순례자 혹은 나그네이기 때문에 그가 여기서 신자들을 가리켜 나그네로 칭 하고 있다(히11: 13참조).

 

"18. 너희가 알거니와~~~" ;  이것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언급할 때 언제나 기 억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 구속의 보장으로 끌 어낸 것이다. 복음의 은혜를 거부하거나 '멸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무 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가치를 보여주신 바 그리스도의 피도 지역시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 거절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무서 신성모독죄인가를 잘 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우리의 구속의 값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예리하게 우리를 자극하여 거룩하게 행하도록 하는 것은 없다.

 

"은이나 금 같이~~~~" ;  사도는 은과 금을 그의 논증을 확대 설명하는 데에 대 조적으로 도입시켜서 사람들이 값진 것으로 생각하는 온 세상 것이 다 우리 가 받은 구속의 엄청난 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 금 깨닫게 하고 있다.  사도는 우리가 우리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삶이 망령된 행질의 깊은 구렁텅이에서 방황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가 바른 길로 나아오게 된 것은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치 르신 값이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보증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부르신 원인이 된다.

 

더우기 베드로는 우리에게 우리의 불신앙이 이 구속의 값을 헛되게 [하거 나 무익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할 것을 경고한다. 바울이 . 자기는 청결 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설겨왔다(딤후1 :3)고 자랑하고 있고, 또 이와같이 그가 디모데를 그 외조모 프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물려 받은 순수한 믿음으로 인하여 칭찬하고 있으며(딤후1:5),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유대인들이 누구에게 예배하는지를 알고 국계시키 무때문에(요4) 22) 베드 로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서 망령된 :것밖에는 배운 것 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상해 보일는지 모른다.하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곧 그리스도께서 참 신앙의 도(), 혹은 지식이[ 유대인들에게 감속하였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그 백성을 언급하고 계신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 과 계명들을 언급하고 계신 것이다. 조성전이 까닭없이 예루살렘에 건축된 것 이 아니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상상에 따라 [경배를]받지 '않으시고 율 법에 규정된 바에 따라서 경배를 받으신 것도 까닭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 러므로 사도는 유대인들이 그 율법을 바로 지킬 경우에만 길을 잃지 아니하 리라고 말한다. 바울의 조상과 로이스와 유니게,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 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항상 그[백성 가운데 적어도 소수의 남은 자들을 두 고 계셨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백성의 주축은 온통 부패하여 져서 온갖 오류에 빠져버렸으나, 이 남은 자들 인간에서는 아직 참된 경건이 발견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미신들이 [지배하고외식이 만연하였으나 내 가 알기로는 구원의 소망이 하찮은 것들 위에 '세워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악한 생각에 몰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지극히 하찮은 망상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던 .자들은 ]더욱 큰 부패의 :유혹에 빠 져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민족의 대부분이 참 신앙에서 떨어져 나 갔거나 아니면 타락해 있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가 조상들의 기관습을 정 죄할 때, 그것을 β법의 핵심이며 진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고 있 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순간에 그들은 파멸로 떨 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조상들의 권위나 유전의 구실 아래 숨는 것은 헛 된 일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열조의 |율례를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며 그 후우상들로 스스로[더럽히지 말라"(겔20 18)고, 쳤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비록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과 유전을 저버리는 것이 될지라도 우리의 이전 생활 을 정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은 조상들의 이름만으 로도 그들의 모든 미신들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그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그 결과야 어찌되었든지 개 의치 않고 무조건 거부하는 데에서 또 다른 실수를 범하고 있다.

 

"19. 오직 홈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 사도는 이 유추를 통하여 비록 그가 특히 유월절 어린 양을 언 급하고 있으나 옛 제사들에 의해서 예표되어 온 모든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었음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점에서 율법을 읽 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깨닫게 된다. 비록 제사의식은 폐지되 었을지라도 그 실체를 예표와 비교해 보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한 예표 안에서 다른 것이 포함하고 있는 바를 찾도록 해준다. 모세는 유월절 학생으로서 홈이 없는 어린 양을ю취 하라고 명하였다(출12:5). 이와 동일한 명령이 제사에 관해서도 자주 반복 되고 있다(레3:6, 4:3, 22: 20~25; 민28 ; 그리고 그밖의 여 러 곳을 참조할 것). 이 귀절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킴으로써 그리스도는 하 나님께서 인정하신 홈없는 완전한 희생이셨음을 베드로는 |가르치고 있다. 이는 그가 흠없고 점없는 완전하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일 그의 안 에 무슨 홈을 갖고 계셨더라면 그는 하나님께 바로 드려질 수가 없었으려 니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도 없으셨을 것이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 ; 다시금 하나의 대조를 통해서 사도는 그 당시 사람들이 특별히 입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확대 설명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그들의 때로 늦추신 것은 놀 라운 은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경문 가운데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의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므 로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구주로 나타나신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 의 새롭고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을우리는 특히 이 점을 바로 이해해야만 한다. 새로운 것은 항상 의심을 산다는 사실 외에 도, 만일 우리가 수천 년이 지난 뒤에야 인간을 위한 구제책이 갑자기 하나 님께 떠올랐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도대체 어떤 기초를 갖고 있겠는가 ?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영원한 구원이 그의 안에 항상 있어온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확실히 신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외에 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오래 전에 약속된 사실을 이미 듣고 있었던 유대인 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 비록 그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직분에 관하여 참되거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들에게 한 구속자를 약속하셨다는 확신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창세 전에 타락한 것이 아닌데 어찌 그리스도께서 미리 구 속자로 지명되셨겠는가 하는 질문에 다음에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 것은 곧 하나님의 예지를 언급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하나 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기 이전에 그 사람이 자기의 신실을 오래 지키지 못하 리라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놀라우신 지혜와 선하심 이 나올 수 있다. 즉 치료는 :병이 발생한 을 따라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인류를 파멸에서 '구할 구속자가 되어야 할 것 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더욱 분명 히 빛을 발한다. 바로 그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의 진병을 예견하시고 그 은혜로운 치료책을 마련하셔서 첫 사람 아담이나 타락하여 사망에 이르기 전 에 다시 생명으로 회복시킬 대책을 정해 두신 것이었다.[만일 독자가 이 주 제에 관하여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면 나의 〈기독교 (강요>를 참 고하기 바라다.

 

"이 말세에~~~~~~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  이 말에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나 타나심 뿐 아니라 또한 복음의 선포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하신 바를. 수행하셨고, 그리하여 그가 조상들에게 희미하게 지시하셨던 :바가 (이제는 복음의: 가르침 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사도는 그 일 이 이 말세에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때가 전차매'(갈 4:4)라고 한 말과 의미가 같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학섭리 가운데서 작 정하신 때가 완전히 이르러서 만기()가 된 것을 뜻한다

 

너희를 위하여 사도는 바로 위에서 발한 약속이 쓸모없게 된 조상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리그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은 총을 베푸셨으므로 우리에게 향하신 은혜가 크면 클수록 더욱더 존경과 열 심과 관심이 요구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