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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

1. 성경 (벧전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  바울의 .서두 인사와 공통되는 이 인사말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위하여 기원할 때에는 그 동사가  빠져있고, 베드로는  "더욱 많을지어다" 하는 말 가운데 동사를 덧붙여 놓고 있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다. 바울은 신자들을 위해서 은혜와 평강을  시작하여 기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시작하신 일을 다 이루실 때까지 은혜와 평강이 더하시기를 기원하였다.

 

"나그네" ; . 경건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들이요, 또한 운유적으로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경건한 자들이 나그네로 지칭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질못을 범하고 있다. 이같은 잘못은 바로 앞에 나오는, 흩어진 이라는 말로써 반박될 수가 있다.  이 '나그네'라는 말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될 수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고국에서 추방되어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들이 주께서 하나의 영원한 기업으로 약속하셨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사도는 뒤에 모든 신자들을 나그네 혹은 행인으로 지칭한다. 이는 그들이 땅에서는 순례자들이기 때문이나 여기서는 문제가 다르다. 유대인들이 나그네들인 것은 그들이 약간은 본도에, 약간은 갈라디아에,또 일부는 비두니아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가 본 서신을 특히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저작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8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자기가 유대인의 사도로 세우심을 입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흑해로부터 갑바도기아에 이르는 소아시아 전체를 그가 열거하고 있는 지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2. 순종함과" : 사도는 "거룩하게 하심"에 두 가지 일을 덧붙인다. 그는 '순종함' 이 새 삶을 의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은 사죄를 뜻하고 있다고 본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성화의 일부, 혹은 결과라고 한다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가끔 즐겨 사용하던 용어와는 다소 의미가 다른 그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유효적인 부르심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새로와져서 그의 의에 순종하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우리가 죄에서 깨끗하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율법 아래서 거행되던 옛날의 피 뿌리는 의식에 대한 하나의 암시적인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에 희생 제물을 죽여 피를 뿌리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못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도 만일 우리의 양심이 죄 씻음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가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나의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에 율법 아래서 피를 뿌리는 일이 제사장의 손으로 행하여졌듯이 이제도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피를 뿌리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의 무조건적인 선택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신앙 체험으로써 확인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신 데에는 두가지 결과 혹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곧 새롭게 지으심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두 가지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선택이 그의 부르심과 분리될 수도 없거니와 믿음에 의한 칭의가 중생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의 비밀에 속한 것이어서 성령의 특별한 계시가 없이는 알려질 수 없는데 이것이 어찌 밝혀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게 되므로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 우리는 :우리 형제들의 선택에 관하여 지나치게 캐고 들어서는 안되고, 그들은 오히려 부르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으로 받아 들여진 자들은 다 선택을 받은 자들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상의 남은 사람들로부터  구별하신 것이었다. 바로 구원의 증표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겉으로만 선택받은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신 표가 .나타나는 자들을 모두 선택 받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비의 판단은 될지언정 믿음의 판단은 되지 못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 속에서 그들의 선택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부터 선택을 추론해 내고 있음을 문맥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내가 지적한 대로 선택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를 보여주는 한,  사도는 그들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전에 택하신 자들만을 거룩하게 위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도는 우리에게 그 선택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선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구별되었고 세상과 함께 망하지 않게 되는데, 사도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선택의 기초요, 제일의 원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가 구원을 위하여 택하신 자들을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지의 본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소피스트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공로를 미리 아셨으며, 그리하여 각자가 스스로 자신을 입증하는 바에 따라 선택을 받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우리의 공로를 배격하고 우리의 구원의 터전인 하나님의 뜻을 지적하고 있다.그러므로 베드로가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선택의 원인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써 이는 하나님이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우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 편에서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다. 우리는 이 주제를 에베소서 제1장에서와 그밖의 다른 곳에서 보다 광범하게 다룬 적이 있다.

 

사도는 우리의 선택을 우선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총에 돌리는 동시에 선택으로 말미암은 은혜를 우리에게 알게 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부르심을 간과하고 우리 선택의 확실성을 아주 깊은 신비에 싸여 있는 하나님의 숨겨진 예지 속에서 찾아내려는 것보다 더 위험스럽고 더욱 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아주 훌륭하게 교정을 한다. 그는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생각나게 하여 그 원인이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고, 이제는 우리에게 선택의 효과를 제시하고 상기시켜 그 효과를 제시할 뿐 아니라 선택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 효과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곧 유효적 소명인데, 성령의 내적인 역사에 의하여 생기는 믿음이 복음의 외적 선포에 더해질  때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