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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

1. 성경 (벧전1:3 ~ 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3)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4)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5)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6)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7)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8)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9)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0)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1)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3. 찬송하리로다" :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전쟁에 대비하고 또 용기를 얻어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 본 서신의 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 다. 이는 우리가 그 유익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그밖의 모든 것들은 무가치하게 될 것이며,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베푸시는 축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때 그가 없이는 무엇이나 다 쓰레기와 같이 되기 때 문이다.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높이 찬양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무한한 보화를 얻고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버리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함에 있고, 또한 현재 상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낙심할 것이 아니라 인내로써 극복하고 영원한 복으로 만족을 누리도록 하자는 데 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사도는 신자들에게 육체의 모든 반감들을 사라지게 할 영적인 기쁨에 참예할 것을 요청한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  우리는 원문의 이 말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칭하심으로써 그와 세상의 거짓 신들과의 관계를 구별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 다 음부터는 오직 그곳에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위엄을 적나라하게 파악하려는 자들은 참  하나님 대신 하나의 우상을 붙들고 있을 따름이다. 유대인과 회교도들이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무릇 진실로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와 만남 없이 하나님을 추구할 때면 예외없이 방황하고 혼란에 빠져서 결국은 완전히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얼마나 은혜롭고 친절하신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하나 님의 선하심을 실제로 알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많으신 긍휼대로" ;  사도는 먼저 유효적인 원인을 언급하고 나서 그 다음에 중보적인 원인을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산 소망이 있게 하기 위하여 거듭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이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홀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행위의 공로를 보다 완전하게 배제시키기 위해서 베드로는 "그 많으신 궁홀"이라고 말한다. 실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고 나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원인들을 끄집어내서 그만큼 하나님의 긍훌을 삭감시킨. 베드로는 오직 긍훌만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그런 다음 즉시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라고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을  다른 방법으로나 다른 곳에서는 보여주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여기에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급되지 않고 그의 부활만 언급된 사실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일의 시작이 없이는 결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는 그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가 여기서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새 생명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 그는 거듭남이 하나의 선물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본래 진노의 자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육체에 따른 생명의 소망을 갖고 태어났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본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의 재창조이다. 이 주제에 관해서는 에베소서 1장에서 다룬 적이 있다. 비록 산 소망은 부패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에 고정된 소망과 인간의 덧없이 사라지는 소망들 사이의 비교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하나 희망을 의미한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  여기에 나오는 세 가지 형용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베드로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은혜의 위대함에 참으로 감명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더우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라는 말씀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라는 말씀은 동격이며, 후자는 전자를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사도가 한 가지 일을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는 각기 중요성을 갖고 있다. 기업이 하늘에 간직된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기업이 하나님의  손안에 간직되지 않았다면 끝없는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만일 기업이 세상에 있었다면 그처럼 수많은 변화 속에서 우리가 어찌 불안한 마음 없이 그것을 기대할 수 있겠 는가?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이 사단이 감히 해할 수 없는 안전한 곳에 간직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는 한 기업이 우리에게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없으므로 베드로는 '너희를 위하여' 라는 말을 덧붙인다.

 

주께서는 그가 계신 하늘에서 우리를 향하여 '보라 네 구원이 내 손에 있으니 너를 위하여 간직하고 있노라' 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심령은 평안 가운데서 고요히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다 허락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도는 다시 믿음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부여받은 자들이 나머지 다른 자들과 구별되게 하고, 또 그들에게 이 하늘나라의 참되고 합법적인 상속자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하고 있다. 믿음은 곧 바로 하늘로 통하므로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하늘에 있는 축복들을 가져다 준다.

 

"5. 너희가~~~~구원을 얻기 위하여" ; 우리는 본래 지체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곧 권태에 사로잡히게 되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구원이 지체되는 것은 구원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타낼 적절한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 교리는 우리의  소망을 든든히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  더우기 사도는 심판날을 '말세라 칭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의 회복이 그 이전에는 기대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위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말세로 불리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부터의 전 기간을 의미하는데, 이전 시대와 비교하여 그와같이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말로써 세상이 끝날 때까지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 우리는 사도가 하는 말 가운데 서 그 전후 관계에 유의해야만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보호하심을 입고 있으며 우리의 기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그 문맥을 바로 파악하지 못할 때에는 즉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치 광풍이 흉흉하는 바다에라도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처지에 있는데 우리의 구원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 가? 우리가 수없이 난파당할 위험 가운데서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는 처지에서 우리의 구원이 '고요한 포구에 안전히 보호되어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위험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 보호하심을 받고 있으며, 비록 우리가 그와같이 죽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믿음의 보호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전히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줄 때 이와 같은 반대 견해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믿음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자주 움츠러들기 때문에 주께서 만일 우리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항상 내일을 염려했을 것이다.

 

우리는 실로 교황제도하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보존(성도의 견인)은 내일도 동일한 은혜의 상태에 있게 될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심스럽다는 하나의 사단의 소리와도 같은 견해로 꽉 차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를 이와 같은 의심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의식하는 데서 일어나는 의심이 우리를 불안에 빠뜨릴 것에 대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믿음의 확고함이 생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 안전은 현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역시 보장된다.

 

"6. 그러므로~~~~~~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  버림을 받은 자들도  악에서 벗어나 자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심은 또한 그들에게도 역시 공통되는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베드로는 신자라면 근심을 기쁘게 견디지만 불경건한 자들은 원망하면서 완악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다툰다고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길들인 황소가 그 멍에에 순응하듯이 혹은유순한 말은 어린 아이가 잡은 고삐에도 순종하듯이 모든 근심을 이겨낸다. 나님께서는 버려진 자들에게 사납고 고집이 센 말의 입에 강제로 재갈을 물리듯이 근심을 당하게 하신다. 버려진 자들은 발길질을 하고 몸부림을 치되 헛수고로 끝날 뿐이다: 이제 베드로는 신자들을 칭찬한다. 이는 그들이 기쁘게 근심을 당했으며 마지못해서 억지로 당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이제~~~잠간"이라는 말은 위로를 준다. 왜냐하면 고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잠시 있다가 지나간다면 근심을 경감시킬 수가 있고 또 우리의 생은 잠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난의 조건은 동기 혹은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자기 백성에게 이와 같은 시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시 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까닭없이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면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위로의 논증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그 목적이 항상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뜻을 온전히 좇아 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가 한 차례의 시험만 언급하고 있지 않고 .여러 차례의 시험을 언급하고 있으며, 한 종류의 시험만 언급하고 있지 않고 여러가지 시 험들을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귀절에 관한 주석은 야 고보서 1장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 비록 그 헬라어 동사의 어미가 미심쩍기는 할지라도 그 의미는 우리가 '너희를 기뻐하다 보다'는 '너희가 기뻐하다'로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는 하늘에 간직된 구원의 소망에 관한 전 주제를 언급한다. 사도는 그들을 칭찬하기보다는 권면하고 있다. .이는 그의 목적이 구원의 소망에서 나오는 열매, 곧 영적인 기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고 커다란 기쁨을 말함이다. 사도가 신자들이 크게 기뻐하는 동시에 근심한다고 말할 때 다소 모순이 있어 보인다. 이는 기뻐하는 것과 근심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두 가지 일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훌륭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으로써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자들은 목석도 아니고, 또 그들이 슬픔에 동요되지 않고, 위험을 개의치 않으며 궁핍에 해를 입지 않고, '극심하고 견디기 어려운 박해에도 상처를 입지 아니할 정도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박탈당한 사람들도 아니므로 그들은 악으로 인해 근심하게 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슬픔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되므로 근심하는 중에도 동시에 끊임없이 기뻐하게 된다. 이러므로 근심은 그들의 기쁨을 막을 수가 없고 오히려 기쁨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또 비록 기쁨이 슬픔을 이긴다 할지라도 그 슬픔을 아주 종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 기쁨이 우리의 본성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인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데에 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 사 값없이 그의 자녀로 택하신 사실을 생각할 때 기쁨이 생겨나기 시작한 다. 이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다 모든 악한 재난을 견뎌내는 것이 쉬운 일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신령한 것들을 맛본다면 어찌 슬픔에 억눌리는 일이 있겠는가?  자기의 고난을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시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그 고난을 닫고 일어설 뿐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는다.

 

"7. 너희~~~~~금보다 더 귀하여" ;  이 논증은 보다 낮은 것에서부터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된다. 우리가 만일 금을 썩지 아니할 귀한 물질로 여긴다면 그것을 불로 연단하여 그 진가를 확인할진대,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을 그의 보시기에 귀한 것으로 여기시는 만큼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연단을 요구하시는 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겠는가? 비록 말씀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도는 믿음을 금에 비교하되 그 가치가 충분히 드러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믿음을 금보다 더 귀 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가 동사 '도키마제스다이: 연단하다'와 명사 '도키미온; 연단'의 의미를 어디까지 확대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금은 실제로 두 번 불에 연단한다. 한 번은 불순물을 제거 할 때, 그리고 또 한번은 순도를 결정할 때 그렇게 한다. 이 두 가지 연단이 다 믿음에 대해서도 매우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먼저 우리 안에 여러가지 불신앙의 불순물들을 제거할 때 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갖가지 고난들을 통해서 불신앙의 요소들을 뽑아내야만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광로에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깨끗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에게는 또한 그 믿음이 거짓된 것인지 참된 것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연단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두 견해를 취하고자 한다. 곧이어 나오는 내용은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은이 제련되기 전에는 가치가 없는 것처럼, 사도는 우리의 믿음도 그것이 충분히 입증되기 전에는 특히하나님께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 이 말을 덧붙인 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고 끝까지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우리의 생명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져 있고, 또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까지 마치 땅에 묻혀 있는 것처럼 감취어져 있게 될 것이며, 우리의 전 생애는 겉사람이 후패해가는 과정인 보통시에 우리가 당하는 모든 독일들은 죽음의 서곡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고난 중에서 영광과 찬양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시련은 자신에 대한 죄책과 수욕으로 가득차 있으나 그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은 아직 분명히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그 위로의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  사도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은 곧 그들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예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지금도 보지 못하는 그를 믿는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후자에서 비롯되는 사실이다. 사랑의 원인은 믿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축복들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그를 사랑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심으로써 그가 우리도 자기에게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보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명령한다. 이것은 그들이 눈에 숨겨진 축복들로 만족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에 대해서 비록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도는 오히려 그들을 권면한다기보다는 가르치는 데 있었다.

 

우선 첫절에 흐르고 있는 그의 사상의 흐름은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만 헤 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들의 축복이 소망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장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믿음은 참으로 밝은 눈을 갖고 있다. 그들은 그 믿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말씀 의 거울로 사용하고 만족한다. 이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 라"(고후5 : 6 7)고 하였다.

다음 귀절은 그 믿음은 하나의 냉정한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밝혀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만드는 뜨거운 심령이라는 것이다. 민음은 소피스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혼란스럽고 복잡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곧 정도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될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 푯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믿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존재만을 붙드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에게 어떠한 분인가, 또 그가 우리에게 어떠한 복을 가져다 주시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네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 : 21) 고 하신 주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사람의 행복이 있는 곳으로 이끌리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 .사도는 다시금 그가 언급했던 믿음의 열매를 언급 하는데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얻고 또한 우리가 영생의 소망 가운데서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의 비할 데 없는 유익이다. 사도는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지각에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영광스러운'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뜻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게 될 헛되고 속되어 곧 사라질 것과 반대되는 것을 뜻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영광스러운'은 헛된 것으로 변할 위험이 없는, 견고하고 영원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하늘 위로 들리움을 받아서 세상을 멸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들이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헛되이 자랑하는 자들이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집중시켜야 할 곳, 즉 영원한 구원을 상기시킨다. 이 세상은 그 유혹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감정에 굴레를 씌워놓고 있다. 이 생과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영적인 삶을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하는 큰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 앞에 이 장래의 생을 우리의 깊은 묵상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기만 한다면 그밖의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염려할 일이 못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받음이라는 말로써 사도는 그들이 구원을 확신하고 더욱 즐겁게 전진해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의심을 사라지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서도 사도는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은혜가 연기되는 일로 인하여 지나치게 불안해 하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며, 우리가 때도 이르기 전에 우리의 기업을 주실 것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또한 '결국'이라는 말을 보상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도의 말에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오직 우리를 값없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자녀로 받아들 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의심할 여지없는 확실한 구원은 인간 행위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인간의 공로에서는 구원을 소망하거나 기대할 수조차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의 몸에 대해서 역시 부활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는데 왜 영혼의 구원만을 사도는 언급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이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 보호함이라(고전5:5)고 말하는 바와 같이 영혼은 불멸하므로 구원은 당연히 영혼에게 돌려진다 사도가 "영원한 구원을 말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의미이다. 여기에는 육체에 속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사라져 가는 삶의 암시적인 대조가 나오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육체는 그것이 영혼과 결합되어 있는 한 ,영광에 참예하는 데서 제외되지 아니한다.

 

 [10 ~ 12절 개관]

사도는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구원을 연구하고 살폈다는 사실에서 그 '구원 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의 큰 문제요, 또 특별히 뛰어난 사 건임에 틀림없다. 구원의 문제는 선지서에서 핵심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옛날 모든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부지런히 연구해서 얻은 것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구원의 복음이 알려져 있으므로 더욱 분명히 빛을 발한다. 이와 동시에 사도는 이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이는 창세로부터 그 구원이 성령의 분명한 증거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첫째로 그것은 사도는 여기서 하나의 대조를 통하여 복음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옛 조상들에게 알려졌던 것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이 알려졌다는 것과 둘째로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에게 선포된 바는 성령께서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입증하셨으므로 어떠한 의심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고 말할때, 이것은 그들의 글이나 교리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 속에 가득차 있었던 개개인의 소망을 가리킨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그들의 공적인 직무에 대한 언급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각 항목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본문의 내용을 어떤 주제 아래서 정 리해야만 할 것이다. 첫째 주제는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강림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예언했던 선지자들이 그 완전한 계시가 '이루어지게 될 시기에 관하 여 연구하고 자세히 살폈다는 것이다. 둘째 주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 선지자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그리스도의 왕국의 장래 일을 예언하셨다는 것 이다. 그의 왕국은 현재에 나타나 있고, 또 앞으로 나타나게 될 것으로 기 들어 대가 되었다. 곧 그리스도와 그의 온 몸이 많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가시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그 선지자들의 사은은 그들이 살던 당시에는 하 시대보다도 우리를 위해 더욱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었으며, 그 나님께서 단지 희미한 예표로서만 제시하던 구원의 사실들을 이제는 그리스 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으로서 그리스도만을 통해 위로부터 온 구원의 계시라는 것이다.

 

네번째 주제는 곧 말씀하시는 이는 .동일하신 상성령이시므로 거기에는 복음에 포함된 선지자들 의 교훈에 대한 분명한 확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멀리서 출선포하시던 구원을 이제는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다시 도말해서 우리 눈앞에 밝히 드러내신 구원은 이전보다 훨 씬 더 완전하고 명백한 구원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주제는 통하늘에 서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즐기는 천사들조차도 살펴보기를 원하므로 복음 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의 영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점이 여기 서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주제들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천상의 행복의 정상에 오르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비할 바 없는 유익을 것것으로 돌아가게 할 장애물이 어디 있겠는가?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 우리의 조상들은 j우리가 얻은 구원과 동일 한 구원을 얻지 못하였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사도는 조상들이 마치 오늘 날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그들이 고대하였다 고: 말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즉 여기서의 구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분명한 계시에 접하게 되었다는 의미 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베드로의 이 말은 단순히 많은 선지자와 의인 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 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13 17)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계시에 관한 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가 져다주신 은혜를 제한된 상태에서 체험하였으므로 그들이 그 이상의 구원 을 결과결과하였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러시므온이스그리스도를 보고 나서 평온을 에 얻고 조용히 자기의 죽음을 예비하였을 때 그는 자기가 이전에 불안과 초조 휩싸여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경건한 자들의 느낌 이었다

 

사도는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는 말을 한글개역 성경은 11절에 덧붙임으로써 그들의 연구의 성격을 지적한다. 율법과 복음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곧 그 둘 사이에는 마치 어떤 휘장이 쳐져 있는 것 같아서 지금 :우리 눈에 계시된 일들을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보다 가까이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실로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아직  떠오르지 아니하셨는데도 완전한 빛으로 대낮처럼 비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록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규정된다. 테두리 안에 자신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할지라도 보다 가까이에서 고자 열망하며 탄원하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연구속이 |속히임하 열망하였으나 그 때를 늦추는, 것이 주 기를 바라고, 날마다 그것을 보고자 인내로 기다리는 일을 방 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소망 안에는 특정한 시기를 찾아내 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더우기 예언 가운데서 그 려는 것은 나에게는 '무익한 일로 보인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구원의 때는 선지자들이 가르쳤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라 틴어 주석가들이 장래의 은혜'로 해석하는 말은 문자적으로 너희에게 임 할 은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국 마찬가지가 되므로 나는 그 말을 달리 해석할 생각이 없다. 사도가 선지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할 시기를 살핀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에 전념하였다고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는 것은 더 욱 가치 있는 일이다. 이와같이 그들은 모범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경을 바 로 상고하는 열심을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균형을 유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인간의 마음을 다스 려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으로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밖에 다른 것은 더 원치 못하도록 규제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호기심에는 분명히 한계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그 지도자가 되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은 인간의 생각이 미칠 수 있는 이상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해 야만 한다.

 

"11. 자기 속에 계신 스그리스도의 영이" ;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먼저 자기 (선지자들) 속에 계셨고  다음에 :미리 증거하셨다'(증거를 주셨다)고 말이 한다. 이 표현으로써 그는 선지자들이 지식의 영을 받았고 우리의 선생들 과 증인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그 영을 받았으나 그들은 우리에게 분명히 .나이 타난 그 빛에는 참예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자도 는 그들의 가르침에 크게 찬사를 보낸다. 이유는 그 교훈들이 성령의 ]증거소 였기 때문이다. 비록 전파자와 목회자들은 사람이었으나 가르치는 분은 명령이시다. :사도는 까닭없이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들을 :다스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성령을 하늘로서 임하신바 복음 전하는 여자들의 주인금 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며, 그것은 그리스도 로 인하여 옛 선지자들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받으실 고난~~~~~" ; 신자들이 침착하게 그들의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그들에게 그들의 고난이 오래 전에 성령에 의해서 예언 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그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시키고 있 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교회 '통치는 처음부터 지하나님께서 지명하셨 으므로 십자가는 승리로, 사망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그는 또 이 교훈이 분명히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치 우리가 고난으로 비참한 처지에 있기나 한 것처럼 우리가 부당한 고난에 억 눌릴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를 :복된 자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순서에 유의해야 한다. 사도는 먼저 '고난을 언급한다. 그리고 나서 고난에 뒤따르는 영광을 말한다. 그는 이 순서가 바뀌거나 뒤집어질 수가 없으며 반드시 고난이 영광에 앞선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영광에 들어가기에 앞서 많은 '고난을 당한다는 것과 또 고난은 그들 에게 영광을 안겨다 주므로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이같이 연결시키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제 우리가 처하게 될 우리의 위치가 그처럼 여러 세기 전에 벌써 예언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복된 장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또 우리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우연히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섭리에 의해서 받는 것이며, 마지막으 로 예언의 말씀들은 거울과 같아서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늘 영광의 형상을 비추어 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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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베드로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을 증거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그의 몸에서 분리시키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제한될 것이 아니요, 머리로부터 시작하여 그 온 몸의 지체에까지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우 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만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 29)고 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일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보편적인 고난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우리의 고 난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으로 제시할 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 화시키는 '자극제로서 훨씬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이 고난을 그가 반음으로써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사망과 [생명의 관계가 어떠한 것 인가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매일 그 의 각 지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사 그의 고난이 우리 안에서 끝날 때 영광도 또한 그 완성을 보게 하시는 것이 거룩한 연합의 특권이요, 방법이 된다. 골로새서 3장과 디모데 전서 4장에서 이 주제에 관하여 보다 상세히 논한 바를 살펴보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  본절은 광신자들에 의해서 이상하게 왜곡되어 율법 아래서 살던 조상들이 영원한 구원의 소망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본절 은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시대에 대하여 훌륭한 공헌을 하였고 또 교회를 가르쳤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우리가 말세에 처하여 있기 때문에 그 들의 사역은 우리에게 더욱 유용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 수스도의 오나라를 얼마나 극구 찬양했으며 그 나라를 돋보이게 하며 모든 사람 들을 권장하여 그 나라를 구하는 데 얼마나 부지런히 힘썼는지를 잘 알고 있 다. 그러나 그들은 앞서 죽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본 바를 다 보지 못하 였다. 이것은 대상에 음식을 1차려놓고 지체함으로써 그 뒤에 오는 다른 손님 들로 하여금 그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여유 있게 먹게 함이 아니고 또 무엇 이겠는가?? [그들은 실로 믿음으로써 1주께서 선지자들의 손을 통하여 우리 에게 넘겨주신 음식을 즐겁게 맛보았으며, 또한 그들 영혼의 참된 양식이신 그리스도의 만찬에 동참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선지자들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불러 일으키도록 하는 한계 내에서 가르쳤다는 그들의 직분이 제한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고 숨어 계신 분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숨어 계시다는 것 은 그의 은혜의 권능이 숨기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그가, 아직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는 의미에서 숨어 계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왕국도 역시 아직은 숨기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가리어져 있 었다. 그가 이 땅에 강림하심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 주셨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전에는 멀리 예표로서만 나타나던 이 영 적인 부요를 가까이에서 대면하게 하셨다. 이같이 열매 맺힌 그리스도의 성 취는 우리와 선지자들의 간격을 드러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 자 신을 위해서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일하였는가를 깨닫게 된다.

 

비록 선지자들은 그들이 선포한 은혜가 다른 시대로 .연기되리라는 말을 위로부터 들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은혜를 전파하는 .일에 게으르지 아니 하였으며 기다리는 [일로 싫증을 :내지도 아니하였다. [그들의 인내가 [그처럼 위대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두세 번 당해야 할 모든 고난들을 :그들은 한꺼번 에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은혜로 일반아들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 히 그들보다 몇 ,배나 더 감사할 줄3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  사도는 다시 그옛날 예언과 복음의 가르침의 차이를 지 적한다.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아 복음에 계시가 되었으 므로 성령께서 이전에 증거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광도 이제는 밝히 전파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사도는 복음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이는 복음이 다름아 닌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오래 전에 증거된 것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다. 더 나아가서 사도는 신자들이 여기에서 어떤 인간적인 것을 생각할 것 에 대비하여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은 동일하신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 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복음이 진주같은 지혜의 보화들을 간직하고 있으나 아직도 전천사들에게는 인봉되어 숨기어져 있다는 것은 5실로 복음에 대한 찬사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항상 하나님 의 얼굴을 뵈오며 교회를 다스리시는 일에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대하나님의 종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도 자기의 몫 을 다하는 천사들에게 숨겨진 것들이 우리에게 밝히 알려진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할는지 모른다. 이에 대해 .나는 이 일들은 우리가 그 것들을 말씀의 거울을 통해서 볼 때에만 우리에게 밝히 알려져 있으며, 우 리의 지식이 천사들의 지식보다도 더 높다는 말은 앉아니라고 대답하겠다.

 

베드로는 다만 천사들이 좀 확실하게 .살펴보기를」원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8~10절에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천사들에게 알려졌다 고 말하고 있다. .그처럼 여러 세기 동안 산 소망에서 멀리 떨어져 나갔던 잃어버린 세상의 육신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의 지체로 모아질 때 그 것은 천사들의 눈에 하나의 새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러므로 그들은 날마다 자기 교회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과 지혜가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놀라움은 얼마나 더 클 것인가가 그들이 아직도 기대하고 또 확실하게 .살펴보고자 하는 이 계시는 현재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절의 의미는 두 가지로 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복음 안에서 갖고 있는 보화는 천사들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놀라운 광경이 될 것이므로 그들에게 그것을 살펴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일게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들이 복음 안에 나타난 살아 있는 형상이 그리스도의 나라 보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할 수 있으나 나에게는 후자가 가장 적절한 의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