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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1)

1. 성경 (벧전2:11 ~ 25)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1)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2)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3)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4)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5)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6)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17)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8)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19)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0)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1)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2)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3)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4)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2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이 권면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첫 부분은 곧 그들의 영혼이 사악한 정욕에서 벗어나 자유로와야 한다는 것이요, 그 두번째 부분은 곧 그들이 사람 가운데서 정직하게 살아야 하며 선한 삶의 모범을 통해서 경건한 자들을 굳게할 뿐 아니라 또한 불신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육체의 정욕에 탐닉하는 데서부터 그들을 불러내기 위해서 사도는 그들이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논증을 편다. 사도가 그들을 이같이 칭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고국에서 추방당하여 여러 나라에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나그네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을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 같이 본 서신 서두에서는 하나의 사실적인 의미로 나그네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그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된다. 육체의 정욕이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세상에 거하기 때문이며, 또한,하늘이 우리의 :본향인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로이 인생을 지낼 때에는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  또 하나의 논증은 곧 그들이 육체의 정욕을. 좇으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제7장과 갈라디아서 제5장에서 서술하고 있는(그곳에서 바울은 영혼을 육있는체의 대적자로 소개하고 있다) 싸움을 언급하고 것이 아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곧 영혼이 육체의 욕구에 동조할 때면 언제나 그것은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이  면에서 사도는 우리의  부주의를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가 우리 몸에 위험을 가져다주는 원수들은 애써 피하면서도  부주의하여 우리 영혼을 해치고 파멸에 빠지게 하는 원수들을 거리낌없이 용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로 이것은 원수 앞에, 우리의 목을 들이미는 것과도 같다. 

 

"육체의 정욕~~~~~" ; 이 말씀에서 사도는 소피스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동물들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욕구들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본래 이끌림을 받는 영혼의 육망들도 역시 지적하고 있다. 이는 육체 곧 구속받지 못한 본성의 모든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인 것이 분명하기때문이다(롬8:7)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  사도의 권면의 두번째 부분은 그들이 사람들에 대해서 정직하게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에 선행하는 바는 곧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인간의 도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서 일반사람들에게 장애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사도는 분명히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도처에서 미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많은 혐오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한 생활과 행실을  통해서그들의 이름에 붙은 악평과 불명예를 떨어버리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힘을 써야만 했다.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고후11 :12)라는바울의 권면에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의 악평과 비방은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고 바른 생활을 하게 해주는 자극제가 된다. 이는 그들이 우리의 실수를 찾기 위하여 현안으로 우리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나태하고 부주의하게 살 여가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  사도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호평과 칭찬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위해 분투 노력하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아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가르치신 바와 같이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곧 불신자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권고하시는 날에"의 뜻이다. -나는 어떤 이들이 이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에연결시키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달리 해석한다. 곧 위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통해서 방황하는 자들을 바른길로 되돌아오도록 준비시키신다는 뜻으로 본다. '우리가 돌아서는 첫 걸음온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기를 기뻐하실 때 시작된다.그러나 그가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돌이키신다면 우리는 멸망하게 된다그러므로 권고하시는 날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로 초청하시는 날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  어떤 이들은 모든 피조물에 세운'으로번역한다. 그러나 그처럼 애매모호한 번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왜곡시켜서 다른 뜻을 이끌어내고 있다. 나는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리시는: 구별된 방식을 지적해 내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헬라어에 있어서 동사 'κτξecv(크티제인)-여기서 κτισιs(크티시스)가 :나왔다 은건물을 이루다, 건물을 짓다를 뜻한다. 그 ,말은 제도 라는 ,말과 일치가 된다. 이 말로써베드로는 우리에게 세계의 창조주이산 하나님께서 인간을 혼돈 상태에 두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에 따라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제도는 말하자면 균형이 잡히고 또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진 하나의 건물과도같은 것이다. 그것이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로 불리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고안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잘 배열이 되고, 정당하게 질서가세워지고 또 적합한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사도는 이제 특별한 권면에 이른다. 관원들에 대한 순복은 정직한 행실의 일부이므로 사도는 그들에게 순복하라 는 결론을 내린다. 제도의 명에를 거부할 때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게 될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처치 곤란한 민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특히 이러한 이유로 미움을 샀고 또 악명이 높았다. 그들이 각 지방에서 일으킨 소요사태들은 큰 재난의 원인들이되었으므로 조용하고 평화적인 부류의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을 역병처럼 무서위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베드로는 복종에 관하여강력히 말하지않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자유의 선언으로, 생각하여 누구나 다 자기는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났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종이 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보였다. 또 세상의 상속자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소유권을 갖고 있지 못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모든 관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었고, 또 그들의 권세를 매우 남용했으므로 특별한 존경심을 자아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발견되지 못했으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베드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곧 그는 이와 같은 특별한 이유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국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보여줄 것을 권면하고 있다.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내가 보기에는 사도가 여기서 가이사를 지칭하고있는 듯하다. 가이사 황제는 당시 본 서신 서두에 언급된 모든 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비록 왕이라는 명칭은 로마인들이 극히 싫어하는 것이었으나 헬라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실로 그들은 자주 가이사를αυτοκρατωρ(아우토크라토르; 절대 권능, 또는 능력)의 뜻으로 칭하였다.그러나 때로는 또한 βασιеυS(바실류스; 왕명)로 칭하기도 하였다. 그가 최고의 권좌에 있으므로 그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임에 있어서 사도는 가이사를 다른 관원들에 비교하고 있지 않다. 가이사는 최고의 권세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복종은 공직의 권세를 행사하는 모든 관원들에게 공히 돌려지고 있다. 그 의미는 곧 신자들이 그들을 다스리는 모든 관원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우연히 그 자리에 세움을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세움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역시 로마서 13장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권리로 그 권세를 얻었는지에 대해서 지나치게 캐묻는 습성이 있으나, 우리는 다만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그것을 보는 이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권세가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는 말로써 쓸데없는 질문들을 일축하고 있다. 성경이 자주 왕들에게 검을 주시고 그들을 권좌에 높이세우시며,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나라들을 움직이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베드로가 특히 로마 황제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 훈계를 덧 붙일 필요가 있었다. 이는 로마인들이 아시아에 침투해 들어와서 어떤 합법적인 방법을통해서보다는 부당한 간계를 통해서 이 지역들을 복종시켰던 것이 분명하기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 당시의 전통치자였던 가이사는 폭군적인 힘으로써 군소 군주국들을 지배하였었다. 그러므로 로베드로는 이 모든 일들을 논쟁에 이끌어들이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서 통치자들을 그 지위에 두셨으므로 신민들은 마땅히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기꺼이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4.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  이것이 우리가 국가의 권세를 존중해야만 할 두번째 이유이다. 곧 그 권세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공동복지를 위해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만일공익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다면 야비하고 잔인해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뜻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방백들의 사역을 통해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시므로 무릇 그들의 권세에 손상을 끼치는 자들은 인류의 적이다.

 

사도는 두 가지 일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플라토는 그것을 국가의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두 가지 일이란, 선한 자들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옛적에는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였을 뿐아니라 또한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였다. 비록 명예가 바로 돌려지지 않고 마땅히 받을 자에게 그 상이 돌아가지 아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을지라도 선한 자들이 적어도 방백들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 살고 있으며,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폭력과 해를 당하지 아니하며, 모든 사람이다 아무런 제재를 받음이 없이 마음대로 사는 것보다는 그들이 법 아래서보다 평온하게 지내고 또 그들의 명성을 보다 쉽게 유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시못할 명예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악인들이 그 원하는 바대로 행하지 제재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여기서 왕들과 그 밖의 방백들이 자주 그들의 권세를 남용하고 공평보다는 포악한 잔인성을 드러낸다는 반대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본 서신이 저작될 당시에는 모든 방백들이 거의 다 그 모양이었다. 이에 대하여나는 폭군들과 및 그와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제도가 여전히 유효한 상태안에서 그들의 권력을 남용하여 그와 같은 행위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라고 답변해 둔다. 그것은 마치 아내와 남편이 어울리지 않게 행동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영구한 결혼 계약이 파기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결과는 제 위치에서 변함이 없는 것이다.

 

누가 만일 이에 반대하여 우리는 방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취하여 그들의 힘이 미치는 한도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악용하고 비열한 야수처럼 폭력을 쓴다면 거기에는 순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에 대하여 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는 우리가 지극히 높이 인정해야만 하므로, 악랄한 폭군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권세를 존중해야한다고 답변하겠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또 하나의 답변이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잔인하고 난폭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공평을 지워버릴 수는 없으며, 아무도 하나님의 의와 공평에 대항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평한 질서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아 아주 파괴되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므로 언제나 그의 질서는 일부만이라도 흐려지지 않게 보전하신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류의 제도이든 그것이 아무리 변질되고 부패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정부 상태보다는 더 낫고 유익하다는 것을 부연해 둔다.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 . 사도는 온갖 계층의 관원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순복하지 않아도 될 방백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라는 말로써 이것을 확증한다. 원문의 대명사 그에게 를 왕에게 연결시키는 이들은 크게 잘못을 범하고 있다. 모든 방백들의 권세를 높이는 하나의 일반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백성을 다스리며 또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도 역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아) 하나님께서 세우신권세에 순복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결론이다운다.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 사도는 이제 불신자들이 악평할 기회를 틈탈 것에 대비하여 그의 이전 가르침: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가 앞서 말한 것보다 더 간결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어리석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만 도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는 표현은 비록 그것이 석색다른것이어서 :거칠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흐리게 하지는 않는다. 리그가'불신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그는 그들이 중상과 비방을 하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는데,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때문에 무식한 말로 비방을 한다. 불신자들에게 지각과 .이성을 주지 않으시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참 지각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중언는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제아무리 자기 자신의 영특함에 스스로 만족하고 또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으로 지혜로울 수 없 시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정죄하신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것도 견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불신자들의 비방을 막는 방법은 오직 선행으로 라고 제시한다. 이 표현에서 사도는 사람으로서의 모든 의무와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친절과 사랑을 다 포함시키고 있다. 이 중에는 방백들에 대한 기순복도 포함 순복이 없이는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자라날 수 없다. 만일 신 이 된다. 이 자들이 아무리 주의하여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불신자들의 비방은 결코 그 치지 아니하리라는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은 방금 여기 서 사도가 불신자들을 금하여 모욕과 비난을 퍼붓지 못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다만 그들이 제아무리 비방하고 싶어도 비방거리를 찾을 수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불신자들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애써 할 만큼 관심을 보일 .가치가 없다고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에 대비하여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불신자들의 입을 막아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 과 같이 하라" ;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일어난 반대들을 예기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말이다. 사람들은 본래 자기의 이익 을 찾는 데에는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오직 자기들만을 위해서 사는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하였다. 이 잘못된 생각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겉잡을 수 없는 방종과는 얼 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주는 베드로의 말에 의해서 교정되고 있다. 첫째로 사도는 악을 가리워주는 어떠한 구실이나 핑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의 말의 뜻은 곧 우리가 이웃을 해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힐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참 자유란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 자유이다.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을 섭기는 자들은 자유롭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우리가 보다 기꺼 이, 그리고 즉시 하나님께 순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유를 보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죄의 지배에서 것이나 사람들로 하여금 의에 순종하기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 자유는 하나의 자유한 종의 상태요, 또한 하나의 섬기는 자유이다. 이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하므로 이 자유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수식어가 필요하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양심은 자유하게 되나 이 자유가 우리를 금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 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유 하되 그들을 공경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에 대한 간단한 요지이다. 사도는 국가의 제도가 우리 가운데 확고해지지 않으며 방백들이 그들의 권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사람들에게 공평이 시행되지 아니할 것을 뜻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다 공경하라는 명령을 나는 아무도 무시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본다. 이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명령으로서 인간적인 우의와 교제의 촉진을 시사하고 있다. '공경하다 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비록 사도들이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였으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그들의 이전 언어인 히브리어를 따랐던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에게 우리가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고 또 교제를 나누어야만 하므로 모든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처럼 화평과 친교를 깨뜨리는 일은 없다. 사도가 형제의 사랑에 관하여 부연하고 있는 점은 그가 방금 ,말한 바에 대한 하나의 특별한 예이다.이는 우리가 믿음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사도는 지금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가져야 할 특별한 사랑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관계를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특히 사랑할 것이로되 이 일로 말 미암아 제약을 받아서 우리의 사랑이 온 인류에게까지 미치는 데 방해가 되 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여기서 형제 나라는 말을 나는 집 합적인 의미의 형제들이라는 뜻으로 본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 나는 베드로가 이 모모든 .절들을 바로 앞에 있는 주제에 적용시키고 있음을이미 지적한 바 있다; 사도는 왕에게 돌려져야  할 공경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 며, 따라서 그것은 이 두 가지 사실과 연관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는 마치 무릇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마땅히 온 인 류를 그의 사랑 안에 품을 것이며 또한 왕들을 공경할지니라|라고유말하는 것과 같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사실상 가이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 정부의 형태는 다른 정부형태들보다 더 미움을 사고 또 그 안에 그밖의 모 든 형태들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비록 이것이 특별한 훈계이긴 하나 뒤따르는 다른 말들과 함께 연결이 된다. 이는 사환들이 그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명령과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복하라는 명령은 사회적인 복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도는 사환들이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북하기를 원한 다. 이 표현으로써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한 존경심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존경심은 그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을 자기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할 때 일어나게 된다. 다음에 사도는 이 두려움을 억지와 위선적인 복종과 대치시킨다. 이는 사도 바울이 칭하고 있는(골3:21) 바와 같이 δρθαλμοδouleiα(오프달모둘레이 : 아주를 섬기는 .이상)는 이 두려움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환들이 그들이 당하는 흑사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멍에를 '벗어던지려 할 경우, 그들은 그 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려움은 자기 의무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비록 본절에는 아무런 예외 규정이 부연되고 있지 않으나 다른 귀절들에 따르면 예외가 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순복이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환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또는 그들이 말하는 제단 안에서처럼 그 주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의 단어는 δοйοι(둘로이)가 아니라 oixёται(오이케타이)이므로 비록 사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노예나 종으로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심부름 군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비록 자기 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기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이 사환의 의무라 할지라도 그들 자신에 관한 한, 만일 그들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면 이에 대하여 항의할 수 있겠으나 사도는 .이것마저도 금한다. 그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지간에 사환들은 그 주인에게 충실히 순복하지 아니할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전이 그의 권세를 남용할 때에는 그가 장차 하나님께 회개해야만 하거니와 당장에 자기 권한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비록 주인들이 무가치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사환들은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고 있다. 사도는 "까다로운 자들"을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과 대조한다. 그는 이 말로써, 잔인하고 완악한 자, 혹은 인간성이나 자비심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고 있다.

 

어떤 번역자가 하나의 헬라어를 다른 말로 바꾸어서 그것을 '제멋대로 하는 자들' 로 번역해 놓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르본느의 박사들이 '제멋대로 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방종하는 자들, 혹은 '방탕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는데, 그들은 이 엉터리 번역 위에 믿음의 신조를 세워서 교황과 및 그의 뿔달린 야수들이 제아 무리 가혹하고 견딜 수 없는 포학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들 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그들의 엄청난 무지에 대해 서는 덮어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절은 그들이 [얼마나 앨뻔스럽게 하나 님의 말씀을 농락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19~20 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 gratia(그라티아)라는 말은 칭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사도는 우리가 만일 우리의 잘못으로 오말미암아 '매를 맞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무 칭찬도 받을 수 없을 것이나,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그 슬픔을 참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며 칭찬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불의하고 부당하게 취급 한다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자기의 의무를 지켜나간다면, 그 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것인지를 그 때에 확인해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사환들은 멸시를 받았고 가축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취급을당했으며 그와 같은 모욕이 그들로 하여금 실망에 빠지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처지는 매우 고달팠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이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 남편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아내가 그 남편에게 순복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칭찬 받기를 바라는 외 식하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마6:16) 아내는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 상급을 받게 된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자 기 아버지의 호의와 하사품을 받기 위하여 순복한다면 그 아들은 하나님이 아닌 그의 아버지에게서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 만일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고 사람을 존중함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그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은 하 나의 일반적인 사실이다. 더우기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을 명심하는 사람은 반드시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분투노력해야만 한다. 이 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선대할 것 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볼품없는 자들과 우리를 핍박하는 차들에 대해서도 선대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응당 벌을 받아야 된다고 '사도가 말 한다면 그와 같은 주장은 좀 곤란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께서 우 리의 죄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만일 그 형벌을 잘 참기만 대한다면,그 인내는 분명히 주님께 대해서 하나의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나는 여기서 베드로가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조적으 로 설명하고 있다고 공급변하겠다. 사람이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참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슬픔을 참는 것에 비교할 때 그 받을 칭찬은 심히 적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사도는 이와 동시에 그 동기를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들 잘못으로 말미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 암아 일벌을 일반는 다. 그러나,이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답변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비록 사도의 논의하는,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바는 사환들에 관한 것이었으나 본절은 그 주제에만다. 사도는 여기서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공통적인 기독교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인내로서 고난을 견뎌낼 작정으로주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이 일에명령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 일이 우리에게 비참해 보일 것에 대비해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한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부당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돌린다면 그런 고통은 경감된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앞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절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너희에게 본을 끼쳐"라는 말씀에 유의해야만 한다. 사도는 지금 본 받을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무슨 본을 보이셨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신을 적시지 않고 바다 위를 걸으셨고,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류우리가 만일 이러한 일들에 그를 본받으려권능에 관하여 우리에게 증거를 보이를 범하게 될것이다. 이는 그가 그의신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일에 그를 본받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결과로서 일어난 능력의 사건이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서 바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거스틴도 어딘가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는 귀절을 주석하는 중에 우리에게 그 점을 상기 시킨 바 있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사실을 베드로의 강론에서도 배우게 된다. 이는 그가 여러번 "내가 너희에게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제시하였노라"는 말로서 구분할 필요성을 주의시키고 있다. 본 주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9절에서 보다 길게 다루고 있는데, 그곳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 이것은 현재논의 중에 있는 주제에 속한 말씀이다. 이는 만일 누가 그분의 무죄를 자랑할진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범죄로 형벌을 당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라당당히 자랑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사도는 "그는 말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죄에 비해 얼마나 거리가 먼가를 보여준다.이는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약3: 2). '그리스도는 우리 중 아무도 감히 내세울 수 없그리스는 지극히 온전한 무죄의 상태에 계셨다고 사도는 선언한다. 여기저도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억울한 고난을 당하셨는가 하는 점이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중 아무도 그의 모범을 따르기를 거부할만한 이유가 없다. 이는 자기가 죄 아래 있지 않다고 자부할 만큼 온전히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  여기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우리는 조용히 고난을 참아야 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는자들에게 보복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해를 일반을 때즉시 보복할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일체의 보복을 배제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에 고삐를 매어서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 원수갚는 일이라는 말은 표현베드로는이 잘 되지는 않으나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경건한 자들의 위로를 통해서, 만일 그들이 악인들의 비난과 폭력을 인내로써 견뎌낸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시리라는 뜻으로 이 말을 덧붙인다. -우리의당하는 억울한 고난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이 없이 불경건한 자들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는그는 마치 우리가 조용히통한다.고난을 보건뎌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에 소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하나님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로 묘사려 자신을 의로운 심판장으로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이라 는 것이다. 하지만불경건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제아무리 방자하게 행동할지라도 그들이 지금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행한 잘못은 벌을 받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지는 않을것이다.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아무 보호자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는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져주시는 것은 하나 .님께 속한 일이므로 그들이 인내함으로써 영혼의 구원에 이르게 되어야 하 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적잖은 위로를 가져다주므로 그것은 육신의 생각을 제어하는힘을 가진다. 사람이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지 않는다면아무도 하나님의 성실하신 보호를 의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릇 자기가직접 복수하는 일에 뛰어드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월권행위요, 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못하도록 막는 자이다. 사도 바울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롬12:19)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일과 관계된다. 그가 포말한 뜻은, 곧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고자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앞질러서 그가 :심판자로서 일하실 기회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말한 바를 "보수는 내 '것이라"(신32:35)라고 한 모세의 말로써 확증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베드로는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면, 또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를 돌리며 우리가 그를 의로우신재판장으로 믿고 그에게 우리의 권한과 소송을 다 맡긴다면 우리는 보다 쉽게 고난을 견뎌낼 수가 있으리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의 소송을 아버지께 부탁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가 있다. 만일 그가 아버지께 보복을 요구하셨다면, 그는 친히이것이 우리에게는 합법적인 것이 못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여기서우리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그녀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심판을 아버지께 부탁하시되 그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실것을 요구하신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사실이 복음의 공역사에서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출사하여 주읍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셨다. 분명히 우라 육신의 감정은 하나님의 심판에 순응하는 데서 거리가 멀다. 이는 누가 자기의 소송을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할 때에는 그가 먼저 자신을 살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기때문이다. 친히 복수를 노리는 자들은 하나님께 그의 재판장의 지위를 내드리지 못하는 자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집행자가 되어서 하나님의권한을 대행하려 하는 자들이다. 무릇 지금 자기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묵묵히 참음으로 마침내는 그들을 원수 아닌 형제로 삼고자 하고, 또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자는 자기의 원수갚는 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자이다. "오 주여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히고 나를 파멸에 빠뜨리려 하는 자들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주께서는 내 마음을 '아시나이다. 그들이 만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나는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축하할 것 이옵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의 악을 계속 고집해 나아간다면 주께서 나의 안전을 지키실 줄 아는고로 내가 주께 나의 원수갚는 일을 맡기리이다 라 고 기도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온유를 끝까지 고수하셨다. 그러 므로 그것은 또한 우리가 본받아 지켜야 할 법이기도 하다.

 

[만일 사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서 단지 그 본받을 것만 추천하였 다면 그는 너무나 소견이 좁은 사람이 되겠으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죽 으심으로 훨씬 더 풍성한 열매를 공급할 것이라고 한다. 본절에는 유의해야 할 세 가지 점이 있다. 그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곧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 리에게 인내의 본을 보이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생명으로 복귀시키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에게 굳게 결속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기쁨으로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 다. 세째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일반적인 목적을 언급한다. 그의 죽으신 목적은 곧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 게 하려는 데에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사도가 앞서 한 권면을 확증하여 준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이 표현 형식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것이라 하겠다. 율법 아 래서 조직인이 그 죄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대신의 희생이 드려져야 했 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에 따른 저주를 자기의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다. 사도는 분명히 "나무에 달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구속을 이루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 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의 희생이었다는 진리를 잘 표현 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희 생으로 드리셨을 때, .그는 자기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 기 때문이다. 아베드로는 그의 교훈의 요지를 이사야에서 취하여 여러가지 다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곧 우리는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 "그가 찔림 양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 은 우리의 허물을 를 반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 었도다" 하는 말씀을 대한다. 스베드로의 의도는 본절의 말로써 이사야 선지 의 사말씀과 동일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 앞에서 자신을 우리의 보증으로 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형 내놓으시고 또 조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사 벌을 그가 받으셨다는 이 질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구속을 이루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의 희생이었다는 진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희생으로 드리셨을 때, .그는 자기 몸으로 친히 우리의 죄와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베드로는 그의 교훈의 요지를 이사야에서 취하여 여러가지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곧 우리는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말씀을 대한다. 아베드로의 의도는 본절의 말로써 이사야 선지의 사말씀과 동일한 진리를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자신을 !우리의 보증으로내놓으시고 또[우리를 대신하여 범죄를 집어지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가 받으셨다는[ 이 조건으로 주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그들의 학파에서는 갖은 사방법을 다하여!이 큰 [은총을 흐리게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세례 이전의 죄책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벌은 우리가 드리는 목속죄로 말미암아 구속된다고 '주장한다.우그러나| 베드도가|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의 :죄책이- 그에게 전가되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또한 그가 그 형벌까지도 담당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우리를 위한 대속적인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평화를 누리고 :그가 공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데 대해서, 만일 '그들이 이것은 오직 세례 이전에만 해당된다고 반대를 제기한다면 일본절의 :문맥은 그들을 책망한 것이 된다. 이는 그말씀이 신자들에게 전파되고 있는 일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과 바로 뒤따라 나오는: '저가 대채찍에 '맞음으로'"너희는나음을`얻었나니' 나라는 .말씀도 또한 현재 논의중에 있는 주제에 적용될수수[있는데,이것은 곧 우리의어깨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이다.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로 우리가 죄를 속죄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우리 위에 놓여진하나의 짐으로 {짚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일반이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도는 이미 .인내의 모범에서 [다른 목적을 지적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고의로운 고삼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성령은 때때로 두 가지를 다 언급한다. 곧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중국으심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빌3 : 10), 또 두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의 무엇사람 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롬 6: 10)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가 말하 고 있는 이 두번째의 것은 특수한 목적으로서 전자의 일반적인 목적과 차이 가 있다. 인내에는 단순히 하나의 모범이 있을 뿐이나,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상당하셨다고 말 할 때 사도가 바울의 로마서 제 б장에서보다 자세히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우리의 육체를 자제시킬 능력이 있음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 큰 유익을 가져다 주셨다.하나님께서는 소우리 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으 로 다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과 육에 대하여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값없이 의롭게 하셨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생활은 하루 아침에 다 .이 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의 대속을 .위한 우주적인 력을 미쳐서 우리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 베드로는 이 말씀도 역 시 이사야서에서 인용하고 있다. 다만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용하고 있을 _뿐이다 (사53: 6). '양'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강조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도 는 분명히 우리를 양에 비비유하고 있으나 선지자가 '덧붙이고 있는 바 각기 제길로 갔다는 직유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우리 모두가 원의 길에서 벗어나 유리하고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방황하는 길에서 바른 길로 이끌어주실 때까지는 파멸의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대조구문, 곧 사도가 덧붙이고 있는 이제는 너희영혼의 목 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는 '말에서 훨씬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사도는 무릇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잃은 양처 럼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의 통치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세상의 모든 지혜는 정죄를 받게된다.  여기 서 그리스도께 돌려지고 있는 두 명칭은 '뛰어난 호칭들이다. 곧 그리스도는 우리 영혼의 목자 이신 동시에 또한감독'이시다.그가 그의 우리 안에 있어 그의 보살됨을 '받는 자들의 인안전을 성실히 지키지 아니하실까 염려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비록 우리의 다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도 동안전하게 지키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직분이실지라도 베드로는 단지 영혼만을 언 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 하늘의 목자께서 그의 영적인 보호하심 아래 영생 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