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3:16)

1. 성경 (벧전3:13 ~ 22)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3)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4)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5)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6)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7)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8)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19)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0)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1)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2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 베드로는 일반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낸 논리로 앞에서 말한 것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흔히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악한 자들을 성나게 해서이기도 하며, 또는 우리가 마땅히 그들에게 베풀어야 할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쇠같이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해준다. 플라톤도 역시 그의 책〈국가론〉(Republic 351d)제 1권에서 같은 논리를[사용하였 다. "σotdoetS тαρ που αδιкια xai μiση xai μαχαs αλλλοιε παρёχε δ는 δικαιοσⅳνη δμбνοιαν κα: φiliav".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시같다. '불의는 피차간의 다툼과 증오와 전쟁의 원인이 되지만 공의는 피차간의 일치와 우정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은 자기들의 친절함으로 .악한 자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우정을 보여주려 하고 있으나 아직도 부당한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4~15.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  이 말씀은 경건한 자들이 보복하는 데에 격렬하고 기민하기보다는 친절함으로 평안한 상태의 생활을 누리는 데 이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이를 게을리할 때는 조금도 화평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이러한 생활을 힘쓴다면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축복을 보존 받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우리 육체의 판단과는 매우 다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유없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좋은 의도가 없었다면 주님의 입술에서는 나온 말씀을 반복했을리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분으로 임하실 것이요, 지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도 밝히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의 불행은 인내로써 참고 견디어 낼 때에 축복이 된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옹호함에 있어서 어떤 것을 잃는다거나 보탬이 되지 않는 것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아무 잘못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므로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것도 의미하고 있다.
 
"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  베드로는 다시 불의한 자들이 우리를 대적할 때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고 또 지켜야 할 정도 이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까닭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러한 두려워함은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타락하게 하여 우리 안에서 보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불타오르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의 격렬한 감정을 고쳐주는 최고의 치료약은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전적으로 믿음으로써 부당한 공포를 정복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사야 8장 12절에서 이 귀절을 이끌어냈음에 틀림없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외면을 당하고 이방의 도움으로 자신들을 지켜나가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그들처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이 밖에도 베드로는 두려움을 다른 의미로 보고 있는 듯하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을 수동태로 사용하여 불 신앙의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의지하고 담대히 모든 위험을 물리쳐야만 두려움을 무너뜨리게 되고 주위의 모든 온당하지 못한 도움을 거절하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의미에서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즉 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격렬하고 잔인한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공포를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의미하고 있는 공포는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공포와는 다르다. 그렇지만 이 귀절에는 조금도 불합리한 점이 없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지자가 한 말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내를 지속시키는 데 있어서 선지자가 말한 것, 곧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시킴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는.것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라는 말씀을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은 두려워하기 쉬우나 그러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두려워함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할 의사는 없지만 그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로 수고할 필요는 없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선지자가 한 말을 모두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가지 사실, 즉 신실한 자는 만군의 주께 헌신하고자 하는 한 확고하게 서 있을 수가 있고 어떠한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더라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옳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 이같은 성결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국한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위험이 엄습해 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는 것보다도 인간의 힘을 의지하여 인간이 스스로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어찌 두려움에 압도를 당하여 자신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악한 자들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자가 되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도우시는 한 어찌 하나님을 부당한 분으로 대할 수가 있으며, 그를 모독하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지자는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가르쳐주고 있다. 아무리 불의한 자들이 온갖 방법을 다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애쓰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시기 위한 충분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라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도움은 우리에게 충분할 것이고 불신자들의 모든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최선의 방패가 될 것이다. 

 

이 귀절은 새로운 충고를 하는 것이면서도 여전히 앞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결같이 신실한 자가 되어서 그들의 원수들을 담대하게 믿음으로 대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이 귀절은 그가 조금 전에 말한 거룩함의 한 일부분이다.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게 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경우에 무조건 주장하거나 선포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백성에게 분별의 영을 주어 어느 때에,어떻게,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알게 하여주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오직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명함으로써 육체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태만해지거나 겁이 생기는 경우에는 침묵으로 악한 자들의 비웃음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드러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요지는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우리의 믿음을 공언함으로써 우리의 침묵으로  불신자들이 우리가 따르는 종교를 무조건 정죄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준비하라고 명하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사사건건 이 모든 사람의 책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무식하고 단순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지는 일반적인 교훈이다. 베드로는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거룩하고 참된 종교를 소유하고 있음을 불신자들에게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에 관해서 연구할 때 신념을 가질 수가 없다면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으며,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합당하게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태도를 표명해야 한다.

 

이 귀절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고려되어져야 한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널리 악평이 나 있었고,' 기독교는 악한 종교요, 수없이 많은 신성모독의범죄를 범하고 있다고드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전자기들이 '믿는 종교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게을리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가장 배반하고 있는종교로 여겨졌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베드로가 '사용한 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불경건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무식한 자들이 상상하고 있는 그런 실식으로 참된 종교를 부패시키지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분명히 밝히려는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소망'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는 제유법을 사용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베드로는 교인들에게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주의깊고 학문적인 변론을 바라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순수한 신앙과 :서로 일치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들의 믿음에 결과해서 아무것도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오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또 베드로가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이라는 말 속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베드로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신앙고백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안에 믿음이 들어 있지 않으면 혀는 공연히 놀려 대는 수다에 불과하다. 따라서 믿음이 우리 속에  뿌리를 박음으로 그 믿음에서부터 신앙고백의 열매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  이것은 가장 필요한 권면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지 않으면 곧 다툼이 일어난다. 온유는 교만이나 허식과 반대가 될 뿐 아니라 과도한 열심과도 반대가 된다. 베드로는 여기에다 "두려움으로" 라는 말을 덧 붙이고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에서 모든 거친 마음을 길 들일 수가 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침착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논쟁들은 다 알아야 할 하나님의 지혜의 위대하심을 영광스럽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일어나는 당돌하고 뻔뻔스러운 짓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신앙고백을 드리기를 원한다면 모든 교만을 버리고 모든 논쟁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16 .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우리는 현실 생활을 무시하여 가볍게 처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선한 양심과 결부시키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혀를 놀려 많은 말을 매우 거침없이 지껄여대지만 자기들의 생활과 부합되지 않으므로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정직한 양심만이 우리가 마땅히 통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서 많은 그것을 지껄여대면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여 불 경건함을 드러내는 자는 자신을 비웃음의 대상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진리 자체를 악한 자들의 비방거리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무지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첨가 시킨 거짓된 사상과 맞서서 하나님의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면,  어떤 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야 할 이유를 요구하고, 믿음을 지키도록 준비하라고 베드로가 명할 이유가 있겠는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그에 합당한 생활이 따르지 못하면 아무런 도움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한 행위를 비난하는 자들을 가리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는 자들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우리를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만일 너희의 원수들이 너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너희를, 거스려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저희들은 마침내 자기들의 악한 저의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너희의 무죄함이 저희들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를 의미한다.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 ;  이 말씀은 이 귀절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모든 문맥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베드로는 그 당시 대단히 위험스러웠던 믿음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이제는 보다 좋은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선을 행함으로써 부당한 고난을 받는 것이 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형벌받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다. 이 말씀은 많은 말로 길게 말하는 것보다 은밀하게 생각 함으로써 얻어지는 위로이다. 무슨 악한 일들이 일어나든지 참고 견딘다는 것이 선한 양심을 가진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은 세상 작가들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작가들은 용기 있게 말했지만 진실로 용감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음 귀절에서 "하나님의 뜻일진대" 라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회상을 시켜 주기를 우리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가장 좋은 것 이외에는 허락지 않으시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은 자기의 슬픔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증인이 되시며,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자기의 믿음에 대한 증거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18. 그리스도께서도" ;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앞으로 잘 되어질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고난을 당하며 결국 축복이 따라오리라' 는 생각을 가진다면 또 다른 위로가 된다. 동시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들어서 우리가 우리의 악한 행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결코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셨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 감으로써 그와 더불어 살고 죽는다는 것외에 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귀절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핍박을 당할 때 평안으로 견디어내야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된 이상 우리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경건한 자들이 고난을 당하도록 그대로 두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벌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을 벌하실 때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벌을 주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베드로도 그것을 부인하지.않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 주는 것이므로 위로가 된다는 것을 상기 시켜고 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역에 대해 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의로운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죄가 없는 자들이라고 불리어진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  우리가 이유없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행복을 갖게 된다는 또 하나의 위로의 조건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육체의 연약함으로  고난을 받으시기는 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나 그의 죽으심은 그리스도에게 해를 미칠 수가 없었다. 생명은 승리를 쟁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인해서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 대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에 그의 죽으심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육체'란 겉 사람을 의미하고, '영'이란 그리스도를 정복자로 죽음에서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 ;  베드로가 이 말을 종합으로써 자기가 말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준다. 바울도 로마서 5장 5절에서 이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만을 살린 것이 아니라 똑같은 자신의 영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게 하여 심지어 는 죽은 자까지도 그 능력이 미치도록 위하셨다고 l말한다. :우리는 이 귀절에 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경능력밖에는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 귀절의 의미가 불명확하므로 흔히 여러가지 해석이` 제기되고 있는데, 나는 먼저 지금까지 있었던 변해들을 논박한 후 그 참되고 적절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이 귀절에서 언급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 귀절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 하면 이 귀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다만 그가 '영이 되셨다는 말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가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의 능력으로 전파하셨다는 각기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있다. 베드로는 1영'이라는 말을 강력하게 사용함으로써 참된 실재 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관념을 배제시키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이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께서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즉 불신자들에게 나타나신다 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이 사도들을 통하여 육체에 갇힌 자 들에게 가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해석은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인해서 합당하지 못하다. 첫째,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영들 에게' 가셨다고 말함으로써 육체와 분리된 영들을 의미하고 있다. 살아 있 는 사람은 영이라고 결코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베드로는 4장에서 같은 의미를 반복하면서 이러한 유추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말씀은 죽은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째, 베드로가 사도들에 대해서 말할 때 비록 자기 자신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할 지라도 갑자기 노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이 러한 대화 방법은 이치에 맞지 않고 부적합한 '것이므로 이 해석은 옳다고 할 수가 없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그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놓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사상은 길 게 논박할 필요조차도 없다. 대외나하면 우리가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앙으로 계속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은 소망을 가질 여유가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얻어진 구속이 노아 시대에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에게도 효험이 되었지 만, 그들은 홍수에 빠지기 전 잠시 동안 회개를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다 그럴듯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완악함에서 기인한 형벌로 육체의 고통을 당하였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영원히 멸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매 우 위태로운 해석이다. 이 해석은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베드 로는 오직 노아의 식구들만 구원함을 받았고 방주 안에 있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멸멸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베드로가 일반적인 결론,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경건한 영 들에게 나타났다는 것과 이들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참 고 결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아니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왜 베드로가 경 건한 자들의 영이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난 후 옥에 있는가 하는:의심이:생 길 것이다. 나는 φνlaxη(필라케)라는 말이 파수꾼이 파수 할 목적을 위해서 있는 망대, 혹은 파수하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경건한 영들이 비록 멀리 바라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들에게 약속된 구원에 대한 망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상은 헬라 저자들에게서 매우 흔히 찾아볼 수가 있으며, 이것이 가장 알맞은 해석인 것 같다. 거룩한 선조들이 살아있었을 때 나 죽은 이후에 이러한 목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을 옥이라는 말에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적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갈3:23 에서 바울이 말한 바에 의하면) 율법은 그들이 살아있을 경우에 행동을 제 한하는 일종의 감옥이었으므로 죽은 이후에는 아직까지 자유의 영이 충만하게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리스도를 향한 동일한 열망으로 속박을 느껴 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처럼 기다리는 괴로움은 그들에게 감옥 이었다.

 

사도의 말씀은 사실이고 논리의 전개와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다음 귀절들에는 약간 난점이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신실한 전자들에 대해 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불신자들만 말하고 있어서 이 귀절은 .앞에서<한 해 석을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언 급되고 있는 것은 전에 경건한 자들의 원수요, 핍박자였던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의 심판주가 되심을: 깨닫게 되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죽을 때에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벌하신다고말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에게 위 로를 주고 있다고 한다.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이 해석이 잘못되. 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복음이 죽은 자들에게 증거 된 것은 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좇아 살게 하기 [위한 충만한 민음의 특성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 장에서도 베드로는 조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반 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베드로가 특별히 의도하고 있 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적 능력 그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주는, 것 임을 보여주고, 역시 죽은 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알려졌으므로 우리들에게 도 그와 같은 생명을 얻으리라는 점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면 베드로가 왜 믿지 않는 자들만을 언급했는지고찰해 정보자. 스베드로 는 한 때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영으로 그나타나셨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베드로가 그 당시|, 참된 하나님의 종들이 불신자들과 함께 섞여 있었고 많은 불신자들로' 인해서 거의 가려져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는 헬라어 구문()이 이러한 의미 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일 베드로가 이것을 의미하고자 했었다면 절 대 소유격을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종종 다른 구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또 베드로가 여기에서 많은 것들을 한데 겹 쳐놓고 있어서 달리 적합한 의미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뒤엉킨 귀절을 이렇게 해석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믿지 않는 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복음 전파를 받은 이들과 다르다 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후에 곧이어 "그 들은 전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많은. 악한 자들에 게 거의 압도당하고 있었던 거룩한 선조들이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음 을 의미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베드로는 그 당시 신실한 자들이 괴로움 을 당하는 것에 의심을 가진 자들을 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거의 가 모든 세상이 불신자들로 가득차 있어서 불신자들이 모든 권세를 행사 하고, 그 생명도 그들의 권세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험은 사망의 정죄 아래서 사실상 벗어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을 흔들 어놓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에게 조상들의 형편도 그와 같았 음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온 땅이 악한 자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하더라도 성 도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지켜질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빠 베드로± 경건한 자들이 자기들의 숫자가 극히 적다는 ,이유로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경우에 모든 옛날의 행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본보기를 들어서 그러한 세상은 홍수로 :멸망했다고 위로해 주고 있다. 온 인류가 멸망받은 중에서 노아의 가족만이 유일하게 피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이 일이 어떻 게 일어났는지를 지적하고, 그것이 일종의 세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 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다.

 

이 귀절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요약해 보면, 세상은 항상 불신자들로 가 득차 있지만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많은 수효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노아는 비록 불신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를 따르는 자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는 결코 자기 믿음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태만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불신자들에게 적용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응 하심을 늦추시고 즉각 시행하지 않으셨을 때에 악한 자들은 함부로 그의 형벌을 무시했었지만 노아는 그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예언하여 주심으로써 오랫동안 홍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를 짓는 데 열심을 낼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모든 태만을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 ;  나는 대체로 관계 대명사는 상대격으로 읽어야 하며, '호' 대신에  δ(호)를 취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나 노아가 세례의 모형이 되는 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도가 이것을 말했기 때문에 노아와 "우리는 서로 같다. 는 사실이 보다 분명해진다. 이 귀절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사악한 본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구원의 바른 길을 걸으며, 세상과 뒤 섞이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는 점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다. 이 사실은 세례에서 분명해진다. 세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 었고 따라서 세상과 육신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세례는 노아의 세례의 원형(dutiturov 안티튀폰)이요, 노아 의 세례는 처음 원형이 아니며, 우리의 세례가 내적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사도가 히브리서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처럼 율법의 의식들은 하늘의 divtituπα(안티튀파i;언약)라고 말할수가 있다(히9:4). 헬라의 저자들은 성례를 가리킬 때에 같은 말을 조사용했다. 그들은 성찬의 신비적인 떡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의 dvtitura(안티튀폰)이라고 발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소()를 비교하는 것이 없고 다만 상호간에 비슷한 점과 따라서(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서로 대조가 된다는 것만을 사도가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아마 아리스토텔레스가 변증법적인 '음운으로 '안티스트로폰;대응' 을 사용한 것처럼 대응시킨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사실 자체가 지명확하기 때문에 단어에 대해서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노아가 마치 무덤에 묻힌 것처럼 방주 속에 문혔을 때 모든 세상은 멸망한 가운데서도 그의 몇 식구들과 함께 죽 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고 보존된 것과 같이 오늘날 세례 안에서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상과 헤어지지 니하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  이 말씀을 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려는 일이 일어남으로써 거의 모든 사람 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교회의 교제 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베드로가 앞에서 말한 것, 즉 오늘날 세례로 구원을 받는 사 람은 하나님께서 방주에 들어간 여덟 명만을 구하신 것처럼 소수에 불과하 다는 것은 타당치가 못하다. 베드로는 드러난 표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그와 연관되어져야 하는 결과에 대해 .말할 때에 이러한 『반론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있다. 베드로는 노아 시대에 일어났던 일이 어떤 때에도 항상 일 어날 수가 있고, 인류는 자기 자신의 멸명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다는 사 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놀라우신 방법을 사용하여 그의 '작은 무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훈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례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우리의 세례는 노아의 세례와 매우 다르다 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베드 로는 대답하기를 세례가 진실하고 유효하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면 외부적 인 상징은 불충분한 것이라고 한다. 세례의 '본질(veritas)은 대단히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어진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이 예표들을 의지할 때 에 사람들은 흔히 어떻게 행동을 할 것과 또는 우리가 비록 숫자적으로는 소수라 할지라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주의깊게 바라보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슈엔크펠디우스(Schuencfeldius)와 같은 열광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 를 왜곡하고 어리석게도 성례에서 그 능력과 효험을 사제해 버리고자 한다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제우신 의식이 헛되거나 효험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할 수만 있다면 세례를 타락시키고 부패시 키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배제시키려 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례에 대해서 말할 때 표시와 세례로 나누어 생 각한다. 세례에 있어서 표시는 물이지만, 세례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로 써 영혼을 씻는 것과 육체를 제국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의식은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표시는 사람들이 남용함으로써 종종 효 력을 갖지 못하거나 열매를 맺지못하는 경우가 있는-것이 사실이지만,이 것이 성례의 본질을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그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자체와 그 표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본질을 분리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배우도 록 하자. 동시에 우리는 교황주의자들 속에 침투해 있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죄악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땅히 구별해야 할 세례의 본질과 표시를 구분하지만 않고 외부적인 요소에서그치 코 이 국외부적인 요소에 자기들의 |구원과 [소망을 제고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보이는 물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개념을 삭 제해 버리는 짓을 저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축복들을 성 례 속에서 베풀어 주시는 유일한 분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 의 영광을 물로 바꾸며, 성령의 은밀하신 능력을 보이는 표시에 고착시키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님께서 서로 연결시켜 주신 것 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례 안에서 영적인 씻음을 깨 달아야 하고 그 안에서 죄의 용서와 우리의 중생의 증거를 가져야 한다. 그 리스도와 성령께 마땅한 영광을 돌림으로써 구원의 어떠한 부분이라도 그 대해서 형식을 변형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베드로가 세례에 언급한 후 더러움을 벗어버리는 것 자 곧이어 이러한 예외를 말한 것은 그것이 육체의 체가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베드로는 세례가 어떤 자들에게는 단지 의 뿐이요, 외부적인 표시 그 자체는 아무런 효험이 없음을 충 식적인 행위일 분히 설명하고 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통합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  여기서 찾아 간다' 는 말은 해답이나 증거 대신 취한 말이다. 이제 베드로는 선한 양심에 주의 를 환기시킴으로써 세례의 효험과 유용성을 간략하게 정의하고, 하나님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를 세례에 있어 서 그 주요한 부분은 영적인 것이며, 세례는 조직의 용서와 옛사람의 혁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j우리의 옛사람이 새롭게 되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우심 안에서 새로와지기 전에 어떻게 선하고 순전한 양심이 있을 수가 있는가? 또 우리가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를 의지하고 또 이에 의해서 유 지되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응답할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베드로는 그 중심에 세례의 효험을 설정하기를, 위선자들이 하고자 하는 것 처럼 텅 비어 있고 죽은 의식 속에는 아무런 영광이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물이라는 요 소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은 오직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모 형이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베드로는 부활 을 말할 때 자기가 앞에서 말한 교훈, 즉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돌이켜보고 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요,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그의 부활 속에 포함되고 배제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에 우리의 모든 생각을 고정시키지 아니하고서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세례 에서 유익을 찾아낼 수가 없다.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이 그를 고대하며, 이것이 특별한 믿음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셨다고 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도록 명하고 있다. 아버지 우편에 계셨다는 말은 다른 곳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어느 곳에서든 최고의 능력을 행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을 설명 하기 위해서 천사들과~~~~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라는 말이 뒤따라 나온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보다 확대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권세 들'과 '능력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말들로 천사들을 묘사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명칭들로 말미암아 얻으신 주권을 찬송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