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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벧전4:17)

1. 성경 (벧전4:12 ~ 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2)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3)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4)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5)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6)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7)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8)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1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2. 사랑하는 자들아~~~~이상히 여기지 말고" : 이 세상에서 시련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 이유는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귀절은 차이점이 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면할 때 인간 생활에서 공통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을 말했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신자들이 당하는 시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로 베드로는 시련이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게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신자들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랫동안 묵상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결코 당황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처럼 인내로써 견디어 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핍박이 홍수처럼 밀려 올 때를 대비해서 마음의 준비된 상태를 갖추기 위해 편안할 때에도 계속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유익함을 두 가지 이유에서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반절에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는 이 시련은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주된 관심사로 보시기 때문에 기쁨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는 일은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베드로는 우리 앞에 십자가가 있을 때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라고 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핍박을 통해서도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도록 하시는 것은 진실로 기쁨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다른 기쁨, 즉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자신과 똑같은 생명의 길로 불러 영광의 축복된 관계에까지 자신과 더불어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이보다 훨씬 더 능가하는 기쁨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의 육체에 지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악한 자들도 실로 많은 시련을 당하고 있으나 저들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이러한 일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슬픔과 죽음이 그들을 완전히 정복해 버리고 말 것이다.

 

경건한 자들의 모든 위로는 자기들이 이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데서부터 나온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로부터 부활에로 변하는 영광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이 세상은 미로와 같아서 죄악의 끝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앞날의 계시를 말하고 있 는데, 이것이 현재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간과하지 말고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두 가지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소망 중에서 현재 기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이루어질 소망의 성취에서이다.

 

처음 것은 슬픔과 비애가 뒤섞여 있고, 두 번째 것은 기쁨과 연결되어 있다. 시련을 당하는 도중에 모든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자유케 될 수 있는 기쁨을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으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죄악의 감정을 부드럽게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당하는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  베드로가 욕을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신자들에게는 물건을 잃거나 육체의 고통이나 고뇌를 당하는 것보다 더한 쓰라림이 종 종 생기기 때문이다. 순전한 심령을 굳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궁핍함을 견디는 데 용감하고 고통 중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담대하면서도 욕을 받는 데는 굴복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험악한 경우를 만났을 때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을 위해서 욕을 당하는 자는 복 되다고 말한다(막8 35). 이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과는 정반대가 되지만 이유를 "하나님의 영"이요, 또한 "영광의 영"이 그들 위에 계심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분리하여 '영광에 속한 것'이라고 번역하고, 베드로는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 그대로 읽는 것이 그 의미에 더욱 적합하고 용어에 있어서도 더 단순하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욕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경건한 자들의 기쁨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들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영광을 보유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는 성령께서 그들 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육신에 대해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영은 그들이 확신을 갖도록 해준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  이 말씀은 앞의 말씀의 확증으로 하나님의 영이 복음을 위해서 욕을 참고 견디는 경건한 자들에게는 축복이 되고 넘치는 영광이 된다는 사실로 만족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매우 다른 것들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으므로 베드로는 '너희는 악한 자들의 오만함을 담대하게 멸시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주신 영광의 증거가 너희를 그 안에 확고히 머물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불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 암시해 주시고 또 내려주신 것들은 모두 조롱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이 욕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카타 프롤레프신'이란 말씀은 이런 뜻이다.  즉 세상은 그 눈이 어두워져서 그리스도를 욕하는 부끄러운 일밖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으나 경건한 여자들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그릇된 생각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감추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양심 속에 그들의 추측에 대항하여 숨겨진 믿음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 바울도 이처럼 자기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했 고 그의 얽매임 속에서도 영광을 돌렸다(갈6:17). 그러면서 바울은 세상의 심판이 그들에게 임박했음을 충분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베드로는 육체의 비방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자요, 다른 세상 사람들과 같이 소경이 된 자라고 말한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여기에서도 베드로는 반론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있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권면하기를 만일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인내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은 왜 그러한 시련에 대해서 말했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즉 그들로 하여금 모든 악한 행위를 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번째 권면은 마땅히 형벌을 받아야 할 행위에 속한다. 여기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꼭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왜 자기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열심히 권면하는가를 말하려고 하며 그들에게 올바르고 흠잡힘 없이 살것을 강조하여 자신의 실수가 있을 때에는 정당한 형벌을 스스로 담당할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표적이 심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악하고 잔인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모든 그것을 유익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임을 베드로가 말하려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이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지 않아도 될만큼 순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반론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내가 생각하기는 베드로는 여기서 우리가 전적으로 벗어버려야 할 도적이나 살인같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또 한가지는 베드로가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향해서 마땅히 친절한 자가 되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우리와 이 세상의 자녀들과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는 데 대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악함에 빠져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한 생활로 말미암아 율법의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마땅히 벌하실 만한 많은 죄들이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특권으로 그의 자녀들을 보살펴주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내리시지 않음과 동시에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표적들, 즉, 그리스도의 표적들을 주셔서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고 또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알로트리오에피스코포츠' 라는 명사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심히 탐내는 사람을 가리카는 것 같다. 재물이나 명예를 탐내는 사람들은 호레이스가 말한 대로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꼬거나 비뚤어진 눈으로 바라보지만,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은 호레이스가 다른 곳에서도 말한 것처럼 황금더미를 볼 때에도 올바른 눈으로 직시한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치 불신자들이 자신의 악한 행위로 인해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처럼 어떤 해로운 일이나 흠잡힐 만한 일을 행하지 말라고 금한 후에,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핍박을 당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자유케 하시고 모든 죄의 공통적인 형벌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포로가 되거나 갇히거나, 욕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그의 복음을 증거하도록 영광된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자비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핍박을 당할 때 소란을 피우거나 불평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라고 한다. 설사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으로' 라는 말을 이름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은 복음을 낮추려 하는 데 있어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무슨 욕된 말을 하든지 간에 신자들은 오직 복음을 옹호하기 위해서 참고 견디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도리어~~~~~" ;  모든 고난이란 그 원인이 죄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참으로 나는 내 죄로 인해서 주님께 이보다 더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경건한 자들에게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죄가 없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의를 인하여 고난을 당하도록 하실 것이다. 성도들은 자기의 허물이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입법의 다른 결과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죄책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있다. '도리어'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이유를 가진다.

 

"17. 하나님~~~~~때가 되었나니~~~~~~" ; 베드로는. 위로를 더욱 확대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받는 동안 겪었던 것들이 축복의 조건이 된다고 한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마지막에는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들의 공통적인 슬픔을 주관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의 손에 징계를 받은 자들을 주관하게 될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핍박은 더욱 침착하게 견뎌야 한다, 우리가 신실한 자들의 숫자에서 제외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등을 돌려 하나님의 채찍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그의 심판을 내리시지 않고 우리를 아들의 인격으로 만들어서 다만 자신과 자기 이름을 위해서만 고난을 당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은혜로운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베드로는 이 귀절을 성경의 공통적이고도 한결같은 교훈에서 취했다고 보는 것이 어떤 특별한 귀절에서 취해온 것보다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먼저 하나님의 징계의 실례를 찾도록 함으로써 마치 다른 낯선 사람보다 한 가족의 머리로 그의 자녀들을 바르게 고쳐나가고 있음을 모든 선지자들이 증거했고 주님께서도 전에 이 방법을 따르셨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심판주가 되시면서도 특별히 그 자신의 교회의 지배 안에서 자신의 섭리가 알려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심판주로 오실 것을 선포하시면서 시온산에서의 자신의 사역을 완성하신 이 후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10: 12). 하나님은 백성이나 이방인들에게 차별없이 그의 손을 펼치신다. 왜냐하면 둘 다 역경에 처해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가 되는 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유기된 자를 구별하시고 택함을 받은 자들과 대조되도록 그의 엄하심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면서 술과 음악으로 즐기고 고통없이 즉시 무덤에 내려가며 눈이 덮일 정도로 살이 찌고, 한난에서 제외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면서 편안하고 유쾌하게 일생을 보내면서도 감히 하늘을 향해 자기들의 입을 열고 있다고 경건한 자들은 불평하고 있다 (욥21 7~13, 시733).

 

요컨대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이 세상에서는 조절하여 살륙의 날을 위해서 악한 자들을 살찌우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많은 죄들이 간과되는 것은 마치 그들을 인정해 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관심을 갖는 자녀들이 옳은 길에서 떠나갈 그때마다 돌이켜 바른 길을 가게 하신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고 한 말 속에는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심판은 주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한 대가로 내리시는 모든 형벌과 세상을 바로잡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베드로는 지금이 '그 때 '라고 말하고 있는가 ? (내가 보기에는) 베드로는 선지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선포했던 그 때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는 것이며, 그 개혁의 시작은 교회 안에서 시작되어질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기를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 중에 가장 비참한 사람들일 것이라 했다(고전15': 19).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방탕에 빠져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눈감아 주시고 계시는 동안에도 신자들은 계속해서 한숨짓고 신음하여 계속적인 무기력으로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더욱 엄격하게 십자가 아래서 연단하도록 하신다.  신자들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것을 일부러워하는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시련이다. 현재의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은 여러 곳에서 이 문제에 대해 조심하라고 한다. 특히 시편 37편은 신자들이 악한 자들의 번영을 부러워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조용하게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을 다른 사람과 자기들의 받을 이곳을 비교해 보게 함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심판자이시므로 무사히 그의 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실로부터 지금 형편으로는 형통한 것처럼 보여지는 사람들에게 곧 무서운 보응이 임할 것을 추론해 내고 있다. 베드로가 말하는 요점은(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현재 죄악의 쓰라림으로 인해서 곧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잠간 동안의 괴로움을 침착하게 견디어 냄으로써 마침내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한편,  악한 자들은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번영을 얻기 위하여 어리석게도 그것을 영원한 파멸로 대치시켜 버림에 틀림없다. 그때 자기들의 구원을 성취하게 됨을 보여주려는 데에 베드로의 의도가 있다. 이것은 작은 것에서 보다 큰 것으로 이르는 논증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원수들과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무서운 형벌' 이 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하심으로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시는 손을 들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른 일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8. 또 의인이~~~~~~~"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은 잠언 11장 31절에서 .취해 온 것으로 생각하고 헬라어 번역을 솔로몬이 말한 대로 번역하고 있다.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베드로가 의도하는 것이 이 귀절을 인용했거나 보통 잠언을 반복하고 있거나 (나는 이것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간에 그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것임을 가리킨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도 가시밭 길이요, 어려운 길이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조심성없이 방종에 빠질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우리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고, 또 그 끝이 무시 무시한 절벽으로 되어 있는 시즌을 평탄하고 편하게 걷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현재 생활의 어려움을 가리킨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길은 마치 많은 폭풍우가 예상되는 가운데 많은 암초 사이를 위험스럽게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수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고서는 항구에 도달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안내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을 우리의 선장으로 모시고 있는 한 조금도 파선할 위험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힘들고 어렵게만 구원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해석은 매우 불합리하다. 베드로는 현재의 일을 말하고 미래를 가리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엄하시고 혹독하심만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결승점에 도달하기 전에 극복해야만 할 난관이 얼마나 많고, 또 어떤 것들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죄인은 악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베드로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이란, 의에 있어서 절대 완전하지는 못하나 의롭게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다.

 

"19. 그러므로~~~~~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부탁할지어다." ;  베드로는 핍박은 조용하게 견뎌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의인의 형편은 자기들의 가장 원하는 번영을 즐기고 있는 불신자들이 누리는 행복보다 더 복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크게 위로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신이 없이는 고난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베드로가 "그 영혼을~~~~부탁할지어다"라고 말한 것은 '그들은 자신을 구원하여 자기 생명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할지어다'와 .같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미쁘신 조물주"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능력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신실하게 지켜주시고 돌보아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물주' 라는 말을 보호자 라고 번역한다(칼빈은 후자를 택하고 있다-역자 주): 헬라어 κτιστη(크티스테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나는 후자를 취하는데,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하여 하나님을 우리 생활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선을 행하는 가 운데"라고 말함으로써 신자들은 자기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에게 복수를 하려 하지 말고 자기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악한 자들을 선행으로 대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