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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3:4)

1. 성경 (벧전3:1 ~ 12)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1)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2)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3)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4)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5)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6)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7)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8)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9)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10)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1)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베드로는 이제 또 다론 주제로 넘어가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명한다. 믿지 않는 남자에게 결혼한 사람은 자기들의 멍에를 떨쳐버리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하다고 여겨지기 쉽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러한 아내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뚜렷이 회상시킴으로써 그들이 무엇보다도 그들의 의무를 다해야만 할 이유를 보여준다. 아내들의 정결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 남편을 믿음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있다. 불 신앙의 남편에게도 아내들이 순종하는데, 더우기 믿는 남편을 가진 아내들은 기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가 남편을 "말로 말미암지 않고"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한 말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롬10 : 17)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되는 것으로 의심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 나는 베드로의 맡은 오직 거룩한 생활만이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생활은 남편의 마음을 부드럽게하고 평안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종교를 보다 덜 멸시하게 된다는 뜻으로 지적한다고 대답하겠다. 나쁜 실례들이 좋지 못한 오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좋은 실례들은 종교에 적지않은 도움을 가져다 준다. 베드로는 아내들이 비록 말은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로 말미암아 그들의 남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인도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2. 너희의~~~~~~봄이라." ;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믿는 자들의 선한 행위를 봄으로써 참된 믿음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생활을 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견해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고 정결한 행위를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사명이 되어야 한다.
 
"3. 너희 단장은~~~~~~" ;  베드로의 두번째 권면은 아내들은 검소하고 단정하게 자신을 단장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귀절에서 그들이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노력과 욕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러한 쓸데없는것을 헛되이 추구하지 않도록 바르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관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몇 가지의 사치스러운 단장을 지적하고 있다. 즉 인위적으로 곱슬머리를 만들거나 흔히 행해졌던 대로 머리 핀이나 기타 방법으로 머리에 모양을 만드는 것, 그리고 머리에 금을 꽂는 것 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자기를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사도 베드로가 몸을 단장하는 데에 금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정죄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이 말들이 의미하는 것은 베드로가 곧이어 "아름다운 옷을입는 것" 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아 금에 못지 않게 값진 의복을 입는 것도 금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 단순히 옷을 산뜻하고 우아하게 입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이 될것이다. 우리는 비록 물질이 지나치게 호화스럽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만드셨고 예술적 창조의 기술도 그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모든 종류의 몸단장을 비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헛된 죄악에 매이는 것을 책망하려는 것이다. 옷을 입는 데는 실용성과 단정함, 이 두 요소가 있어야 한다. 단정함은 절제와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헛되이 머리를 부풀게 하고 곱슬거리게 하며 땅는다든가 사치스러운 장식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들의 허영심에 대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게 한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옷 입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하는자들은 쉽게 논박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도한 단장과 사치스러운 장식, 요컨대 모든 지나친 것들은 자만심이나, 과시의 허식 등은 제외하고라도 이러한 유행에 속한 기타의 것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그러므로 든 허영에 대해서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매사를 적절히 처리하여 절제할 수가 있다.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  이 귀절이 대조하고 있는 것을 주의깊게 고찰해 보아야 한다. 카토(Cato)는 말하기를 육체를 단장하기에 열심인 사람들은 마음을 단장하기에는 게을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인들에게서 이러한 욕망을 억제하도록 하기 위해 그 치료약으로 더욱 자기들의 마음을 교화하도록 힘쓰라고 한다. '마음' 이란 말은 모든 영혼을 의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베드로는 여인들이 영혼을 단장함에는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썩지 아니할 것"은 쇠퇴해 가거나 사라지는 것 그리고 육체를 단장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이렇게 볼 때, 에라스무스의 번역은 그 진정한 의미에서 떠난 것이다. 요컨대 베드로는 영혼의 장식물은 시들어가는 꽃과 같지 아니하고 사라지는 영화로 되어 있지도 아니하며, 썩지 아니할 것으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이라는 말을 베드로는 특별히 여자들에게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 이상으로 여인들의 특징을 짓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허영심을 바르게 해주는 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심령의 안정보다 더한 것은 없음을 알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한 말씀은 심령뿐만 아니라 앞에 있는 모든 문장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그 의미는 동일하게 된다. 왜 여자들은 자기 자신을 단장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자들이 자기들에게 눈길을 돌리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베드로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에 보다 열심을 기울이라고 그들에게 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제 그들 앞에 외모의 치장보다 영적인 치장을 추구했던 경건한 여인의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사라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그가. 모든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가 되기 때문이요,  특별히 여성적인 면에서 존경과 모범이 될 만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또 다시 순종의 원리로 돌아가 모세의 말을 빌어 자기 남편을 주라고 불렀던(창 18: 12) 사라를 실례로 들어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러한 칭호들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 아니하시지만 때로는 일부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성미가 까다롭고 불순한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그들의 입으로 사용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라가 이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은 이 명령을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으로 알았고, 자기는 자기의 남편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는 또 사라의 순종을 배우는 자들은 사라의 딸들이 된다고 하였다. 즉 이 말은 신실한 자들 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6. 사라가 ~~~~~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  여성의 약점은 의심이 많고 겁이 많아서 남편을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예속되는 경우에 그들에게 거친 대접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 문이다. 이 귀절은 베드로가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여인들이 방해를 당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보인다. 베드로의 말은 다음과 같다. '기꺼이 너희 남편들의 권위에 순복하라. 그리고 너희가 순종을 하면 오히려 너희의 처지가 더 나빠질까 하는 생각으로 너희의 순종이 방해를 받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을 보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 라는 말이다. 여자들은 자칫하면 놀라며 아주 사소한 일에도 종종 수선을 떠는 일이 많아서 자기 자신과 가정을 혼란 속에 빠뜨리게 된다.어떤 사람들은 여자들의 겁이 많음을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책망함으로써 베드로는 여자들에게 자기에게 부여된 책임을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으로 이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두번째 해석이 첫번째 해석과 거의 차이가 없더라도 첫 번째 해석을 취하겠다.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  남편들에게 베드로는 사려 깊은 분별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기 아내를 오직 남편이 다스려야 하고, 그들이 마땅한 의무를 적절하게 행사하는 데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남편들은 여러가지로 어리석은 점이. 많으며 거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마땅히 그들은 자기들의 무절제함과 어리석음을 조장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베드로의 권면은 공연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말한 남편들의 분별력에는 자기 아내를 귀히 여기는 것이 들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동반자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것은 모욕을 주는 것이므로 우리가 존경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진실한 사랑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은 존경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두 가지 논조를 사용해서 남편들이 자기의 아내에게 귀하고 친절하게 대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첫째는 그들이 성적으로 연약한 점을 들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므로 존귀함을 들었다. 아내들은 연약하고 한편으로는 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아내들에게 마땅히, 존귀가 돌려져야 한다는 것은 약간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곳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께서 탁월하게 만들어주신 자에게 존귀를 돌리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들로 인해서 멸시를 받으신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서로간에 감싸주어야 하고, 또 서로 용서하여 줌으로써 허물을 가려야 함을 배우게 된다.

 

보다 연약한 지체들에게 더욱 큰 존귀를 돌리라고 말했을 때(고전12:23), 바울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욱 주의해서  부끄러움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여인들은 돌보아져야 하고 관대한 대접으로 존귀함을 받아야 한다고 함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연약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경험이 없으므로 잘못한 것들을 쉽게 용서해 주듯이 여성은 성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완고하고 엄격한 대접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지적해 준다.  이미 잘 알려진 '그릇' 이라는 말이 성경에서 어떠한 종류의 기구를 의미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  어떤 사본들은 많은 은혜' 라 했고, 다른 사본은 '생명'대신 '살아 있는'이란 형용사를 취하고 있다. 어떤 사본은 '유업'을 여격으로 취하고 있는데, 그 의미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또 어떤 사본들은 많은 은혜와 생명사이에 접속사를 놓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적합하다. 주님께서는 남편과 아내에게 비슷하게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므로 베드로는 이들이 서로 동등함을 보여주고자 하고 있다. 우리는 아내들이 그들의 남편과 함께 누리고 있는 은혜가 많음을 알고 있다. 어떤 것들은 이 현실 생활에 속해 있지만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신령한 나라에 속해 있다. .베드로는 남편과 아내가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함과 동시에 이것이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구원의 소망에서 볼 때는 벗어난 자이지만 아직도 자기들의 남편 못지않게 주님께서는 여성들도 귀히 여기셨으므로 그들에게 존귀를 돌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안정되고 화평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응답하실 수가 없다. 시기와 다툼과 불평이 있는 곳에는 기도가 있을 수 없다. 베드로는 남편과 아내에게 피차간에 화평하라고 명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추측해 낼 수가 있다. 즉 자기 형제들과 하나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든 집안 싸움이나 다툼을 잠잠하게 하여 모든 식구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함과 같이 일반적인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분쟁과 분냄을 억제시켜야 한다. 우리가 기도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 가는 길을 고의적으로 막아버린다면, 이것은 미친 행위보다도 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해석도 하고 있다. 아내와의 부부생활도 과도하지 않게 적절히 해야 한다. 너무 지나친 부부관계는 무절제함에 빠져서 기도 생활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고전7:5). '그러나 베드로의 교훈은 이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또 바울은 기도가 부부관계로 '말미암아 방해 받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해석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본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별없이 다 해당되는 일반 법칙이 나온다. 베드로는 우정과 사랑을 유지하는 데 특별히 필요한 몇 가지 사항들을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다. 친구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질 자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사랑을 가리우는 구름이 되어 쉽게 증오심의 씨앗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 사이에 피차 마음이 하나가 되어지면 '쉼파데이아 :동정심' 는 우리의 모든 허물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웃의 불행에 대해 자기보다 못지않게 애석해 하고, 이웃이 번영할 때에는 즐거워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다음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특별히 신실한 자들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알려진 곳에만 진정한 형제 우애가 존재한다. 베드로가 불쌍히 여기며"라고 말한 것은 우리가 형제들을 도와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도 담당해야 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두 가지의 헬라어 본문이 있지만 나는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을 택하겠다. 형제우애를 가장 두드러지게 유지시켜 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절제 있고 겸손한 생각을 갖게 될 때라고 알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우월한 존재로 생각할 때 큰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는 지혜롭게 우리에게 명하기를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들을 멸시하도록 인도 하는 교만과 오만함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검손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9.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이 말씀은 모든 종류의 앙갚음을 금하고 있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악한 자로부터 손해를 입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을 잘 참아야 한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피차간의 사랑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많은 어려움을 견디어야 할 것을 바라고 있다. 흔히 손해를 당할 때 보상 받지 않는 것은 나약하고 비굴한 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말한 대로 가장 아량이 넓은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베드로는 원수 갚는 것을 억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를 욕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빌어주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복을 빌라" 는 말은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말이 다음 귀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악을 친절한 행위로 이겨야 할 것을 일반적인 원리로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대단히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태양을 무가치한 자들에게도 비취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 소피스트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심과 동시에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마5 : 44~45)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교훈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 귀절의 의미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그가 의미하는 바는 이 조건인데 그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요구되어지는 것으로, 곧 그들이 손해를 입힌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매우 온유한 마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저주하는 자들에게까지 축복을 빌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힘들고 또 거의 부당한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베드로는 신실한 자들이 불평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보상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잘못된 곳으로 돌아서게 되기 때문이 다. 요컨대 베드로는 우리가 묵묵히 손해보는 것을 견디어 나간다면 그 인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축복으로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동사 '글레로노메인'은 영원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손해를 참고 견딘 데 대한 축복은 잠간 동안이 아니라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축복해 주신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하나님께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들을 이루어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한편 베드로는 손해당한 것에 대해서 보복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좋지 못한 것들을 가져오도록 힘쓰고 있는 자임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동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아 가게 하기 때문이다.
 
"10. 그러므로 ~~~~~~원하는 자는~~~~" ;  '베드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마지막 말을 확증하고 있다. 이 귀절은 모든 악한 행위와 그릇된 길에서 자기를 지켜나가는 자들은 모두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성령의 증거를 시편 34편 12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흔히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만일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방어하지 아니하면 원수들의 오만함에 자신이 압도 당할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성령께서는 오직 온유하게 악한 것들을 이기는 자들에게만 복된생활을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지 아니하하면 우리는 행복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는 선하고 겸비한 사람이요,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 아니다.
 
베드로는 헬라어 번역을 따랐으나 그 의미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다윗이 한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 이 누구뇨"(시34 : 1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두셨으므로 우리가 일생동안 평안하게 지낸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베드로 는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르고 해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만이 축복을 얻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주의를 준 것은 혀를 금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칠고 교만한 말을 해서는 안되고 또 속임수로나 표리부동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부터 베드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나 손실을 주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도록 힘쓰며 사회적인 책임을 이행하도록 힘써야 할 것을 이끌어내고 있다.
 
"11. 악에서 화평을~~~~ 추구하여 이를 좇으라." ;  화평이 우리에게 임할 때 화평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화평이 우리를 피하는 것같이 생각되더라도 그것을 좇아가야 한다. 이 화평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 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찾을 때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어렵고 방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것을 구하여 좇으라고 명하고 있다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사실은 모든 악한 것들을 완화시켜 주므로 충분한 위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자신이 언급한 축복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보살펴 주시지 않는다면 그의 백성들은 이리의 먹이가 되는 양과 같을 것이다. 우리가 격정에 날뛰고 갑자기 분노가 끓어오르며, 복수심에 불타는 것등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보살펴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또 그의 도움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의 마음이 먼저 이러한 진리,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주고 계시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우리를 구하여 주신다는 진리에 젖어 있지 아니하면 인내하는 것도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납득하게 되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쉽사리 순수하게 되어지고 그에 따라서 악한 자들에게 괴로움과 미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게 된다. 베드로가 우리의 기도에 주님께서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고 말한 것은 기도의 용기를 더욱 북돋아준다.
 
"주의 낮은~~~~"이 귀절에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시는 자가 되심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악한 자들의 오만함을 억제 하시기에만 급급하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생활이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방어하려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대적해 주실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매우 차이가 있다. 보다 의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악한 자들에게 더욱 괴로움을 당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답변하고자 한다. 의와 화평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에 있어서 때때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에 대한 약속들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데 필요한 이상으로 많지 않다는 것을 특별히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과 더불어 화평하려는 일이 종종 어그러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육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와 또다른 면에서 우리가 아무 손실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종종 세상과의 화평이 무너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