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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벧전5:2)

1. 성경 (벧전5:1~14)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1)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3)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4)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5)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6)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8)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9)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0)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1)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2)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3)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베드로는 목회자들에게 맡은 바 임무를 잘 감당하라고 권면하는데,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세 가지 죄악, 즉 나태와 금욕과 명예욕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 그는 첫번째 죄악에 대해서는 민첩함 혹은 자원하는 마음을, 두번째 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세번째에 대해서는 절제와 온유를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적당한 자기 위치를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목회자들은 주님의 양떼를 돌볼 때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만 자기 일을 수행할 때 피상적이고도 나태하게 하려고만 한다. 베드로는 목회자들이 자기가 해야 할 바를 기쁨으로 수행하여 자신의 일에 진실로 헌신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탐욕을 바로잡기 위해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명한다. 그들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기꺼이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교회를 위해서 청렴결백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이들은 다만 자신의 뱃속을 채우고 돈만 아는 노예가 될 뿐이다. 베드로가 정죄하고 있는 세번째 죄악은 권력이나 지배욕을 가리킨다. 그러면 베드로가 의미하고 있는 권세가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베드로가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되라'  고 명한 귀절과 대조해 봄으로써 추측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신분을 지나치게 미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려는 의도를 베드로가 지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을 겸손하게 똑같이 공통적인 규범에 복종시키지 않고는 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다. 이러한 미덕과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은 포악한 자만심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예속에서 제외시키고 교회를 포악하게 압제할 때를 가리킨다. 에스겔 선지자가, 지탄한대로 너무 잔인하고 강폭하게 다스렸다고 정죄한 거짓 선지자들이 이러한 자들이다(겔34: 4).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신 것도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기 싫어하는 무거운 짐들을 백성들의 어깨에 지웠기 때문이었다(마23:4). 그러므로 사악한 목회자들은 이러한 전제적인 권위의식에서 교회를 다스리고자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고쳐져야만 한다. 목회자들의 권위가 제한되어야만 성경의 경건한 삶의 모범을 따라서 그들이 교회를 보다 모범적으로 다스릴 수 있다.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  베드로는 이 말로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 세움을 입은 목회자들과 기타 모든 자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을 장로라고 높여 부른 것은(seniores honoris causa) 그들이 모두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은 사려가 깊고 권위와 경험이 보다 풍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늙은이들이 지혜롭지 못하고(헬라의 잠언에 있는 것과 같이) 오히려 디모데와 같이 젊은 사람이 적절할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도 택함을 받으면 장로라고 불렀다. 베드로도 이와 비슷하게 자기 자신을 장로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혼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여러가지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이러한 명칭으로 자신의 권위를 더욱 높이고자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는 열 두 제자들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는 동료돌보다 더 우월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므로 목회자들을 훈계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베드로가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면 이것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의 경우에서도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사도였기 때문에 자기 동료들을 다스리는 권위가 결코 자신에게만 위임된 것이 아니고 이와는 반대로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똑같은 직분을 나누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  이 말씀은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나는 그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그 뜻은 양자가 모두 비슷하다 할지라도 나는 후자를 더 취하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두 문장, 즉 베드로가 자기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 문장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2) 라고 말한 바울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믿음의 증거를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여주신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믿도록 하는 데 큰 자극을 준다.  이 귀절에서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진실하게 말씀하고 계시며 자기 종들을 인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증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말씀이 더욱 존귀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귀를 기울인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자기가 당한 쓰라린 핍박과 장차 올 생명의 소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주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베드로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축복들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특징이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장로란 말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깨닫게 된다. 이 말 속에는 양 무리를 먹이는 직분이 포함되어 있다. 교황은 이와는 매우 다르게 장로를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목매어 죽이는 자들로 취급하면서 그들에게 양들을 먹이는 직분이 있다는 것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법과 교황이 착각하고 있는 교리와는 빛과 어두움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이 말의 정의를 마음 속으로 간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 무리는 순전한 교훈, 다시 말해서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만으로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조용히 방관만 하는 자나 자신의 사상을 퍼뜨려 죽이는 독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너희 중에 있는"이라는 말씀은 '너희 모든 힘, 즉 이것을 위해 너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다하라'는 말씀과 의미가 같다.옛날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너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이 이 말씀의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취하고 있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보다 더 정확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의 번역한 내용을 반대하거나 버리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귀절은 "하나님의 양 무리"라고 읽든지 '주님의 양 무리',  혹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 라고 읽든지 별로 차이가 없다. 어떤 사본에는 세 말씀이 다 기록되어 있다.

 

에라스무스는 '치되' 라는 말을 '돌보되'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이 말의 헬라어는 '에피스코푼테스'라고 되어 있어서 나는 베드로가 감독의 직분과 칭호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우리는 다른 성경 귀절들을 통해서 이 두 이름, 즉 감독과 장로가 동의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에피스코페인'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다스리다' 또는 '감독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정당하게 목회의 직분을 맡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라고 번역한 말은 문자적으로 볼 때 필요에 따라서만 하지 말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필요에 따라서 일을 하게 되면 우리의 일을 수행하는 데 억지로 하는 것과 같이 느릿 느릿하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  헬라어에서 전치사 '카타'는 거의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부당하게 권세를 사용하는 것을 정죄하고 있다. 부당한 권세를 행하는 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사역자로 생각하지 않고 그 밖의 것을 구하게 된다.  베드로가 특별히 교회를 '맡기운'(cleros)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는 주님의 기업이기 때문에 수많은 농장과 같이 도시와 촌락으로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각각 장로들에게 맡겨서 경작하도록 할당하신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어리석게도 그것이 여기서는 소위 목사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에 대한 모든 직분들을 가리켜 목사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고대의 표현 방법이다. 나는 신부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이유는 성경이 모든 교회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을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킬 권한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 방법은 오류이거나 최소한 사도들이 사용한 의미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베드로는 강력하게 교회에 이러한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 것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의 것을 탈취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하 고 있다. 여러 곳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교회는 자신의 특별한 보배요, 자신의 기업의 증표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이 교회를 전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주님께서는 결코 목회자들에게 통치권(regnum)은 주시지 않았다.  다만 보살피도록(curam) 하셔서 자신의 권리가 손상됨이 없이 존속하도록 하신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  목회자들이/이다. ,마지막{때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결코 자기들의 소명의 길을 참되게 걸어갈 수가:없고>도도 리어 자주 실패하게 된다. 조심성 있는 소명을 가진 자의 길은 여지없이 실 망시킬 만한 장해물들이 수없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종종 감사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을 하고도 길고도 힘든 수고가 부당한 대 접을 받음으로 해서 허사가 되어 버릴 때가 많다: 사단은 때때로 자기의 사 악한 음모로 그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이 낙심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길은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신실하게 자신의 일을 [계속 할 때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큰 상급을 예비하고 계계신다는 것을 둘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기대가 지연되는 경우에는 지치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베 드로는 동시에 이 큰 상급은 모든 지연된 날들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말 하고 있다. 그는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 경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 말한다.

 

우리는 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목자장'이라고 부른: 이유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교회를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 '아래서코다스리 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참된 '목자가 되시카 때문이다.' 여기에서 장(chief)이라는 말은 그가 우두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있을 뿐 아 니라 다른 모든 권세를 가진 자들이 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도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명령과 권위가 아니고서는 그를 대신 '표현할∞수가 없다.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베드로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장로 들'(seniores)이라는 말은 앞의 것과 그 의미가 다르다. 장로들과 젊은 자 들을 서로 비교할 때에는 두 문장을 대조할 필요가 있다: 베드르가 앞에서 그들의 직분에 관해서 포말했을 때에는 연령을 보아서 장로(aetate senes ; 연 장자)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이제는 특수한 호칭을 떠나서 일반적인 호칭으 로 나아가고 있다. 요컨대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훈계(maioram)를 순종하며 자기가 가르침을 일반을 만한 자임과 겸손한 자임을 보여주라고 명하고 있다. 젊은 때에는 군은 의지가 변하기 쉬워서 재갈을 물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장로들에게 이러한 존경심이 강화 되고 증진되지 않으면 목회자들은 자신의 일들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스스로 자기를 다스려야 한다. 신복종이 없는 곳에는 통 치가 파괴된다. 조자기 자신의 권리와 명령에 따라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자. 들은 모두가 곧 오만하여지고 자기 멋대로의 인간이 되어버린다.

 

"다 서로" ;  베드로는 젊은 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로서 젊가 은이들이 마땅히 안정되며 질서가 잡혀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설혹 당연 히 장로들(senibus)에게 권위가 있다고 보여긴다[ 하더라도의 고삐를던져버릴 권리나 자유까지 주어진 그것은 아니다. .장로들도 역시자신이 마땅한 질서를 따라서 피차 매이도록 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지만 다른 의미에서 볼 때 아내에게 매여 있다.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을 주관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예속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자녀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의 진리는 다른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사회적인 모든 주지위들은 모든 지체를 돌보아야 하는데, 이것 은 모든 지체들이 미치차간에 '복종하고 서로 매임으로써 연결되지 아니하고서 는 행할 수가 없는 1일들이다. 검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남에게 예속되는 일보다 더 사람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임금의 영혼도 여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영혼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은 참된 말이다. 사람들 의 인간적인 성품이 .우월감으로 들끓고 있을 때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복 종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겸손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이 러한 오만과 불손을 크게 꾸짖었다. 베드로가 사용하고 있는 비유는 매우 적절한 것이다. 너희 자신을 모든 면에서 겸손으로 둘러쌈으로 마치 너희의 의복이 에 너희 온 몸을 가리우듯 하라 [는 그것과 같다. 베드로는 우리가 피차간 서로 복종할 때 이것 이상으로 더 아름다운 장식을 갖추는 때가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대한글 개역 조성경에는 없음-역자 주):  자기 자신을 높이려고 보내쓰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자기의 .원수로 '만들려는 자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실 것이라고 한 ,베드로의 말은 엄격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검손한 자들을 즐겨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 푸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두 개의 손을 갖고 계신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기를 높이려 하는 자들을 두들겨 산산조각이 .나게 하시는 망치와 같은 손 이요, 다른 하나는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자들을 일 으켜 세우사 확고한 후원자처럼 붙들어 주시는 손이다.우우리가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았다면 교만으로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음 속에 깊이 감염손 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형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망상은 지금 도 두려움없이 하늘을 향해 찌를 것처럼 일어나고 있다. 베드로의 이 말씀 이 사람들을 참으로 결손하게 만들어주는 하늘 나라의 외침이 '되도록 해야 한다.

 

베드로는 겸손한 자 란 자기 자신의 권세나 지혜나 의에 대한 모든 신뢰 를 버리고 하나님께서만 모든 선한 것을 구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길 즉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자기의 영광을 기꺼이 .망각하는 길 외에 하 나님께 나아갈 더 그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6. 그러므로~~~~겸손하라" ;  우리는 항상 베드로가 명한-대로 하나님 앞 에서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 다시 발하자면 사랑이 검손을 요구하는 한 .우 리의 형제에게 보다 판대하고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 저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그래서 [베드로 는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반항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례하 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하나 님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권면한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더욱 두려움을 주 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하신 손"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종종손'이라는 말이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귀절의 전후관계에서 이 뜻 을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우리의 겸손함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나의 겸손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더욱 거만해지려고 보조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여기에 대비해서 베드로는 모든 겸손한 자들이 훨씬 탁월할 것을 약속하고 그들의 교만을 겸손으로 대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때가 되면~~~~~~" ;  이 말은 지나치게 서두르지 말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지금 당장 겸손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높임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음을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주 남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이리들 가운데서 부르짖을 것이다', 또는 '이리들에게 잡혀 먹히기까지 기다리는 양과 같은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라는 격언처럼 우리가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계의 사슬을 늦춤으로써 그들이 더욱 포악하게 날뛰며 우리를 해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그 의미를 겸손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확신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쉽게 인내와 겸손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사람들의 사악함이 우리가 포악하도록 자극하는 경우에 사도는 다윗이 시편 37편에서 말한 것처럼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리고 평안하게 안식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님의 섭리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필연적으로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격렬하게 대들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화평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또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겸손하고 온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살펴주고 계심을 생각할 때 모두가 그와 같이 더욱 겸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치 돌같은 마음으로 모든 감정이 비록 무디어졌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고 명령을 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러한 경우에는 너무나도 많은 염려, 혹은  두려움이 우리를 견디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사람들을 모든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주고 아무 염려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육신의 나태함에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인식을 얻도록 해주는 것이다.

 

"8.  근신하라  깨어라~~~~~~~" ;  이 말씀은, 우리가 가장 맹렬하고도 강력한 원수와 더불어 싸울 때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하는 데까지 그 범위를 확대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두 가지 비유를 사용하여 그들이 근신해야 할 것과 경성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과식은 나태함과 졸음을 가져다 주는 것과 같이 오직 땅의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것으로만 쾌락을 누리는 자는 영적 무기력 속에 침몰해 버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사도가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싸워야 할 싸움을 말하면서 그 싸움은 보통의 싸움이 아닌 사자처럼 날뛰며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자와 싸워야 할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 귀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깨어 근신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도 에베소서 6장에서 이와 똑같은 내용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그는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정신적 죄악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 평화를 열망하면서도 곧 나태함으로 돌아서기 때문에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넘어뜨리기가 일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록 그곳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육신의 뜻을 따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마귀를 사자에다 비유하는 것은 마귀가 사납고 거친 야수와도 같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주의 깊게 경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귀는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베드로는 마귀를 경건한 자들의 대적이라고 부름으로써, 경건한 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리 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계속해서 마귀와 싸워야 할 입장을 알아야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머리와 더불어 싸우는 것은 그 지체와는 나뉘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9. 너희는~~~~~저를 대적하라" ;  원수들의 세력은 우리를 더욱 예민하고 더욱 경성하게 만들어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은 승리에 대한 소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는 한 무절제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넘어지고 만다. 이것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싸우기만 한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을 알고 있다. 베드 로는 이러한 싸움에 나서는 자는 누구든지 분명히 승리의 믿음을 가지고 승 리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대적하라 고 말한다. 누군가가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 하고 묻 는다면 베드로는 믿음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충분히 대적할 능력이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내가 이미 인용한 구귀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갖춘 무기의 여러 부분들을 열거하고 있다(입6:13) 이 말씀의 의미와 같이-요한도 믿음만이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승리임을 증거하고 있다.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앓이니라." ;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고난 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사단은 우리를 위 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에서부터 떨어지도록 대한고 있다. 우 리는 읍의 용기를 꺾고자 사단이 어떻게 유혹했는지에 대해서 그들은 적이 있 다. 거룩한 자들을 바라보아라 그들 중에 누가 :그러한 고난을 겪지 않은 자가 있느냐?'(옵5:1  칼빈사역) 뿐만 아니라 :사도는 이 귀절에서 우리 가 당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당한다고 :상기시켜 주고 있다.그러 므로 우리는 모든 구성도들과 증더불어 :나누는 교제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들어떠 한 고난도 거절할 [수가 없다. "동일한 유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속에서 로베드 로는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매일 거룩한 성도들 안에서 고성취되어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특백성들을 세상 에서나 차별없이 찾으신다는 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위한 우리에게는 있다고 해석되어진다. 베드로는 이미 우리가 사 싸워야 할 필요성이 남아 단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말해 놓고 지금은 그 안에 모든 종류의 환난 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 귀절에 대적을 '가해오든지, 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적 원수들이 어떠한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어떠한 질병으로 우리를 억누르든지, 땅의 소산을 없애버려 굶주림으로 우리를 해하든지 사람들을 시켜 우리를 핍박하 든지간에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항상 싸워야 위한다는 사실이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  베드로는 자기의 훈계를 충분히 말한 후에 이 제는 그 방향을 기도로 돌리고 있다. 대해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역 사하시지 않으신다면 교훈이란 허공에 쏟는 것과 같이 .허사에 불과하기 때 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대당연히 따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수고를 성공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 기도 ,방법외에는 심거나 물주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본들은 미래시제를 .택하여 이 말씀이 마치 약속인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동시에 사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기도한 것을 교인들에게 확증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창조주라고 불러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들 이 영원한 j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또한, 그분이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확증시켜 주고 있다.

 

베드로는 히브리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 의거해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라고 불렀다. 그가 특별히 모든 은혜' 라고 말한 것은, 첫째 교인들이 모든 축복들을 하나님의 은사로 '간주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려는 것이요, 둘째는 한 가지 은혜는 또 다른 은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은혜에 첨가 해서 앞으로 그들이 바라고 있는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다.

 

"너희를 부르사~~~~~~" ;  이 말씀은(내가 말한 대로) 확신을 더욱 증가시켜 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으로 뿐만 아니라 그의 은사들을 통해서 점점 더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단순히 소명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 교인들이 부르심을 받았는가, 즉 영원한 영광을 소유하게 된 것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부르심의기초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우리의 소명이 그리스도를 기초한 것이요, 영원한 하늘 나라의 복된 세계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실들은 영구적인 확신에 이르게 하여 순간적이거나 쇠퇴하지 않도록 해준다. 이 귀절에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첫째,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부름은 정당하고 확고한 것이다. 둘째,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공로나 유익함을 배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통해서 우리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신 것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사, 우리가 그의 음성에 북종하도록 하시는 것은 보다 큰 은혜라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특별히 거룩한 자들을 말함으로써 성령의 효과적인 능력을 외부적인 교훈과 연결시키고 있다.

 

어떤 사본들은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견고케 하시리라"는 세 단어를 탈격으로 하여 동명사로 해석하도록 하고 있으나 그 의미로 볼 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안된다. 베드로는 이 모든 말들을 통해서 동일한 사실이 거룩한 자들을 확증하고 있음을 단순히 의미하고 있다. 아베드로는 이 단어를 그런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길을 걸어간다는 그것이 특별히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필요함을 우리가 깨닫도록 해준다: 여기에 삽입된 잠간 고난을 받은"이라는 말씀은 고난을 받는 기간이 잠간 동안임 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적지않은 위로를 주고 있다.

 

"11. 권력이~~~~~~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거룩한 자들에게 더욱 확신을 주기 위해서 베드로는 즉시 감사를 더 드리라고 한다.  이 귀절은 직설법으로도 읽을 수 있고 가정법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그 의미는 거의 같다.

 

"12. 내가~~~~~~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  베드로는 편지를 끝맺음에 있어서 교인들에게 믿음 안에서 변치 말 것을 권면하고, [또 자기가 관련지를 쓰는 목적 이 그들이 받은 바 교훈들을 순종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발달하고 있다. 베드 로는 자기의 편지가 간단함을 말함으로써 읽을 때에 싫증을 느끼지-않도록 해주고, 자기의 심부름꾼에 대해서 간단하게 추천함으로써 이 편지에 기록 된 것을 생생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과 같이 하고 있다. 이 말의 목적은 자 기가 그에 대해서 갖고 있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특별히 "내가"!!!"아는"이라고 한 말씀은 겸손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자기 마음의 확신에 따라 말하고 있음을 교인들이 알도록 하여 매우 위대하신 사도의 판 단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함을 깨닫게 한다.

 

"권하고~~~~증거하노니~~~~" ;  민음을 계속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변절로 그 증거가 ¡나타난다. 우리가 사람 들의 경솔함과 변절함과 또 그들이 (헛된 그것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ρ어떠한 '교훈이라도 의심 이 일어나면 마음 속에는 확고하고 영속되는 뿌리를 가질 교수가 없기 때문 에 베드로는 교인들이 배운 바 하나님의 진리가 .확실한 것이었음을 증거하 고 있다. 그 확실성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명확해지지않으면 계속해서 동 요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모든 새로운 교리가 ι나타나면 1쉽게 돌아서고 만 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말로 베드로의 믿음이 정모든 교사람들에게 효과 적이며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13~14.  함께~~~~~바벨론에 있는 교회" ;  많은 옛날 주석가들은 생각하기를 이 귀절에서 로마가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기뽑으로 이 주석을 받아들여 주장하기를 베드로는 로마 교회의 머리였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명칭을 구실로 삼을 수 있게수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 이름을 그대로 지저분하게 방치하고 있으며 베드로를 자기들 편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매우 축소시키고 있다. 그들은 다만 베드로의 의자에 새겨진 이름만 얻을 수 있다면 로마가 지옥에 들어간다 해 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옛날의 주석에서는 조그마한 진 리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유세비우스나 다른 사람들이 왜 이러한 해석 을 받아들였으며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오류에 빠져들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 은 마가가 네로 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은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베드 로는 그보다 6년 후 로마에서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 약(그들이 말한 대로) 마가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오래 도록 감독으로 있었다면 그는 결코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지 않았을 것이 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 동안 교황으로 있었다는 유세비우스와 제롬의 이론은 갈라디아서 제 1장과 제 2장을 지적함으로써 쉽게 반박될 수가 있 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기록했을 당시에 마가를 자기의 동반자로 데리고 있 었으므로 그는 바벨론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이 견해는 베 드로의 소명과도 일치하고 있다. 우리는 베드로가 특별히 유대인들의 사도 로 택함받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로 많은 유대인 들이 있던 세계를 찾아다녔다.

 

교회를 동일한 선택에 참여한 자로 말함에 있어서 베드로가 목표하고 있 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점점 더 확고하게 되어지는 것이었다. 그처럼 먼 세상에서 유대인들이 한 교회 안으로 모여든다는 것은 위대한 일 이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 ; 베드로는 마가를 칭찬하기 위해서 이렇게 불렀다. 그 이유는 마치 바울이 믿음으로 디모데를 낳았던 것처럼 그를 낳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입맞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한 바가 있다. 베드로가 사랑의 입 맞춤을 바라는 것은 마음의 신실성은 외면적인 행위와 상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