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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베드로전서

사순절 이십오일차 묵상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

1. 성경 (벧전 2:18~21)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8)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19)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0)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  비록 이것이 특별한 훈계이긴 하나 뒤따르는 다른 말들과 함께 연결이 된다. 이는 사환들이 그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명령과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복하라는 명령은 사회적인 복종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도는 사환들이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북하기를 원한다. 이 표현으로써 그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한 존경심을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존경심은 그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을 자기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할 때 일어나게 된다. 다음에 사도는 이 두려움을 억지와 위선적인 복종과 대치시킨다. 이는 사도 바울이 칭하고 있는(골3:21) 바와 같이 δρθαλμοδouleiα(오프달모둘레이 : 아주를 섬기는 .이상)는 이 두려움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사환들이 그들이 당하는 흑사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멍에를 '벗어던지려 할 경우, 그들은 그 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려움은 자기 의무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 생기는 것이다. 비록 본절에는 아무런 예외 규정이 부연되고 있지 않으나 다른 귀절들에 따르면 예외가 있다. 이는 사람에 대한 순복이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한계를 넘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환들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또는 그들이 말하는 제단 안에서처럼 그 주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문의 단어는 δοйοι(둘로이)가 아니라 oixёται(오이케타이)이므로 비록 사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노예나 종으로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심부름 군의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비록 자기 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자기 주인에게 순복하는 것이 사환의 의무라 할지라도 그들 자신에 관한한, 만일 그들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면 이에 대하여 항의할 수 있겠으나 사도는 .이것마저도 금한다.  그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지 간에 사환들은 그 주인에게 충실히 순복하지 아니할 핑계를 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전이 그의 권세를 남용할 때에는 그가 장차 하나님께 회개해야만 하거니와 당장에 자기 권한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비록 주인들이 무가치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사환들은 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고 있다. 사도는 "까다로운 자들"을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과 대조한다. 그는 이 말로써, 잔인하고 완악한 자, 혹은 인간성이나 자비심이 결여된 자를 가리키고 있다.

 

어떤 번역자가 하나의 헬라어를 다른 말로 바꾸어서 그것을 '제멋대로 하는 자들' 로 번역해 놓을 수 있게 한 것이 무슨 뜻인지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르본느의 박사들이 '제멋대로 하는 자들'이라는 말을 방종하는 자들, 혹은 '방탕한 자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는데, 그들은 이 엉터리 번역 위에 믿음의 신조를 세워서 교황과 및 그의 뿔 달린 야수들이 제아무리 가혹하고 견딜 수 없는 포악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그들의 엄청난 무지에 대해서는 덮어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귀절은 그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농락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19~20 절.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 Gratia(그라티아)라는 말은 칭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사도는 우리가 만일 우리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매를 맞고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무 칭찬도 받을 수 없을 것이나,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그 슬픔을 참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며 칭찬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불의하고 부당하게 취급한다 할지라도 만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자기의 의무를 지켜나간다면, 그 것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것인지를 그 때에 확인해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 사환들은 멸시를 받았고 가축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취급을 당했으며 그와 같은 모욕이 그들로 하여금 실망에 빠지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처지는 매우 고달팠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소망이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자기 남편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아내가 그 남편에게 순복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칭찬 받기를 바라는 외식하는 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마6:16) 아내는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 상급을 받게 된다. 다른 경우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 기 아버지의 호의와 하사품을 받기 위하여 순복한다면 그 아들은 하나님이 아닌 그의 아버지에게서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만일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고 사람을 존중함에 있지 않다면,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이 그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이다. 더욱이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은 반드시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분투 노력해야만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선대 할 것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볼품없는 자들과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선대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보잘것 없는 사람들이라 해서 그들이 응당 벌을 받아야 된다고 사도가 말한다면 그와 같은 주장은 좀 곤란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께서 우리의 죄를 징벌하실 때 우리가 만일 그 형벌을 잘 참기만 한다면, 그 인내는 분명히 주님께 대해서 하나의 향기로운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나는 여기서 베드로가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답변하겠다. 사람이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참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슬픔을 참는 것에 비교할 때 그 받을 칭찬은 심히 적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사도는 이와 동시에 그 동기를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들 잘못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이것은 이미 내가 제시한 답변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비록 사도의 논의는 사환들에 관한 것이었으나 본절은 그 주제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도는 여기서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공통적인 기독교의 과제가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인내로서 고난을 견뎌낼 작정으로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이 일에명령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 일이 우리에게 비참해 보일 것에 대비해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한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더 부당하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돌린다면 그런 고통은 경감된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절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너희에게 본을 끼쳐"라는 말씀에 유의해야만 한다. 사도는 지금 본 받을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무슨 본을 보이셨는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는 신을 적시지 않고 바다 위를 걸으셨고,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류를 범하게 될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일들에 그를 본 받으려 권능에 관하여 우리에게 증거를 보이는 그가 그의 신인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일에 그를 본받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결과로서 일어난 능력의 사건이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서 바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거스틴도 어딘가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는 귀절을 주석하는 중에 우리에게 그 점을 상기 시킨 바 있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사실을 베드로의 강론에서도 배우게 된다. 이는 그가 여러번 "내가 너희에게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제시하였노라"는 말로서 구분할 필요성을 주의시키고 있다. 본 주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9절에서 보다 길게 다루고 있는데, 그곳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