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히4:1~16)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1)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2)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3)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4)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5)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6)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7)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8)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9)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0)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1)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2)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3)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4)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5)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 저자는 서신을 받는 유대인들이 부여된 축복을 박탈당할까 두려워하라고 결론짓고 있다. :저자는 계속하여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 한 그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로 인도되리라는 것이다. 선한 목자의 임무는 모든 양떼를 돌보면서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마음을 써서 그 양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것이다. 우리 각 사람도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써서 자기 자신을 위함 같이 자기 이웃을 위해서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려움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확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근신하는 마음을 주어서 부주의와 태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말씀이다. 우리는 마치 최후의 확실하지 않은 심판에 대하여 궁금하여 떨거나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두려워해야 한다.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라고 저자가 말할 때, 저자는 은혜를 거절함으로써 이미 약속을 포기해버린 자가 아니면, 누구나 약속에 이르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돌이키시기는 커녕 끊임없이 그 선물을 우리에게 공급하신다.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멸시 할 때에는 예외이다. '그러므로'라는 추론은 다른 사람들의 타락을 보고 우리는 겸손하게 되는 조심성을 배우라고 지적한다. 바울이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우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 20)고 하신 말씀과 같다.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 저자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바로 그 교훈이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교훈과 똑같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부르심을 견고하게 잡지 않으면, 우리의 조상들보다 더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양보의 형식으로 확실히 복음은 우리에게 전파되어 있다 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헛된 자만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재빨리 그것을 제한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렇게 많은 은혜의 몫을 불신자들에게 주셨는데, 그들은그의 사랑과 그 은혜로부터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도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코 그 축복에 참예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듣는다 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하고 있다. 즉 믿음이 동반하지 않으면 말씀이 우리에게 전파되어도 듣는 일은무익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또한 여기에서 말씀과 믿음의 상호관계에 주의 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상호관계란 믿음이 말씀으로부터 분리될수는 없다는 것이다. 한편 말씀 역시, 신앙으로부터 분리되어서는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의 효력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 세계가 거짓되다 할지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은 역시 진실하시기 때문이다. 말씀은 신앙이 그 통로를 제공할 때만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가져온다. 말씀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능력이 되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롬1 : 16, 17).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자체가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인 효력을 발생하며 구원의 능력을 갖지만, 말씀의 결실은 오직 믿는자들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말씀이 없으면 이미 믿음은 없으며, 믿음과 말씀을 분리시키려고 시도하는 자는 누구나 믿음을 일시에 소멸시키고 백지상태로 돌려버리고 만다. 이것은 진실로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그러므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양자로 택함받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에게만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어떠한 구원의 약속도 반지 못한 악마들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말씀을 무시하는 모든 이교도들이 어떤 믿음을 갖는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언제나 듣는 일이 믿음에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도 이 이유는 타당하다.
[저자는 이제 다윗으로부터 방금 전에 인용한 귀절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저자는 복음을 문자에 따라서, 즉 그 문자적인 의미에 따라서 이제부터 그는 복음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좀 더 자세히 확대시켜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말들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윗의 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연 설명(iπeξepraσiα 에페크세르가시아)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6절에서 모세의 증언을 다루고 있는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라는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행해지는 일을 성경에 좀 더 단순하게 적용하기 위해서 유비의 방법으로 설명한다 해도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지체의 요점은 이러하다. 역시 하나님의 안식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시편의 경고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데,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어떤 유의 안식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바와 같다. 이 귀절이 어려운 것은 역시 많은 주석가들이 다른 뜻으로 곡해해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도의 유일한 목적은 어떤 종류의 안식이 우리에게 제기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 안식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자극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우리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 안식으로부터 제외될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그 안식의 입구가 안식보다도 열려 있는 것은 가나안 땅의 훨씬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한 절, 한 절 순서를 따라 설명해 나가기로 하자.]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 이것은 반론을 제기한 하나의 귀절이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오직 불신앙뿐이므로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만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불신앙자들에게 격노하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에 참예하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불신앙으로 인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그 안식에 들어가려면 미리 하나님께로부터 초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제1인칭으로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하셔서 엄청난자비심을 가지고 그들을 그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 우리의 안식의 본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정의하기 위해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즉시 그의 모든 사역을 쉬셨다' 는 모세의 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부터 영원토록 계속되는 신자의 진정한 안식이 하나님의안식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것은 인간의 가한다. 그리장 고상한 축복이므로, 그것은 역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어야1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행동은 이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 안된다.저자는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안식하신 후에 오랫동안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의 안식을 거부하셨다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취하신 안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익한 일이 될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거기 들어갈자들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만일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라면, 믿는 자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 뒤에 오는 말은 좀더 이해하기 어려운데, 시편에서 우리에게 주는 안식을 이와는 다른 오늘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거절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윗의 말이 그런 뜻으로 사용되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서 땅을 빼앗음으로 그들의불신앙을 처벌하셨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나는 이와 같은 추론이 정당하다고 대답한다. 즉 성령은 우리에게 우리의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불신앙의벌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우리를 경고범죄를 자초하거나, '그들과 '똑같은 형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약속되지 않는다면 너희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너희에게 '일어나치 않도록 삼가 주의하라 는 경고의 뜻은 무엇을 사말함인가? 그러므로 사도가 조상들의 불신앙이 그들을가난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소유를 모두 박탈당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약속이l1그들의 후손에게 생산된 것은 조상들이 잃은 것을 그 자녀들이 얻도록하기 위함이다 라고유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 저자는 다윗이 안식이라고 말할 때, 여호수아가 ,백성을 인도한 가나안 땅을 의미하고 있음을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들이 열망하는 최종적인 안식이라는것을 분인한다. 그리고 그 최종적인 노안식이라 함은 보당시의 신자들에게나 우리들에게도 공통적인 소유를 가리킨다. 그들이5이 세상의 공장보다도 높은 땅을 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우리의영적 상속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가치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부그토지의 소산을 얻은 후에 그들은 마치 그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그들이 참된 안식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가나안땅을 소유하는 것이 영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윗이시편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은 그 땅의 토지를 실지로 소유하고 있었다.그러나나 그들은 다른 곳의 좀더 좋은 안식을 찾도록 격려를 받았다.
우리가 본 것처럼 가나안노망이 하나의 안식을 의미했지만 하나의 그림자또는 표상에 지나지 않으며, 신자들은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면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준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도 아래에서 백성들이용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열렬한 열심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소망하였기 때문이다.후로부터또 그 앞서간 그들과 우리와의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아주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과 우리 앞에 동일한 목표가 주어져 있지만그들은 자기들의 안내자로 삼을 외적인 표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또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모든 사실이우리의 눈앞에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구원이 아직 소망중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소망을 좇으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똑바로천국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의 손을 뻗치고 계신 것은 우리를 상식적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를 이1세상으로부터 취하여 하늘에서 살리기 위함이다. 사도가 여기서 그림자와 현실을 나누고 있는 것은 외부적 사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는 안식이 남아 있다고 함으로써 저자는 날마다우리를 초대하시는 영적 인식처가 되신다고 결론짓고 있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 이것은 영원한 안식(sabbath)의정의()이다. 인간 최고의 행복은 이 안식 안에 있으며, 거기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일치한다. 철학자들이 지복( summum bonum)에 관해서 논한 것은 모두 어리석기짝이 없는 무익한 쟁론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을 인간 자신 속에 국한시키지만, 진실한 행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인간 최고의 행복이란 단순히 하나님과의 합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 이 인간 최고의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본서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가 자신의 행위를 중지할 때 일어난다고 발하고 있다. 이로부터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이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를 중지한다는 것은 곧 육신의 행위를 죽이는 일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삶을얻기 위해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를 쉬고 하나님이 인간 안에 오셔서 활동할 여지를 주어야 한다는것이다. 자기 부정은 우리가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규범을 말할 때 언제나 시발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복종할 때만 오직 인격이 올바르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악한 자들이기 때문에 이같은 일은 자신의 행위를 버리지않는 한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통치와 우리의 마음 사이에는 큰대립이 있으므로 우리가 자신의 행위를 쉬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역사하실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안식의 완성이 결코 이루어질수 없으므로 그의 안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안된다. 신자들은 이렇게 해서 안식에 들어가지만, 계속 달리고 달려서 안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가 안식일에 대하여 특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의외적 준수를 중지시키려 하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안식일의 폐지는그것이 제정된 영적 목적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한 초가지의「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하려 하고 있다 . 즉 저자는 여기서은혜의 탁월함을 찬양하고 우리에게 이 은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안식일의 진정한 준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외적 의식에 .집착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안식일의 폐지에 관해서, 명백하게드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이 저자의 특정한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안식일의 의식의 준수를 다른 각도에서 [살피도록 그들을 교훈함으로써 차츰 그들의 미신적인 견해에서떠나게 한다. 계명의공목적이 외부적인 안식(rest)이나 이 세상의 예배 이상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식적인 관습이 그리스도가 오신 것으로말미암아 폐지되었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쉽게 인정하게 된다*본체가 .나타나면 그 순간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다.그러므로 우리의 첫째관심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어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향하여야 할 목표를 보여준 후에 이제는 근 목표에 이르는길을 따라 전진하라고 권고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단호해야 한다. 저자는 동안식에 들어가는 일을[ 정도에 비교하면서 안식에서 멀어지는 일을 그 반대로 언급한다.] 이러므로 그는 두절에 걸쳐서 이 비유를 계속한다. 동시에 저자는 모세로부터 인용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였기 때문에 광야에서 쓰러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민26: 65). 그래서 저자는.τω aitoυπoδεуματι(토 아우토 휘포데이그마티; 동일한 보기[ 다음에)라고 말하는데, .이 뜻은불신앙과 완고함의 벌은 마치 그림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안에 이와 :같은 불신앙이 발견되면 반드시 똑같은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멸망하다'나라는 뜻으로 타락하다 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좀더 명백하게 '말해서 저자는 이 말을 조직의 뜻으로가 아니라 형벌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은유법은 앞에있는 들어가다 라는 말에 적용될뿐 아니라 조상들의 비극적인 멸망에도적용되는데, 바로 이 예로써 유대인들을 두렵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 저자가 여기에서 말씀의능력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반드사 벌을 받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그가 주께서 우리에게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우리의 내적인 감각이 모두 감동하도록 진지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의 어느 부분도 감동을 받지 않는 부분은 없다 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전에 사도가 한 '말씀은 일반적으로 발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특히 신자들에게 적용시켜서 말하고 있는지를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왜냐하면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동등하게 효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말씀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능력을 나타낸다. 그들이 진실한 자기 인식으로 말미암아 겸손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말씀이 마음 속 깊이까지 꿰뚫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인간의 마음 속에 한없이 계속되고 있는 꼬불꼬불한 위선의동굴은 여지없이 두들겨 부쉬버려야 한다. 우리는 위선의 깊은 계곡을 살짝건드리거나 할퀴는 정도의 수술로는 안되고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가서 상처를 입더라도 인간의 더러운 찌꺼기들을 모조리 파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영원한 죽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풀이 죽을 것이 아니라 위선의 자신을 죽임으로 영원히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옛 사람이 성령의 날선검에 죽임을 당하기까지는 우리의 마음 전체가 결코새롭게 되자 못할 것이라고(앱4 요구하는 바와 같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빌217)에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믿음의 제물을 드린다고말하고 있다.왜냐하면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의지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께대한 복종으로 옮겨질 수가 없으며, 그들의 세속적인 지혜가 파괴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런일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경솔하게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시끄럽게 방해하고 불손하게도 하나님에 대항하여 궐기를 한다. 마치 하나님의 5말씀은 쇠망치이고 그들의 마음은 모루인데, 어떠한 [강타로 내리쳐도 그들은너무나 단단하여 되받아치고 튀어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직 믿는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살 속, 뼈 속까지 사무치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 본 서신의 문맥은 이것이 불신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선고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아무리 내리쳐도 꺾이는 일이 .없고 철이나강철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죄책감에 의하여 영락없이 감금된다. 그들에게도 웃음은 있지만 그것은 조소적인 웃음이다. 그들의 마음 속은 숨막힐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김심판대에 저지 않기 위하여 갖가지의 구실을찾는다. 그러나 그들은 본의는 아니면서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의심판대에 끌려 나온다. 이 말씀이 그들을 미친개에 비유할 정도까지 몹시격렬하게 조소한다. 미친개들은 자신을 고려어놓은 쇠줄을 아무리 기물어뜯고할퀴고 쥐어뜯어도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여전히 공공 묶여 있는 채로 허우적거린다.
그리고 이 말씀의 효력이 처음부터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말씀이 누구에 대해서나 무익하게 전파된 적은 없었다는 것을최후의 심판날에 알게 될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확실히 일반적인 적용의 말씨로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이 이 심판을 행하는 것은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능력을 언제나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이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 본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질과 그 본래의 기능에 관하여 자세히 논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이 말씀이 우리의귀에 들리자마자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갈 때, 헛되이 허공을 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잘못을 범험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셔서 그의 충만한 능력에 인간의 어떠한 부분도 접촉되지 않은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이 전체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시자마자, 우리의 모든 감각은 그의 ,말씀을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이 이헛되이 뿌려져그것이 없어지거나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고 땅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그의뜻이 아니고, 인간의 양심에 효과 있게 도전해서 인간을 그의 지배 아래로가져오는 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의 말씀에 능력을 주셨다. 즉 말씀이 |영혼의 모든 부분을 살피고 모든 생각들을 조사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식별하기 위해 자신을 심판자로서보여주셨다.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난다. 이 일이 율법에 관해서 말한 것이라고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에 관해서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도가 율법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죽음을 가져오는 것, 즉 의문이 죽인다' (고후3: 6~7)라고 말하고,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롬4 15)는 바울의 증언을 인용한다. 그러나사도는 여기에서 그것의 다른 여러가지 결과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복음으로 말미암는 죽음은 살리는 제죽임이다:그러므로 사도가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고 말할 때 우리는하나님의 가르침 전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바울은 '증언하기를(고후2 그 자신의 설교를통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내새가, 그리고 민는 자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또 어떤 자들은 멸망으로 빠뜨린다는 말씀은 결코무익한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능력이며(마18:18), 이것은 바울이 자랑하고 있는(고후10:4) 영적 .능력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약속할 때는 언제나 그 반대의 불신앙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반드시 선언하고 있다. 불신앙자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 자신들에게 죽음을 가져온다.
그리고 사도가 여기에서 또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직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온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적인 말씀은 확실히 효력이 있지만 사람의 입술을 통해서 오는 말씀은 죽은 것이요, .아무런실효도 없다는 생각은 얼빠진 생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확실히 인간의 혀에서 효력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음성 자체에 효력이있는 것도 아니며효력의 모든 것은 성령에게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역시 성령은 |전파된 말씀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통하여 밀씀하시므로 비록 그 가르침의 전달자가 인간들이라 해서 그 가르침이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하신다. 이리하여 바울은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를 때(롬1:16), '그는 자신의 설교를 이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 설교가 어떤 자들에 의해서는 인정을 받고 또어떤 자들에게는 거절당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다른 (롬10 8~10)에
서도 우리의 구원이 신앙의 교훈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때 그는 전파되고 있는 복음이 바로 그 교훈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그 교훈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존경하도록 하기 위함이다.그가 말씀은 '살았고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인간에 관해서 라는 말을 마음 속에 보충하여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것은 둘째의 형용사에 의해서 더한층 명백하게 된다. 그가 그 후에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 라고 말할 때, 어떠한 생명을 말씀이 가지고 있는가를 그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의 목적은 말씀이 우리에게 어떠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기성경은 검'이라는 비유를 다른 귀절에서도 사용하고 있지만, 사도는 단순한한 비교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가르쳐주는 일이기 때문이다.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고고", 또한 "좌우에 날선"이라고 그는 말한다.왜냐하면 당시의 검은 한쪽은 무디고 다른 한쪽으로만 베는 것이 보통이었키 때문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 이라는 명사는종종공영사과 똑같은 뜻으로 해석되지만, 두 개가 함께 합쳐져서 사용될때은 모든 마음의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으며, 영은 오성()이라고 불리어지는 능력, 또는 기능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 장 2~3절에서 그들의 영과 혼과 몸을 모두 그리스도 오실 때까지 흠없게 보전하여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만 마음과 의지에 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외부적인 행위나 활동 모두에 있어서 그들이 순수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그가 기도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똑같이 이사야서26장 9절에서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라고 말한 것은 확실히 그가 하나님을 구하기에 몹시 열중한것이고 영도 마음도 온통 그것에 쏟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것을 어떤 사람들이 다르게 설명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의견에 쉽게 동의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럼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귀절로 다시 돌아가자.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영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전체를 포괄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생각을 조사하고 인간의 뜻과 욕망을 감찰한다. 똑같은 뜻이 관절과 골수"라는 귀절 안에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인간 안에는 하나님 '말씀의 효력이 궤뚫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단단하고 견고한 것은 없으며, '그만큼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바울이 예언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판단하여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한다(고전14 : 24~25)고 말한 것은 이것을 말함이다. 그리스도의 임무는 마음 속 김이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을 폭로하여밝은 빛에 드러내는 일이므로, 그는 이 일을 대부분 복음을 통해서 행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κριτιбS(크리티코스, 심판관)이다. 왜냐하면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을 그 이전에 빠져 있던 미로에서 끌어내듯이지식의 밝은 빛 아래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불신앙만큼 깊은 암흑은 없으며,위선은 가공할 만한 방법으로 우리를 소경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암흑을 흩어버리시고 위선을 멀리 내동댕이친다. 여기에서 사도가 언급하고있는 식별과 판단이 나타나고 있다. 거짓스러운 덕의 외견 밑에 숨어 있던악덕이 이제는 밝혀지기 시작하여 그 회칠한 무덤의 가면이 벗겨졌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이 잠시 동안은 그들의 은신처에 숨어 있더라도 필경 말씀의 빛은 그곳까지 꿰뚫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을면할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될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그들의 불평과 그들의 분노가 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말씀에 의해서 충격을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광기가 노출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말씀을 멸시하였으므로 변명이나 구실을 붙여서 말씀의 능력을 피하려 하고또 못 들은 척 행동하려고 하였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렇게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중상하고욕지거리를 할 때마저도 그 말씀을 싫어하고 저항하면서 그 자신들 안에 말씀의 능력을 느끼고 있다고 시인한다.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 여기서 사용되는 없고 라는 다음에 계속되는 접속사는 나의 생각으로는 원인 불변사 (causal particle)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인간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는 진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본성으로부터 증거를 인출하고 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하나님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으로 끌어낼 수 없을 정도의깊은 곳에나님을대상숨겨져 있을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신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시므로 자신의 말씀에 의하여 이 연구 조사를 수행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긴 장대와도 같은 것으로 이 장대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 속에 숨겨진 것을 확인하고 손을 대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귀절 전체를 몹시 곡해해서 거기에서 전혀: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곤란을 다음과 같이 논증함으로써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일편단심 진실한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가장 깊이 숨겨진 생각들에까지 꿰뚫고 들어가는 임무를 그의 말씀에 주셨기 때문이다. 많은 주석가들에게 해석상의 혼란을 일으킨 것은πp∂S &ημED]16ros(프. 혼 헤민 호 :로고스)우리를 상관하시는 자 나라는 분명치 않은 귀절이다. 그들은 이 문구를' 우리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자 (to whomwe speak)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구는 오히려 우리가 상관하고있는 자'(with whom we are (concerned-한글 개역 성경)라고 번역되어야할 것이다. 이 귀절의 의미는 이러하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또는 우리가상관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간들을 대하듯 경솔하게 그를 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제기되었을 때 우리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앞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숨겨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 이제까지 저자는리스도의 사도직에 관해서 언급해 왔는데,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제 2의 임무로 전환해서 논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l오셨을 때 그는교사 의 직분과 제사장의 지분두 가지 직분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즉 [이다. 그래서 저자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권면한 것이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지분이가져온 은혜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이제부터 다루고자 하는 논지는 두 개 부분 중의 두번째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양자의 목적이 우리를 모두 하나님에게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사도 직분을 아주 적절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저자가 '그러므로 라는 유추적인 문구를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제사장이라는 논지에 대해서 그가 앞에서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장직의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해서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므로, 저자는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준비하게 하기 위하여 이 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교사로서 인정하고 기꺼이 따르는제자로서 그에게 헌신하려는 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또는 그의학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어떠한 효용을 가지고 있으며, 제사장 직분의 활용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 남아 있다. 먼저저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말로 시작하고 있으로 사용되고 있이바지하지 않으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는*다. 이 고백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앙의 뜻인 환유법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그의 가르침을 확증하는 데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확증하고 비준하여 주산 복음에대한 신앙을 의심하거나 또는 흔들리거나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사도는 결론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그에게서 제사장으로서의 영예를 탈취해 버리는 일이 된다. 이러한 종류, 이러한 정도의 훌륭한 담보는 우리에게신뢰를 증대시켜 주고 우리가 거리낌없이 복음을 믿도록 인도한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훌하지 아니하는 자가아니요?~~~~~" ; 저자가 말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에는 본래 위엄이 갖추어져있어서 우리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위엄밖에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계속 편안하지 못할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면전에서 특히 우리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자신의 죄를 기억하게 될때,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있을까?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하나의 장애가 있게 될것이다. 그들은 레위의 제사장 직분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제사장 직분에서는 한 사람의 보통 인간이 모든 다른 사람들 중에서 택함을받아서 지성소에 들어가 기도를 드림으로써 형제들을 하나님에게 화해시키는 직분이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중보자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만일 사도가 이와 같은 레위의 제사장 직분에 대처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영광에 있어서 우월할 뿐만아니라, 우리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호의와 친절과 부드러움으로 대하신다는것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레위의 제사장 직분을 언제까지나 고집하는 유혹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체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시험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 직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σνμπ&θια(쉽파데이아체홀, 동정)라는 단어에 관해서는 너무 엄밀히 논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와 같은 슬픔을 당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은 호기심이 많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익한 질문이다. 사도는 물론 그러한 복잡한 질문과 한가한 공론을 가지고 우리를 피곤케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일을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그 손을 우리에게 펼쳐주심으로 우리는 엉뚱하게 먼 곳에서 중보자를 구할 필요가 없고, 또 그는 우리의 형제이므로 우리는 그의 위엄을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연약함을 그 자신이 입으신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더한층 우리를 잘 보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불행을알지 못하며 우리를 돕기 위한 어떠한 인간적 감정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도가 지적하는 전체적인 취지는 신앙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그 자체에 있어서 논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결같이 라는 말을 우리의 본성과 한결같다는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말로 보아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과 우리의 감정으로 옷입으셨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경험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아서 우리의 불행을 도와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러한 교육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렇게 해야만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가지시는 배려를 우리가 이해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 아래 고통을 받고 허덕일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도 똑같은 고통을 결경험하셨다는 것을 우리마음 속에 명심하자.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며, 그러한 고통에 의하여 우리가 압도되지 않기 위함이다.
연약함 이라는 말에 대하여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여러가지의 뜻으로 해석될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기타 육체적 곤궁이라고해석하거나 어떤 사람들은 모욕, 빈곤 및 기타 그런 종류라고 해석하고 있다. 바울이 여러 귀절에서 특히 고린도 후서 12장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의견은 이러한 외적 비참과 함께 두려움과 슬픔과 죽음의 공포 등과 같은 마음의 감정들을 포함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이다. 확실히 죄는 없으시니라 고 하는 한정문()은 만일 그가 우리의 감정에 관해서 발하고 있지 않았다면 불필요하게덧붙인 말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감정은 우리 안에있어서 언제나 사악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일체의 죄악이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는 최고의 의와 절대적인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빈곤과 죽음과 및 이러한 외부적인 고통들을죄 가운데 포함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저자가 죄와 관련 있는 연약함에관해서 말할 때 마음의 여러가지 감정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그 연약함 때문에 그러한 마음의 여러가지 감정들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천사들의 조건은 슬픔이 없다는 점,두려움이 없다는 점, 또 온갖 종류의 염려에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의 상태보다 우월하다.그리스도는 이러한 연약함들을 스스로 자신이 걸머지시고 그것들과 싸우려고 하셨다. 그것은 다만 우리를 위해 연약함을 이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우리가 연약함에 의하여 시험을 받을 때마다 그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이 되셨을 뿐만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의 특성들을 취하셨다.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는 한정구문()이 부가된 까닭은 그리스도의 감정과 우리의 구감정을 언제나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그것은 언제나 정의의 엄격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한편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혼란된 근원에서 홀러나와서 고질적인 본성의 냄새를 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몹시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이다.
"16. 그러므로 우리가~~~~~~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저자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의 앞에 오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도달하는 길이 열려 있다고 결론한다. 또 그는 신자들에게 주저하지 말고담대하게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오라고 격려하고 있다. 온전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영적인 가르침의 주된 결실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이 확신이 인간의 양심에서 제거될때, 종교는 완전히 결과피되고멸망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일로부터 쉽사리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교황주의 동안에서는 복음의 빛이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제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긍훌과 은혜를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적대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을 갖게 되며, 비참한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명령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은Z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은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거기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출입문은 빗장이 질러져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과연 이론상으로는 i그리스도가중보자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효력을파괴하고 그리스도에게서 그 명예를 탈취해 버린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는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제거되지 않는 한한(그들의!'그리스도는:진실로 중보자 로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이 원리가 확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진해서 '우리를 도우려하시는 대제사장을모시고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히, 그리고 :아무런^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결론은 별 '효력이' '없을 것이다.음반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그 손을 우리에게 뻗쳐 주신다는 것을 제대로 지납득한다면 누가 그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을가? 그러므로 내가 말한 것은 진실이다.
즉 사람들이 거주저하고 마차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이리저리 다른 그리스도를 찾아 헤매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효력을 빼앗는 결과가보도된다.그의 보호에 의하여 그에게 의지하는 자는 .누구나 모두(사도가여기에서 말하고있는 바와 같이) 기도가 상달됨을 확실히 안다. 이 확신의 기초는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를 -압도하는 [적나라한 위엄으로특징지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새로운영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대면을 회피할 때는 언제나 기억해야할 칭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그의¡보좌에 돌린다면 이 영광은 우리를 결코 절망으로 채울 수는 없다. 그만큼 하나님의 보좌는 가공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심이 부족함을 고치고 우리의 마음을 모든 두려움과 소란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사도는보좌를 은혜로 옷입히고, 그의 온화하심으로 우리를 격려하신다고 말하고있다. 그것은 그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에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의 가차를 높이 세우셔서 기치를 하나님의 위엄이 우리를 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방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는 것이다.
이 전체의 뜻을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당히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할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베소서 3장 12절에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자비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믿음을 보아서 제자 신분 안에 받아들일 때,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은혜로감싸주시므로(그렇지 않으면 이 위엄은 가공할 만한 것이 될수 있다) 그의은혜와 자비만이 나타나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긍률하심을 받고*****이 말을 덧붙인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확고한 신앙을 확신시키고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의 불행을 느끼는 감정에 내리눌려서 그 결과 그 자신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길을 막아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긍훌하심을 받기 위하여 라는 이 귀절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즉, 그리스도를 옹호하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확실히 자비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이 길을 가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경고하고 그들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꼼짝도 하시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사도는 '때를 따라 우리를 돕기 위하여 라고 부언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얻으려거든 이라는 단서를 붙인 말이다. 이 때라 함은 우리의 소명의 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며, 바울이 복음의 선교에 적용하고 있는(고후6: 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는 말은 이사야서(49:8)의 귀절에서 따른 것이다. 사도는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그 오늘에 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를 내일로 연기한다면 한밤중이 되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미 닫혀진 문을 무익하게 두드릴 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