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6:6)

1. 성경 (히6:1 ~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1)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2)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3)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4)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5)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7)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9)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0)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1)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3)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4)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5)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6)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7)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19)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2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므로 아우리가!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사도는 그의 책망에 더하여 초보를 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라는 이 권고를 첨부한다 '초보' 라는 말은 초심자가 교회에 받아들여질 때 그에게 주어지는 첫 입문적 훈련을 의미하고 있다. 저자가 그러한 입문의 초보적 문제들을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은 신자들이 잊어버려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은 가능한한 잠간동안 그 단계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뒤에 계속되는 "터" 라는 직유에 의하여 더 한층 명백하게 이해될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우리는 결코 터(기초)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터를 놓는 데 많은 시간을 다 허비하는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터를 닦는 그것은 대건축을 하기 위한 것인데, 언제까지나 그 터를 닦는 데에만 시간을 허비하고 상층 구조를 건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고 쓸데없는 수고로 오직 자신을 피곤케 할 뿐이다.

 

요컨대 건축사의 일은 터를 닦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그것은 바로 그의 위에 집을 짓는 단계로 진행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의 교리에 있어서도 똑같다.  우리는 가초를 배워서 우리의 터를 닦았다. 그러나 건물을 완성하는 더 한층

가르침이 바로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초보에만 머물러 있는 자들은 어리석게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명확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모든 수고를 터를 닦는 데에만 소비하고 집을 짓는 데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건축가와도 같다. 그러므로 저자가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원하는 바는 우리의 신앙이 처음의 견고한 터 위에 세워져서 결국 나날이 성장함으로써 그 완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교리문답의 관례적인 의식과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서간은 초기의 복음 선교 직후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어떤 형태의 제도가 이미 확립되어 있을 때라는 추론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 제도라 함은 세례 지원자는 세례가 허락되기 전에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사가 세례 지원자에게 질문하는 어떤 기본적인 문제들이 있었다는 것은 고대 교부들의 여러 증언들에 의하여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시문은 주로 사도신경으로 알려져 있는 신앙고백의 의식에 준해서 행하여졌다. 이것은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신앙에 대해서 이방인들이었으나 성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교회에 들어가는 첫째 관문이었다. 마치 교사가 아이들에게 A, B, C를 가르치는 것은, 그가 그들을 좀더 차원이 높은곳으로 이끌어올리기 위함인 것처럼 사도는 여기에서 세례 지원자들에게 신앙교리의 기초원리를 가르치는 데 잠간 동안 시간이 주어졌던 관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생각하여 보자.

 

사도는 복음 전체의 기초가 되어 있는 두 가지의 완성, 즉 신앙과  회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부여한 명령은 신앙과 회개를 전파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원했을 때, 그는 이 두가지 일들을 가르치는 데 고심하고 노력하였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우리가 일생 동안에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할 회개와 신앙을 버리라고 사도가 여기에서 요구하는 것은 언뜻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죽은 행실을"이라고 덧붙여 말함으로써 그는 처음 회개의 행위에 관해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죄는 죽음을 낳거나 영혼의 영적 죽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어서 모든 죄는 죽은 행실이 되지만 하나님의 영적 생명으로 인하여 거듭난 신자들이 죽은 행실로부터 회개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분명히 거듭난다 함은 아직 그들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그들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씨가 아무리 연약하고 어리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는 간주되지 않는다는 효용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가 일생동안 적극적으로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할 모든 회개를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최근에 그리고 지금 처음으로 신앙에 갓 들어온 사람들 즉, 새 생활을 시작한이들만 처음 회개를 가진다는 뜻이다. 이와 똑같이 '신앙'이라는 말은 보통 '신앙개조'라고 불리어지는 신앙교리를 간략하게 요약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2. 세례들과~~~~~~교훈의~~~~~"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따로 따로 읽어서 '세례들에 관한', 그리고 '교훈에 관한'이라고 한다.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설명이긴 하지만) 그것들을 합쳐서 '세례들의 교훈에 관한' 이라고 읽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법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말들은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세례와 안수의 교교훈이기도 한) 회개, 하나님께 대한 신앙,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해서는 다시 터를닦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만일 '세례들의 교훈에 관한' 과  '안수에 관한' 이라는 이 두개의 귀절들을 괄호 안에 넣었다면 문맥은 좀 더 잘 통하였을 것이다. 만일 이런 동격의 방식으로 읽지 않는다면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불합리가 생기게 된다. 세례의 교훈이라 함은 여기에서 재검토되어 있는 것,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 회개, 심판 등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크리소스톰의 생각으로는 세례들 이라고 복수로 사용하는 이유를, 처음 세례를 받은 자들이 처음의 세례를 폐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지만, 나는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교훈은 세례들이 여러개 있었다는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세례들' 이라는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엄숙한 의식들 혹은 세례의 준비를 위한 문답식들이 의미되어 있다. 그는  '안수'를세례에 연결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세례 지원자들에게 두 개의 단계가 있으므로 의식도 두 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인이었던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하기 전에는 세례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이 보통 세례에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의 자녀들은 유아기에 세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신자들의 자녀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되었으며, 약속의 권리에 의하여 교회의 몸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아기가 끝나고 신앙에 대해서 교육을 받으면 그들도 요리문답을 받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요리문답 교육은 세례이후에 행하여진 셈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안수례라는 또 하나의 다른 의식이 부가되었다.

 

이 귀절 하나만으로도 이 의식이 사도들에게서 기원했다는 증거는 확실하다. 그런데 이 의식도 후에 미신이 되어버렸다.  세상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가장 좋은 제도들을 가지고도 퇴보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이것이 '성례전'이며 성례전에 의하여 갱생의 영이 부여된다는 이야기들을 꾸며냈다. 이 발명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세례를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세례 의식의 고유한 것을 그들은 안수로 바꿔버렸다. 이 의식은 실로 어거스틴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엄숙한 기도의 의식이 되었다. 이 의식을 고안한 자들의 표시는 그 의도가 청년기의 사람들이 유년기를 자나서 대행하는 신앙고백을 견고케 하려는 것이었으나 그들은 결국 세례의 능력을 파괴하는 일을 마련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이 제도를 순수한 상태로 보존해야 하지만, 또한 그 미신도 고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 귀절은 또한 유아 세례를 인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왜 똑똑같은 가르침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례라고 불리어지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수라고 불리어져야 했을까 ?  그 이유는 유아세례의 경우에 세례 받은 후 신앙 안에서 교육을 받게 되므로 앞으로는 그들에게 손을 얹는 일 (안수)만 남아 있게되기 때문이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라는 귀절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두 가지는 천국 지혜의 가장 위대한 비밀들 중에 속하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신앙 목표이다. 그러나 똑같은 진리라도 교육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런방식으로, 그리고 좀 깨달은 자들에게는 저런 방식으로 가르치므로 사도는 '너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느냐?'  '너는 영원한 생명을 믿느냐?'  라는 질문을 보통 형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나 적절하게 어울리는 것이며, 더구나 오직 한 번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에게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단적으로 퇴보를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다음에는 .공공연하게 무서운 비난이 따른다. 그러나 .사도는 유대인들이 지나치게 태만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기는 일이없도록 이와같은 맹렬한 비난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도가 내일로 연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발전할 기회가 언제나 있는것이다. 아니잖는가?  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이 종종 원하는 대로.출발점에서 결승점까지 단숨에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다. 우리가 행로를 완전히 주파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인 것이다.

 

"4~5. 한번 비침을 얻고~~~~~능력을 맛보고" ; 이 귀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서신을 거절하는 계기를 주었다. 특히 노바티아누스(Novatian)파의사람들은 이 귀절에서 타락한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부인하기 위해 탄약을 장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구 교회의 교부들은 노바티아누스파가 그들의 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노바티아누스 파의 논지를 거절하기에 충분할 만큼을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였므로 이 서신은 순수성을 부인하는 편을 택하였다. 그러나 사도의 생각이 일단 알려진 이상 그런 우스팡스러운 잘못을 지지하는 것은 여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곧 아주 명백히 될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서신의 권위가 신성 불가침의 것이라 하여 불합리성을 거절하고 허무맹랑한 말들로 불합리성을 말하려 하고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 수 없나니" 라는 말이 '보통이 아닌'  또는 '어려운'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은 말의 원뜻으로부터는거리가 매우 멀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회개에만 국한시키는데 이 회개로 말미암아 '세례 지원자'들은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세례를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치 사도들이 세례를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금식이나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을 명령하였던 바와 같다. 그러나 사도는 세례의 부산물인 회개가 반복될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어떠한 위대한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한 번 받은 후에 그것을 버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복수를 선언하고 있다.  만일 그가 그들의 처음 회개에 대해서 그것을 되풀이할 더 이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이 선언은 부주의한 자들이나 마음이 요동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데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질것인가?이 일은 모든 종류의 범죄에 적용될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긍구의 소망을 주시므로 적어도 어떤 사람이 어떠한 이유에서든간에 제외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이 문제의 중심은 "타락한 자들은" 이라는 문구안에 있다.  누구든지 이귀절들의 힘을 이해하는 자는 모든 어려움들로부터 쉽게 탈출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중의 타락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하나는 특수한 타락이고 또 하나는 일반적인 타락이다. 그러나 특수한 방법으로 범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들은 그와 같은 타락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에서 도적질, 또는 거짓 증거, 또는 살인, 또는 술취함이나 간음 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즉  죄인이, 다만, .하나님께 부분적으로 범죄한 타락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를 완전히 저버린 타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더 한층 명백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 타락과 그가 말한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비교해야 한다. 타락한 사람이라 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그 빛을 가리우고 하늘의 은사를 맛 보기를 거절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소망과 용서로부터 제외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전에 자신들이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난 배교자들이다. 이런 일은 성령에 대해서 범죄하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십계명의 제 2계명을 범하는 자, 또는. 무지로 인하여 제 1계명을 위반하는 자는 이 반역의 죄에는 아직 범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도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아버릴 수가 없다.  한 번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거기에서 떠난 배교자들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

 

만일 누군가가 질문하기를 사도는 그런한 사악한 변절과는 아주 거리가 먼 신자들에게 편지하여 말하고 있는데, 왜 여기에서 이런 종류의 배교에 대해서 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도는 그들이 그러한 배교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미리 위험을 제시하고 그들을 경고하는 것이라 고 대답하겠다.  이것은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서 다 이탈하게 될 때남에게 대해서 자신의 악을 변명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을 속여 그 악을 우리 자신에게로 부과하게 된다.  사단은 몰래 우리에게 살며시 다가와서 우리를 음흉하게 숨겨 두었던 간계로 차츰 차츰 우리를 유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길을 잃고 있으면서도 잘못된 길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차츰 차츰 미끄러져 내려가서 나중에는 곤두박질하고 만다.  이것은 흔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신자들 전부에 대해서 미리 주의하도록 경고하고 있음은 이유.없다고 할 일이 아니다. 오래 계속되는 태만은 자칫 무기력 상태가 되고 그 후는 정신 착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이 계제에 사도가 복음의 지식을 표현하고 있는 용어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는 이것을 "비췸을 얻는 일"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을 비추시기까지는 소경이라는 말이 된다. 사도는 그것을 "하늘의 은사를 맛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의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자연 세계에서 맛볼 수 있음을 얻는 것 이상의 맛이 있다고 하며 그것은 신앙의 사람들만 의미한다. 사도는 그것을 "성령에 참예하는 일"이라고 부른다. 각 사람에게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가 가지고 계시는 빛과 지식을 모두 주시는 이는 성령이시며,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12 3)' 성령은 우리 마음의 눈을 열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하신다. 그것을 사도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는 일"이라고한다.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우리를 감미롭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서 그 밖의 어떤 종류의 방법으로도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표현은 역시 율법과 복음과의 사이의 차이를 보여준다. 율법은 위엄과 심판만을 포함하지만 복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다하는 만족스러운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그것을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일" 이라고 부른다. 이로 말미암아 사도가 지적하는 감각들에 대하여 숨어있는 저 복된 불멸의  생명을 우리가 성령에 의지함으로 얻게 되고, 신앙에 의지함으로 하늘의 문을 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정당하게 알려질 수 없음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그 은혜를 앎으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서 하늘로 올려지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위에 안식하는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한 번 도달한 사람이 그 후에 타락한다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일어난다. 주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효과적으로 부르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어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그의 성령에 참예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신 확실한 보증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은 치명적인 타락의 위험이 면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맡기신 이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신 분이시므로 그는 택한 자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시겠다(요17: 12)는 약속을 지키셨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즉, 확실히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중생의 영을 부어주시며 택함받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서 버림을 받은 자들과는 구별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다시 만들어지고 장차 상속의 소망을 가지고 성령의 보증을 받으며 똑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복음이 그들의 마음 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맛보도록 거절하였다는 이유에서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하나님의 빚의 조명이 미미하다는 이유에서 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서, 또는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새겨넣었다고 해서 그들이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마가복음 4장 17절에서 언급하는 일시적인 신앙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 안에도 얼마간의 지식은 있는 것이지만 마땅히 필요한 만큼의 깊은 뿌리를 박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그들의 지식은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나중에는 소멸되어 버린다.

 

이 통제 수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움과 겸손 안에 붙들어 놓으신다. 그리고 만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부주의와 어리석은 맹신에 빠지기 쉬운가 하는 것을 우리는 명백히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관심이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일시에,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격려하시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계속 평온한 가운데 머물고, 마치 안전한 항구 안에 정박하고 있는 듯 평온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을 여러가지 시험으로 연단하시며 우리를 태만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6. 타락한~~~~새롭게 하여 회개케" ;  이 일이 아무리 엄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자신의 배반에 대한 형벌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가혹하심을 탄핵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겔18:27)는 성경 귀절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회개가 요구되고 있는데 한번 복음에서 곤두박질하듯 떨어져나간 자는 참으로 회개의  감동을을 받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회개가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성령을 박탈당하고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자가 되어버리게 되고,  그 결과는 마귀에게 넘겨져서 멸망을 대향하여 계속 돌진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죄에 죄를 계속 더하고 멍청이가 되어서 하나님을 가소롭게 여기거나 혹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처럼 미친듯이 증오하며,  하나님을 욕하게 된다. 배신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결말에 이른다. 즉, 그들의 둔감이 아무것도 두려워하거나 혹은 피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하기도 한다.

 

요컨대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회개라는 것은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익한 경고이다. 하루 하루를 연기함으로써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하기 위함이다. 사악한 자들은 그들의 .임종 시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의 사악한 생애를 회개하면 그것으로써 .충분한 줄 알고 떠벌임으로써 그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그들은 무서운 양심의 고통을 맛 봄으로 인간의 개심이라는 것이 이만 저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그의 약속을 거부하거나 멸시함으로써 그들의 강퍅함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모조리 멸망한다 해도 그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 타락으로부터 돌이켜서 다시 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다른 점에서 중대한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절대로 하나님의 반역죄가 아닌 이상 가 그를 정죄할 수 없다는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  사도는 사람들의 공격에 대해서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 말을 첨부하고 있다. 하나님이 반역자들을 용서함으로써 그 아들을 조소거리가 되게 방치 해 두신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랍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고 사도가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새 생명에 들어간다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제10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다시 죽는다는것은 두번째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하는 말은 그들의 타락성이 그들 안에 있는 한이라는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반역을 한 후에 아무 때나 자유로이 하나님께로 돌아갈수 있다면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개선 행진 속에 끌려가는 포로와도 같은 존재가 될것이기 때문이다.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 이것은 정당한 성장을 하려는 열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아주 적절한 :비유이다.  마치 땅에 종자가 뿌려지자마자 얼마 안가서 곧, 싹이 돋지 않으면 수확 때에 땅이 좋은 곡식을 산출할 수가 없듯이, 만일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고자 원한다면 주께서 그 말씀을 뿌리자마자 곧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게 하며지체함이 없이 곧, 싹이 트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 씨가 눌러서 싹이 나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 씨가 썩어버린다면 열매 맺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비유가 아주 적절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주의깊게 사도의 의도하는 바에 적용해 보기로 하겠다.

 

그는 말하기를 씨가 뿌려진 후에 즉시 빗물을 빨아들인 땅은 든든한 줄기를 내어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풍요한 수확을 가져다 준다. 이와 똑같이 마음 속에 복음의 씨를 받아 그 씨로부터 어린 새싹을 산출해 내는 자들은 계속 성장을 거듭하여 마침내는 잘 익은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한편 땅을 갈고 물을 댄 후에 가시덤불이나 엉겅퀴밖에 내지 않는 땅은 수확의 소망이란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산출되는 것이 성장하면 할수록 더한층 땅은 점점 더  절망적인 박토가 된다. 이것의 유일한 해결책은 농부가 해롭고 무용한 .잡초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일뿐이다.  똑같이 무관심이나 타락된 탐욕으로 인하여 복음의 씨를 썩어져버리게 함으로써 일생동안 아무런 좋은 성장이나 진보의 기미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은 충성되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수확도 찾아볼 수 없다.

 

사도는 여기에서 오직 복음의 열매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또한 우리가 신속하며 민첩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권고를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는 씨가 뿌려진 후에 곧, 잎이 싹트지 않으면 안되며 더우기 매일 물을 주어서 성장이 촉진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보타넨 유데톤' 이라는 헬라어를 어떤 사람들은 '시절에 맞는 채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적합한 채소' 라고 번역한다. .양쪽의 뜻이 모두 문맥에 적합하다. 앞의 번역은 계절에 관한 언급이며 뒤의 번역은 그 성질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기타의 주석가들이 여기에서 즐겨쓰는 우의적 의미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저자의 의도와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9. 사랑하는 자들아~~~~~너희에게는~~~~~확신하노라." :  지금까지의 문장들이 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을 만큼 벼락치는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격렬함은 완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제 저자는 그가 격렬하게 말한 것은 독자들에 그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확실히 누구든지 좋은 선생이 되고자 원한다면 그 제자들을 낙심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그들의 용기를 복돋아주는 방법으로그들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소망 없는 자로 간주되고 있음을 안다는 것보다 더 우리가 교훈을 듣는 데 용기를 저해하는 것은 없다.  사도는 그가 유대인들에게 이 경고를 하는 것은 그가 그들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함이라고 언명한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신랄하게 그리고 극히 엄격하게 꾸지람을 받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 뿐만아니라 택함을 받은자들,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간주되는 바로 그런 사람들조차도 책망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결론한다: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이 말은 사실상 저자가 시작이 좋았으므로 좋은 결말을 기대한다' 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의 .난점이 제기된다.  즉, 그 난점이라 함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의무들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너희 구원을 확신하노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행위를 잊어버리실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도의 이 말씀은은 사도가 그들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기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채무자인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궤변가들도 행위의 공덕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비시켜서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는 이 문장에 큰 강조를 두고있다. 이 일에서부터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행위에 대해서 영원한 구원이라는 보수로 갚아주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을 부정하실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에 대한 나의 간단한 대답은 이러하다. 즉 여기에서 사도는우리의:원의 이유에 관해서 명백히 언급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커철로부터 [행위의공적을 추론해서도 안되고, 또 행위에 대해서 지불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이 말씀으로부터 결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 이외에는다른 아무 구원의 원천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는 소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하나님이 여기저기에서 행위에 대한 보상을 제약속하는 l자실은 우리를그자녀들로 삼으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부과하시지 않고 우리를 그 자신에게 화해시키신다는 무상의 약속에=의한)것이다. 행위에 대한'보상은공적을 통해서가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제공된다.그리고 이 행위의 절대적인 인정조차도 그리스도의|자비를 통해서 우리가드은혜 :안에: 받아들여진 후가 아니면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한다. 즉 하나님께서는;지신:우리에게 갚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는 이미 자기가[약속하신 약속을 지키고 계시며 그뿐만 니라 :우리와: 우리의: 행위를 용서하심으로써그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다. 이리하여』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놓치지 않으진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 :안에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를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가 이해하고 있는 의로우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을 부인하시지않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바울이 너희 ,속에 착한 일을.시작하신.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 6)고, 말하는' 곳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하시는 것 외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0무엇을] 찾으시려고 .하겠는가?

 

요컨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우리[행위의 지 사이에!어떤 상호 관련이있다고 몽상하는 궤변가들은 잘못 사용이해하고[있다.사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이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이 '우리의 이유익이나'의무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하여 '끝까지「수행하도록{ 자신의'은사를 고려하신다. 나는 되풀이 해서 .말하거니와 행위에 '대하여:i보상하시는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이. 성실하시고{진실하시다는 차실에 있다. 하나님께서[우리에게 빗진자가 '되친{것은{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서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어거스틴이 말한것처럼 만물을 |우리에게 |완전히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 ; 문자 그대로 '말하자면' '사랑의 수고를 가리킨다. 이 사랑의 수고라는 o말로 사도가 의미하는 그것은즉 (우리가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의무를 다하고자 원한다면 『우리는 .아껴저는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충고와 여러가지 노력의 방법으로 돕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이 수고를 짚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대단한 열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되며, ,많은 ,분노를참아야 하고, 때로는 수많은 위험에 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구든지 사랑의 의무를 감당하고자위하는 사람은 수고스러운 인생길을 각오해야 한다. 사도는 유대인들이 "이미 성도를 섬긴-것과-이제도』설기는" 사실에 있어.그들의 사랑의서 증거를 발견한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들에게 대한, 봉사를거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그가 -명백히 성도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오직 그들에아니다. 

 

우리의 사랑작은 명백히 인류대해서만 빚진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κ것은전체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음근러나 믿음의 권속들을 특별히 우리에게 권고하시므로 우리는 특별히 그들에게마음을 써야 한다. 선을 행하도록 감동을 받을 때, 한편 사랑은 하나님에대한 경의에서, 또는 우리의 공통적인 성질에 대한 경의에서 발동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그 사람은 우리가 도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형제의 사랑으로 둘러싸여져야 한다. 이미 성도를내심을 찬양선을 행할 때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의인 향향다. 이 인내심은 사랑의 행위에 가장 필요한 덕이다. 남에게싫증나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형제나 이웃들을 기꺼이 돕는 사람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불변하는 미덕은 극히 보기 드문 미덕이며, 그들은 대부분. 마치 그들의 :열의가능식어버리기나 한 것처럼 열심을 곧 잃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디의 말이 우리에게 영속적인- 격려를 ;주게 될것이다: {사도는 성도들에게대해서보여준 사랑은 주님의 이름에 :보여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일로,말미암아 사도는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선물소선물로 받아들이신다고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작은 자인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 또한 "가난한 여자를 불쌍희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구이는 것이니(잠19 :17) 등의 『귀절과 같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  사도는 '독자들의 마음을 너무 자극하지 않으려고 훈계 속에 칭찬을 섞었으므로 그의 공손한 말씨가 어떤 겉치레처럼 들려서는 안되겠기에 이제 그는 아직도 결핍되어 '있는 면에 대해서 그들에게 솔직한 경고를 한다.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는 많은 증거와 확증으로사랑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이제 너희에게는 신앙이 사랑에 일치해야 한다는 조건이 남아 있다. 너희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신앙이 진보하도록 적지않은 열심을 가지고 전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확고부동한 신앙의 확신을 갖기위함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기독교 신앙은 율법의 두 돌판에 대응하는 두 개의 부분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두 개를 따로분리해서 논하는 사람은 누구나 두동강이난 단편밖에는 가지고 있지 못한다. 이 일로부터 신앙의 어떤 언급을 생략하고서 사람들에게 오직 정직함과성실성만을 역설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종류의 교사들인가 하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이것이 외면적 정의라는 가면 밑에 잠복해 있는 이단적인 철학이라고 주장하겠다. 실로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의 철학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 철학은 교의를 잘못 개작함으로써 ˙그보다 우위의 철학을 가지신 하나님께 도전하고 그 권리를 박탈하려 한다. 그러므로우리가 노력의 방향을 신앙과 사랑의 양쪽으로 돌릴 때만 오직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기독교 신앙을 표명한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의견들에 미혹되거나 또는 여러가지 대형태의 미신들에게 아직도 얽매여 있기때문에 시사도는 그들에게 확실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더 이상 동요하거나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고 여러가지 [풍조나 의심 앞에 이리저리 '움직이는일이 없도록 하라고 권고한다. 이 충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충고이다.하나님의 진리가 움직이지 않는 견고한 것인만큼 똑같이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신앙은(만일 그 신앙이 진실한 것이기만 하다면), 확실한 것이며 모든 의심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면 안된다. 이것은 헬라어로 πinpoopoiα(플레로포리아)라고 하는데, 즉 '의심없는 확신 이라는 뜻이다. 이 '의심없는 확신 으로 말미암아 신앙심이 깊은 마음은 속이거나 거짓말을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을 품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결심한다.

 

소망 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신앙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두 말은 서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오래 참는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같이 '보인다음이 일로부터 불신자들과 마귀들에게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부류의 이해가 얼마나신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우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결론할 수 있다.그들도또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진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신앙으로부터 아무런 좋은 소망도 유도해 내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도는 끝까지 이르기까지 라고 말한다. 그들이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나 더한층 진보할것을 생각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게으름에 주저앉아서는 안되며 참으로[진지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5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부지런을 이라고 말한다. 의하늘 위에 오른다는 것은 쉬운수일이 아니므로 특히 땅 위를 겨우 기어다닐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길에는 무수한 고장애물들이 있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내리누르고, 사단은그 무수한 채략들을 가지고 :우리를 '땅으로 끌어내리므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어 올린다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이유들때문에 사도는 영적인 게으름이나 약함을 경계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12.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사도는 "본받는 자 되게라는 이 말을 "게으르지 아니하고"라는 도말에대비시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우리는 참을성 있는 j열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상들은 오직 불굴의 신앙을 견지하고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사도가 우리에게 기억시킬 때,이것은 훨씬더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실례들은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만일 모든 교훈을 일일이 .나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브라함이라는 인격 안에서 실제로 성취하신 것을 우리가 심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아브라함의 실례를 든 것은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실례보다도 더한층 탁월한 실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신앙에 있어서는 모든 성도들과 공통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은 당연한 보상이었다.그러므로 사도는 자신이 신앙의 선명한 거울을 제시하고자 할 때 그들 가운데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사도는 독자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주목하게 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믿음과 오래 참음이라는 말은 언제나 변함 없는 참을성 있는」신앙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된 말이다. 즉 오래 참음 과 결합되어 .있는 신앙을 말하며, 신앙은 첫째 요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참으로 굉장한신앙을 보이지만 얼마 ,안가서는 곧 게을러지기 때문에 :오래? 참음은 구준하고 변함없는 신앙의 진정한 증거이다: "믿음과,오래{참음으로0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보상 관념을 제거해 버린다.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기업으로 받았다고 말할 때 무더한층 명백하게 되므로 우리는 양자권에 의하여서만 오직 상속자들이 된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  우리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받고서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약속을 참을성 있게 길러 나가지않는다면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은혜는 헛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저자의 목적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자손을 약속하였을 때 그 일은 믿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고 논증함으로써 헛현 것이라고 한다. 즉 사라는 그 일생 동안 수태하지 못하는 몸이었고 두 사람 모두 노쇠한 고령에 도달해 있었다. 그들은 부부의 :잠자리보다는 죽음이 가까왔고 전혀 자녀를 갖게 될수도 없었으며, '사라의0태는 일찍부터Ζ닫혀 있었다. 이 두 사람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백성이 나오리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1이것은 완전히「이치에 보맞지 않는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 '일을 기대하였고, 하나님께서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실망 따위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사도의'논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시간적 사정에 유의하지 않으 ,면 안된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기다림으로써 이 축복의참여자가 되었다는 것이 다음에 계속되는윤말의 [요점이]된다. 「하나님께서는'우리가 감각으로 느끼도록 하시지 않고 소숨겨두신 우리의 '참을성을 단련하도록 오랫동안 연기하시고 계신 것을 묵묵히 기다리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는가를 우리는 잠깐 고찰해 보기로 하자.

 

"14.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  이 맹세의 .형식은 이미 제 3장에서 설명되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서는 명백히도사용되지 않지만 이것을 보충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행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진실하시지 못한 자로 인식되기[때문이다.

 

"16. 사람들은~~~~~"  ;  저자는 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보다 큰 것으로 나아가끌어낸다면서 논술하고 있다. 만일 인간이 보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고 해서(그 본성이 거짓말장이인) 인간의 맹세에 신뢰가 주어진다면 영원한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실 때는 얼마나 더 큰 신뢰를받아야 마땅하겠는가?. 그런데 그는 이 글을 다소 길게 늘여 꾸미고 있다.첫째 그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도맹세하나니"라고 말하는데, 즉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정당한 권위가 없으므로 그 권위를 어떤 다른 곳에서 빌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맹세에 .대해서는 큰 존경이 돌아가야 하므로 [그것은 충분한 확인이요,]또한 인간적인 증언이나 기타의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는 곳에서 여러가지다투는 일에 최후의 확정을 내린다고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1사람들앞에 증인으로 채택된 사람은 충분한 증거를 할 수 없단 말인가 ? .만약 그의 권위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모든 의심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때는 자신이 .말한 증거에서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의 입으로 불리어질 때 그만큼의 비중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는 얼마나 더 큰 비중을 가질 것인가?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주요 핵심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일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하나는 우리가 맹세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맹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맹세의 사용이 논쟁들을 해결하는 하나의정당한 방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허용될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명령하고 있으며, 만일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다른 이름들을 혼용한다면 그것은 개방세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이것에는 세 가지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가 진실을 명백히 하기 위한 수단이 없을 때는 진실을 표명하기 위해 하나님 이외에 아무에게도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원하신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만이 심장을 살피사는 자(렘17:10)이므로 만일 신비에 싸여 있어 인간의 판단으로부터 숨겨진 일들에 있어서 어떤 다른 재판관에게 호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정당한 직무를 박탈하는 일이 된다. 세째로 우리가 맹세할 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의 거짓맹세에 대한 복수자가 되어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하나님께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는 자들에 대해서 대단히진노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그만큼 정당한 영예를 빼앗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때때로 다른 맹세의 형식들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교리와는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사람은 마치 그것들에 신적 능력이 있기나한 것처럼, 또는 티끌만큼이라도 신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을 가리켜서 맹세하는 자들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간접적인 단언으로 말미암아오직 하나님만을 가리킨다. 단언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로 중요한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재판관으로 요구하고 그의 법정에 직접 호소할 때 해당된다. 또 하나는 특별히 우리에게 귀중한 것들, 이를테면 우리의 생명이나 머리 둥 이와 비슷한 것을 가리킬 경우이다. 세째는 우리가 피조물을 하나님 앞에서 증언으로서 사용할 경우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적절히 말하자면 우리는 다름아닌 하나님에 의하여 맹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성자들을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여 형벌을 주는 권리를 죽은 성자들에게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못 지않게 또한 그들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다.

 

더우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귀절은 어떤 :형식의 맹세가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서 정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사실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율법 안에 기록하신 엄숙한 맹세의 규칙을 완전히 '부인하는 어떤 극단론자들을 반대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분명히 여기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거룩한 승인을 받은 것으로 맹세의 실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그는 그 실행이 옛날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 실천은 지금도 실행 중이 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증거의 형식이 없을 때, 맹세로 하여금 진리 파악을 위한 우리의 [도움이 되게하자.

 

"17.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  저자는 .특히 유대인들에 관해서 말하는 듯이 보인다. 비록 :상속이 ,마침내는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지만 그 러나 유대인들은 최초의, 그리고 정통의 상속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 은 외부인들이요, 이차적인 상속자들이었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는!상속 자들이 되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39절에서 [그의 처음 설 교 중에 유대인들에게 강론하기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는 타의 상속자들에게도 얼마간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 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을 맨 앞의 서열에 앉히고 있다.》같은 사도행전 25절에서 다시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 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고도 말하는 바와 같이 사도는 똑같이 이 귀절 o에서 유대인들이 약속을 좀더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계약이 맹세 의 부가로 말미암아 확증된 것은 첫째가 그들을 위해서였다고 으말한다., 유 대인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비어있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이 문장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언급되고 있다.

 

복음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아무도 구 가르침이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정의 표현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못하도록, ,사도는 하나님의 뜻'이라 고 부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신자들은 :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안에 감추어진 그의 뜻이 그들에게 선포된다는 것과 이로 말미암아 창세전에 그가 우리의 구원을 [작 {정하신 것이 나타난다는 것을 제조군게 확신해야만 한다.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 마치 선하신 아버지와 같이 하나 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우둔함이나 느림을 관대하게 참으시는가 알아 보 자.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더한층 충분히 새겨넣기 위 해 자신의 맹세를 첨가하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신 그 확실성을 위해서 그의 맹세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명백하게 해 주므로 이제 더 이상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서는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고 경솔하게 사용함을 금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남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선언하고,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하여 당연한 존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하나님의이 름이 가장 높은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은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경솔한 맹세를 금 하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려고 계획하셨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 께서 우리의 구원을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가를 결론할 수 있다. 이 구원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앙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의 권리를 버리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 랑으로 우리의 질고와 상처를 감싸주시기 때문이다.

 

"18. 이는~~~~~~~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일과 맹세하시는 일, 이 두 가지에 관해서 변함이 없는데 인간들의 경우는 이와 아주 다르다. 인간들의 자부심은 그들의 말이 너무나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 곱번 단련한 은같도다"(시126)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진실로, 발람은 비록 하나님의 공공연한 원수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 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민23:19)고 증언하지 않 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한 진리이며, αυτбπιστοS(아우 토피스토스 또는 독자적 신임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맹세가 첨부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가득찬 화증을 더욱 가득 채우는 격이 된다. 이로부 터 우리는 말씀하실 때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오직 약속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더우기 맹세의 말씀을 첨부하신다는 사실에 강 [력한 위로와 격려를 얻는다.

 

"피하여 가는 우리~~~~~~" ; 이 말에 의하여 저자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굳건한 보호하십에서 제외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의 유 일한 피난처를 구하여 거기로 피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αradispures(카타뀌곤테스 피하여 가는) .라는 분사는 우리의 궁핍과 빈궁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궁핍과 빈궁에 쪼들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피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라는 말을 그가 첨부할 때, 그는 우리가 필요한 도움 을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우리를 만나러 와주시며 신앙의 원료(fidendi materiam)를 우리의 손 안에 넣어주시기 때, 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신리로 유대인을 격려하여 그들에게 제공 된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처럼 하나 님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그들에게 제공된 은혜를 거절하기 위한 모든 변 명을 박탈하셨다. 확실히 이것은 복음이 나타났기 때문에 율법의 공포에 있 었을 때 보다 더 진실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누가 하늘에 올라 가겠느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말씀이 폐계 가까와 네2입에서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롬10: 6~8)라는 .말씀에 보아무런 [이유가 없다.

 

소망이란 사말은 원인으로 결과를 대치하는 대한유법에 의해 [쓰여졌다. 는 이 귀절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가 되는 약속을 뜻하는것이라고 이해한다. 또한나는 이 소망이 바라는 그것(소망의 (대상)을 의미한다고 보는 자들의 의 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부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사 도가 텅 빈 약속이나 혹은 공중에 떠 있는 약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일반아들인 우리의 약속에 대해서불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소망이 여기서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파악된약속을 의미 한다는 것이다. κρατησαι(크라테사이 : 얻으려고)라는  동사는 보소망'이라는 명사처럼, 앞에서와 똑같은 불변성을 가리키고 있다.

 

"19 . 우리가~~~~영혼의 닻 같아서" ;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동안 신앙을 낮에 비교함은 훌륭한 비유이다. 확실히 우리가 이 세상을 여행하는 우리는 단단한 대지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마치 바다의 한가운데 에,우더구나 하고 있다. 높이 파도치고 광란하는 바다물결 속에 있는것처럼 몹시 동요 마귀는 쉴새없이 무수한 폭풍우를 일으켜, 소만일-우리가 우리의 버릴 닻을 깊고 먼 곳에 내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배를 1단번에 뒤엎어 침몰시켜 것이다. 우리의 '눈에 명백히 보이는 피난처는 아무데도 없고, 향으로 [어느 방 돌려봐도, 오로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어디나 물뿐이며, 실로 높이 부풀어 올라 우리를 위협하는 파도뿐이다. 그러나 물 속 한가운데 어두컴컴하고 안 보이는 곳에 닻을 내리면 그 닻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한낮은 파도 위에 있는 배를 그 자리에 안전하게 붙들어 매어 배를 떠내려가지 않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소망도 우리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만다. 다만 낮은 바다 밑바닥에 단단한 대지()가 있으므로 바다 위에서 내려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의지할만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므로 위로 하늘을 바라본다고 위하는 차이가 있을)것이다.소망은 피조물에 의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 있어서만 :안식을 발견한다. 마치 닻을 매는 닻줄이 길고 컴컴한 심연을 통하여 배 자체를 대지에 연결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는 방해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하나님 자신에게 붙들어 매는 줄이다. 어떠한 먼 거리도 어떠한 포함호도 우리를 하나님에게 귀착시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주연결되어[있을 때,비록 끊임없이 폭풍우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파선의위험으로부터 구출된다. 이것이 바로 낮은 튼튼하고 견고하여라고 저자가말하고 있는 이유이다. 광포한 파도로 인하여 (닻이 빠지고 일부서지거나,으닷줄이 끊어지거나, 배가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릴[수도 있다.[5]물론 '이런일은 바다 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를 지탱하여 주시는하나님의 능력은 아주 다르다. 또한 소망의 통합과 조하나님』말씀의 보건고함도그러하다.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ρ신앙은 하나님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오직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늘까지 뚫고 들어가야 할 필요가 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므로, 그는 옛날의 회막을 언급하여 그들이 눈에보이는 것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장막 속에 있는 지성소에까지 ,들어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마치 우리는 모든 옛날의 외부적인 경식들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신앙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음의 추론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즉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신앙도 또한 그 방향을 하늘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말미암아 우리는 신앙의 눈을 어떤 다른 곳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의 존엄성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엄성은 인간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손을 뻗쳐서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여 주시는 데, 이 일은 실로 옛날 율법에 있어서도 예표되었던 바이다. 대제사장은 다발개되어만 자기 자신의 이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의 이름 아래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12지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12개의 보석들을 그의 흉패에 꿰매어 넣었고, 그의 어깨에 붙인 2개의오닉스 돌(onyx stone)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넣었다. 말하자면 모든 12지파들을 가슴과 어깨에 새겨넣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모두 단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다 함께 지성소에 들어가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은 하늘에 들어가셨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하늘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문은 결코 그리스도에게서우리를 위해서도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하늘의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그 문이 닫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없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가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선구자라고 불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