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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

1. 성경 (히8:1 ~ 13)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1)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2)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3)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4)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5)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6)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7)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8)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9)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0)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1)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2)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저자는 논증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의 의도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영적인 것이며, 율법의 제사장 직분은 이로 인하여 폐지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여러가지 이유들을 가지고 그의 목적에 독자들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 동일한 논증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저자는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신 것을 확증하였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하늘로부터 주신 것이라는 점을 논술한다. 이 말은 결국 모세가 율법 아래서 제정한 제사장 직분은 땅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소멸되어 버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는 겸손히 육신을 입으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사 이 세상에서 자기를 낮추어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셨다(빌2:7).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눈을 돌리는데, 이 승천으로 말미암아 지신 십자가의 모욕뿐만 아니라 우리와 같은 육체를 따라 스스로 취하신 비천하고 불명예스러운 상태도 또한 모두 제거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위엄은 그의 부활과 승천 안에 나타난 성령의 능력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사도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위엄 있게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셨으므로 그는 우리 지상의 성소를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성소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2. 성소";  소유격인 '하기온; sanctorum" 이 여기서는 중성으로 쓰여져 있으며, 사도 자신이 장막이라고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세에 의하여 세워진 장막은 거짓으로, 혹은 제멋대로 세워진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말에는 은연 중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즉 저자가 말하는 진리는 잘못 대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표적으로 대조된 것으로, 요한복음 1장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는 바와 같다. 그래서 옛 장막은 인간의 무의미한 고안 품이 아니라 하늘 장막의 표상이다. 그러나 그림자와 실체는 다르며 기호와 사물 자체와도 다른 것이므로, 사도는 이 옛 장막은 참 장막이 아니었다 고 말한다. 마치 그것은 다만 장막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사도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이 땅에 속한 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근원을 아브라함의 씨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의 희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실로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그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이 땅 위에 내려오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생애의 고통에 한 인간으로서 복종해야 하셨으며, 나아가 죽기까지 복종하셔야 했다. 나는 지상의 그리스도에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앙의 눈을 가지고 영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나온 그의 육신은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그리하여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 실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온 세상을 위한 생명이었고,  또한 확실히 초자연적인 일이다. 그래서 사도는 인간성의 특징을 언급한다.  오히려 성령의 숨은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어떤 세상적인 냄새도 맛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 나라의 수준에까지 높이기를 배우도록 하자.  이렇게 하면 어떤 의심도 남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5 장 1절에서 거의 같은 목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이 장막의 건립자라고 부름으로써 이 장막이 견고하고 또한 영속적임을 말해 준다. 이는 마치 반대의 경우 인간의 손으로 세워진 것들은 견고하지 못하여 결국 멸망으로 떨어지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 얻어진 속죄는 진실로 하 나님의 역사이시며, 그것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놀랄 만한 방법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옛 레위적 제사장 직분과 절충해 나갈 수 없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은 제사장들을 임명하여 하나님께 제물들을 바치게 했다. 그러므로 제사없는 제사장 직분의 명칭은 공허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는 보통 율법 아래서 드려졌던 것과 같은 제물이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이 땅 위의 것이나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좀 더 탁월한 종류의 것 이라는 말이 된다.
 
이제 우리는 상반절과 하반절을 하나씩 검토해 보자. 이 상반절에서 주목 할 것은 어떤 제사장도 예물을 드림이 없이는 임명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점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은 중재하는 제물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원이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물에 기초해야만 하는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등한히 하며 그의 죽으심을 생각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존전에 달려나가는 자들은 어림없는 추측으로 결정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기도를 거룩하게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 앞에 두도록 배워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면 우리의 기도에 결코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을 노하게 했기 때문에 우선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앞서 제물이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떤 인간이든, 천사이든 아무도 하나님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 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칠 수 있는 자신의 어떤 예물도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가리지 않고 마구 중보자로 삼는 교황주의자들의 무례함을 완전히 논박하고 있다. 사도들이나 순교자들에게 제물을 공급하지 않고,  이런 종류의 과업을 맡기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이다.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라는 것에는 이제 논의의 여지가 없다. 마치 재판관의 임무가 법률과 법규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 제물을 바치는 임무가 제사장의 칭호와 결합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땅 위의 혹은 눈에 보이는 제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이 땅에 속한 제사장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제나 유의해야만 하는 진리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할 때, 그는 그 외부적인 행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적 결실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죽음을 경험하셨지만, 제사장으로서 세상의 모든 죄를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속량하셨다. 외부적으로 그는 그 의 피를 흘렸지만, 내부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그는 깨끗하게 했던 것이 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서 죽으셨지만 그의 죽음의 능력은 하늘 바로 뒤이어용나오는 귀절을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많은 제사장들 중의 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의 말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그 귀절을 '제사장들이 있는 한' 또는 '제사장들이 있으므로' 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저자의 의도는 다음 둘중의 하나를 보이려는 것인데, 만일 율법에 의한 제사장 직분이 아직도 계속된다면 그리스도께는 아무런 희생 제물이 없으므로 그는 제사장이 아니라는 의미든가 혹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과 동시에 율법의 제사는 끝났다는 의미이다. 이 중 첫째의 것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서 제사장의 영예를 박탈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레위적 질서가 이제 폐지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 뿐이다.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나는 헬라어 성경의 문맥 중에 '엔' 또는 '에피'라는 전치사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아  'λατρευеι라트류에인; 섬기다' 이라는 말을 거룩한 일들을 행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편이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적합하다. 그리고 헬라어의 구문상 이런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용이하다. 요컨대 저자가 말하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율법적인 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레위 제사장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들은 진정한 원형보다 못한 그림자 혹은 간접적인 닮은 점을 가지고 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πodecrμα(휘포데이그마 ; 모형)라는 말의 뜻이다. 이렇게 저자는 반대론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변론하고 있다.  그는 옛 제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보다 더 높은 것, 즉 하늘의 진리를 지향한 것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조업음과 같으니~~~~~~" ;  이 귀절은 출애굽기 25장 40절에 있으며 사도가 여기에서 그것을 인용함으로 율법적 예배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인 것들을 표상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장막의 모든 부분들이 산에서 모세에게는 지시된 원형에 부합되도록 명령하셨다. 만일 장막의 모양이 무엇인가 다른 것을 가리킨다면 그와 같은 형태가 의식이나 모든 제사장 직분에 관해서도 일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로 보건대 이런 모형과 그림자들 안에는 영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귀절은 세 가지의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요점들이 있기 때문에 유의할 만하다.
 
우리가 첫째,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옛 의식들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어린 아이들의 장난처럼 그것들을 가지고 놀게 하기 위하여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장막의 건립은 다만 그 외부적인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그것에 눈을 고정시키기 위한 허무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늘로부터 보여주신 원형을 좇아 모든 것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으므로 그 모든 것 안에는 진실한 영적의미가 있었다. 그러므로 의식들이 명령된 것은 다만 백성들이 이방인의 낯선의식을 좇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변덕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완전히 불경건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부분에 불과하며,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이러한 의식들이 백성을 중보자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기 위한,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과도한 호기심을 갖고 철저하게, 마치 헤시키우스(Hesychius)나 기타 대부분의 고대작가들이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것처럼 아주 사소한 일들 안에까지 어떤 숭고한 오의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사실 그들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을 철학적으로 세밀히 설명하려 하다가 유치한 공상들을 꾸며냈고, 그리하여 그 자신들의 어리석은 것으로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용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데,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것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여기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인간이 그들의 재능에 의하여 자신들의 생각으로 고안해 낸, 하나님의 계명에 반대되는 모든 형태의 예배는거짓이며 가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규칙에 따라서 행해져야 한다고 명령하시므로 우리가 어떤 다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은허용되지 않는다. 다음의 두 문장들은 똑같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삼가 모든 것을 본을 좇아 지으라"와  "삼가 본 이외의 것을 짓지 말라" 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하신 규칙을 지킬 것을 이렇게 강조함으로써 그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을 금하신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모든 형식의 예배는 쓸모없게 되고, 성례전들이라고 불려지고는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째로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들이 아니면 진정한 종교적 상징은 어떤 것도 결코 없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또 우리 자신들이 고안해 낸 것들을 그리스도에게 맞추려고 교황주의자들이 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자신과는 전혀 닮지도 않은 것으로 변형시켜 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고안해 내는 일은 허용될수 없고, "삼가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에게 보이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이다.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 앞에서 사도는 언약의 탁월성을 제사장 직분의 가치로부터 추론해 왔던 것처럼 이제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한층 탁월한 것이며, 그 이유는 그가 보다 더 탁월한 언약의 해석자와 중보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해석자와 중보자)가 다 필요하였는데, 왜냐하면 유대인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정하고 순수한 진리를 향하여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의식들의 미신적 준수를 버리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하는것은 복음이 율법보다 탁월한 언약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율법의 희생들보다 훨씬 더 고귀한 희생이므로 모세와 아론은 한층 탁월한 본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언약은 더 한층 우월한 언약들에 근거하여 선언되었다고 그가 덧붙여 말하는 것에는 다소 난점이 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은혜는 일반적이므로, 율법 아래 살았던 옛날의 열조들에게도 우리와 똑같은 영생에 대한 소망이 주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앙은 동일한 언약들에 근거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비교하고 있는 것은 실질보다도 형식에 더 관계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것과 똑같은 구원을 그들에게 약속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성질이나 형식은 우리의 것과는 동일하거나 비슷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만일 누가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갈리디아서 4장과 5장, 그리고 나의 〈기독교 강요>를 참조하여 주기 바란다.
 
"7. 저 첫 언약이 무흡하였더면 ~~~~~~" ;사도는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의 탁월함에 관해서 사도 자신이 말해 온 것을 다시금 다짐한다. 그리고 율법의 언약은 결코 확실한 것도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한다. 만일 그것에 흠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것이 그것 대신에 놓여질 필요가 있었겠는가? 따라서 옛 것이 모든 점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이대치가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그는 예레미야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관점 검토하게 된다. 한편 만일 처음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언약을 요구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뒤에 사도가 '백성들에게 허물이 있어,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언약의 해결 책이 도입되었다' 고 덧붙여서 말하고 있음은 조리가 잘 맞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백성에게 무엇인가 허물이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언약의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므로 이 논의는 유효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수백 번 백성들을 책망하셨다 하더라도 그 일 때문에 언약에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반대론에 대해서는 쉬운 대답이 있다. 비록 언약을 파기하는 죄가 당연히 그 불신앙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백성들이 범한 것이라고 말함이 당연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언약의 약점도나타나는데, 왜냐하면 이 언약이 그들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완전하고도 유효한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둘째 언약을 위한자리가 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8. 저희를 허물하여~~~~~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선지자는 장차 올 날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백성들이 율법을 받았지만 신앙으로 말미암아 굳건히 서지 못하였다고 그들의 불신앙을 비난한다. 그 율법은 백성들에 의하여 파기되었다고 하나님이 한탄하신 언약을 말한다. 이 악을 교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을 약속하신다. 이 예언이 성취되면 구약은 폐기되어진다. 그런데 사도는 자기의 논지에 부합시키되는기 위해서 이 예언을 오용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에 관한 것인데, 예언은 율법 전체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규칙을 인간의 마음 속에 기록하고 이 규칙이 인간의 가르침과 문서에 의하여 후세에 전해지는데, 그것이 의식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이 논법은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나아가는 논법이라고 나는 대답하겠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맺었으되 너희는내 언약을 지키지 않았다" 고 예언할 때, 이 선지자의 예언이 모세의 율법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또한 율법은 어떤 뜻에서는 의식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신체가 죽은 후에 의복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속물이란 그 본질과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잘 알려져 있는 속담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의식이 모세의 율법 전체와 함께 종말을 고한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의식에 관한 논의를 할 때 율법 전체의 일반적인 문제를 드는 것은 사도가 보통 잘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단지 의식들에 관한것보다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낡은 언약의 테두리 .안에 의식들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 예언은 지금 이 주제에 적절히 적용된다. 사도가 말하는 날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다. 이것으로 낡은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수정되었다는 말이 된다. 사도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라고 지명하는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두 개의 ,왕국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이 이전에는 갈라져 있었지만 모든 택함을 ;받은 백성들을 다시 한 몸으로 모은다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9. 또 주께서~~~~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 이 귀절은 당시 유효했던 언약과 선지자가 소망을 갖게 하는 새로운 선언약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차이가 없다면 선지자는 다만  "나는 녀희의 허물로 실패로 돌아간 언약을 새롭게 하겠다" 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양자가 다른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언약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붙잡고 그 노예된 처지에서 그들을 인도해 내던 날에 맺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선지자는 이 큰 은혜를 그들에게 기억하도록 하여 그들이 언약을 버린 데 대한 비난을 더 한층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는 단지 한 시대의 망은 뿐만 아니라 해방된 자들 자신이 바로 변절하였으므로 그 후예들도 또한 그 본을 따라서 변절하였다는 것을 결국 백성 전체가 언약을 파기하였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혹은 '저희를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았다' 고 .말하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비록 한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구제책을 가지고 그들을 도우러 오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의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예언이 히브리서에 인용되면서 약간 달라져 있으나 지금 이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10. 또 주께서~~~~~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이 언약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주요한 항목이 있다. 첫째는 죄의 값 없는 용서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마음의 내적 변혁에 관한 것이다. 또 둘째에 딸려 있는 세번째 요소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비췸을 받는 정신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유의할 가치가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간의 음성만으로, 말씀하시는 한,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불러 모은들 아무런 효과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은 올바르고 공정한 것을 가르치시고 명령하시지만 그의 말씀은 막혀버린 귀에 울려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귓전을 치는 외적 음성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은 사악과 강퍅함에 가득차 모든 건전한 가르침을 물리쳐버린다. 요컨대 우리의 마음은 쇠나 돌같이 굳어서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드럽게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이까지는 결코 들어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에는 그와는 반대되는 법이 새겨지고 우리의 마음은 사악한 정열의 지배를 받아 우리를 반역으로 몰아 세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그의 율법을 기록하시지 않으면, 즉 우리를 그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형성하고 부합시키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인간의 음성을 통해서 그 율법을 선포하실 때 헛되이 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의지는  얼마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의 본성 안에는 무슨 의가 있는 것인지 명백해진다. 우리는 무언가 뜻하고 선택하며,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께 저항하려는 거의 미칠듯한 충동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결코 복종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 말한 대로 율법이 돌판에 기록 된 채로 남아 있는 한, 율법은 우리에게 치명적이며,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영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 본래의 사악성을 변화시키고 고치실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오직 악한 정욕과 완전히 사악에 바쳐진 마음을 발견할 뿐일 것이다. 명백히 규정되어 있는 것은 새 언약이 달리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심으로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둘째 항목은 죄의 값없는 용서에 관해서이다. 비록 그들은 '범죄하였지만 그들을 용서하리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신다. 이것은 좀 더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도록 훈련을 하여도 여전히 우리의 사악한 육신의 수많은 정욕들은 남아서 결코 근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의 본성의 사악함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고 이로 인한 더럽고 사악한 욕망은 끊임없이 터져나온다. 그리하여 이 일로부터 바울이 한탄하는 그러한 싸움이 나온다(롬7 19). 즉 신자들은 하나님께 정당하게 복종하지 않고 여러가지 모든 방법으로 거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올 바르게 살기를 원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율법의 완전함으로부터 아주 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영원한 죽음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값없이 용서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면 언약에는 아무런 영구성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언약을 한 번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특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훌히 여기신다는 그것과 그들이 굴복당하고 있는 어떤 죄도 용서의 약속이 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약속은 그들에게 오직 하루 동안만 주어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바로 마지막까지 주어진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있다는 그것에 주목하지 않으며 안된다. 이 은혜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바와같이 그리스도의 왕국 전체에 미치고 있다. 이 곳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며,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오직 끊임없는 절망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유죄로 정해져 있으며,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긍훌 노안에 피난하지 않으면 우리는 해방될 수가 없다.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 언약의  열매는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자신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후견인이 되실 것을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라는 귀절의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며, 또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안에 받아들이시는 이상은 반드시 그의 의가 우리를 생명에 참여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14415)라고 다윗이 적절히 설명하고 있는 바와같이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에는 의심할 것이 없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대상이 되고 언약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후사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특권은 우리가 또한 그 언약 안에서 우리 자신의 문을 갖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무리 .멀고 광범위하게 보편쳐져 i있 더라도 거기에 이 구원의 선 언약은 효력을 가진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실하고효과적인 제약속이 전혀 없 었던 것이 아닌가?  옛날의 열조들은 성령의 은혜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열조들은 그들의 범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흔적이 전혀 없지 않은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실한 마 음과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간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에 의해서 내적으로 가르침 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들이 그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들은 값없이 주시는 죄사함을 신뢰함으로써 ,다시 위로를 받고 용기 있게 일어났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런데 사도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에게서 이 두 가지의 축복을 빼앗 아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나는 사도가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 들의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고, 또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을 단순 히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을 비교하 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성령의 능력을 훨씬 더 풍부하게 나타내셨고, 또한 그의 자비를 널리 인류 위에 쏟으셨으므로 이 탁월성은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의 열조들에게 주신 은혜의 조그마한 몫 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또 당시에 맺었던 약속들이 가리어져 '있었고 알기 힘든 것이었으므로 눈부시게 우리를 비추는 복음의 명확함에 비하면 그 약속들은 오직 달이나 별들처럼 희미하게 빛났을 뿐이 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과 순종은 대단히 탁월한 것이었으므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그 신앙과 순종에 견줄 만한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물들이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는 경륜이라고 대답하겠다. 뿐만 아니라 열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 적 같은사들은 모두 그 시대에는 우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러한 은사들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복음을 율법과 비교하여 복음의 특성을 율법으로부터 빼어낸다고 해서 불합리할 것은 없다. 또한 동시에 하 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은혜를 옛날의 열조들에게까지 뻗쳐서는 안된다는 이유도 없기 때문에 이것은 참된 해석이다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이 세째 항목은 둘째 항목 의 부분으로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에 딸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을 밝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돌리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 은 인간의 이해력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지혜이다. 그러 므로 성령의 은밀한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이 지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사야가 교회의 갱신에 관해서 말할 때 하나님 의 자녀들은 모두 주의 가르침을 받으리라(사2816, 26)고 말하는 것이 다. 여기 예레미야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저희가 나를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 는 것을 약속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신다. 요컨대 선지자의 이 '말들은 우리의 마음이 소경과 같아서 성령 에 의해 비침을 받을 때까지는 올바른 이해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힘있게 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자들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이 계시를 소유할 만하다고 여기는 자들뿐인 것이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라고 말함으로써 선지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쏟아지며, 어떠한 신분의 사 랍들도 이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의미 하는 것은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도 하늘의 지혜로부터 닫혀져 있는 것은 아 니나, 고관들과 귀족들이라도 그들 자신의 예지나 학문의 도움에 의해서는 이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장 낮고 비천 한 자들을 가장 높은 자들과 공연결시킴으로써 무지한 것이 낮고 개천한 자들을 방해하지 못하고 높은 자들이 그들의 ;총명으로 높이 |오르지 못하며, 다만 그들의 유일한 공통의 주인은 다같이 성령이신 것을 보이셨다.
 
바로 이 귀절을 들어 공적 설교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불필요한 것처 럼 여겨 폐지하려는 광신자들이 있으나, 그들의 공란은 쉽게 논박된다. 그 들의 반대론은 이와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누구도 이웃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에 공적 설교는 중지되고, 그 결과 하 나님의 내적 영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특 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빠뜨리고 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그들 이 서로 가르친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고, 그는 이것을 그들 은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모를 만큼 무지가 이전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훈에 두 가지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째는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이 기독교의 초보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이미 시작을 한 사람들이 더한층 진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고 있는 한 진보 성장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기 므로 때문에, 아무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으며, 따 기꺼이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지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확실한 라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성장하 는 수단은 바울에 의하여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로 보건대 교 회로부터 이와 같은 필요한 은사를 빼앗아버리려는것은 전혀 선지자의 마 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의 유일한 의도는 하나님께서 큰 자에게나 작은 자에게 똑같이 그 자신을 계시하려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요엘 선지도 요엘 3장 1,2절에서 예언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이 기회에 이 건강한 지력의 빛은 오직 교회에만 특별하게 약속된 것이며, 따라서 이 귀절은 오직 신앙의 가족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  사도 는 대립되는 다른 언약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들어서 한 언약이 파기되었다 는 것을 결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처음 언약이 폐기되어야 했던 증거를 구약이라는 이름에서 찾고 있는데, 낡은 것은 쇠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대새로운 것이 대치되었으니 낡은 것은 필연적으로 종말을 고한다. ,이 둘째의 언약은 앞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되는 모세의 모든 제도가 지나갔다면 당연히 의식들도 또한 종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