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히 9:1 ~ 28)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1)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2)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3)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4)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5)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6)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7)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8)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9)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0)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1)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2)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3)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4)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5)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6)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7)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8)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19)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0)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1)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22)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3)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4)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5)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6)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7)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28)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첫 언약에도~~~~" ; 낡은 언약의 폐지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말한 후 저자는 이제 그의 고찰을 특별히 의식으로 돌린다. 그의 의도는 당시 사용 되었던 것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국저자는 구약 시대에는 어떤 일정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규칙이 있었으며, 그것은 그 시대에 '한해서 적합한 것이었다고 말 한다. 좀 뒤에 가서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이 모든 의식들이 어떠한 것이었 는가는 비교에 의하여 명백해질 것이다. 몇몇 사본들에는 πρτη σxηνπ(프 로테 스케네; 첫장막)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나는 장막 이라는 명사에는 잘 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무식한 독자가 형용사에 |명사가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언약에 관계되어 있는 것을 장막에 연결시켜 어리석게 σκηνη(스케네; 장막)라는 말을 덧붙였음이 틀림없다. 이 잘못이 이제까지 널리 퍼지고 지속되어 많은 헬라어 사본들이 일치해서 이 곳을 이렇게 읽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필연적으로 옛 날의 기록대로 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도가 구약 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그는 구약, 말하자면 부속물이었던 의식 들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모세 율법의 모든 의식들은 구약의 일 부분이었으며, 그것과 똑같이 오래된 것이므로 폐지되지 않으면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Δατρεα(라트레이아 ; 섬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는 귀절을 많은 사람들은 대격 |복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δικαιιματα λατρёαS (디카이오마타 라트레이아스; 섬기는 예법)라고 두 낱말을 한데 붙여서 읽 고 사람들에 동의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히브리 사람들이 D'pN(후킴)이라 부르는 하나님 예배에 관한 규정들이나 의식들은 헬라어로는 δικαιωματα 는 (디카이오마타; 예법 규정)라고 기술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대체적인 의미 곧 제사들과 몸을 씻는 일들과 그리고 성소를 포함하여 기타의 여러 상 징들로 구성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전 체계가 옛 언약에 연결되어 있었다 는 것이다. 사도는 그것을 세상에 속한 성소 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것들 안에는 아직 어떠한 하늘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은 모세에게 보여준 원형의 상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은 실체와는 다르다. 특히 이 귀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그 양자가 대립하는 것 으로서 서로 비교되고 있는 때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성소는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이 땅 위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당연히 이 세상의 사물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하늘의 것이었다.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 사도는 여기에서 그저 가볍게 장막의 건 축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의 논의를 위해서 필요한 이상의 시간을 소비하 지 않고 있으므로 나도 이것에 관하여 이 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 겠다. 그래서 우리의 당면한 목적을 위하여서는 장막을 세부분으로 나누는 일만으로 충분하다. 첫째 부분은 백성들이 머물러 있었던 바깥마당, 둘째는 보통 성소 라고 불리어지는 곳이고, :마지막은 가장 안쪽에 있는 성소인데, 이것은 특히 지성소 κατ' χ(카테크소켄)이라고 불리어졌다. 첫째 /성소 는 백성의 [마당에 접해 있었는데, 거기에는 등대와 상이 있었고[그 책상 위에 진설병이 놓여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도는 이 [장소를 복수형으로 τ& &ria(타 하기아; 성소)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지성소 라고 불리는 가장 깊은 장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백성들이나 성소에서 .임무를 행하고 있는 제 사장들이 보이는 곳으로부터도 매우 떨어져 있었다. 지정소 바깥 휘장에 의 하여 가로막혀 있었듯이 둘째 휘장은 제사장들을 지성소로부터 가로막고 있 었다. 사도는 거기에 00μιατηριον(뒤미아테리온 향로)이 있었다고 [말하는 데, 나는 이 귀절을 향로보다는 오히려 향단 으로 이해한다.그리고 사도 는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д항아리와 아론 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 룹들이 있으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도는 모세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1 싹난 지팡이가 두 언약의 비석들과 함께 언약궤 안에 들어 있었다고 개발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열왕 기상 8장 9절에서 "퀘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되었었다"고 말하는 특별한 이야기()와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ι그러나 이 두 구절들을 일 치시키기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금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를 십계명 앞에 놓아야 한다고 명령하셨으므로 그것들이 두 돌판들과 함께 언약케 안 에 넣어졌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성전이 세워지면 이러한 종목들 이 제각기 다른 규정에 .따라서 진열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언약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밖에 없었다는 것을 마치 새로운 일이나 되듯이 분명히 기록하 고 있다.
"5.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 캐 묻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면 끝이 없으므로 사도는 이러한 일들에 관해서 너무 길게 논하여 논맥을 흩어서는 안되므로 그의 당면한 목적에 관계가 없는 어떠한 세론의 기회도 다 잘라내 버린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이 사도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이 문제에 관해 더 자세히 논하려 한다면 그는 대단히 부적당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아마 다른 곳에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사도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주목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이 적절한 한도를 넘어서 철학적인 설명을 한다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몇가지의 일들은 .애매한 점도 없고 신앙을 기르는 데도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잘 판단하고 중용과 정도를 지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이상의 것을 알려고 욕심부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 사도는 기타의 것을 모두 생략하고 크게 논쟁이 된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제사를 행하는 제사장들은 날마다 첫 장막에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번씩 예식용 제물을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 일로부터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저 율법이라는 장막이 아직 있는 동안 성소는 닫혀져 있었으며, 이 첫장막이 파괴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길은 우리를 위해서 열려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그 자신들의 소망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낡은 장막의 그 형태로 경고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그림자를 여전히 붙잡고 있음으로써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는 '프로텐스케넨; 첫 장막'이라는 헬라어를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저자는 그것이 일반의 성소를 의미한다고 해석했으나 여기에서는 그것을 장막 전체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장막은 다음에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정소와 대립해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는 이 장막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가져오기 위해서 파괴되었으며 이것이 파괴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7.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 히브리어의 '샤가그' 는 과오를 범하다 라는 뜻이며, 그 파생어는 (슈가가)라 는 명사인데, 이 '슈가가'는 완전히 과오 나라는 뜻을[나타내지만 일반 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죄로 사용되고 있다. 확실히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죄를 범하지 않는다. 사도는 이 귀절에 의해서 오직 단 순한 무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적으로 범하는 모든 죄도 다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과오나 무지가 없는 죄는 결코 없다. 인간은 알면서 또는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더라도 역시 반 드시 자신의 욕망에 의하여 소경이 되어서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거나 올바른 판단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의도적으로 자신의 멸망을 향해 뛰어들 지 않는다.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 이 말의 헬라어는 παραβολη(파라볼레 ; 비유)인데, 나의 의견으로는 여기에서의 이 귀절은 divtituπos(안티튀포스: 모형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는 둘째 장막이 첫째 ,장막 에 대응하는 양식이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초상은 그 인간 자신과 꼭 일치해야 하므로 그 초상을 보면, 곧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표현되어 있 는 인물을 상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도는 이 비유는 당분간의 것, 즉 외적인 율법 준수가 실행되고 있었던 때까지의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 비유의 효과를 율법 시대에 한정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조금 후에 사도가 모든 의식들은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 고 덧붙여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가 "드리는 예물이라는 현재 시 제를 사용하고 있음은 이것에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므로 마치 자신이 예물을 바치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한 사 람이기나 한 것처럼 양보하는 말씨로 말하고 있다. 예물과 제사 라는 말 은 하나는 유()이고 다른 하나는 종이라는 뜻에서 다르다.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 즉 제사들은 진정한 깨끗함을 줄만 큼 영혼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귀절을 온 전하게 하다', 완전하게 하다 등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을 나는 거절하지 는 않는다. 그러나 이 귀절은 깨끗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로 해석하 는 것이 문맥에 비추어 더 적합한 것 같다. 독자들이 그의 의도를 더 잘 이 해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양심의 대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 는 율법의 제사에 의해서는 예배자들이 영적으로나 또는 내적으로 깨끗하게 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서 그는 그러한 모든 의식들은 모두 육 체적인 것, 또는 정욕적인 것이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러 한 의식들에는 무엇이 남겨져 있는가? 보통 의식들은 성실성과 예절을 격 려하도록 사람들을 훈련하는 유용한 형식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식에 부가되어 있는 약속에 그처럼 비중을 두지 않는 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견은 완전히 거절되어야 한다. 육체의 예법을 다 만 육체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일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무지 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이 말들에 의해 의식을 영혼에까지 도달하지 않는 단순한 지상적 상징들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완전한 거룩함의 진정한 증거이기는 하였지만, 그것들 자 체로서는 아무런 거룩함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또 인간에게 고거룩함을 주지 도 못하였다. 신자들은 이러한 도움들로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어 상징들에는 없었던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얻으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왜 조사도가 하나님 에 의하여 제정된 성례전에 별로 경의를 갖지 않고 거의 멸시하는 투로 말 하며, 또 그 효력을 격하시키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자도는 성례 전을 그리스도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였다고 대답할 것이다. 의 식들은 그것 자체로서만 평가된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 9절에서 부르 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이 세상의 무력한 요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개혁할 때 라고 사도가 말할 때 사도는 예레미야의 예언(31: 37)에 관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언약은 그 개혁의 방법으로서 낡은 언약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먹고 마시는 것 과 기타 그런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의 이름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사소하고 별로 중요하지 도 않은 듯한 규정들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율법이 얼마나 복음의 완전함 으로부터 먼가를 더 확실히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 이제 사도는 율 법 아래 있었던 것들의 실체를 제시하고 독자들의 눈을 상징들로부터 돌려 서 그 실체에 주목시킨다: 율법 안에 예시되었던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 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더 이상 그림자에 머무르지 않고 실체와 확실한 진리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가 그리스도를 옛날 율 법 아래 있었던 대제사장과 비교하는 항목들을 '주의깊게 주목해야 한다. 사 도는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에 한번씩 죄를 씻기 위하여 피를 가지고 성소 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 점점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저 옛날의 대제사장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홀로 제사장의 위엄과 임무를 가지고 계시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제사장 직분을 항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영원한 축복을 가져오신다는 점에서 다르다. 둘째로 옛제사장과 우리의 제 사장인 그리스도와는 둘 다 성소를 통해서도지성소에 들어간다는 점에 있 어서 비슷하다보크러나 그리스도만이 홀로 그 육체의 성전을 통하여 하늘에 들어가셨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지성소가 일년에 한 차례만 거룩한 속죄를 위해 대제사장에게 열렸다는 사실은 j그리스도의 '독특한 '제사를 희미하 게나마 예표하는 것이었다. (단번에' 그들어갔다는 그것은 양자에-공통적이었으 나, 지상의 제사장에 있어서는 그것은 요해마다 :있었던'!일이었고,하늘의 제 사장에 있어서는 세상 [끝까지 [이르는 [영원한 '것이다.!^피를 바치는 :일은 .양 자에 모두 공통적이지만 피에는 큰[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를 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동바치셨기 때문이다. ¡속죄는 '양자에 ¡공통적이 지만 낡은 율법에 의한 속죄는 효력이 ¡없었기 {때문에 ;매년』반복되었다. 그 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속죄는 영원한 효력이 있 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거의 모든 말들이 큰 중요 성을 가지고 있다. 이 귀절을 어떤(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라고 번 역하는데 이렇게 번역해서는 사도의 참 뜻을 올바로 표현하지 못한다. 왜냐 하면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레위 [제사장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그들의 [임무 를 수행한 후에(우리가 위의 제 7장에서 본 바와 같이)_ 그리스도가, 그들 대신 오셨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장래 좋은 일"이라 함은 영원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 다. 장래가 현재에 대비되어 있는 그것과 마찬가지로 고장래의축복이, 현재의 축복에 하늘 위의 대비되어 있다. 그 논지는 그리스도의 경제사장 직분에 의하여 [우리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인도되어 영적인 의와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되었으므로 이와 우리가 이 이상 더 좋은 것을 원하는 1일은 옳지 못하다는 법을 갖고 같이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보전하시고 견고하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 이 문장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전에 레위의 대제사장이 성소를 통해서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처 럼 그리스도는 그 육체를 통해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왜냐하면 그 리스도가 우리의 육신을 입고 그 육신 안에서 고통을 받으셨을 때, 그는 지 금 일부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보자로 서는 특권을 회득하셨기 때문이다. 첫째 성소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몸에 적용된 것은 타당하고 적절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완전한 위엄 전체가 내재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 다. 사도는 그가 그 몸을 통해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몸 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그 몸 안에서 다. 성별되어 진정한 의가 되셨고 그의 제사를 드릴 준비를 하신 것이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몸 안에서 자신을 비어 십자가의 죽음을 견디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모든 무릎을 그의 앞에 꿇게 발견하였다(빌2 8~10): 그는 그 자신의몸을 통 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 아버지의 우편에 공앉아계신 다. 그는 하늘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시는데, 그것은 그가 우 리의 육신을 입고 그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아버지께 드리셨기 때문이고; 그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의를 회득하여 ,주시기 위해 그의 몸 안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가 그리스도의 몸이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는지 모르겠다.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창조 되었으며, 고난과 죽음을 견디신 것은 확실한 자실이기 때문이다.「나는 사 도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전육체나"그 육체적인 성질 이 아니라 그의 몸으로부터 오는 영적 능력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리스도의 육체가 생명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먹이는 하늘의 '음식인만큼, 또는5의 피가 영적 음료인 동시에 깨끗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육체나 피 안에는 어떤 지상적인 또는 물질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다음 에 이것은 나무와 농쇠와 가죽과 갖가지의 ,직물류와 금과 은 등 생명이 없 는 물건들로 만들어어진 옛 장막에 관해서-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체는 하나님의 능력의 입김을 받아 살아 있는 영적 성전으로 만들어졌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 여기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특성은 참으로 타월하므로 그 특성이 율법의 모든 그림자들을 무효하게만 든다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피가 짐승들의 피와 동류로 평가된다면 그 리스도의 피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만일 율법의 깨끗하게 함이 그 효력 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하여 얻어진 속죄는 무슨 의 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죽음의 효력을 몸에?지니고 오 실 때, 모든 ;상징들은 반드시 종식되어야 한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 많은 사람들은 이 문장 이 영적 의미를 갖는 성례전에 (관한 것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을 잘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마치 이방인 들이 범죄의 불명예를 씻기 위한 속죄의 행위를 하는 г것처럼ο다만 인간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아주 비기독교적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다만 이 땅 위에 속한 것에만 한정시킨다면, 하나님의 ,약속들에 해를 입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모세의 기록에는- '제사가 올바르게 행해지면 불의는 소멸된다 는 문장이 종종 나타난다. 이것은 확실히 신앙에 ,관한 .영적 가르침이다. :그것 은 모든 제사들이 그리스도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더한층 그 렇다.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과 같이 제사들은 이 구 원의 진정한 증거들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 관해 서 말하고 있을 때, 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는 확실히 육체 를 정결케 하는 일을 상징적인 성례전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즉 만일 짐승들의 피가 정결케 함의-진정한 상징이며 성례전이라는 방법으 로 육체를 정결케 하였다면 하물며 진리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오직 외적인 의식에 의해서 정결을 입증하실 뿐만 아니라 진실로 1인간의 양심에까지 미 치는 정결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이 논증은 상징들로부터 상징된 것들 자체로 이르는 논법인데, 왜냐하면 그 결과가 상징들의 :실체보다 우월 하기 때문이다.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 이제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를 명백히 정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외부적인 행위가 아니라 영의 능력으로 평가되어야 한 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고통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 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난드일이었다.[1]영원 한 속죄를 위한 제사는 인간적인 행위를 초월한 행위였다. 조사도가 ."영원하 신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행하신 화목이 |영원한 화목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사도가 '흠없는'이라고 말할 때 비록 이말이 어떠한 불구나 불완전함이 있어서는 안되었던 율법의 희생물들을 암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동시에 그리스도만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합법적인 희생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리스도 이외 의 기타 모든 것들에는 엄밀히 말해서 항상 어떤 홈이 될만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도는 위에서 율법의 언약은: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고 말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제사만이 완전무결한 것이다.
"죽은 행실~~~~~" ; 사도는 이 귀절에 의해서 죽음을 낳는 행실 또는 죽음의 결과인 행실을 이해하고 있다. 영혼의 생명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결합하는 데 있으므로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사람들은 당연히 죽은 자로서 간주된다. 우리는 속죄의 목적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속죄의 목적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깨끗하게 된 것은 육체의 더러움 속에 여전히 잠겨 있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정결 함이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하기 위함이다. 사도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깨끗하게 되기 전에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느 것도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이전에는 모두 하나님의 원수이므로 우리가 행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는 한결같이 가증스러운 일일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무슨 행위이든 간에 그것 자체 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큼 그렇게 깨끗하지도 또는 전혀 무죄 하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더러움과 오점을 없애주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정결케 하는 역사가 반드시 개재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죽은 행실과의 진정한 대조이다.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 사도는 그리스도가 새로운 언약 아래 제사장의 임무를 완전히 감당하시기 때문에 이제 어떤 다른 제사장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사도가 중보자라는 영예를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그와 함께 그 영예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임무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을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절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더 충분히 확증하기 위해서 사도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죽음을 개재시키면서까지 어떻게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감당하셨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만일 이 일이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는 일이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면 오직 그만이 진정한 중보자라는 말이 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과 결과에 관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옛 언약 아래서 짐승들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한 대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기 위한 것 이었다. 만일 율법이 몹시 무력해서 죄의 속함을 위하여 어떠한 정치료책을 적용해 보아도, 그것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누가 율법 안에서 안전한 피난처 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에게 율법보다 나은 것을 기대하도록 격려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율법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끊임없 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올 때 우리 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한 속죄를 얻 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율법에 의지함 이 없게 하기 위해서 율법의 무력함을 보여주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굳게 서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들의 양심을 편안하게 하 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열조들의 죄는 율법 아래서 사함을 받았느냐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내가 앞에서 '그들의 죄'는 그리스도의 긍호에 의해서 사함을 받았다고 한 대답에 유의해야 한다. 그들의 외적 속죄()에 관해서는 아직도 그들의 죄책감에 대 한 자책에 오억눌려 있었다.[5]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 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골2:14)였다고(말한다. 한 죄인이 하나님 앞 에 죄를 치었다는 것을 공공연히 고백하고, 어머움없는 동물을 희생으로 드 리면서도 차기 자신이 영원한 죽음에 해당함을 인정한다면, 즉 그 자신의 서명에 의하여 자신의 죽음을 봉인()한 것이 아니라면 그 희생으로 부터 무슨 유익이 올 수 있겠는가?u 열조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에만 죄의 완전한 사함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 만이 죄를 소멸하는 일이라면, 율법에 머물러 있었던 자들은 결코 죄로부터 해방을 얻지 못하였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라고 다윗은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축복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율법 을 저버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보안일 사람이 율법에 집착한다 면 결코 유죄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다.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우리에 대 한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마지막에는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국사도는 우리가 그리스 도의 긍훌히 여기심에 의하여 이것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 로부터 명백한 것은 언약의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약속'이라는 말은 약속된 기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마치 영 원한 생명의 약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도록 우리 에게 주어졌다 고 그가 말한 것과 같다. 확실히 생명은 열조들에게 약속되 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기업은 태초부터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미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그것을 우리의 소유로 만들 수가 있다.
"16. 유언온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 이 귀절 하나만으로도 이 서신 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어의 (브리트)라는 말은 언약이란 뜻이지 유언의 뜻은 아니 다. 그러나 헬라어의 διαθππкη(디아데케)에는 언약과 유언의 두 가지 의 미가 다 포함되어 있다. 사도는 유언의 의미로 사용하면서 양자가 그리스도 의 죽음에 의해 확중될 때, 비로소 확실하고 유효한 것이 될 수 있다고 논 증한다. 그리고 이것을 유언의 효력은 유언자가 사망할 때까지 보류된다는 유언의 일반적 관습을 언급하여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다소 약한 논증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가 말하는 것은 별 어려움 없이 논파될 수 있을 것같이 보인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서 유언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옛 날의 백성들과 언약을 맥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다는 것 을 언약한 사실 자체로부터나 혹은 언약이란 말로부터 결론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죽어야만 했던 것을 유언이 유언자의 죽음 에 의해서만 재가되는 이유 때문에 언약한 사실 자체로부터 추론한다면 모세가 계속 사용하고 있는 л(브리트)라는 말이 살아 있는 사람끼리 한 언약이고 유언한 사실 자체에 대하여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이. 논증은 즉각 잘못되어진다. [단어상으로 볼 때, 사도는(앞에서 내가 말한 바 와 같이) 단순히 그 말이 헬라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에 언급하고』있을 뿐 이다. 그러므로 그는 근거를 주로 사실 그 자체에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는 것에서는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이 언약은 피에 의해서 재가되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유언과 .비슷한 것이었 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거나 이유없이 하나님께서 제도입한 』상징은 일찌기 .하나도 j없었다 는 이 진리에 우리는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7 그런데 율법의 언약을 확인 하는 데 하나님은 피를 사용하셨다.그러므로 그것은(세상에서 보통 말하 듯이)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언약이- 아니었고, 죽음을 요하는[ 언약이었 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기-시작한다는 것이 유언의 독특한 조건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사도는 개발에서가 아니라 사실로부터 논증을 한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제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가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을 인정 한다면 큰 곤란은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방인들도 어떤 의미에 서 제사에 의한 언약들을 존경하였다 고 반대한다면, 나는 『그것은 사실이 라 고 시인하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의식을 이방인들의 관습에 서 빌어온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방인들의 모든 제사들은 형편 없는 부패 물들이기는 하나 그 기원은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의식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이 [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즉 파 를 가지고 확증하신 하나님의 선언약은 유언과 똑같은 조건과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유언에 비교됨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 이 귀절로부터 사 도는 주로 사실에 관하여 설명하며 단어를 문제삼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 해진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단어를 그가 쓴 말 속에 자신의 의도에 맞게 사용했지만, 이것은 마치 흑자가 같은 하나님의 언약을 :종종 헬라어 μαρτρρα(마르튀리아; 주증언)를 사용하여 말하면서, 이 말에 언약이라는 칭 호를 줌으로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것과 같다. 진실로 그것은 μαρτνρια이 며,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그것에 관해서 증거하고 이 땅위에는 그것에 관해 서 수많은 증인들, 즉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 또 무수한 순교자들 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아들이 몸소 그것의 보증자가 되셨다. 그렇 게 포말한다고 해서 아무도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동 시에 히브리어 '테우다'라는 말의 고유한 뜻에는 이 의미가 포함되 어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와 모순되는 것은 아무것도 언급되어 있 지 않으므로 말의 뜻을 너무 세밀히 캘 필요는 없다.
사도는 낡은 언약이 피를 '가지고 세워졌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것으로부 터 사도는 사람들이 낡은 언약의 때에 죽음이 개재하지 않는 한 언약은 확 실하고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는 것을 추론해 보냈다. 동물의 피가 홀 려졌다는 사실이 영원한 언약의 확립을 유효케 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 일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가 모세에 관해서 말하 는 물 우리는 의식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저자는 이 언약이 제워 진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이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함으로써 언약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자신들 의 더러움으로 언약을 모독하지 않을 만큼 신성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언약을 세운 것은 다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 을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사도는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과 율법 책에도 피 를 뿌렸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이 피를 뿌리는 의식으로 그 당시 백성들 이 배웠던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신앙을 가지고 피의 중재를 바라보기만 하 면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구할 수 있고 혹은 찾을 수 있으며, 또는 올바 르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은 당연히 우리에게 두려운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만족하셨고, 바로 그 피가 우 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곁에 쉽게 가도록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위엄에 이르는 길은 위험천만의 미로이다. 모든 예배는 그 리스도가 그 자신의 피를 뿌림으로 마말미암아 깨끗하게 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결함과 어려움으로 가득찬 것이다.
장막은 일종의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사형상이었고, 섬기는 일에 쓰는 모 든 그릇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역시 진정한 예배의 상징들이었다. 만일 피 되었이는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백성들을 구원할 수 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가 그 파를 가지고 나타나시지 않는 곳에는 우리가 하 나님과의 아무런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쉽게 .결론지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가 아무리 불변한 이것이라 하더라도 교리 자체는 이 귀절 안 에 특명백히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활못한다는 것을 이이 귀절은 명백히 보여 준다.
다른 사람들은 그이것을 달리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 교회의 몸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을 드릴 주대는 은 장막을 ,교그릇들은 하나님께서 그 섬김을 이용하시는 각 신자들로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 하나 향하였으며, 또한 그 님께 기원 언제나 국신자들은 성소 쪽으로 들이 성전에 모일이 주의 제앞에나온다' 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말하는 일 반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20. 이르되 이는 사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 만일 이 것이 유언의 피라면 유언은 피가 없이 재가되지는 않으며, 또한 유언이 없으 면 피만으로 죄를 속할 수는 없다. 이양자()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안된다. .또[,우리가 알기로 상징은 기술법이 설명되었을 때에만 주어졌 다는 것이다!"말씀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무슨 성례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 문에 상징은 말씀의 부수적인 존재이다. .이 말씀은 마술의 주문이나 외듯이 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크고 명백한 목소리로 선포된다는 것 작은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말씀이라는 말은 그것이 에 주목하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성례의 중심인 계 백성들에게 명의 설명을 듣는 일이 없는 곳에는 성례의 잘못된 사용과 남용과 이교적인 부패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징으로부터 사물의 진정한 이해를 제거해 효력없이 ]죽은 요소만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다..요송 버리는 교황주의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그 확증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 이 귀절은 오직 우리에게 유익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시킨다. 바울이 미암아 올 때에만 하나님의 약속들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 가 되고 '아멘'이 된다 (고후1:20) 고 증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인장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새겨질 때, 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뿐만 아니라 말씀되어 있는 것의 보증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 자신을 제공하시는 것을 볼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읽는 것이 잉크로 기록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복음이 전파될 때 그리스도의 신성한 피가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떨어진다는 이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 미 치는 것만으로 우리의 주목과 존경은 훨씬 더 크게 될 것이다. 이것의 상징 이 모세가 언급한 뿌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세의 말이 포함하고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의 내용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모세는 책에 뿌렸다고 기록하지 않고 백성에게 뿌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염소나 붉은 양털이나 우슬초 따위의 이름들도 기록하지 않았다. 책에 관해서는 피가 책에 뿌려졌 다고 명백히 증언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모세는 제물을 드린 후에 책을 내 어오게 했다고 기록된 사실로 보아 피를 뿌렸다고 추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모세가 책을 내어오게 한 것은 엄숙한 계약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을 하나님 에게 매기 위함이었다. 기타의 일들에 관해서 사도는 여러가지의 속죄를 함 께 섞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이것에는 아무런 불합 리함도 없다. 사도는 피로 말미암아 행하여졌던 구약에서의 속죄 문제를 일 반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슬초와 붉은 양털로 피를 뿌렸을 때, 이 것은 성령에 의하여 행해지는 신비적인 피뿌림을 상징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우슬초가 깨끗하게 하고 순화시키는 특별한 효 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씻기 위 해서 지금 자신의 피를 뿌리는 대신 그의 영을 사용하신다. 이 때 그는 우 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주시고, 우리 육체의 타락된 욕망들을 순화하 시고 자신의 의의 고귀한 색채로 우리를 채색하신다. 하나님은 이것을 무익 하게 제정하시지는 않았다. 다윗도 이것에 언급하여 시편 51편 7절에서 "우 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라고 말하였다. 진지하게 생각 하려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귀절에 관해서 내가 언급한 것만으로써 충 분할 것이다.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 거의 라고 그가 말할 때 그는 어떤 것들은 다른 방법으로 깨끗하게 된 것도 있음을 보 여주려고 것들을 한 듯하다. 확실히 그들은 종종 그들 자신이나 또는 다른 더러운 하는 씻는 데 일반적으로 물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물조차도 깨끗하게 능력을 제사로부터 얻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가 결론하여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마지막에 말하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므로 더러움은 제사에 의하여 깨끗하게 될 때까지는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깨끗함도 구원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 없이는 아 무 깨끗함도 구원도 가져올 수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이라는 제사로부 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가 단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즉 이 상징은 거의 언제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때 깨끗하게 됨이 없었다 보호하더라도 그 잘못은 피에는 없었다. 왜냐하 면 모든 의식들은 그 능력을 어떤 점에서는 이 보편적 속죄로부터 빌어왔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하나하나 뿌림을 일반은 것은 아니었다(작은 양의 피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충분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럼 에도 불구하고 깨끗하게 함은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래서 거의 라 는 말은 이 의식이 빈번히 행하여졌으므로 깨끗하게 하는 의식에 이것이 제 거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과 '같다; ]2이것들은 오직 상징에 지나지 않았 기 때문에 여기에 잘못 나타났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는 사도의 의도와는 아주 멀다.
"사함이 없느니라. " ;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있다. 하나님이 인간들 모두에 대해서 노하고 계심은 보당연한 일이므로 노여움을 푸실 때까지 인간들 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기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게 하는 유일한 수단은 피에 의하여 이루어진 속죄이다. 그래서 우리가 피 를 가져오지 못하면 죄의 사함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이 일은 우리가 믿 음으로 미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피난처를 구할 때 일어난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 요가 있었으나~~~~~" ; 구약에 세웠던 피는 '유언자(그리스도)의 피는 아니었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저 장막은 이 땅 위의 것이었으므로 동물의 제물에 의해 드려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 (깨끗하게 하는 1일과 깨끗하게 함을 받는 것들 사이에는 유사함 과 닮은은 점(analogiam et similitudinem fuisse)이 있었다. 한편 그가 말하 고 있는 하늘의 모형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드려졌다. 여기에는 염소나 송 아지가 소용될 여지는 .전혀 없고 결국 유언자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 여기의 의미는 이러하다. 즉 율법 아래에서는 .영적인 것에 대한 지상적 상징들이 있었으므로 속죄의 의식도 또한 육체적이고 표상적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모형은 이 세상적인 것을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탁월성에 어울리는 동물의 피 이외의 피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진정한 확립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유언자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하고스터는 사도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것이며 그것 안에는 진리의 확고한 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더 좋은 제물 이라는 말 대신에 (여러 개의) 더 좋은 제물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하나뿐이지만 뚜렷하게 대조하기 위해서 복수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24. 그리스도께서는~~~~~~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게 아니하시고" ; 이것은 앞 귀절의 확인이다. 그는 진정한 성소, 즉 하늘에 있는 성소에 관해서 말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리스도가 거기에-'들어가셨다고 덧붙여 .말한다. 필연적으로 이에 개역 성경에는 소 의 뜻이다. 성소가 멸망을 그가 여기에서 에 :합당한 확인이 '뒤따라야 한다. 그는 '거룩한장소' (한글 」'성소 라고 전반역되어 있음)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 그가 성소를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Ι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면치 못하는,피조물(가운데{포함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말하는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별이D반짝이는 하 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하늘의 위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을 의미한다. 사도는 낡은 정소'를 참 성소, 즉.'영적인 성소의 모형' 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외적 상징으로만 경험되는 그것을 자연적 감각으로 보는, 즉 거울로 보는 것 같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헬라 저자들은 기독교회의 성례 전들을 논할 때에 때때로 이와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현명하고 적절한 사용법이다. 눈에 보이는 성례전은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옛날 레위 문제사장은 정책성들 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지만 그것은 다만 상징으로서였다. 그러나 확 고한 실체와 상징의 완전한 실현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 기 위하여 진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 나님의 법정에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할 아무 이유도 없다. '우리는 이 법정 에서 이처럼 좋은 변호인을 가지고 있어 :그의 신앙과 비호()에 의하여 완전하고 평온하게 된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계셨을 때에 우리 의 변호인이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보호자로서의 과업을 떠맡기 위해서 하늘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언제나 이 일로 해서 우리에게 오게 되는 큰 은혜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변호로 우리를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나타나
시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어떤 사람의 질문은 참으로 얼빠진 질문이요, 문제커리도 안되는 질문이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바는 오직 그리스도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목적인, 우리를 위한 그의 중재의 간구에 관해서 뿐이기 때문이다.
"25. 대제사장이 해마다~~~~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 니하실지니. " ; 그러면 그리스도가 아무런 '제물도 드리치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제사장이란 말이냐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제사장의 임무나 인품 때문에 계속적인 제사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율법 아래에서도 해마다 주요한 제사들을 위하여 법정적인 날들이 있었고, 또 날마다 행해지는 아침과 저녁으로 일정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린 저 유일한 제사는 영원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효력에 의하여 지탱되고 옹호를 받고 있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이 없다. 또한 여기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가 레위 제사장과 어떻게 그리고 어디가 다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소'에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제물의 성질에 있어서의 한 가지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드리신 것이지 짐승을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는 다른 또 하나의 사실상의 차이를 추가하 고 있다. 즉 율법 아래서 희생이 빈번하고 거의 끊임 없이 되풀이된 것과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는 희생을 되풀이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 사도 는 이제 만일 우리가 유일한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속죄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 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몇 번이고 죽으셔야 했다는 말이 된다고 그 는 추론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제물은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 은 일은 참으로 터무니 없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이 유일한 제물의 능력은 영원한 것이며 모든 시대에 미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라는 말은 태초부터 어느 시대에나 속죄를 필요로 하는 많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물이 태초부터 효 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열조들 중 단 한 사람도 구원을 얻지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만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하였기 때문에 만 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에 화목시키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세상 끝날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단번에 고난으로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에 게는 구원받을 아무런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많은 죽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단번의 제물로 만족하자. 이 일로부터 명백한 것은 교황주의자들이 명확히 세우기를 좋아하는 구별이 얼마나 경박 한 것이겠는가? 교황주의자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드리 신 제물은 피의 제물이었지만 자신들이 하나님께 매일 드리고 있는 체하 는 미사(Mass)의 제사는 피 없는 제사라고 엉터리 소리를 하고 있다. 만일 그와 같은 교묘한 핑계가 허용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을 생각하 지 못한 일에 대해서 그 부주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죽음을 동반하지 않는 제사란 없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 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의 저자들이 그렇게 발했던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사를 자기가 좋아하는 식으로 발명해 내는 권한은 인간 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피를 흘리는 일이 없는 제사로는 죄가 용서 반을 수 없다고 하는 성령의 진리는 확고하게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몇 번 이고 드려졌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생각해 낸 착상이다.
"자기를 표단번에 제사로 가드려 범죄를 없게 하시려고" ; 이것은 다니엘서(924, 27)에서 죄의 봉쇄와 제거가 약속된 후에 제사의 완료가 지적되어 있는 예언과 일치된다. 죄가 파괴되었는데 속죄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이 죄의 파피는 죄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에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지 는 일은 없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있 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날마다 사함을 구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는 오직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죽음이라는 보증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화목되 므로 그것에 의해서 죄가 멸절되었다는 말은 진실이다.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때가 차매'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을 사도는 세상 끝에 따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 영원하신 의지에 의해서 결정하신 시간의 성숙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왜 이 일이 좀더 일찌기 ,일어나지 않았던가, 왜 오히려 이 때가 아니고 다른 때에 일어났던가 등의 호기심을 가지고 묻고자 하는 기회가 봉 쇄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아버려에 복종하지 않으면안된다. 비록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명백히 아시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도가 말하는 것은,리스도가 이 목적을 위해서 아버지에 의의 해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으므로-그의 죽으심은 시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능력은 만물과 모든 시간의 정당한 지배권이시며, 아버 지는 그 완전하신 지혜(비록 그 지혜는 우리에게 모습겨져 있기는 하지만)로 말미암아 만물과 모든 시간의 진행을 결정하시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이 세상 끝 은 지나간 시간의 불완전성에 대립시켜 제시되어 있다. 하나 님은 구약시대의 그의 백성들을 불안정 속에 놓아두셨기 때문에 그들이 "아 직 안정상태에는 도달하지 않았음을 게 재결론지을 수 있다.유이 때문에 바 울은 고린도 전서10장 11절에서 말세를 만난 우리 라고 전언하는데, 이 말을 통해; 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모든 것에 완 성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때가 찾다는 말은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를 의미하므로 마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하여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은 가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사를 갱신하려고 원하는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모욕과 악을 고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나타 나셨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두세 번 오셨다면 처음의 제사는 불완전 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이드세상 끝에', 때가 차매'라는 말을 부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27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 이 뜻은 우리가 죽은 후로부터 심판 날까지를 인내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항할 수 없는 일반적인 자연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물며 그리스 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데 있어서 그보다 못한 인내를 갖는다는 말인가? 만 일 긴 세월이 일반의 인간들로부터 축복된 부활의 소망을 결코 빼앗아 버 릴 수 없다면 그리스도에게 경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부조리 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제 2의 죽음을 요구한다면 우리 는 이처럼 그에게 경외를 나타내지 않게 된다. 그는 이미 단번에 영원한 죽 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은 두 번 죽 은 것이 아니냐고 반론한다면, 즉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 들의 보통 상태에 관한 것이며 홀연한 변화로 멸망에서 옮겨진 사람들은 이 대열에서 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오직 흙아 되어서 육체의 구속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만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8. 죄와 상관 없이~~~~두번째 나타나시리라." ; 사도는 다음과 같은 오직 하나의 논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만으로써 우리에게는 충분하므로 새로운 종류의 속죄를 소망하는 따위의 부질없는 잘못된 욕망에 의하여 마음을 흐트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한 번 나타나셔서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물을 드리셨고, 또 그의 재림에 의 하여 그는 그의 죽음의 효력을 명백히 나타내실 것인데, 그리하여 죄는 이 제 더 이상 우리를 해칠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죄를 담당하시려고"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 사람들을 그 유죄에서 해방시킨다는 뜻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 는데, 이것은 로마서 5장 15절에서처럼 모든 사람 을 의미하고 있다. 모 든 사람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물 론 확실하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그들의 불신앙이 그들을 가로막기 때문에 일어난다. 물론 그 문제는 여기에서는 다루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사도 는 얼마나 적은 사람이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국음으로부터 유익이 되었느냐 하는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 들을 위해서 제국으신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수를 유일에 대비시 키고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상관없이 나타나신다 고 사도는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 죄라는 말을 로마서 8장 3절, 고린도후서 5장 21절 및 모세의 여러 구절에 있어서처럼 죄를 깨끗하게 씻는 제물, 또는 속죄하는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좀더 명확한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즉 그리스 도는 자신이 오실 때 자신이 죄를 어떻게 제거하셨는가 하는 것과 그리하여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어떠한 다른 제물도 결코 필요없다는 것을 명백 히 하실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법정에 올 때,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뒤에 계속되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라는 귀절의 논 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달리 .해석하여 그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자 들에게 라고 읽는데, 앞의 뜻이: 더 -적절하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안심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죽음에서 완전한 구원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온이런|기대는 이 『당면한 ]주제에 합치된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살전1:10) 신자들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모든 신자 들에게 공통적인 일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구별 하기 위한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주께서 오심을 말하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다. 사도는 지금 우리가 그리프도의 단번에 드린》제사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이그는 안식을 우리가 도크리스도를 기다리는 일 로 부르고 있는데, 이유는 '우리카 「그리스도의 구속만으로 만족할 때 다른 새로운 구원 수단이나 도움을 찾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