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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

1. 성경 (히11:1 ~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1)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2)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3)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4)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5)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7)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8)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9)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0)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1)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 .여기를 제 11장의 시작으로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문장의 연속을 잘못 끊는 것이다. 사도의 목적은 그가 앞에서 말한 것, 즉,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의 증언을 인용하였다. 사도는 이제 아직 입증하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믿음을 인내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음은 믿음을 믿음 자체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음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논지의 순서는 '우리가 인내를 갖추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구원의 목표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는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지자는 예언했지만 믿음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먼 곳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자체 안에 필연적으로 인내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믿음은~~~~~실상이요"라는 것은 삼단 논법의 소명제가 될것이다. 이 일로부터 명백한 것은 믿음에 관한 정확정의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있다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에서 믿음의 본질 전체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본질 중에서 자기의 논지에 맞는 부분만을 선택하고 있다.즉 믿음은 언제나 인내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귀절에 관해서 고찰하여 보자. 사도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바라는 것이란 지금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직 숨겨져 있는 것, 또는 적어도 그것의 회득이 따를 때까지 연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도는 바울이. 로마서 8장 24절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데, 즉 거기에서 바울은 소망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 후에 소망하는 것을 인내를가지고 기다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리하여 히브리서 저자인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이미 나타난 일들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라, 아직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이 문장의 모순된 외관에 그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믿음은 실상, 즉 우리가 그 위에 확고히 서는 버팀기둥 혹은 토대라고 한다. 그러나 무엇의 버팀기둥이며 토대인가? 현재 우리 눈앞에 없는 것, 즉 우리의 발 밑에서는 매우 멀어서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훨씬 초월하는 것의 버팀기둥이요 토대라는 것이다. 실상과 성격을 나타낸다. 불신앙이 고만한 이유이와 똑같은 생각이 큰 다음 귀절에도 있다. 즉 사도는 믿음은 보지 못한것들의 증거, 말하자면 실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실상이라는 것은 사물을보이게 하는 것이며 보통은 우리의 감각에 속하는 것에 적용된다. 이 두 가지 일들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모순되지만 믿음에 관해서는 완전히 유일치한다. 하나님의 영은 숨겨진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저히 그의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지만 우리는 결국 죽는다. 축복을 받은 자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지만 우리는멸망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어 있지만 죄는 여전히 우리안에 살고 있다. 

 

우리는 복 있는 자라고 들었지만 한편 무수한 불행에 짓눌리고 있다. 우리는 풍부한 모든 은혜의 약속을 받고 있지만 종종 배고프고목이 마르다. 하나님께서는 곧 오신다고 선언하고 계시지만 우리의 외치는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시지 않는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소망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광휘를 통해서성령에 의해 어둠의 한가운데로부터 세상 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될것인가? 그러므로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말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은 가끔증거 라는 말을 '확신'이라는 말로 바꾸어 번역하는데, 나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도의 마음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실상' 또는 증거 라는 명사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 선진들이 이로써~~~~~~" ; 사도는 '옛날의' 열조들이 구원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된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이다 라는 논의를 이장의 끝까지 계속한다. 유대인들이 그 자신들의 연조에대해서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들 '사이에는 열조에 대한 다소 지나친 존경심이 있어서 그들이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몰두함으로써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도록 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 이 일은 야망에 의해서나 미신에 의해서 또는 그 :양쪽 모두에 의해서일어났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축복받고 거룩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 이 칭호에 아주 우쭐해져서 하나님에 대해서보다도 인간들에대해서 그들의 눈을 돌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들 .안에는대항 의식이라는 비뚤어진 정신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조들에게 모방할 만한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마치 모든 종교가 거룩하고 완전한 옛 전의식들에 있기나한 것처럼, 옛 의식들을 굳게 지키는 관습이 생겼다. 사도는 이 잘못을 논박하고 열조들의 주요한 특색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후예들이 어떻게 해야 함으로 그 열조들과 같은 자가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사도가 전개하고 있는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열조들은 모두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들이는 열조들과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며, 또한 믿음을 버리자마자 그들은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자가 되고,이제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적자들이 아니고 일시적이고 가치없는 서자들이되었다는 것을 그들 자신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우리가 아나니." ;  이것은 앞의 문장의 아주 훌륭한 입증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의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짐승들과 아무런 다를 바가 없다. 인간에게 이성과 지력이 주어진 이유는 그 창조주를 알기 위한 목적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일 뿐이다. 그러므로 열조들 사이에서는 다른 모든 미덕 이상으로 믿음이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신자들도 알고 있는 것'을 믿음에 의하여 이해한다고 사도가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의 외관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조차 무언가 창조주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때문에 바울도 (롬1:21) 모든 사람들을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책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마땅한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마음에 특히,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자라는 것을 추측하지 않았다면 확실히 종교라는 것이 이처럼 모든 민족들 사이에 번성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믿음 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이 지식은 믿음 없이도 일어날 수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자 한다. 세계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어떤 추측은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렴풋 하였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생각해 냈을 때는 언제나 그들의 생각은 곧 애매모호해져서 진실한 하나님을 파악하기보다는 오히려 암흑 중에서 신의 그림자를 불확실하게 더듬어 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훌쩍 스쳐 지나가는 덧 없는 억측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지식을 얻기에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더우기 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우연에 돌렸다. 그리고 이 세상의 유일한 만물의 지배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비췸을 받고, 또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면 결코 파악할 수없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모든 피조물 안에 빛나고 있는 그의 본질적인 빛에 대해서 소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러한 지혜를 신앙의 덕택으로 돌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건축가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확신하고 있으며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고능력을 다만 세계 창조 때에 나타난 것으로써 인정할 뿐만 아니라, 창조된 세계의 유지와 보전에 있어서 계속 나타나는 것으로써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만 능력에 관하여서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인자하심과 지혜와 공의에 관해서도 이 느낌을 갖고 있다.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 모든 주석가들이 이 귀절에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나는 믿는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이 (에크 ; ~로부터)라는 전치사를, 'ραινομёνων(파이노메논 :보이는 것)이라는 분사로부터 분리하여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라고 해석하는 사실로부터 일어난다. 이러한 말로부터는 어떠한 의미도 이끌어낼 수가 없거나 기껏해야 매우 빈약한 의미 밖에 안된다.  뿐만 아니라 문맥은 이러한 의미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럴 경우에 이 말들은μη фαινομёνων(에크 메 파이노메논; 보이지 않은 것으로부터)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의 말한 순서는 다르다. 만일 우리가 이 말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축어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절은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이 뚜렷이 보이는 것들의 광경들이 되었다' 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전치사인 (에크: ~로부터)는 분사와 결합된다.  이 말들은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백한 형상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귀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그 만드신 보여 우리가알게 된다'(롬1:20)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계라고 하는 건축 전체를 통해서 자신의 영원하신 지혜와 인애 하심과 능력에 관한 명백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 자신의 역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신성의 거울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세계를 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그 자신을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나타내심으로 보는 눈을 주신 신자들은 다시 말해서 모든 이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피조물 안에 있어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들을 인식한 것이다. 계는 실로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가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  사도는 이제 성도들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든지 간에 그들은 그 가치와 그 유용성을 믿음으로부터 얻었고, 그들이 어떠한 탁월성을 가졌든지 간에 그들의 탁월성은 믿음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하고 있다. 이 일로부터 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열조들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사도는 두 가지 이유에서 믿음을 칭찬하고 있다. 첫째는 그 복종 때문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의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시도 하거나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에 의한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만 믿음은 그 가치와 유용성을 갖게 된다. 이 장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발견될 때, 언제나 사도가 목적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이외의 다른 믿음의 규칙을 갖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과 우리는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의지하여야 하는 것임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는 첫째로 말하기를 아벨의 제물이 그의 형의 제물보다 더 낫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아벨의 제물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짐승들의 기름은 그 냄새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그런 냄새는 아니다.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희생을 기쁘게 여기셨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기뻐하셨다고 하는 모세의 말로부터 우리는 아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쉽게 결론 지을 수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기쁘시게 한 일은 그가 믿음으로 깨끗한 마음을 가졌다는 일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  .우리들 자신이 은혜 안에 받아 들여질 때까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무런 행위도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혹은(좀더 간단히 말하자면) 의인의 행위가 아니면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 앞에 의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내가 방금 말한 것을 사도는 확증하고 있다. 즉, 그의 이 추론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셨으므로 아벨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 가르침은 유익하고 또한 우리에게는 그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에 있어서 영광스러운 것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즉각적으로 감탄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공정하게 평가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내적 순수함만을 보시며 어떤 일의 외적 모습에 주의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될 때까지는 어떤 올바른 일도 우리에게서부터 산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저가 죽었으나~~~~~" ;  아벨이 살아 있을 때 못지않게 죽은 후에도 아벨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셨다는 것도 또, 오히려 말하느니라" 고한 믿음의 문제이다.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말할 때", 사도는 '하나님은 아벨의 참사에 충동을 받아 그 복수를 하셨다고 모세가 말하고 있는 그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벨이 또는 그의 피가 말하고 아벨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다. 죽은 아벨을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셨다는 것은 아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특별한 증거였다. 이 일로부터 그가 하나님의 성도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에게 귀중한 것이다.

 

"5: 믿음으로 에녹은~~~~~" ; 사도는 가장 옛날 사람들 중에서 소수를 선택 하여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자손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역할을 시키고 있다. 에녹이 옮겨진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에녹을 특이한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옮기셨는가 하는 이유를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였던가를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증표였다. 그 당시에는 불신앙과 갖가지의 부패가 도처에 충만했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지켜져서 부패되지 않도록 되었다고는 아무에게도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지는 않고 옮겨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하늘로부터 나타나서 마치 불 속에서 그를 건져내듯이 그를 옮기셨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보통이 아닌 영예였다. 사도는 에녹이 이 영예를 얻은 것은 믿음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모세는 에녹이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의는 믿음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사실은 당연히 그의 믿음에 연유한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는 복잡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좋다. 즉 그들은 에녹과 엘리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공연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기 위하여 이 두 사람은 교회 종말의 날까지 숨겨져 있다가 때가 되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고 그들은 예언하고 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허한 철학은 지력이 모자라는 인사들에게나 맡겨 두자.  그들은 확고한 토대에 머물러 있을 수가 것이다. 우리는 에녹과 엘리야가 옮겨진 그것은 특이한 죽음이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해야 하며, 또한 그들이 죽을 운명에 있는 썩어버릴 육신을 벗어 버리고 다른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과 함께 영원한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 이 명제는 사도가 이 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모든 예들에 공통되지만, 그것에 관해서 다소 분명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이 명제의 의미를 더 면밀히 검토해 봄은 보람있는 일이다.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자보다 더 좋은 해석자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바로 뒤에 첨부하고 있는 증명이 우리에게는 일종의 해석이 될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열려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믿음이 없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자들이라는 말이 된다. 사도는 이 일로부터 믿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얻게 하는가를 먼저 보여준다.  왜냐하면 믿음은 참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사이기 때문이며, 다음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 한층 확신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일이 무익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부분은 가볍게 지나쳐버려서는 안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둘째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일은 무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실재 하심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고 사도가 요구하고 있는 사실은 그렇게 큰 요구를 하고 있는 것 같이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좀 더 면밀히 고찰해 보면 그것에는 참으로 풍부하고 깊고 숭고한 가르침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거의 누구에게나 다 이론이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그 자신에 관한 확고한 인식에 붙들어 두시지 않으면 모든 종류의 의심들이 우리 마음 속에 살며시 기어들어 와서, 신성에 관한 모든 감각을 우리 마음 속으로부터 밀쳐내 버리게 된다. 확실히 인간의 지력이라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허무함에 특히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잊어 버리기 쉽 다. 그리고 사도는 다만 무엇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납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인가를 분간할 수 없다면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한다 하여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어떤 우상을 발명해 내서 그것에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 봤던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사도가 이 부분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 속 깊이에 확신하지 못하고 갖가지의 사실에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는 결코 없다고 말한다. 이것으로부터 명백한 것은 만일 인간들이 올바른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모든 종교들은 오직 무익할 뿐만 아니라 사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상과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진리가 지배하지 않는 곳에 종교는 없다. 만일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경의와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위엄과 더불어 공표될 때에만 비로소 진실로 알려지는 것이다. 이 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열심이 생기고, 또 우리의 전 생활이 (그 목표에 대해서 처럼) 하나님을 지향하게 된다. 

 

둘째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일이 무익하게 끝나는 일은 없다는 확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확신은 그것 자체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포함하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실제로 체험함이 없이는 하나님께 구원을 얻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을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거나 하나님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다만 생각만 할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일지라도 때로는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으나, 그들은 확실하고 확고한 믿음에 의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 하나님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것은 믿음의 제 2의 부분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제2의 부분을 부정하게 왜곡하여 그것으로부터 행위의 공적을 이끌어내고 그리하여 그 행위의 공적에 해당하는 것을 신뢰한다. '만일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의례히 믿음이 행위의 공적을 존중할 것이다' 라는 그 잘못을 논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길을 떠나서 해매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는 올바른 길은 사람이 영원한 죽음의 선고를 받아서 양심에 찔림을 받고 완전히 좌절한 상태에서 절망하고 구원의 유일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일이라고 성서는 단언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 행위의 공적을 쌓아도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은 분명히 어떤 곳에서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하나님을 찾는 데서 이 원리를 정직하게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곤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 주시는 일은 행위의 값어치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궤변가들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를 가질 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냉랭한 주석을 타파하게 된다. 사도의 의도는 우리를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코 헛된 수고가 아니라는 것을 각 사람의 양심이 굳게 확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분명히우리가 우리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특히 각 사람이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할 때가 그렇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가르침의이익과 효용을 각 사람들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마음에 두고 계시므로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은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과, 우리의 변함없는 구원자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 없이는 이런 것들 중, 아무것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으므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에게 주목해야 하며 오직 그에게만 의지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이 두 부분에서 우리는 사람이 믿음없이는 어떻게 왜 하나님을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를 알게 되고 결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모두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가지고 우리를 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교정책은 우리의 능력 안에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가지고 우리를 지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이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 결과 어떠한 부패한 미신에게도 결코 미혹당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며, 그 다음에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때이다.

 

만일 누가 이 논의에 관해서 더 한층의 발전을 원한다면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시도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헛 것이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 진정한 인생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하는 일이며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앞서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민음과 신뢰가 수반되지 않으면 별로 유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무익하게 찾는 일은 없게되고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을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될 때 믿음이 오직,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하게 되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게 한다. 사람이 교만으로 말미암아 소경이 되고 또 타락된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미혹되기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이 인간의 공적에 대해서 보상주가 되신다는자신은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신뢰는 공적이나 인간 자신의 가치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만 발견되기 때문에 오직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만을 주목해야 한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  이것은 놀랄 만한 미덕의 본보기였다. 즉 온 세계가 아무런 주의함이나 자제함이 없이 향락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의 심판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처럼 형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오직 노아만은 오랜 기간에 걸쳐 경고 기간이 지났음에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비하였던 것이다.그리하여 노아는 120년에 걸려서 피곤하고 지칠 정도로, 일하여 방주를 건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많은 불신자들이 몹시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굽히지 않고 변함없는 신념을 갖고 견디어 냈다.그리고 온 세계가 멸망하는 가운데서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점을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방주에 운명을 걸고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였던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간단히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고찰하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와 같은 탁월한 미덕이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제까지 사도는 원시시대에 살았던 열조들의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이 홍수로부터 구출된 것은 일종의 재생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일로부터, 인간은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을 받을 수도 없고 또한 칭찬받을만한 아무런 일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제 노아의 경우에서 우리가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노아는 장차 올 일들, 그러나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들을 경고받고 두려워하였다는 것과,

둘째로 그는 방주를 건조하였다는 것과,

세째로 방주를 건조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세상을 정죄하였다는 것과,

네째로 그는 믿음에 의한 의의 후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 믿음을 순서의 제일 앞에 놓은 것은 믿음의 능력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는 원칙에 끊임없이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숨겨져 있는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보는 일은 확실히 믿음의 목표이다.  

 

120년 후에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를 노아가 들었을 때, 시간의 길이가 그의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첫째로 중요한 점이었다. 둘째로, 그 사건은 그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셋째로, 그 동안에 노아는 불신자들이 마음에 아무거리낌도 없이 향락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이 엄청난 홍수의 선포는 단순히 헛된 협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존중하였기 때문에 그의 눈을 당대의 일반적인 사물관으로부터 돌려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협박하고 있는 파멸을 마치 현재의 일처럼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심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준비하게 하였고, 후에는 방주를 건조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 믿음을 실천하였다.그런데 사도는 왜 믿음을 두려움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에 대해서질문이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은혜의 약속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바울은(롬108) 복음을(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노아는 두려운 마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을 부적당하게 말한 것같이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믿음이라는 것은 실로 언약으로부터 생기며 언약에 기초하고 있고 언약을 믿는 것이라' 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믿음의 진정한 목표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는 우리와 화해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구원의 언약이 확인되고 보증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하나님께 유의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흑 이 말을 좀 더 간략하게 말한다면, 믿음의 임무는 하나님께서 발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아무런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언약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경고에 대하여 복종하는 일이다. 그러나 은혜의 언약을 이미 알고 하나님을 자비하신 아버지와 구원의 창조주라고 인식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아무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도록 충분한 감동을 받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경고로 재촉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도록 결코 노 력하지도 않기 때문에 복음을 그 주요 부분 때문에 제유법에 의하여 믿음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믿음과 복음과의 사이에는 상호의 관계가 확립되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직접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역시 하나님의 경고에 유의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복종이 이 귀절에 집중되고 있다. 방주를 건조하는 일은 오랜 세월이 걸리고 대단히 수고스러운 작업이었으며, :수많은 ,불신자들의 조소에 방해를 받았으며 수천 번이나 작업이 중단될 뻔하였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이 선하고 거룩한 사람을 우겨싸고 욕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가 불신자들의 파렴치한 모욕을 한결같이 줄기찬 마음으로 견디어냈다는 사실은 그의 보통 아닌 단호한 복종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노아가 이처럼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이미 구원의 소망으로 그에게 준 언약에서 안식을 발견하였기 때문이고, 또 그가 끝까지 확신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아가 그렇게 많은 고난들을 그 자신의 의지로 견디어 낼 용기를 갖고 있지 못했고, 그렇게 장애물들을 극복할 힘도 없었고, 또 미리 믿음의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면 그렇게 견고하게 자기 목적에 집착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순종을 가르치는 유일한 교사이며,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믿음의 부족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믿음의 결여는 이 세대에 두려울이만큼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주 적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고 하는 것을 노아의 구원에 관해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또 문맥 상으로 보아서 이것을 노아의 믿음에 관해서 말한 것이라고는 거의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을 노아의 방주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는 두 가지의 의미에서 이 세상이 방주로 인하여 정죄를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노아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을 방주를 건조 하는 데 소비하였다는 사실은 사악한 자들로부터의 모든 변명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사건은 이 세상의 파멸이 당연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방주가 오직 한 가족의 안전을 위한 보호자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거룩한 사람인 노아를 불경건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도록 보존하셨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그가 살아남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의 정죄는 그렇게 명확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노아가 하 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모범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강략함을 정죄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음 가운데에서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았다는 사실은 전 세계가 멸망한 것이 당연한 일이며, 만일 세계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노아의 방주를 보전하셨을 것이라는 증거이다.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  이것은 노아 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는 마지막 것이다. 모세는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믿음이 이 의의 근본이고 원인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여러 사실들에 의하여 이것이 증명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그가 아버지같은 자비에 의한 언약에 의지하고 또 그의 생활이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면 결코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 함으로써 그 자신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실일 뿐만 아니 라, 어떤 사람의 생활이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표준에 의하여 측량될 때는 죄사 함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는 반드시 믿음에 기초하고 또 의존하지 않 으면 안되는 것이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사도는 이제 아브라함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주요한 아버지이며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거룩한 자손이라는 이 유일한 영광 때문에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보통 인간의 신분보다 뛰어나기나 한 것처럼 여기고 있다. 사도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고 간주되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그들을 믿음으로 다시 인도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신은 믿음에서 나온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탁월한 것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즉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은 이와 같은 믿음에 의해서 그는 자기의 소명을 끝까지 지켰던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너무나 확신에 찼던 것은 인내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즉각적인 순종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옛날의 ,주석가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아브라함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빈약하고 효력없는 의미가 된다. 나는 오히려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자기의 고국을 떠나도록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는 자발적으로 이 유랑 생활에 기꺼이 복종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것은 다윗이 말하는 것 처럼 (시편 119:105) 말씀이 우리가 가는 길을 등불과 같이 비춰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믿음의 원칙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니면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전 생애를 통하여 지켜야 할 일임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 이 .부르심의 명령에 더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업으로 받을 땅을 주겠다는 언약을 첨부하였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을 즉시 받아들이고 마치 소유하러 보내지는 자처럼 급히 나갔다. 손 안에 있는 것을 버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아직 알려져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서 나간다는 것은 특별한 신앙의 시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출발을 명령할 때, 아브라함을 보내고자 하는 땅을 그에게 보여주지 않고, 그 마음에 정처없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까지 방치해 두신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땅이라고 지적하는 일을 연기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더 연단하기 위한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향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아브라함을 지체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마음을 붙들어 매어서 집을 떠나지 못하게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으므로 그의 믿음은 일체의 장애물들을 타파하고 그를 주님께서 부르신 곳으로 데려갔던 것이다.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  두번째 문제점은 이것이다. 즉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아브라함은 기껏해야 겨우 이방인의 나그네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소망했던 유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확실히 그의 마음 속에는 그가 하나님께 속았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도는 그 말을생략하고 있지만 자기가 기만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더 큰 증거가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기근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에서 쫓겨나서, 다음에 그랄 땅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사도는 그가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는 자였다고 말함으로써 오직 이 한 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그의 견인불발의 신앙을 칭찬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거하는 자의 형편이란 약속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 시련을 용감하게 이겨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탁월한 신앙의 미덕이었으며, 그것은 오직 믿음에서만 생기는 일이었다.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 사도는 여기에서 그들이 동일한 장막 안에서 동일한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도는 아브라함의 아들과 손자가 아브라함 자신과 똑같이 약속하신 땅에서 우거하는 자들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기다리게 하였지만 그들은 역시 용기를 잃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그들을 아브라함의 동료로 간주하고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신앙의 방패를 들이댐으로써 의심을 모두 물리치지 않았다면, 기다리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유혹은 더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성을 바랐음이니라:" : 사도는 그들의 믿음의 인내는 하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믿음을 수세대 후에 그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던 것은 물론 위대한 일이지만, 그들은 단지 그곳에 머물러 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늘 자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진 것이다. 사도가 하늘을 "터가 있는 성"이라고 말는 이유는 하늘은 영원히 계속되지만 이 세상에는 일시적이고 썩어갈 터전 밖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가 하나님을 하늘의 창조자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 아닌 것 같이 보여서 이상한 말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거니와 지상 건축물의 재료에 인공이 가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작품이 지상의 건축물에 있어서의 인공과 비교된다 해서 부적당하다는 법은 없을 것으로 안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모두 그것을 만든 자의 일시성을 반영하고 있고, 천상의 생의 영원성은 그것을 창조하신 분인 하나님의 본성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 피곤하지 않게하기 위해서 모든 피곤함은 이 천상의 삶에 대한 기대 때문에 가볍게 된다고 사도는 지적하고 있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이 진리가 남성에 대해서와 똑같이 여성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사도는 사라의 실례를 들고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앞에서 사라를 들고 있는 것은 사라가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칭찬을 받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녀는 천사의 말을 농담으로 알고 웃었기 때문에 그녀의 불경건함이 노출되었던 것이다(창18:12~15). 그녀의 웃음은 결코 존경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천사에 의하여 그렇게 신랄하게 힐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 믿음에는 불경건이 섞여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고를 받았을 때 자신의 역시 하나님의 인정을 반고 믿음의 칭찬을 받았던 불경건을 교정했으므로 것이다. 그녀는 처음에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거부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임을 알게되자마자 완전한 전복종으로 받아들였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아주 유익한 가르침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신앙이 좀 흔들리거나, 약간 중지될 때라도 자신의 불신앙에 굴복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이삭이 출생했을 때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은 아브라함과 그의 처, 사라의 신앙의 결실이었다.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앓이라." ; 이것들이 신앙의 힘과 본성을 설명하는 이유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사라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첨부한 이 설명은 모든 난점을 없애준다.사라의 신앙은 그녀가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며, 특히 그의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은 점에 있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일로부터 첫째,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까지 우리는 그의 진실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오직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맹신자들이나 궤변가들의 설명을 논박하기에 아주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 사이의 상호관계를 항상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말씀이 반드시 충분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 약속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라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한 분으로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의 약속에 의지하는 이 두 가지 일이 진실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12.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많이 생육하였느니라." ; 사도는 이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거의 반은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고, 한창 젊은 나이에 불임이 된 그의 아내 사라는 여자로서 이제 늙어서 생산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두사람에게서 어떤 민족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돌에서 석유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무수한 자손들이 출생했다. 지금, 만일 유대인들이 그 자신들의 기원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번성의 원인이 어디 있었는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의 현재의 번성과 축복은 모두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의 덕택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득한 신분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오직 믿음을 기초로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