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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12:11)

1. 성경 (히12:4~13)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4)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5)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6)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7)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8)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9)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0)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1)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2)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4. 너희가~~~~~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 . 사도는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박해할 때 그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 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완전히 죄로부터 깨끗하고, 죄책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싸움을 시작할 수 없다. 우리는 이것에 관해서는 그와 비슷한 점이 조금도 없다. 왜나하면 죄는 항상 우리들 안에 살고 있고, 고난들은 이 죄를 길들이고 이기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가 .알기로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은, 특히 죽음은 죄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에서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가 받고 있는 이와 같은 박해는 다른 방향에서도 죄를 멸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유용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훈련과 규칙의 멍에 아래 묶어 두시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방탕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때로 하나님은 성급함을 저지하시며 우리가 장래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하여 죄를 벌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나 혹은 우리가 죄를 범하기 전에 미리 방지해 주시기 위해서거나간에 하나님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죄에 대한 싸움에 우리를 참여토록 하신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가 그의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들이 죄에 확대한 형벌이라고 간주하시지 않는 영예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에 의해 듣는 말씀이 우리와 관련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불신자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을 고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치유법을 하나님의 복음을 변증하는 데  사용하셨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중의 은혜이다.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이 없어지는 것도 기꺼이 참았고, 온갖 수욕을 이겨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들을 게으르다고 책망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투 도중에 일찍 지쳐버리고 ,죽기까지 용감하게 싸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전투에 종사하였든지 주님께 우리의 방면을 신청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휴가병도 가지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5. 또 아들들에 권하는 것같이~~~~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 ; 나는 이것을 의문형으로 읽는다. 사도는 아직 잊어버릴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벌써 묻고 있다.있어버렸느냐고 그들에게 사도는 여기에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고 위하는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도는 솔로몬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우리는 '주의 징계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는 것이며, ,둘째는 '주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내 아들아' 라는 말로 권면을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 권면의 말씀이 이처럼 친절하고 감미로운 표현에 의하여 이끌려서 우리 마음 속 깊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솔로몬은 만일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징계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지 않는 자들은 그의 아버지같은 사랑의 표적을 거부하는 자들로서 더욱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다.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 이 추론은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신자들과 택함을 받은 자들을 무차별하게 벌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징계는 그의 사랑이라고 하기보다는 가끔 진노를 더 선포하시며, 성경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우리의 경험도 그것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느끼고 있는 징계의 효용과 결과에 대해서만 믿는 자들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벌하실 때는 언제나 그들에 대해서는 엄격하시고 격노하신 심판자로서 자신을 나타내시지만, 택하신 자들을 대하실 경우에는 그들의 구원을 고려하시는 일밖에는 다른 목적을 갖지 않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성애의 증거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종종 재난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이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고집이 세고 반항적인 아들이 그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방탕하다가 드디어는 굶주림과 추위와 온갖 불행으로 말미암아 기진맥진하게 되어 결국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당연한 징벌을 각오하게 되고 그가 겪은 환난으로 인하여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도리를 배우게 되는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것이 아버지의 징계라는 것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권속들로부터 떠나게 되며, 결국은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매가 아버지의 매라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지 않는 한, 징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의 아무런 혼적도 찾아볼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한 생각은 불신자들의 마음에는 전혀 떠오를수 없다. 그들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더우기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하나님은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권속을 똑같이 벌하시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권속들에게 손을 뻗치신다. 그것은 그의 권속에게는 특별한 배려를 하고 계시다는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즉 그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납득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신자들이 징계를 받고 있는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할 때,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한 보증을 갖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의 구원에 관해서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참고 견디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고 말한다. 난폭한 말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차버리는 자들이나, 또는 그것을 고집 세게 저항하는 자들은 이 대열에 설 자격이 없다. 요컨대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때에만 나타난다' 고 말한다.

 

"7.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여기서 사도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서 추론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의 징계를 면한다는 것은 적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인간 중에 적어도 분별력이 있고 건전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녀들을 징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징계없이는 자녀들을 진정한 신앙의 덕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물며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어찌 필요한 징계를 참으시겠는가?  만일 누가 항의하여 이러한 종류의 징계는 인간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어른의 시기에 이르자마자 중지된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쪽에서 보면 어린 아이들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회초리는 언제나 우리의 등에 가해져야 한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사도가 누구든지 십자가로부터 자유를 얻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리를 포기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수효 중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자들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회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축복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완전히 거절하는 일이 된다. 고난을 침착한 마음으로 참고 견디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일을 범하는 자들이다. 사도는 왜 처벌을 회피하는 자들을 이방인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사생자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 이유는 교회에 적을 두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지적하기를 만일 그들이 아버지의 훈계 또는 징계를 회피한다면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거짓되고, 진실한 것이 못되며, 그러므로 그들은 합법적인 적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  이 비교는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우리를 낳은 아버지에게  그렇게 큰 존경을 표하고 그 훈련에 복종한다면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훨씬 더 큰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은 '아버지들이 그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하는 연단은 오직 현세를 위해서 유용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우리를 성결케 함을 목표로 하신다' 는 것이다. 세째로는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들은 자녀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징계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의로우신 목적과 가장 높은 지혜를 가지고 그 훈련을 적용하시므로 그의 훈련은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첫째로 .사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인간은 육신의 아버지이며,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라고 단언한다. 이 일을 사도는 육신과 영을 비교함으로 그 이유를 확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욥이 그 자신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창조를 하나님의 주요한 기적들 중에 아무런 까닭 없이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관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 부르는 것은 당연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없이 영혼을 창조하시고 또 재생하시는 유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라면 바울이 그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낳은 자들의 영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공연한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은 영혼과 육체의 아버지이시며, 달리 여기에 합당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이 이름은 영혼이나 육체에 관해서 하나님의 양보 또는 증여로서 인간에게 양도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함에 있어서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으셨으며, 영혼은 하나님의 영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기적이나 중생의 역사를 의미하므로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 특별히 최고의(par excellence) 아버지라고 불려진다.

 

"공경하였거든"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사람들 안에 본래 가지고 있는 애정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호되게 다루고 있을 때조차도 이 애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권에 의하여 우리 위에 가지시는 권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은 원인 또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으며, '카이곡:그리고' 라는 접속사는 '하기 위하여'라는 분사의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에 의하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에 내어맡기기를 거절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위험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번째의 확대 설명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육신을 길들이고 억제하여 우리를 하늘의 생명으로 중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것이다. 이 일로부터 하나님의 징계의 은혜는 영원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인간의 징계에서 이와 똑같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훈련이나 징계는 시민적 질서의 일부분이며(pais ordinis politici ; 정치적 질서) 따라서 오직 현세에만 국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영적 성성이 육체의 안락을 능가할 정도까지 훨씬 더 큰 은혜를 가져온다는 말이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박하여 아버지의 의무는 그 자녀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양육하는 일인데, 그들을 훈련하는 기간은 그렇게 짧은 기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보통 정부나 국가에 관해서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사도는 여기에서 가정 생활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 비록 종교 문제를 돌보는 것은 행정관들의 의무라 할지라도, 그들의 임무는 이 세상의 한계 내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이 지상의 시민 정부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성성을 얻게 하는 데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사실은 마치 하나님의 징계가 우리를 완전히 거룩하게 하였다고 함과 같은 .식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준비하도록 하는 조력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된다. 왜냐하면| 징계로 말미암아; 육신을 억제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때문이다.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  사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우리가 목전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측정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말을 첨부하고 있다.  우리는 마치 매를 무서워하여 될수 있는 한 회피하려는 아이들과도 같다고 사도는 말한다.  아이들이 매를 무서워하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징계는 우리의 현재의 육신적 감각에 의하여서는 정당하게 평가될수 없으며, 우리는 징계의 결과를 주시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이 징계의 목적이다. 그리고 '의의 열매'라 함은 주를 두려워하는 일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의미한다. 사도는 그 열매를 '평강의 열매' 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역경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또 불안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고요히 안정되고, 그리고 이전에는 가혹하고 고통스럽게 여겨졌던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이었던가를 알게 된다.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조차도 우리의 구원을 고려하시는 것이라고 말한 후 계속하여 새로운 기쁨과 열심을 내도록 격려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과 역경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약하게 하고, 또 힘 빠지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배려하고 계심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 사도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고난을 용기를 가지고 참고 견디어 내도록 격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충고하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일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봉사를 얼마나 방해하는 지에 관해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기꺼이 표명하지만 그들은 박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심을 위하여서 손과 발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논쟁하기를 원하며, 또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선하고 올바른 목적을 위한 일들을 감당하기를 원하며, 또 하나님과 그들의 동포들에 대해서 그들의 의무를 다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미움을 받을 위험에 있기 때문에 또, 그들에게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올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때는 팔짱을 끼고 조용히 방관한다. 만일 십자가에 대한 저 압도적인 공포가 일단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어서 십자가를 참고 견뎌낼 각오를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들 안에 있는 어느 부분도 하나님께 대한 그 의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 부분이나 부적당한 부분은 없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도가 말 하려고 하고 있는 점이다.

 

'너희 손은 피곤하고 너희 무릎은 연약한데, 그 이유는 역경에서의 진실한 위로를 모르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의무를 게올리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너희에게 십자가의 훈련이 어떠한 유익을 주는가를 보여주었으므로 이 가르침이 너희를 격하여 지체 모두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서 그 결과 손과 발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소명에 신속하고 기꺼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이사야 제35장 3절에 있는 말씀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귀절에서 선지자는 교사앞에 은혜의 소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약한 손들에게 명하여 하라고 한다.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하기를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이렇게 하는 것이 주께서 이렇게 임무가 교회 전체를 보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열매라면, 마치 목사의 하는 일인 것과 같이 각 개인의 임무는 이 가르침을 각각 자기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견고케 하고 용기를 내게 통하는 일이 될수 있는 것이다.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  이제까지 사도는 강하게 되고 용기를 가지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로에 의지해야한다는것과 이것이 우리의 지탱이 된다는 것을 말해 왔다.. 그리하여 사도는 이제다른 것을 첨부한다. 즉 우리가 조심성 있게 걷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야한다는 것이다. 분별없는 열심은 게으름이나 무기력 못지않게 해로운 것이다.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곧은 길은 인간의 마음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된 ,길에만 관심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두려움은 참으로 교묘하게 샛길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약한 두려움에 말려 들게 되면 포잘못되고 비뚤어진 길을 찾으려고 하지만, 반대로 환난을 참아 견디려고 결심하는 사람은 누구나 어디든지 주께서 부르시는 곳을 똑바로 가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게 걷는다. 

 

사도가 지적하는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고, 두려움이나 이 세상의 유혹이나! 기타의 어떠한 제장애물도 방해하는 일이-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 올바른 행위의 규칙을 만들어 놓고 있다. 로마워[9있[2]를사도는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라고 부언하는데, 이것은너희가 절뚝거림으로 인하여 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는 뜻이다. 절뚝거린다는 말은 인간의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려서, 성심껏 하나님께 전심하지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하나님의예배와 [미신을 혼합하고 있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18:21)고 말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법이다.헤매는 것은 절뚝거리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비틀비틀 주절뚝거리기 시작하는 사람은 즉시 길에서 낙오되는 것은아니지만 차츰차츰 길에서 떨어져 나가다가 드디어는 죄악 속으로 빠지게되고, 사단의 .미로에 둘러싸여서 그 가운데로 .빠져 버린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가 어느 정도 절뚝거리거나 비틀거릴지라도 조속히 고쳐잡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그 전뚝거림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게 것이기 때문이다름이 말은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점점 [더 절뚝거리거나또는 점점 더 옆길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역시 똑같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길을 똑바로 걷지 못하고 조심성없이 이리저리 길을 비뚤어지게 걷다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리 떨어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