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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히12:25)

1. 성경 (히 12:18 ~ 2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8)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19)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0)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1)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2)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3)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4)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5)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6)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7)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8)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2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8. 너희의 이른 곳은":  사도는 이제 자신의 논점을 다른 논법으로 논의해 나간다. 사도는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공개된 은혜의 위대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을 가지고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배우기 위함이다. 다음에 사도는 이 달콤한 은혜를 우리가 찬양하고사랑하며 열망하도록 유도한다. 사도는 율법과 복음 을 비교함으로써 이두 가지를 역설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모세의 통치 시대보다 우월하면 우월할수록, 또 우리의 소명이 옛날 백성들의 소명보다 영광스러우면 영광스러울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는 이 축복을 합당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 이 세상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위엄을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배은은 악질적이고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하신 것처럼 무서운 자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친밀함과 우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초대하시므로 만일 우리가 그의 참으로 고마우신 초대를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중으로 망은의 죄를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에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는데 이 비교는 두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자. 즉 하나는 하나님의영광이 율법에 있어서보다도 복음에 있어서 더 명백히 나타난다는 것이고,다른 또 하나는 하나님의 소명이 이전에는 오직 두려움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친밀한 것이라는 점이다.

 

"만질만한 불 붙는 산" ;. 이 귀절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지상의 산과 영적인 산이 대비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되는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라는 말도 이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율법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나타내신 이러한 '기적들이나 표적들은그것들 자체가 놀랄 만한 것이요, 진실로 천상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앙국에 이를 때, 하나님이 거기에서 우리에 보여주시는 것은 모든 하늘보다도 우월한 것이다.: 이로부터 율법의 모든 위엄은 거의 지상의 것이 되어버린다는 결론이다. 시내산은 손으로 만질 수가 있지만시온산은 오직 영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가 .출애굽기19장에서 읽은것들은 눈에 보이는 표상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우리가갖는 것은 육신적인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반론하여시내산에 나타난 그것들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었고, 또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에까지 올라서게 되는 신앙의 외적인 실천이 있는 것아니냐고 주장한다면 나는 사도는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을 비교해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 효율법을 복음과 비교해 보면, 복음음 에 있어서는 영적인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율법에 있어서는는 지상적인 상징들이 더한층 뚜렷하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 이 두번째 부분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율법이 선포되었을 때 모든 종류의 공포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복음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고 한다. 출애굽기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엄격하신 재판관이심을 보여주려고 심판의 자리에 오르신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만일 해롭지 않은 동물일지라도 우연히 너무 가까이 오면 죽이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다. 그런데 스스로 자기 자신의 유죄함을 의식하고 또한 자신이 율법을 통하여 영원한 죽음에 정죄되었음을안 죄인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큰 형벌이 목전에 박두하였을 것인가?" 그러나 복음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반드시 사랑을 포함하게 된다. 그 이상의 것을 더 알고자 하는 사람은 고린도 후서 З장을 참조하면 될것이다.백성들이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사도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고 백성들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없도록 간절히 원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모세라는 인물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개재하여 그들의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하였다는 것이다. .

 

그러나 사도는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는: 말을 모세가 한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석가들을 당황하게 하는말이다. 왜냐하면 그 말을 모세가 했다고 말한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가 백성들의 중개자로서 백성들의 요청을 하나님께 가져와서 백성들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해결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은 백성들 전체의 호소였으나 모세는 그들 전체의 대변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 포함된다.

 

"22~23.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  본서의 기자는 이사야 2장과 이와 유사한 다른 귀절에서 그의 복음이 시온산에서부터 보나올 것이라고 약속하신 예언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시온산과 시내산을 비교하면서 시온산을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시온산을 이와같이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세상적 산을 더 이상 고집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 의도에서였다. 그들이 율법의 멍에 아래서  종노릇하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그들은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시내산으로 되돌아가야하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전 세계에 세워질 것이며, 또 스가랴에서 천사가 그의 경계를 동에서부터 서편까지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천만 천사"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복음으로 부르실 때는 우리가 족장들의 반열들과 더불어 천사들과 교제하게 되며, 하늘나라에서 축복받은 성도들의 영 가운데 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진정 아버지께서 천사들과 거룩한 신앙의 선조들을 포함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값비싼 명예이다. '천만 천사' 라는 표현을 나는 에라스무스의 표현을 빌어 '헤일 수 없이 많은'이라고 주석하지만,  그 말은 다니엘서에서 빌어온 것이다. '장자들의 총회'라는 표현은 성경에 가끔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없이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특히 족장들과 옛 교회의 뛰어난 인물들을 구별해서 말한 것이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책에 기록한 모든 택함받은 자들, 혹은 에스겔서의 기록에 따라 하나님의 비밀 장부에 기명된 자들을 의미한다.

 

"민민의 심판자" ;  이것은 아마 두려움을 주기 위한 표현인 것 같다. 사도는 이것을 마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만약 더러움이나 신성모독의 요인을 간직한 채 무례하게 하나님의 성소를 침범했을 경우  우리의 심판자 앞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이란 말을 첨가했다. 이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어버리고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떠난 거룩한 영혼들 가운데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는 이제 그들이 육체를 떠나서 더 이상 육체의 약함에 종 노릇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별된 혹은 '온전케 된' 이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육체를 떠난 거룩한 영혼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사실이다.그렇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교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본서의 저자는 "중보이신 예수"라는 표현을 부가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를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로 맞이해 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두려움없이 그분 앞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우리의 구세주가 될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피,히브리적 표현으로는 "뿌린 피"에 '의해서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그피는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한 번 흘리신 바 되었으므로, 이제 우리의 영혼은 믿음을 통하여 그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옛날의 율법 의식을 언급한다.

 

"24. 새 언약의~~~~더 낫게 말하는~~~~" ;  이 말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를 막을 수도 없고, 이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다. 즉 그리스도의피는 아벨의 피보다 효과적으로 외치게 되며, 또, 하나님이 더 잘 들으신다. 어쨌든 나는 이 말을 축어적으로 해석하며, 그 음성 자체가 더 좋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그의 음성은 우리의 죄를 사함받는 효력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아벨의 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살인자에 대한 복수를 호소했기 때문에 정당하게 외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그 외치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매일같이 속죄가 이루어지고 있다.

 

"25. 너희는 삼가 발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 사도는 앞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기를 요청하였다고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는 그때와는 무엇인가 좀 다른 뜻으로 말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바로 앞의 비교에서 그가 의도하였던 것처럼) 역시 옛날 사람들이 율법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형벌없이 무사하지는 못했으니, 지금도 복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소에서 대에 이르는 논법을 써서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때에는 하나님이나 모세가 이 땅 위에서 말하였고, 지금은 동일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말씀하신다고 한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다 하나님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사도는 하나님이 낮은 데서 검손한 방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지상에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율법의 외적인 집행에 관해서 라는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복음에 비하여 무엇인가 지상적인 맛이 있었으며, 아직 인간의 마음을 하늘 위로 인도하여 완전한 지혜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율법은 똑같은 가르침을 담고는 있지만 다만 교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완전성이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다.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  하나님께서 율법을 선포하실 때 땅을 진동시켰는데 이제는 더욱 굉장하게 말씀하신다고 사도는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땅과 하늘 양쪽을 다 진동하신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 사도는 선지자 학개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 문장을 사도는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지자는 하늘과 땅이 장차 진동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는 이것을 해석하여 복음의 소리가 땅 위에 진동할 뿐만 아니라 하늘 위에까지 꿰뚫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선지자 학개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의논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동일한 문맥에서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전에 충만케 하리라는 말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국이 오직 그리스도의 인도 아래서만 하나로 모일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욕망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영광에 있어서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하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이 온 세계에 퍼졌을 때이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오실 때를 말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왕국이 처음부터 땅의 낮은 부분까지 진동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의 능력이 하늘에까지 곧 바로 꿰뚫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라면 복음의 가르침은 더 한층 탁월한 것이며, 모든 피조물은 더 한층 명백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결론하고 있다. 

 

"27~28.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 선지자의 말대로 '조금 있으면'이라고 해석된다. 선지자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백성들의 고통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 말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천지가 진동한다는 말로 그리스도가 오실 때,  온 세계의 상태가 완전히 변할 것임을 추론하고 있을 따름이다. 피조물들은 멸망에 복종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반드시 좀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안된다.이 일로부터 사도는 또 다른 하나의 권면을 한다. 주께서 우리를 떨리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진정하고 영원한 토대를 그의 안에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옛주석가가 제시한 우리가 왕국을 소유한 즉, 은혜를 얻었다 는 이 문을 택하고 싶다. 만일 이 문장을 긍정문으로 읽는다면, 의미는 대단히 잘 통한다. 즉 복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영이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존경과 거룩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권고문으로 해석해서 '하자' 라고 한다면, 부자연스럽고 뜻이 분명하지 못한 말이 된다. 요점을 말해서 나의 생각으로는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완국에 들어 간다면, 우리는 참으로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열중하는 견고한 은혜를 얻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세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중생의 은사도 그렇기 때문이다.

 

사도는 '유아레스토스: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봉사는 자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검손과 마땅한 존경이 동반되지 않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사도는 육신을 좇는 잘못된 신앙과 거기에서 오는 게으름을 항상 규탄하고 있다.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  사도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감미롭게 설명하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엄격하심도 선언한다. 사도는 이 문장을 신명기 4장에서 빌어온 것 같다. 이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자신에게 이끄시기 위해서 아무것도 생략하시지 않았음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도록 친절하고 부드럽게 이러한 부드러운 인도하심에 아무런 진전이 없을 때 인도하시지만, 그러나 이러한 부드러운 인도하심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협하시기도 한다.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가 약속될 때는 동시에 반드시 위협을 동반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너무나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우므로) 이와 같은 자극을 받지 않으면 비교적 쉬운 가르침도 우리 안에서 고착되어 버리므로 루리를 별로 감동시키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는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 자손의 천대에 걸쳐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자신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질투와 공의로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