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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13:13)

1. 성경 (히13:8~13)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8)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9)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10)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1)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2)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  :우리가 진정한 신앙 안에 머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신앙의 토대를 굳게 붙들고 거기에서 조금도 떠나서는 안된다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있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그가 비록 하늘과 땅을 통달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식은 완전히 무익한 지식이다. 모든 천상의 지혜의 보물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사상을 그 위에 고정시킬 수 있는 진정한 지혜의 다시 없는 표준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한 주목해야 할 귀절이다.

 

사도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언제나 동일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오늘도, 세상 끝날까지도 언제나 똑같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세상에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처음부터 통치하고 계셨던 분이며, 우리가 그의 앞에 도달했을 때는 우리는 더 이상 지나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라고 함은 구약성경 시대 전체를 포함한다. 그리고 복음의 선포가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에 잠시 후에 무엇인가 갑작스러운 변화가 있을 것을 기대하는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그리스도가 최근에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것은 그에 관한 지식이 영원토록 동일하게 계속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한다

 

이로 인하여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본질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신자들 가운데 항상 계시며, 교회의 영원한 기초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논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 능력을 발휘하시기 이전부터 존재하셨다. 그러나 당면 문제는 사도가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귀절은 어떤 특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본질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지 어떤지에 관한 논의는 전혀 없고, 인간들이 그리스도에 관해서 가졌던 지식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그의 외적 형태나 모양에 있어서 율법 아래서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목표가 언제나 동일한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진실되지 못하며 적당하지 않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9.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  사도는 우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결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확고부동한 것이므로 이 진리에 우리가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된다.  참으로 모든 종류의 의견이나 가지각색의 미신들이나 모든 터무니없는 오류 등, 요컨대 모든 종교적 탈선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우리의 지혜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절대로 무익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요점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 확고하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사단의 모든 계책에 걸릴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떠나서 확고한 신앙이란 없으며, 다만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동요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을 제거하기 위한 반대 요법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소멸해 버리거나 매몰시켜 버림으로써 착안해 낸 교황주의자들의 교묘함은 실로 훌륭하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꼭 달라붙지 않으면 결코 위험을 면할 수가 없다는 성령의 경고를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한다.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곳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가르침을 '여러가지 교훈'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이외의 단순하고 순수한 진리는 다른데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여러가지 교훈들' 을 '다른'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밖에 있는 것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로 말미암아 우리는 만일 우리가 성경에 있어서 올바른 숙달을 얻으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똑바른 길을 사람은 누구나 방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또한 하나님 의 교회 안에는 언제나 이단의 교회에 대한 투쟁이 있을 것인데, 그것으로 부터 교회를 지키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의 순수한 지식으로 무장하는 일 밖에 없다고 말한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 이제 사도는 일반적인 원리에서 개개의 사실로 옮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는 식물의 구별에 관해서 공통적인 미신이 있었다. 이 미신이 많은 논의와 불일치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미신은 그리스도를 모르는데서부터 일어난 '다른 가르 침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사도는 우리 신앙의 토대를 그리스도의 터 위에 놓은 뒤 식물의 관습은 궁극적인 구원이나 진정한 거룩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식물과 대비시킬 때 은혜라는 말로 말미암아 영적인 하나님 예배가 중생에 대하여 의미하고 있음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도는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앞의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는 말을 상기시키면서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마치 그는 우리에게 확신과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적 은혜이며, 식물의 관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 귀절에서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확실히 율법 아래 살고 있었던 조상들은 유익한 단련을 받았는데, 식물의 구별은 그 단련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히려 복음의 계시 후 여전히 옛 의식 들을 끝까지 지키는 미신주의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것이 조상들을 가리킨다고 주의 깊게 설명할 수가 있다면 그것에는 전혀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확실히 '주님께서 메어 주신 멍에를 메고, 또 신자들과 전 교회에 공통적인 단련을 순종으로 받아들인다' 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식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만으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식물의 규정은 신자들이 외적 훈련에 대해서 아직 어린 아이들이나 다름이 없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존중도 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이라는 말은 식물에 구애를 받아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별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식물에 관해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의 다른 의식들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  이것은 율법의 옛 의식을 교회의 현 상태에다 적용한 훌륭한 비유(anagoge)이다.  레위기 19장에는 속죄제의 제물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 제물의 어느 부분도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사도는 적절한 암시를 사용하여 제사가 이제는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라는 말에 의하여 사도는 의식들을 집행한 모든 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장막을 외부적인 상징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뜻은 율법의 낡은 의식들이 폐지되었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불태우기 위해서 천막 밖으로 내어간 제물 안에 예표된 것은 마치 장막을 섬기는 자들은 어떤 제물도 맛 보지 못하였는데,만일 우리가 장막을 섬긴다면, 아니 우리가 그 의식들을 지킨다면 우리는 단번에 그리스도가 드리신 희생과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단번에 행하신 속죄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자신의 피를 하늘의 지성소에까지 가지고 가셨다.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가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  이 비유와 그 영적인 비교가 생명 없는 귀절이 되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에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의무를 거기다가 덧붙인다. 바울도 또한 하나님이 신자들을 허무한 의식들에서 떼어놓으려고 하실 때, 하나님은 신자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신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이와 같은 의식의 가르침을 허용하고 있다. 마치 바울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일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금 결코 무익하게 수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 저자인 사도도 또한 지금 똑같은 논법으로 논술해 나가고 있다. 장막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우리를 부를 때 그는 성전의 휘황찬란한 광휘 아래 그늘 속에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는 아주 다른 것이 요구된다 고 충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잡혀가고 탈출하고, 또는 온갖 모욕과 온갖 시련들을 다 받으면서도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도는 이 전투를 피흘리기까지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의식으로서 언급하고 있으며, 소위 고위층들만이 행하는 그늘 속에 갇혀 버리는 종교의식과는 대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