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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12:17)

1. 성경 (히12:14~1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4)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5)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6)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 인간이라는 것은 나면서부터 모두 평화와는 담을 쌓고 태어난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그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뜻에만 따르려고 하며 다른 사람의 의향에는 그 자신들을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한 노력으로 평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결코 평화를 유지해 나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매일 이와 같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여기에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 고 말하는 이유인데, 이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다. '평화(화평)는 우리가 편리할 때만 가끔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최대한의 열심을 가지고 노력하며, 평화가 항상 우리 가운데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많은 모욕을 잊어버리고 여러가지 일에서 서로 용서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과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악덕이나 범죄를 관대하게 여기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는 즉시 덧붙여 말하기를 '화평함과 함께 거룩함을 좇으라' 고 한다. 마치 사도는 우리가 불신자들과의 우정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거나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예외를 두고 화평을 권면하고 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일이다. 비록 온 세계가 전쟁으로 불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일을 버려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끈이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속담에도 말했듯이 오직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고요히 사람들과의 평화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사도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새로와진 눈으로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또는 조심하고)" ;  이 말이 나타내 주고자 하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기는 쉬운 일이며, 그러기에 이 점에 관해서 끊임없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마음이 편하거나 마음이 느긋해진 것을 보자마자 그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습격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노력하고, 그리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사도는 은혜라는 말 안에 우리의 소명 전체를 포함시킨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과 함께 협동하지 않는 한 효력이 없다고 하는데 그 논의는 어리석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의 게으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신은 끊임없는 격려를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경고와 권면을 가지고 우리를 격려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권면이 헛된 것이 되지 않고 또 효력도 없이 떠내려 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신다.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이나 자유의지를 교훈과 권면으로부터 결론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도가 요구하고 있는 주의와 조심성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또 쓴 뿌리가 나서." ;  사도가 신명기 29장에 있는 모세의 귀절을 언급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법을 공포한 후에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어떠한 독초와 쓴 뿌리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한다. 그 후에 모세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여 아무도 형벌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에 '꾀임을 받아 그 자신의 .영혼을 죄속에 버려두거나 또는 술취한 자가 자신의 갈증을 자극하기에 익숙해 있듯이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자극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고 권면하고 있다. 사도도 여기에서 똑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이와 같은 뿌리를 더 이상 자라나게 내버려 두면 그 뿌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고 손상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사도는 그들에게 명령하여 각각 자신의 마음에서 그와 같은 악독의 뿌리를 뽑으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가 그들 가운데 자라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한다.

 

그러한 뿌리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위선자들이나 불신자들이 섞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가 나왔을 때는 언제나 이것을 잘라내 버려야 한다. 그러한 뿌리가 자라서 좋은 씨를 질식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가 독초와 쑥이라고 부르고 있는 대신 사도는 "쓴" 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것이나 유독하고 치명적인 뿌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뿌리는 대단히 치명적인 악이므로 우리는 크게 조심해서 그것을 예방하고 성장해서 더 이상 퍼지는 일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16. 음행하는 자와~~~~~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고" ;  이미 사도는거룩함에 대해서 그들에게 권면하였으므로 이제 이와는 정반대의 더러움으로부터 그들을 피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구체적인 한 실례를 보여주고 '음행하는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고 말한다.  그러나 곧 후에 사도는 좀 더 일반적인 주제로 들어가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이 '망령된'이라는 말은 '거룩함' 이라는 말에 적절히 대비되는 말이다. 주께서는 자신에게 복종케 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세상을 버릴 때  주께서는 이렇게 하신다.  누구든지 그 자신의 더러움에 완전히 만족하여 그 속에 딩구는 자는 망령된 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망령된 자를 일반적인 말로  '이 세상을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주 열심히 열망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망령된 자가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의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를 더럽히는 틈을 주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또 헌신 없이는 진정한 종교는 없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육신을 억제하며 경건을 완전히 훈련하는 일에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망령된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의 더러움 속에 딩군다면 우리는 성화의 은혜를 버리는 일이 된다.

 

"에서와 같이~~~" ; 이 보기는 망령된 이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보다는 한 그릇의 식물에 더 가치를 두어서 축복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령된 자라고 함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마음 속을 지배하고 우세하여 하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야심에 마음을 빼앗기고 금전이나 부에 열중하고 대식에 .빠지되고, 기타의 쾌락들에 얽히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는 전혀 마음이 없고 조금의 신경조차도 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함이다. 뿐만 아니라  이 보기는 참으로 적절하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크심을 보여주시려고 원할 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으로 부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장자들이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단한 영예이다. 이 영예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나 모든 이익이나,  귀중한 명예, 쾌락이나, 기타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으뜸가는 것이나,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다 값싼 한 그릇의 식물과도 같다고 본다. 거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타락한 욕망이라고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보이지 않게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식물을 멸시하도록 배우워야 한다. 이 식물로 사단은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을 꾀어서 그 함정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 처음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판 행위는 어린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우 야곱에게 아버지가 축복을 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축복을 빼앗겨 큰 손해를 본 것을 깨달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이와 똑같이 이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 자신의 구원을 팔아서 지상의 식물로 자신을 먹여 살리려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상실되어 간다고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은 마치 자기가 가장 행복한 자이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여 자신에게 만족하고 득의양양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여신 다음에야 자신들의 악의 진상을 알게 되어서 자신이 파멸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 파멸을 이전에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에서는 배가 고팠을 때는 배를 채우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불렀을 때 그는 자기의 식물을 기꺼이 나눠 준 아우를 비웃고 바보 취급을 하였다. 나는 말하거니와 불신자들은 타락된 욕망에 자극을 받거나 억제함이 없이 자신의 쾌락에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되는 한, 그러한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만다.  그 후에야 그들은 자신이 그렇게도 열심히 추구하였던모든 일들이 얼마나 치명적인 해로운 일들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버린바가 되어"라는 말은 '거절을 당하여'  '또는 물리침을 받아' 라는 뜻이다.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말은 에서가 그 자신의 잘못으로 잃은 축복을 비록 눈물로 구하였지만 회개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얻지도 못하였고, 소용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똑같은 위험에 처해진다고 사도는 경고하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마음으로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왕국을 거절하고 이 세상을 택하였다면 이제 용서받을 소망은 전혀 없을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용서가 완전히 거부된다는 것은 아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다. 사실 하나님께서 망령된 사람들의 조소나 모욕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복수하시는 진노의 예를 우리는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내일이 되면 고치려고 결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새롭고 예기치 못했던 형태의 죽음으로 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해 버리며, 그들이 하나님의 중심판에 관해서 듣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추궁하여 하나님을 그들의 심판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들의 양심이 죽어 있을 때 그들은 나중에 괴로운 양심과 ,죽음의 대가로서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고뇌를 느끼게 된다. 이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위험은 있으므로 사도가 누구에게나 주의하라 고 경고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여기에서 '회개가 주어진 죄인은 그 회개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위에서는 그 회개에 의하여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고 사도가 말할 때, 이 귀절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의 '회개'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심의 뜻으로 해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불의에 깊이 빠져 있는 불신자들을 치실 때 그들이 갖는 공포의 뜻으로 해석되어있을 뿐이다' 라고 말하겠다. 이 공포가 무익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의 악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그들이 받을 심판만을생각함으로써 고통을 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눈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죄인이 탄식할 때는 언제나 주께서 기꺼이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마다 누구나 그 자비를 얻지 않는 자가 없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리기 때문이다(마7:8)"

 

 그러나 에서의 눈물은 소망이 없는 인간적인 눈물이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홀린 눈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도 슬퍼하고 한탄하면서도 하나님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이 일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을 쓰리게 찌르면 찌를수록 그들은 더 한층 하나님께 반발하고 분노를 터뜨린다.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원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하고 진노만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을 피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말하듯이 '임종시에 회개할 기회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고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면 그들은 격렬한 죽음의 고뇌로 인해 고통 중에 소리 지르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시간이 없구나' 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된 시간이 너무 늦어서 멸망으로 직행하게 된다. 때때로 그들은 겨우 입을 열어 '오, 원하오니  단 한 번만이라도' 와 같은 말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곧 절망이 그들의 모든 서원을 '잘라 버리고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술을  닫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