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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히13:7)

1. 성경 (히13:1 ~ 7)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1)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2)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3)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4)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5)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6)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아마 유대인들의 자랑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은밀한 반목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도는 이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을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이 권면은 이 세대에 있어서도 대단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아내보다도 자기를 더 보살피고, .또 타인들에 대해서도 별로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보다 더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더우기 언제나 적대자들은 애써서 우리를 서로 갈라놓는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형제 사랑하기를"이라고 부르는 데, 이것은 서로 특별하고 친밀한 애정으로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서로 형제가 되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사도는 신앙의 권속은 서로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시 주께서 그들을 양자라는 동일한 띠로 밀접하게 묶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른 것은 좋은 관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사랑이라는 명칭은 그 실천과 더불어 완전히 자취를 감취버렸다. 다만 가톨릭의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이 명칭을 자기들 스스로를 위해 가로챘었으나 그들은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분열했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그들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 이 인정미 있는 의무도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대대로 행해져 내려온 옛날의 손님 대접은 우리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있으며, 또 오늘날에는 여인숙이나 여관같은 것이 개인적인 손님 접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당시 부자들 사이에서 보통 잘 행해지고 있었던 손님 대접의 실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과 불행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자기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의무를 더 한층 권면하기 위해서 사도는 말하기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천사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간들을 받아들이는 줄 알았던 것이다. 사도가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롯임에 틀림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의 습관으로서 손님 대접을 했을 뿐인데, 그들은 부지중에, 그리고 그렇게 할 아무런 의사가 없었는데 천사들을 만났다. 이리하여 그들의 가정은 크나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롯을 그렇게 상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 대접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혹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은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항의한다면, 나는 즉각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천사들을 맞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헬라어로는 훌륭한 두음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라틴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3.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는~~~~~" ;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우리를 세워 볼 때만큼 우리가 깊은 동정의 감정을 갖게 되는 일은 없다. 그리하여 사도는 우리가 갇혀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있는 것처럼 갇혀 있는 사람들의 일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의 후반부에 있는 "자기도 몸을 가졌은 즉"이라는 말씀은 여러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대체로 '너희도 인간 본래의 공통적인 운명에 따라서 이와 동일한 역경 또는 고난을 당하는 수가 있다'라고 해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희가 그 사람들의 입장에 있는 것처럼' 이라는 그 뜻으로 한정한다. 어떤 해석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교회의 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너희는 같은 몸의 지체이므로, 서로의 괴로움에 대해서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서로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기혼의 부부들에게 그들의 결혼 관계를 정결하고 조심성있게 이행하되, 남편은 온화와 정절을 가지고 그 아내와 살며, 부끄러운 부정으로 결혼의 침소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권면이라고 한다.  여기의 말은 직설법으로 해석해도 부적당하지는 않지만, 역시 '결혼을 귀히 여기라'는 권면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결혼은 귀히여겨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결혼생활을 영예롭고 존경심으로 영위해 지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양보의 뜻으로 해석하여 결혼은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음행을 하는 것은 불법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뜻은 명백히 쓸모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오히려 사도가 여기에서 치료를 병과 비교하듯이 결혼을 음행과 대비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맥은 이것이 사도의 의도였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음행자를 벌하실 것이라고 위협하기 전에 사도는 이 형벌을 피하는 진정한 수단이 무엇인가를 단언한다.

 

그것은 결혼생활을 성실하게 보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음행을 하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 그들에게 복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주요 논점임에 틀림없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축복 하셨으므로, 이  말씀에 위반되는 어떠한 결합도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정죄를 받고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오직 간음하는 자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음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형벌을 선언하신다. 그 쌍방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떠났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난잡한 성교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도를 파괴하고 뒤엎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합법적인 결합만이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에 의하여 인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치료책이 없이는 난잡하고 방종한 정욕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사도는 결혼을 .우리에게 권장하고 귀히 여겨야 하는 것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계속해서 "침상을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덧붙여 말하는 것은 즉, 결혼으로 결합된 자들은 무엇이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멋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합법적인 결혼의 침상의 사용은 절제가 있어야 하며, 결혼의 절제와 정절에 위배되는 그것은 아무것도 허락될 수 없다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는 "모든 사람은"이라고 말함으로써 결혼이 금지된신분을 가진 사람이란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에 허락 하신 것은 예외없이 만인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나는 만인은 결혼함이 합당하고 또 결혼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한다. 이것은 명백히 표명해 둘 필요가 있었다.  사단이 이미 은밀히 뿌려둔 미신, 즉 결혼은 명령되 일이라든가, 확실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부터 거리가 먼 것이라는 미신을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예언했던 이러한 거짓 영들은  즉시 나타나서 그러므로, 결혼은 일반 서민에게만 즉시 나타나서 결혼을 금하기 때문이다: 있는<자들은,이것을 피해야 한다고 허락되어 있는 것이며, 교회의 고위층에 안되겠으므로,: 사도는 모든 예외를 배제 망상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관대히는 허락한다. 그리하여 결혼은(제롬이 (사도는 {결혼이 한귀히-여김을 되고 인용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오히려 세상에 결혼금지령을 도입한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것은 신기한 [일이다. 즉 사람들이 이러한 명백한 선언에 놀라지: 않았다는 거절한[사람들의》망은 사단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을 벌하기 위해서이지 그밖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 돈을 사랑치 말고" ;  사도는 탐욕을 시정할 목적으로 지금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적절하고 현명하게 명령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신 돈이  많건 적건 간에 주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일이야말로 그것이 진실로 돈을 멸시하는 일이요. 또한 적어도 돈을 올바르고 절도 있게 쓰는 고결한 마음이라 하겠다.  확실히  탐욕스러운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만족하는 일이란 좀처럼 없는 법이다.  오히려 어지간한 재산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록 큰 재산을 얻는다 해도역시 또 그이상의 것을 원하는 법이다. 바울이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 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교훈에 적중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는 사람은 돈에 대한 애착을 자기의 마음에서 ·추방하는 자이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 사도는 여기에서 두개의 증언을 인용하고 있다. 첫째의 증언은 여호수아 1장에서 취해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 귀절은 성경의 공통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주께서는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약속하고 계신다고 사도는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약속에서 사도는 시편 118편에서 말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할 때 어떠한 두려움도 극복할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사도는 병을 뿌리와 가지째 다 뽑아버린다. 만일 인간의 마음이 진실로 깨끗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모든 탐욕의 근원은 신앙의 결여에서 온다. 주님에 의하여 결코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염려하는 일이 없는 법이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우리의 탐욕의 질병을 고치려고 할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고, 또한 이러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증언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다. 이 일로부터 그는 우리에게는 그러한 조력자가 계시므로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결론한다. 이리하여 어떠한 타락된 욕망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다른 아무것것으로도 안정을 줄 수 없을 만큼 큰 불 안 속에 있을 때, 그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기 때문 이다.

 

"7. 하나님의~~~~~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 다음에 것은 도덕을 언급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리를 언급하는 것이다. 첫째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특히 그들이 전해준 가르침을 그들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인을 친 자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라고 사도가 말할 때, 사도는 무엇인가 기억되어야 할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끝까지 진실한 믿음을 고수하고, 또 그들의 전 생애와 죽음을 통해서 올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충실한 증언을 한 사람들에 관해서 일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사도가 그들의 선생들의 본보기를 제시하고, 그것을 본 받도록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적지않은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준 사람들을 아버지로 간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교사들이 때로는 .야만스러운 박해 속에서, 때로는 온갖 투쟁 가운데서도 충성스러우며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더 한층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