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12:1)

1. 성경 (히12:1 ~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 이 결론은 앞 장의 결론과도 같은 것이다. 즉 율법 아래서 그 신앙이 탁월했던 성도들에 관한 이 목록을 만든 사도의 목적은 각 사람이 모두 그들의 모범을 보고 단단한 신앙의 각오를 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도는, 많은 무리들을 은유적으로 '구름' 이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그 빽빽한 구름을 엷은 것에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들의 수가 적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의 모범적인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격려하여 줄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큰 무리가 있을 경우에 우리는 더 큰 용기를 언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군중 또는 무리에 둘러싸여 있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눈을 돌리든 간에 우리의 눈은 곧 많은 신앙의 본을 보인 자들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증인들' 이라는 귀절을 마치 그들을 '하나님의 순교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일반적인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충분히 입증된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 주제에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성도들의 신앙의 미덕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심히 더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안내자와 친구로서 그들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견고케 하는 증언과 같은 것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  사도는 경주의 은유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가볍게 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서둘러 가야 할 때, 짐을 지고 가는 것보다 더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우리의 영적 경주를 더디게 하고 방해하는 짐들은 여러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은 '현세에 대한 사랑', '이 세상의 안목', '육신적인 욕망', '세상의 염려', '세상 부귀와 명예', 기타 모든 종류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리스도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첫째, 모든 방해물을 다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출발이 대단히 늦었으므로 다른 어떠한 지연의 원인도 허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는 부귀와 기타 이 세상의 유익을 무조건 내던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이 우리의 달려갈 길을 방해하는 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여러가지 곤란한 장애물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로 우리를 결박하고 또 얽매이게 하기 때문이다. 

 

경주에 대한 은유는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는 경주라면 아무 종류의 것이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일등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달리기의 경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요약하면 우리는 이미 경기에 들어갔는데, 가장 유명한 경기장이어서 거기에는 수많은 '구경꾼들과 경쟁자들'이 참석해 있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상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리는 도중에 우리가 피곤해지거나 게을러지거나 한다면 그것은 나와 그리스도를 위해서 큰 불명예이다.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성도들이 다만 구경꾼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와 똑같은 경주의 동료들이어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만, 사도는그들을 경기의 '경주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증인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상을 앗아가는 경기 상대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승리를 격려하고 갈채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가 다만 심판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손을 우리에게 들어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더해 주시고 또 간단히 말해서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시고, 경주를 출발시켜 주시고, 훈련시켜 주시며,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결승점까지 이끌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얽매이기 쉬운 죄" ;  이것은 우리를 방해하는 가장 무거운 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얽매여 있다고 사도는 말하는데, 이것은 이 얽매임을 벗어 버리지 않는 한, 누구도 경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사도는 외부적인 혹은(말하자면) 현실적인 지역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의 근원, 즉 나쁜 욕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나쁜 욕심은 우리 모든 사람을 꼭 붙들고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유혹의 덫에 걸려 있는 느낌이다.

 

"인내로써" ; . 이 귀절은 사도가 우리에게 신앙에 대하여 특별히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육신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영적으로 찾도록 권고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고찰을 하는 사람들은 지상적인 것들을 쉽게 경시할 수 있다.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인 것이며,  이 세상의 일들을 훨씬 초월하는 것임을 지도하기 위하여 신앙의 진정한 실천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줌으로써 유대인들이 가장 잘 범하는 의식들에서 분리시킬 수가 있었다.

 

"2.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  라틴어 번역은 뜻이 좀 명확하지 않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사도의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사도는 모든 고통이나 고민에서 구출되고 모두가 행복하고 선한 생애를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진 자유이지만 그것은 그가 무참하게도 치욕스러운 죽음을 기꺼이 참으신 데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즐거움을 위하여' 라는 말은 '즐거움 대신에' 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즐거움' 이라는 말은 모든 종류의 편의를 포함한다. 사도는 즐거움이 그리스도 안에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그 즐거움을 사용할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안티 ; 을 위하여'라는 전치사가 최종 목적인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에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거절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결과가 즐거운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나의 처음 해석을 주장하고자 한다.

 

사도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인내를 찬양할 것에 대해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무참한 죽음을 참으셨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리스도가 굴욕을 개의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죽으신 목적은 영광이었으므로 신자들이 만일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한다면, 그들이 참고 견디는 모든 악이나 재난들은 구원과 영광으로 끝날 것임을 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약5:11)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고 말한 것에 따라서, 우리의 환난의 결과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보는 것과 똑같은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 너희가~~~~~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  사도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비교시킴으로 그의 권고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 의하여 숭경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어려운 싸움을 기꺼이 스스로 싸웠다면, 우리들 중 그와 함께 견디기를 누가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친구라는 것과 우리를 훨씬 초월하신 그가 우리와 똑같은 위치로 내려오셔서 모범을 보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격려하신 것을 생각할 때, 이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모든 유혹을 극복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려는 데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 완전히 녹게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