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히브리서 주제

히브리서의 저자명에 관해서 이전에는 여러가지로 의견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 히브리서가 라틴 교회들(the Latin Churches)에 겨우 받아들여진 것은 좀 후의 시대에 와서였다. 라틴교회들은 ,이 히브리서가 타락한 자들의 용서를 부인함으로써 노바투스(Novatus)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여러 귀절들은 그런 의심과 불안이 근거없는 의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히브리서를 주저없이 사도서신으로 분류한다. 전에 어떤 사람들이 히브리서의 권위를 논박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은 사단의 교활함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 중에서 실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관해 이 히브리서만큼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책은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치신 유일하고 진정한 희생의 효력을 본서만큼 높이 찬양하는 책은 없고, 또 의식들의 실행과 동시에 그 폐지 문제에 관해서도 본서만큼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책은 없으며, 한 마디로 말해서 이 히브리서만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여 주는 책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나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은혜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고 더욱 그 은혜의 소유를 굳게 지켜나가도록 하자.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군가에 관해서 우리는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누가, 어떤 사람들은 바나바, 또 어떤 사람들은 제롬(Jerome)이 말한 대로 클레멘트(Clement)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의 <교회사>(Church History) 제 6권에서 오직 누가와 클레멘트에 관해서 밖에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내가 알기에는 스크리소스톰(Chrysostom)의 시대에는 히브리서가 바울서신 중의 하나라고 여러 곳의 헬라사람들이 널리 믿고 있었다. 그러나 라틴 사람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사도 시대에 가장 가까왔던 사람들이 그러하였다.  나로서는 바울이 히브리서의 저자였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아무런 추론도 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대로 바울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숨겼다는 것은 그리 근거가 없는 일이다. 만일 그렇다면 왜 바울은 디모데의 이름을 언급하였는가? 이 디모데라는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신분이 나타나고 누구인가를 간파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논술의 방법과 문체로 보아서 저자가 바울 이외의 사람이라는 것이 충분히 입증된다. 또 이 책의 저자는 제 2장에서 고백하기를 자신이 사도들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다고 언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제 6장에서 교리문에서 말하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답의 방법과 실행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의 시대에는 잘 맞지 않는 것이다. 기타 몇 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그것들에 관해서는 그 장절에서 말 하기로 한다.  나는 히브리서의 문체에 관해서 보통 행해지고 있는 변명을 잘 알고 있는 데, 그에 의하면 히브리서를 기록한 헬라어는 본래 누가나 또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히브리어로부터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문체로는 결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을 논박하기는 참으로 쉽다. 이 서신으로부터 인용되는 기타 몇 군데의 귀절들은 그만두고라도, 만일 이 히브리서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던 것이라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렇게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유언(testament)이라는 말에 대한 이유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제 9장에서 저자가 유언 (Testament) 이라는 것의 성질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헬라어의 출처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디아데케' 라는 말은 헬라어에서는(유언과 계약)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 '브리트'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오직 언약이라는 뜻 하나 밖에 없다.  이 이유만으로도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내가 말한 것, 즉 , 이 히브리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 할 것이다. 한편 사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그 자신들의 언어로 써 보냈다고 하는 편이 한층 더 가능성 있는 말이라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에도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수는 불과 몇 명이나 되었겠는가? 유대인 각 사람은 제각기 그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따라서 그 지방의 언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더우기 헬라어가 그 당시 더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우리는 이제 주제로 들어가자! 

 

처음의 목적은 '마리아의 아들이신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그리스도인 구속주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이미 그리스도를 고백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있기 때문에 일은 자명 한 일로 치고 있는 것이다.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의 임무가 무엇인가를 증 명하는 것이다. 이 증명으로 해서 특명백히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종교 의식의 준수에 종지부가 찍혀졌다는 조건이다. 이것은 반드시 명기해 둘 필요가 '있다. 사도로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가 그리 스도라는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것을 :또 다시 그 증명 하려 한다면 그것은 공연한 수고가 되었겠지만, 역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보여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효력, 결과를 명백히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미혹되어 확실한 본체를 붙잡지 못하고 대신 그림자를 붙잡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황주의자들도 이와 똑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그리스도가 구속주로서 이 세상에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고는 있지만, 본질에 이르러서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절반 이상을 그리스도에게서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존엄성을 기점으로 하여 논설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이 율법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 저자는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항을 언급한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어온 가르침은 모든 예언들의 완성과 결론이었으므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모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존경심은 이 일을 인정하는 장애가 되고 있을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다른 자들보다 훨씬 우월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점에서 우월 하신가를 간단히 말한 후에 천사들의 이름을 지명하여 그리스도에게 복종 시킨다. 그것은 천사들과 함께 다른 모든 자들이 제각기 순위에 따라 제자리에 서서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조심성 있게 그 자신의 길을 펴 나간다. 만일 저자가 모세로부터 논하기 시작하였다면, 저자의 비교는 더 한층 달갑지 못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군 천사들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것이 성경에 의하여 명백하게 된 이상 모세나 어떤 인간도 천군천사들과 동렬에 서게 됨을 거절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 뿐만 아니라 천군천사들 위에 현저하게 군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는 천사들을 그리스도의 권력과 지배 아래 놓은 후에, 즉 유대인들의 신임을 얻어 선언하기를, 종이 주인만 못한 것처럼 모세가 그리스도만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첫 세 장에서 그리스도를 최고 단계의 능력 위에 세워 놓음으로써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모든 자들은 침묵을 지켜야 하며, 아무것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표시한다. 동시에 저자는 제2장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똑같이 .육신을 가진 형제라고 말하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가 기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헌신하도록 이끌어 준다. 저자는 또한 머뭇거리는 자들이나 또는 고집 세계 저항하는 자들을 복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권고와 위협을 섞어 말한다. 이것이 거의 제4장의 끝까지 계속된다.

 

그 다음에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설명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진정하고 순수하게 이해하게 되면 율법의 모든 의식들은 철폐된다. 그 제사장 직분이 우리에게 얼마나 환영해야 할 굉장한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얼마나 기꺼이 동의해야 할 것인가를 간단히 우리에게 보여준 후에 잠깐 논제를 떠나서 유대인들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종교의 초보 단계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가혹하고 엄격하게 탄핵하여 그들을 겁나게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만일 언제까지나 이처럼 게으르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주로부터 거절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저자는 그들이 보다 더 나은 자들이 되어갈 소망을 크게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격렬한 말투를 부드럽게 하고 있다. 저자 자신이 꾸짖어 의기소침하고 있는 자들에게 성장해 나갈 용기를 주기 위함이다.

 

다음에 저자는 다시 제사장 직분에 대한 문제의 설명으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첫째,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율법 아래_있었던 옛날의 제사장 직분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음에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더 한층 탁월한 것은 이전의 것을 이어받았고 맹세로 말미암아 그 지위를 얻었으며, 재가되었기 때문이고, 그것은 영원하고 또 영원히 효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이가 영광과 존엄성에는 있어서 .아론과 모든 레위족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예표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 안에 투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율법의 의식들이 폐기되었다는 것을 더 한층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 의식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며, 초막도 또한 그렇다고 말한다. 그 특별한 목적이란 곧 하늘에 있는 것의 원형을, 나타내는 일이다. 여기에서 결론짓게 되는 것은 만일 우리가 목적에 도달하지 않고 길의 중도에서 멈출 작정이 아니라면 이 의식들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논점을 확증하기 위해서 저자는 예레미야서의 한 귀절을 인용한다. 거기에는 새 언약이 단순히 옛 언약의 수정으로서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옛 언약은 약해지고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그림자와 그리스도로 나타난 실재 사이의 동일성과 유사성에 관해 말하고 나서, 결론하기를 그리스도의 희생의 효력은 영구적이기 때문에 모세에 의해서 제정된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의 오직 한 번의 진정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으며, 그 희생으로 인해 이루어진 신약(the New Testament)의 확인은 완전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희생은 전에 율법 아래서 실시되었던 외적인 제사장 직분의 진정하고도 영적인 완성이라고 말한다.  이 가르침에서 저자는 또 어떤 격려와도 같은 하나의 권고를 첨가한다. 즉 그들이 모든 장애물들을 버리고 마땅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제 11장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조상들의 많은 실례에 관해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리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유대인들이 비록 모세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다 하더라도 유대인 들은 그 조상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히 그들과 연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민음이 조상들의 주요한 덕이며 모든 덕의 근본이었다면; 당연히 선지자들과 아브라함의 자녀들임을 알 수 있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조상들의 믿음에 따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불의의 자녀들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는 보편적인 교회(the universal Church)와 더불어 연합하며 교제를 나누고 있다는 것은 복음의 장려를 위하여 크게 유익한 일이다. 마지막의 두 장은 우리가 규범 삼아 살아가야 할 도리에 관해서 기록한 여러가지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소망, 십자가를 '지는 일, 인내심, 하나님께 대한 감사, 순종, 자비, 사랑의 의무, 정결 등과 같은 것들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기도로써 서신을 끝맺음과 동시에 그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