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히13:18~25)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18)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19)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20)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21)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22)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그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23)너희를 인도하는 자들과 및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24)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2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8.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 사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들에게 부탁한 후, 기도하기를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가 그 기도의 근본이 사랑으로 온 세계의 사람들을 다 포함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선한 사람들, 거룩한 사람들, 또는 그 신앙의 순결이나 기타 미덕의 표적이 두드러진 사람들에 대해서 특히 관심을 갖는 일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그가 '확신하노니' 혹은 '나는 신뢰하노니' 라고 말하는 것은 한편 그의 겸손과 확신을 표명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일에" 라는 귀절은 사물을 말하는 것으로도, 또는 인간들을 말하는 것으로도 생각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미결 상태로 놓아둔다. 사도는 또 하나의 논점을 첨부하기를 그들이 그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그 개인을 위하여 유용 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그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생각한다기보다는 너희들 모두를 위해서 생각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는 것은 너희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선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과 같다. 이 일로부터 이 서신의 저자가 당시 곤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거나, 또는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받는 사람들 앞에 친히 나타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추측된다. 이와는 반대로 그가 자유롭고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의 행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신의 끝부분으로부터 볼 때 더 한층 그렇게 보인다.
"20.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이 형용구는 확인을 위해서 첨부된 것이다.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목자로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우리를 완전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요컨대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정당한 소망을 갖게 하 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 동일한 능력에 의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함이다. 또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의하여 그에게 위탁된 양을 지키기 위한 만민의 목자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 피에 있어서 (in the blood)라고 번역한 것을 다른 사람들은 '피로 말미암아'(through the blood)라고 번역하였다. 그(베트)라는 히브리어는 대개의 경우 '~~와 함께 (with)'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는데, 나도 그것을 여기에서 그런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으나 그 죽음은 철폐되지 않고, 그 영원한 능력을 지속한다는 것인 듯하다. 즉 사도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죽음에 있어서 흘리신 피가 아들의 부활 후에도 영원한 언약을 확증하기 위해서 능력을 가지며, 또한 마치 '그 피가 항상 흐르고 있기나 한 것처럼 그 열매를 맺듯이 그 아들을 부활시켰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평강의 하나님이" ; . 사도는 그들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서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로써 이 서신을 끝맺는다. 사도는 모든 선한 일에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 혹은 합당하게 하고, 혹은 온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사용하는 헬라어 καταρτισαι(카타르티사이 :온전케 하사)라는 말의 뜻이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선을 행하기에 합당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영의 훌륭한 선물로 빛나고 있으므로, 여기서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시작할 때 기초가 됐던 초보적인 형식이 아니라, 그들을 온전하게 꾸려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사도는 하나님의 뜻이 선한 행위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행하였을 때만 오직 그 행위는 선한 행위라고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 2절과 기타 여러 장, 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제한되어 있을 때 비로소 선하고 거룩한 생활이 온전케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도록 하자. 즉 그는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앞에서 율법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해서 말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은 쓸데없이 억지로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떠한 꾸며낸 일보다도 하나님 자신의 명령을 더 한층 높이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21.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 이 귀절은 두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이고,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뜻이 다 적절하다. 중생의 영과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함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리하여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향기로 가득 차있을 때 하나님이 앞에 향기로운 향내를 풍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의 행위는 악취를 발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두 가지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고 싶다.
기도의 끝맺음 말인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를 나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는 여기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림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서 명백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를 가리키는 그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을 택하고 싶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함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2.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도가 그의 말을 들으라고 부탁한 것처럼 해석하고 있는데, 나는 다르게 해석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간단히' 또는'몇 마디로 썼다'고 하는 것을 사도는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일상 생활을 가르치는 법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는 아주 간단하기는 하지만 권면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우리들 가운데있는 목사들의 말이 필요없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과, 똑같은 권면의 말이 늘 우리 귀에 울리고 되풀이된다 하더라도 인내심이 부족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받아쓰도록 한 문서를 통제하여 자신이 제정하신 명령과 어긋나는 곳이 조금도 없게 하셨다. 이 명령이라 함은 끊임없이 권면의 말씀으로 목사들의 입에서 교회에 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가 권면의 말을 권고하고 있는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인간은 본래 배우고 싶어하는 존재이므로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이미 들었던 것을 듣기보다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항상 좋아하는 존재이며 더우기 인간은 게으름 부리기를 좋아하는 존재이므로 그들은 격려를 받거나 훈계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23.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 Γtvdiaxete(기 알라)라는 헬라어의. 어미는 두 가지의 뜻으로 취할 수 있다. 즉 '너희가 안다' 라든가 '너희가 알라' 라고 읽을 수 있다. 나는 전자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자의 번역을 택하고 싶다.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직 그들이 모르는 것을 사도가 말하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디모데가 바울의 유명한 동반자라면 (나는 기꺼이 이것을 받아들인다), 누가나 또는 클레멘트(Clement)가 이 서신의 저자일 수도 있다. 바울은 확실히 디모데를 그의 아들이라고 더 잘 불렀다. 더우기 이 바로 뒤에 사도가 첨부하고 있는 말은 바울이라는 인물에 적합하지 않다. 이 서신을 쓴 사람은 자유롭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로마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고, 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들을 두루 돈 후에, 그 당시에는 바다를 건너려 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 모든 일들은 바울이 죽은 후, 누가나 또는 클레멘트에 의해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24. 너희를 인도하는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 사도는 이 서신을 히브리 사람들 전체에게 보내려고 쓰고 있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들을 특히 지적하여 그에게 문안하라고 한다. 마치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특별히 구별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은 좀 의외이다. 그러나 나의 의견으로는 사도가 지도자들에게 특히 이 인사를 보내고 있는 이유는 그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통합으로써 그들을 그 자신의 이해자로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 한층 호의를 가지고 동의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인 듯하다. 사도는 "모든 성도에게"라는 말을 추가하는 데, 이 말에 의하면 사도는 신자들 즉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 말할 수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서로 돕고 합치하기를 기꺼이 배우도록 원했거나, 또는 이 서신을 처음에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 주도록 원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