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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6)

1. 성경 (히 11:17 ~ 31)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7)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8)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19)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0)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1)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2)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3)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4)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5)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6)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7)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8)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29)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0)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사도는 아브라함에 관한 나머지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친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와 같은 실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아주, 타월한 믿음의 본보기였다. 이야기를 확대해서 사도는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덧붙이고 있다. 확실히 아브라함은 이미 많은 시련에 의해서 그가 어떠한 종류의 인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이 시험이 모든 기타의 시험들을 훨씬 초월하므로 사도는 그의 믿음이 가장 탁월한 것으로 간주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의 극치는 그의 아들의 희생제사였다. 이때야말로 하나님은 그를 크게 시험하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행위는 믿음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 믿음 이상으로 훌륭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 믿음이 바로 그처럼 타월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시험'이라는 말은 단순히 연단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야고보(약1 13)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할 때 그는 다른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는 악을 행하도록 자극을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말하기를 악에 대한 유혹을 받는 것은 각 사람들의 자신의 사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결함과 순종을 시험하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모르시기 때문에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알기 위하여 시험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우리 안에 이전에 숨어 있던 것을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공공연하게 나타내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나타난 것은 하나님이 나타내셨다고 말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 안에 있는 독특한 것을 그 자신에게 돌리려 하신다는 것은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방법이다. 이삭의 희생의 가치는 영적인 효과에 있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명령받은 것을 수행할 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기꺼이 복종하고자 한 그의 의지가 마치 그가 실제로 그의 아들을 희생으로 바친 것과 똑같은 복종의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  우리가 앞에서 이미 말해 온 것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심령에 깊은 상처를 입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받은 후에 자신의 손으로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의 시험에 비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바늘에 약간 찔린 정도의 아픔에 그치는 시험들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약속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창21 : 12) 고 하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이 약속이 제거된다면 .아무런 축복이나  소망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고 실로 이 세계의 모든 구원과 아브라함의 영원한 구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아들로 인해 이 세계의 모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전멸해 버리는 것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 의인은 무슨 생각과 어떠한 믿음으로 이러한 곤궁을 헤쳐 나갔는가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각을 용감하게 떨쳐버리고 그가 명령받은 것을 수행하였다. 만일 그렇게 많은 시련들을 이겨나가는 것이 놀라운 신앙의 미덕이었다면, 아브라함을 변함없는 승리로 이끈 것은 오직 유일한 믿음이므로 가장 높은 찬사를 받기에 받기에 합당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의 난제가 제기된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에서 출발하였는데 어찌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이 칭찬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치 순종이  믿음에서 유래하듯이 믿음은 약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약속을 빼앗겼을 때,  그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없어질것이다. 이삭이 죽는다면 이미 말한 것처럼 모든 약속이었 다 무너질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이삭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단순히 보통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고, 그 자신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생각되었다. 다른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을 이 문제를 사도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죽음에서 살릴 수 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즉시 부언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을 거절한 것이 아니고, 그 효력과 진실을 자기 아들의 삶을 넘어서까지 확대하였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삭의 죽음에 의하여 제한받거나 소멸되어 버리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의 좁은 한계에 제한하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하였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삭의 죽음에 결부시키지 않고 이삭이 죽어, 재가 되더라도 그가 살아서 숨을 쉬고 있을 때와 똑같은 효력이 발생할 것으로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사도의 목적하는 바는 이러한 상황에 의하여 아브라함의 시련이 얼마나 크고 극심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 이다. 그러나 물론 이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기타의 시련들을 모세의 생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 자신의  아들, 자신의 독생자이며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데리고 나중에 보여지게 될 장소까지 가서 거기에서 자기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여 제물로 바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많은 상처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애정에 찬 두개의 표현을 애써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삼일 길을 가도록 한 것은 그에게 고통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잔혹하게 죽여야 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삼일 길을 가게 되었으니 그가 자기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을 받은 장소까지 왔을 때 제물로 바칠 짐승이 어디에 있느냐는 이삭의 물음에 아브라함의 가슴은 더욱 더 쓰라린 상처를 받았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아버지에게는 쓰라린 것인데 하물며 피투성이가 되는 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더 한층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가져왔다.

 

더구나 그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받았다는 그것은 어느 아버지의 심정이라도 도저히 견디어낼 수 없는 무서운 일이다. 만약 믿음으로 그의 마음이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높은 단계까지 올라가지 않았다면 그는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이유없는 일은 아니다.  그보다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왜 이삭은 독생자라고 불리어지는가 하는 질문이 일어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스마엘은 가족에게서 쫓겨났을 때 그는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었고, 적어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의 수효 가운데는 들지 못했다'라고 대답하겠다.

 

"19.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이것은 사도가 마치 '이 소망이 아브라함을 속이지 않은 것은 이삭을 죽음 가운데서 갑자기, 구출하였을 때, 그것은 일종의 '부활과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비유컨대' 라는 말은 주석가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해석되고 있으나, 나는 이것을 단순히 유비,  유사의 뜻으로 해석한다. 물론 이삭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그것은 아니지만 예기치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기적적인 구출을 받았을 때 일종의 부활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육신은 이삭을 대신한 양으로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 이삭의 희생 안에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진실이라고 인정한다.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사도가 무엇을 지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 진리에 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나의 판단으로는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을 조직적으로 새 생명으로, 자신에게 반환된 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축복을 한 것도 믿음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실재가 없고 다만 말만 ,나타날 때, 필연적으로 오직 믿음만이 힘을 갖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첫째, 사도가 말하고있는 축복의 효력에 관해서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축복한다' 라는 말은 종종 '복을 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은 무엇인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축복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삭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땅을 소유하러 보내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 약속된 땅에서 얻은 권한이라고는 오직 땅에 묻히는 권한뿐이었다. 그러므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연국이 네게 굴복하리니"(창27: 29)라는 영광스러운 자격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소리같이 보였다. 겨우 자유인에 불과한 인간이 무슨 왕국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이 믿음에 의존하고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이삭은 그 아들들에게 줄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의 축복 속에는 믿음이 있었는가' 하고 의심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하나님에 의하여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에게 태어난 쌍동이를 분간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중에 태어난 자에게 우위를 주었을 때, 가장 명백히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랐다. 그리하여 그 장자로부터 그의 정당한 본래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다. 이스라엘 전 민족의 신분은 야곱이 하나님에 의하여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가 택함을 받은 것은 그 아버지의 축복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21. 믿음으로 야곱은" ;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이 백성들에게 일어난 일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모두 믿음의 덕택으로 돌리려 한 것.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요하게 되므로 많은 일들 가운데서 몇몇 사례를 택한 것이 바로 야곱의 이야기이다. 에브라임 족속은 다른 족속들보다 월등하였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족속들이 에브라임 족속의 그늘 속에 가리워져 있었다. 성경은 종종 에브라임이라는 이름 아래 10개의 부족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에브라임은 요셉의 두 아들 중 동생이었다. 그리고 .야곱이 에브라임과 그의 형을 축복하였을 때에는 그들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야곱은 막내에게서 무엇을 보고 막내가 장자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을까?  확실히 그가 축복을 하였을때, 그의 눈은 늙어서 흐려져 있었고 희미하였다.  그러나 그가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오른손을 얹은 것은 우연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양 팔을 교차하여 그의 오른손을 움직여서 왼쪽에 얹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치 그가 이미 그 땅의 지주나 된 것처럼 그에게 두 개의 유업을 할당하였다. 그러나 기근 때문에 그는 거기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만일 신앙이 지배하지 않는 영토였다면 그 모든 축복 속에는 이성에 맞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만일 무엇이든 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믿음만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  이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할 수 있는 장소들 중의 하나이다. 즉 본래 히브리어에서는 모음점을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당시의 히브리어가 오늘날의 히브리어 문법처럼 모음점을 붙여서 쓰는 것이었다면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방바닥을 지팡이 라고 번역하는 잘못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로쉬 하미타'라고 모세가 말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방바닥의 머리맡을 의미하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헬라어 번역자들은 기록되어 있는 말이 '하마테' 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처럼 '지팡이 머리에' 라고 번역하였다.

 

사도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확실히 사도는 본서를 유대인들에게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국어를 헬라어로 바꿔 사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이 아직 신앙의 젖을 필요로 하는 초보자들이기에 그 자신들을 순응시키는 문제에 그렇게 숙달되어 있지 못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만일 독자들이 언제나 성경의 순수한 본래의 의미에 되돌아 가기만 한다면, 이 말씀에 아무런 위험도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야곱이 경배한 것은 감사의 상징적 행위였기 때문이며, 이 일로 인하여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그의 아들에게 그 자신을 순종하게 하였다.

 

"22. 믿음으로 요셉은~~~~~~" ;  이것은 모세가 족장들의 사적에 관해서 말하는 마지막 부분이며, 또한 확실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부나 쾌락이나 명예가 이 거룩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하지 못하였고, 또 그를 애굽에 붙들어 놓지도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은 믿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모든 것을 멸시하고 이 세상에서 귀여움받는 모든 것을 아랑곳 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마음을 그가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얻었겠는가? 그가 자기의 해골을 옮겨가라고 명령한 것은 마치  '그가 자신의 뼈를 묻기 위하여 애굽의 표지보다도 가나안 땅의 묘지가 더 좋아서 묻히기를 원하기나 한 것처럼, 그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그의 동포들의 열망을 강화시켜서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더 한층 간절히 기대하게 하려고 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역시 자기 백성들이 결국은 해방된다는 확신을 갖고 그들의 신앙이 견고하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 다른 사람들, 즉,  불신자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손들의 대를 끊기지 않게는 해야겠다는 염려에서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고 자녀들을 숨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다른 이유로 해서 모세를 구원하도록 감동을 받은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의 부모들은 노예 상태에서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언제나 복수하는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부모는 자기 자신들의 안전보다는 어린 아기의 안전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이새가 그 아들들을 그 용모와 신장에 따라서 사무엘에게 데려왔을 때 비난을 받았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우리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으신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모세의 부모는 사람들이 보통 애정을 갖듯이 아기  모세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 용모에 이끌려서 그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한 것이 아니라 아기 모세의 얼굴 안에 어떤 장래의 탁월성의 표적과도 같은 것이 새겨져 있으므로 무엇인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들이 모세의 용모를 보았을 때 해방이 가까와졌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아기가 장차 위대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해방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믿음의 덕택으로 죽음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을 받았다는 것을 듣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칭찬을 받는 믿음은 매우 약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의 양친은 모세가 죽는 것을 염려하여 그를 버리지 않고 양육을 해야만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양육의 책임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얼마 안가서 흔들렸을 것이 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들이 강 어귀에 아기를 버렸을 때, 그들은 자신의 의무를 태만히 했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믿음이 비록 약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안전하게 된 모세의 :생명에 교회의 해방이 달려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 한층 용기를 얻을 수 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  모세의 모범은 다른 모든 것보다 유대인들에게 기억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 의하여 그들은 노예 상태에서 구출되었고 또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이 갱신 되었으며 교회의 기반은 율법의 공포에 의하여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모세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간주될 때 모세가 신앙의 길에서 그들을 이탈하도록 이끌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사도가 모세의 믿음을 무엇 때문에 찬양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첫째, 사도는 모세가 장성했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  이 신앙의 미덕을 들고 있다  모세의 연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만일 그가 소년이었을 때, 이 일을 행하였다면 그것은 어린 아이의 경솔이나 무지로 해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는 이해성과 이성이 약하기 때문에 그들은 무슨 일이나 그들 자신이 좋을 대로 경솔하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으며 젊은이도 역시 가끔 조심성 없는 열정으로 말미암아 이리저리 밀려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사려 없이 행하여진 행위가 아니며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후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사도는 모세가 그때 장성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도 명백히 밝히고 있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바로의딸인 공주의 양자가 되는 것을 경멸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그 형제들을 방문하는 일, 그 형제들을 도우려고 생각하는 일, 형제들이 받은 불법행위에 대해서 보복을 하는 일 등, 이 모든 것은 그가 왕궁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그가 왕궁을 특별히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이다. 사도는 이것을 믿음의 덕택으로 돌리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의 일족이 축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가 확신하고 있지 않았다면, 모세는 애굽에 머물러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축복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언약만이 오직 유일한 입증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아무것도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서 명백한 것은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을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았다는 것이다.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  우리는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분노하시게 할 때 얻을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치명적인 해독과 같이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소명을 버리게 하는 세상적 모든 유혹을 사도는 '죄악의 쾌락'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죄악의 쾌락은 우리가 순수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이 땅위의 축복들 가운데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일 자체는 정당한 일이지만, 그 사용은 시간적 상황과 장소와 기타의 일 등으로 인하여 금지되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현세의 모든 축복들을 향유함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그 축복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하며 결코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가 잠시 '죄악의 쾌락'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명과 함께 신속히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러한 쾌락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기꺼이 받아야 할 능욕과 비교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예정하셨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 모두를 똑같은 방법으로 능욕이나 어떤 다른 종류의 십자가를 지도록 시험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신이 이 십자가의 교제 안에 부르심을 받고 있으므로 모든 장애물들을 다 내던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생각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이 태초부터 참아 온 모든 치욕들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굴욕으로 간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지체였으므로 그들은 우리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슬픔이나 불행 따위는 죄의 값이며, 또한 처음 인간에게 놓여진 저주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우리가 받는 모든 모욕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받은 모욕으로 생각하신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가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올바르게 고찰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렇게 고되거나 쓰라린 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귀절에서 사도는 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능욕이라는 말로 그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더 한층 명백하게 설명해준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동료로서 백성들의 슬픔에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오직 그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공포할 수가 있 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목적이므로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리고 우리가 수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머리 되신 분의 이름에 의해서만 신성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그리고 이와 는 반대로 사도는 교회를 버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  이 위대한 정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사도는 입증하고 있다. 이것을 사도는 어떻게 모세가 하나님의 약속에 눈을 꼭 감고 있었는지에 대해 그가 하고 있는 설명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가 유일한 언약을 신임하지 않았다면 애굽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함께 있는 편이 훨씬 좋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누가 모세는 상 받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추론한다면 나는 여기에서의 논점은 위에 관해서나 혹은 구원의 근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도는 믿음에 적용되는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상주실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의 은총을 기대하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의롭게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약속된 보상도 주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나님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상을 붙잡는다 고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값없이 의롭게 여기심을 얻는 의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값없이 의롭게 여기심을 얻는 일이 먼저 오지 않는 한, 우리는 행위에 대해서 어떠한 보상도 소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  이것은 모세의 처음 출발과 함께 백성들을 이끌고 나갔던 두번째의 출발을 역시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바로의 궁을 떠났을 때부터 이미 애굽을 떠났던 것이다.  또한 사도는 이 사실을 유월절의 출발 이전의 일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모세의 탈출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그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덧붙인다고 해서 이 견해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 자신이 말하기를 무서워서 도망하려는 충동을 받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모세의 처음 때를 본다면 그는 그 자신이 그 백성의 보복자임을 언명하였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제 2의 출애굽에 관련짓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때, 그는 왕의 광포를 용감하게 무시하고 또 하나님의 영적능력으로 단단히 무장하였으므로 그 짐승같은 왕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하나의 길이 열려지고 수많은 난관을 뚫고 헤쳐나가서 소망을 가진 모세가 무거운 동포의 짐을 지고 전쟁의 경험도 없는 백성들을 그 자신이 이끌고 나갔다는 것은 확실히 놀랄만한 믿음의 능력이었다.  모세는 이 강력한 왕이 자제력 없이 마구 날뛰는 것을 보고 자신이 최대한의 힘을 기울이지 않는 한 결코 결말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모세는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애굽사람들의 모든 공격을 억제하실 것이라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   모세는 불타고 있는 가시 덤불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 주제에 대해서는 부적당하고 또 부적합한 것같이 보인다. 모세는 그 자신이 백성들을 구출하는 위대한 과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이상에 의하여 이미 ,확신을 얻었다 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의 육신적 감각을 빼앗고 그를 이 세상의 위험들을 초월하여 이끌어냈던 것은 모세가 그러한 이상으로 하 나님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 게 오직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었을 뿐이며, 있는 그 대로의 하나님을 보는 일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는 말하기 를 모세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것이 인간들을. 대하는 일과 같지 않고 그가 하늘로 들려 올라가서 하나님만을 대하는 것 같았으며 이 세상의 위험들에 빠지지 않을 것 같았고, 또 바로와의 투쟁이 전혀 문제 없 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대단히 많은 역경에 시 달렸던 것은 확실하므로, 모세는 때로 마음 .속에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 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왕의 오만함에 매우 강 력한 저항을 느껴서 결국은 자신을 압도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 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컨대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자신을 보여주심으로 믿음의 여지를 남겨두 신 것이며, 모세는 수많은 공포에 싸여 있었지만 그는 온 마음과 온 정신을 하나님께로 돌렸던 것이다. 확실히 이렇게 하는 데는 그는,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이상에 크게 힘입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이 포함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나님 안에서 보았던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 았고, 이 사실이 그의 모든 두려움과 모든 위험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그들 이 지금은 비록 애굽의 압제로 고통을 당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 으므로 이미 약속된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일로부터 하나님 을 우리의 눈으로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참된 믿음의 본질이라고 결론짓는 다. 또한 믿음은 우리의 감각이 지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높은 것, 하나 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세째로, 충분하하며, 사단 해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은 우리의 연약함을 교정하기에 의 모든 공격에 대항해서 우리를 일반석보다도 더 강력하게 이렇게 보면, 연약하고 비겁한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적다는 말이 된다.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  이것은 유대인 들에게 믿음을 권면함에 있어서 큰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 들에게는 유월절이 중요한 희생제이며, 가장 숭경하는 행사의 하나였기 때 문이다. 사도가 이 유월절이 지켜졌다고 하는 것은 c이 희생의 어 양이 그리스도의 모형이었기 그 유익의 징조가 아직 없었기 믿음으로 린 때문이 아니라, 문설주에 피를 발랐을'때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징조가 확실하게 표적은 결국 믿음을 가지고 기대하지 않으면 안 대한 해결책으로서 몇 방울의 피를 사용하였 나타나지 않은 곳에서는 크 된다. 모세가 하나님의 상스럽게 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 복수에 다는 것은 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수하였고, 애굽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난으로부 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 사건에 유월절이 믿음목으로 로 사도가 이 관해서 모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는 그것은당연하다. 행해진 것을 모세가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렇지만 사도가 여기에서 아 직 실체가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않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려는 것 을 보면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너무 복잡한 의 논에 골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수사도가 유월절을 행한 「자로서 오직 모세만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대통해서 유월절을 제 정하셨기 때문이다

 

"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녔으나~~~" ; 그 군충들 안에는 많은 불신자들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난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몇 사람의 믿음 때문에 모든i백성이 부신발을 적시지 않고도*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이 똑같은 행위를 하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의 사 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전하게 '건녔지만 한편 애굽 사람들은 조금 후에 그곳에서 :빠져^죽었다.[2] 차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고 애굽[ 사람들은 그렇지 못 하였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 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라고 대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불행한 결말이 애굽 사람들의 무모한 짓에 대한 형벌이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 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넓은 바닷물 한가운데로 더욱 안전하게 통과했던 것에서 잘 증명되었다.

 

"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  마치 사도는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노예의 사슬을 끊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보여 준 것같이 이제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어떻게 땅을 약속으로 소유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약속된 하면 -유업의 들어갈 성읍 땅에 때, 맨 먼저 그들에게 부딪친 .장애물은 여리고 성읍이었다. 이 여리고 은 견고하고 거의 난공불락의 성이어선с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고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들에게 명령하되 도시의 성벽 둘레를 하루에 한번씩 7일 동안에 일곱 번 돌라고 하셨다. 이러한 순 이 회는 아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것이어서 우스팡스럽기 r.짝이 없는 일이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명령을 진지하 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대로 그 성을 ,함락시키는 데제 [성공하였 다. 여리고 성은 확실히 인간들의 외침 소리나 나팔 소리 때문에 함락된 것 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될 것이라고 백성들이 확신하고 소망하였기 때문에 함락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을:활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귀의 횡포에서 ,구출되는 길은 오직 믿음밖에는 없 기 때문이고 또 원수들을 이기고 지옥의 모든 성채와 장벽들을 쳐부수는 것 도 이와 같은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우선 보기에는 이 실례에 나오는 인물의 신분이 낮기 때문에 별로 주의할 만한 가치가 없더라도 이 구절에서 ,사도가 기생 '라합을 인용 한 것은 적절하고도 마땅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사도는 유대인들이 대단한 경의와 존경을 표하고 있는 족장들도 믿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칭찬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그들이 기억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위 (모든, 은사가 이와 .똑같은 믿음에 의해서만 온 결과라고, 가르쳐왔다. 사 도는 이제 그녀가 이방의 한 여인으로 [백성들 중에서도 가장, 신분이: 낮은 기생이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지체의 일부가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대단히 '우월한 자라도 믿음으로 평가하지 않고는 하나님앞에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또 이와는 반대로 이전에는 가장 비속()한 불신자들과 이교도들의 좌중에 거하던 자들이라도 믿음에 의해서는 천사들의 무리 중에 들어가서 함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야곱도 역시 라합의 신앙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데(약2 : 25), 여인이 진실된 .신앙을 .갖고,있었다는 것은 성경 역사에서 쉽게 결론을 얻어낼 수 있다.

 

그녀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완전히 믿는다고 표명하였다. 그리고 마치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7두려워했던 그들이 이미 그 땅의 정복자였었던 것처럼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과 친족들의. [생명을 살려주기를.ζ간청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인간들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자신을 본 것이었다. '이 믿음의 증거는'{그녀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사람의 정탐꾼을 :공손히 영접하였다고하는0컷이다그그러므로 그녀의성읍이 모두 멸망할 때 그가 멸망하지 않고'안전하게-{도피할-수 있었다는것은 믿음의 덕택이었다.7 기생'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강조하기 위해서 전첨부되어 있다. ; 기생)라는 히브리어를 여주인 이라고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그녀가 여인숙이라도 경영함으로써 그녀 자신의 생활을 꾸려나가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귀절을[성서는 어디서냐 기생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이 .무리한 의미를 생각해 !낸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합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들의 정탐꾼들이 기생의 집에 유숙했다고 말하는 것이 자기들의 나라에 거대해서 불명예스러운 일이요, 비웃음을 당할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임때문이었다. 그러한 두려움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의 』이야기에서 (하조나 ;그 기생)라는[히브리어가 고특별히 여기에 전부되어 있는 것은 정탐군이 몰래 여리고 성읍에 들어와서 기생의 집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위함이었다. 이것은 또한그녀의[과거생활을'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왜냐하면 그녀의「믿음은 그녀의 회개를 증거하고 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