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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

1. 성경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3)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4)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5)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  사도는 족장들의 신앙을 비교하여 극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겨우 맛만 보았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 약속과 그 감미로운 은혜에 만족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고 조금밖에는 맛보지 못한 이 맛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을 따라"라고 한 귀절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단순히 그들이 믿음을 갖고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약속받은 축복을 얻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에도 우리의 구원이 소망 가운데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와 열조들과의 차이점이 언급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우리의 열조들에게는 약속만 하셨는데도 그들이 기뻐했는데,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 명백하게 보이고 있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는 오직 희미한 형상만을 먼 거리에서 보여주었을 뿐인데도 그들은 만족하고 결코 믿음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 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인내하기 위해서 이 이상의 무슨 근거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용기를 잃는다면 우리는 또 한 번 변명의 여지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즉, 우리의 열조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멀리서 보았으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대단히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며, 또 그들은 멀리에서도 약속을 보고 환영하였으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까운 거리에서 친근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인내하였는데 오늘날 주께서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시며 우리를 보전해 주시고 있는 데도 우리가 신앙에 피곤해 있다는 것은 게으름의 죄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깨달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들이 믿은 것은 그들이 약속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고 믿음은 결국 약속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나는 이것을 다시 한 번 비교 검토해 볼 약속이라고 말하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 위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똑같은 구원이 약속되어 있었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향유하고 있는 바와 같은 분명한 약속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멀리 있는 그 약속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 이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이것은 야곱이 바로에게 자신의 "나그네 길이 그의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비교하면 짧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창47: 9)"고 말하였을 때 한 말이다. 만일 야곱이 영구적인 상속을 위하여 그에게 약속된 땅에서 그 자신을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인정 했다면 그의 마음이 이 세상에 붙들려 있지 않고 하늘 위로 들려져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리고 사도는 조상들이 이렇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더 좋은 고향을 갖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주었다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이 땅 위에서 외국인이나 나그네였다면 그들의 고국과 그들의 영원한 집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마음의 날개를 펴고 날아서 어둠의 구름을 뚫고 하늘 나라까지 도달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수 있을까 ?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그의 손을 분명히 우리에게 뻗치시고 계시지 않은가?  만일 가나안 땅도 그들을 정착시킬 수 없는 곳이었다면 평안히 안주할 곳이 없는 이 세상에서 그들은 다른 지역을 바라보지의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 '그들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고국을 떠나 있기 때문' 이라고 하는 반대론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사도는 예상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부를 때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마음만 있었다면 그들은 언제든지 자유로이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곳을 박차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또 마치 그곳이 그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곳처럼 떠나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초월한 다른 나라를 찾은 것이다.

 

"16. 저희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사도는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3:6)"고 하는 문장을 언급한다. 참으로 하나님이 인간들의 이름에 의하여 자신을 알리시고 이리하여 이 표적으로 말미암아 우상들과 구별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이 특권도 역시 믿음에 의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거룩한 조상들이 그들의 본향을 열망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시민의 대열에 넣어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우리가 들어설 자리는 결코 없으며, 또한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나그네가 된다면 하늘에는 우리를 위한 유업이 마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도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고 하는 말씀에서 결론지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하늘의 후사였다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