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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히브리서10장

1. 성경 (히10:1 ~39)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1)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2)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3)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4)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5)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6)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7)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8)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9)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1)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2)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3)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4)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5)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6)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7)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9)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0)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1)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2)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3)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4)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25)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6)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7)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8)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29)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0)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31)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32)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33)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34)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5)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36)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7)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8)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3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사도는 이 은유를 회화()의 기법으로부터 빌어 왔다. 여기에서의 :그림자 나라는 말은 골로새서 2장 17절과는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옛날의 의식을그림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아이는 이러한 의식들이 그 나타내고 있는 일들의 확실한 실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의식들은 생생한그림의 초벌 그림과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화가들은 보통 붓으로생생한 색깔을 칠하기 전에 그리려는 그림의 윤곽을 연필로 그린다. 이 분명치 못한 그림을 헬라어로 σκιαγραфια(스키아그라피아)라고 부르는데, 라틴어로는 그림자와 같은'이라는 말과 같고, 헬라어의 elxων(에이콘: 닮은것)이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elxbves(에이코네스)는 라틴어에 있어서는인간들, 짐승들 혹은 장소들의 진정한 외관을 나타내는 닮은 것들을 의미한다.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다음과 같이 명백히 구별하였다. '오늘날 생생하고 실감나게 인쇄된 색깔로 표현된 것을 율법은 기본적이고 개략적인윤곽으로 예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앞에서 말한 것, 즉 율법은 무용한 것이ε아니었고, 또한 그 의식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비록 그 안에 화가의 손에서 나온 이른바, 최종의 걸작과 같은 하늘에 속한 형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열조들에게 유익이 되는 약간의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상태가 더 한층 나은 것이다. 오래 전에 그들에게 보여준 그것들은 지금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는 것과 똑같은 것들이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들과 우리 양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똑같은 그리스도', '똑같은 의',  '똑같은 성화', '똑같은구원'이다. 오직 그리는 화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이라 함은 영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현실적인 사실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은 장차 올 일로서 그 도래가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시인한다. 그러나 사도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그것은 우리가 장차 오는 좋은 일들의 생생한 형상을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완성이 부활 때까지, 또 장차 올 때까지 연기되어 있는 영적 모형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좋은 것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태초부터 계시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시인한다. 그러나 '장차 오는 좋은 일들' 은 오직 구약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도 또한 그것들을 여전히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 ;  비록 전 주제가 한 종류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사도는 주로 레위기 16장에서 언급된 해마다 드리는 제사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즉 이미 죄의식이 없는 곳에는 희생도 필요없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는 똑같은 희생의 제물이 몇번이고 되풀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족함을 받지 못하셨고, 죄는 제거되지 않았으며, 양심은 편안을 얻지 못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희생을 드리는 일이 중지되었을 것이다. 사도가 동일한 목적을 가졌던 희생들에게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의깊게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희생들은 여러 종류의 짐승들이라는 점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제도에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평가되었다.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교황주의자들의 교묘한 피를 논박하기에는 충분하다. 그 교묘한 피로 말미암아 미사(Massy)의 희생을 옹호함에 있어서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의 불합리성을 교묘히 변명하는 기발한 방법을 찾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직 한 번 드리신 희생의 효력은 영구적인 것이므로, 되풀이된 희생은 불필요한 것이라고하는 반대에 직면하게 되면 미사에서 행해지는 희생은 별개의 희생이 아니고 동일한 희생이라고 즉각적으로 변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가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두번째 드려지는 희생은 비록 그것이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속죄를 위해서는 유효하지도 않고, 또한 적합하지도 않다고 말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오직 한 번 드리신 희생과 오늘날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희생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동일한 것이라고 수천 번 외친다 해도 나는 계속 사도의 입을 통해서는 주장 하겠다. 즉, 만일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소용이 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희생들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때, 미사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드려진다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3.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 복음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사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는 우리의 '죄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금이 희생의 중재에 의해서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제사 종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죄를 공고백할 때 드려져야 하는 속죄를 받는 데 필요한 제사를말하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미사라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가 우리의 죄를 제거하도록 미사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그들이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율법의 제사들이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매년 되풀이되었기 때문에 무력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도의 결론이 옳은 말이라면, 그것과 똑같은 이유로 만일 우리가 그 능력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제사가 매일 드려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 또한 무력한 것이었다고 우리는 결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무슨 구실을 가지고 그 자신들의 미사를 색칠하든간에,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엄청난 모독을 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결코 면할 수 없다.

 

"4.  이는~~~~~~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사도는 앞 문장을 먼저 추론한 것과 똑 같은 근거로 확증하고 있다. 즉 짐승들의 피가 영혼을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짐승들의 피에 진정한 정결의 상징과 보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른 관점, 즉 송아지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낸다는 관점에서였다. 여기에서 사도는 짐승들의 피의 가치를 짐승 자체 안에서 논하고 있다.  사도가 짐승들의 피에는 정결케 하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여기에서는 표현되지 않은 하나의 대조가 이해되어져야 하는데,곧 저자가 말한 낡은 희생은 무기력하여 계속 드려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놀랄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희생들 안에는 영혼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짐승들의 피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은 이것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진 희생을 이것보다 앞에 있었던 희생들에 의하여 평가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나시는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속죄자로서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려고 인성을 옷입고 인간들 앞에 나타나셨 을 때, 그가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다른 곳(요6:41)에서 그가 하늘로서 내려온 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 40편은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기는 곤란할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라는 문장은 그리스도가 자진해서 그의 지체들의 죄를 떠맡는 것이 아닌 한, 그리스도의 인품에 적합한 것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전체의 논증으로 보아 이것은 당연히 다윗이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그러나 다윗이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던 것은 명백한 일이므로, 다윗이 그 자신에 관해서 말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고 해서 거기에는 아무런 불합리 함도 없다. 특히 이 귀절에서, 즉, 율법의 제사들을 폐지하는 것에 관해서 말하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말들이 이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여기에서 거절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체의 예배가 그 제사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미신적 견해가 거절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증언은 당면의 목적을 위해서는 거의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 귀절을 여기에 놓은 것이 적절한가 어떤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이 귀절을 좀 더 면밀히 조사해 보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제사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아니하며, 또 한 가치도 없고, 실로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들이다 라는 종 류의 문장들은 실로 선지서들의 여기 저기에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제사들의 본질 안에 본래 가지고 있는 악덕이 아니라 우연히 덧붙게 된 악덕이다. 위선자들이 완고하게 그 자신들의 불신앙을 고집하면서도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징계를 받았다. 선지자들이 제사를 거절하고 있는 그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악인들에 의하여 더렵혀졌고 불순한 양심에 의하여 모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의 논술은 다르다. 다윗은 위선으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제사들이나, 또는 인간들의 사악함과 죄악으로 부당하게 행하여지고 있는 제사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경건하고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에게는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데, 즉 그는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으나 그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사는 그 자체로 인하여 또는 그 자체의 가치 때문에 받아 들여진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하여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면, 나는 이런 종류의 논증은 이 귀절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만일 사람들이 도에 지나치도록 외적 의식에 치우친다면 그들에게 영적 예배를 다시 회상시켜야 한다. 그래서 성령은 의식들이 인간의 과오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높여지므로 의식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윗은 율법 아래 있었으므로 제사의 습관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었다. 그가 마음 속으로부터 성심껏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하는 것을 나는 시인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그것도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라고 말하였을 때, 그는 그 당시의 상황보다도 더 앞을 보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윗의 시대에 있어서 조차도 하나님이 제사를 돌아보시지 않는다는 일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아직도 교사의 멍에 아래 묶여 있었으므로, 다윗은 이러한 형식을 옷 입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완전하게 예배를 드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완전히 참된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래해야만 한다.

 

시편 16편 10절에는 이와 비슷한 귀절이 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일시적으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에 이르러 비로소 진실로 .성취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고백하면서 제사에 아무런 여지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대한 저 완전한 전 순종에 모순된다 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이 완전한 순종은 율법이 폐기된 후에야 비로소 진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여기서와 또 시편 51편 16절에서 외적인 제사를 경히 여기고 본질적인 것을 중히 여겼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장소에서 다윗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옳게 소개하고 있는 증인으로서, 마치 이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엄히 요구하셨던 제사를 위해서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다윗의 말은 '주께서는 나의 귀 를 여셨다' 라고 달리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법이 옛날의 율법의 관습으로부터(출21:6) 빌어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 안식년의 해방을 거절하고 계속적인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서약하기 원한다면, 송곳으로 귀에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말이 '주여 나를 당신의 종으로서 영원토록 당신에게 매이게 하여 주소서'라는 뜻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달리 해석하여 그가 주의 깊고 순종적이라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시기까지, 즉 우리 안에 우리가 천성적으로 갖고 있는 완고함과 강퍅함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까지는 귀머거리이다. 잡다한 속된 일반 대중 (그들에게는 제사가 다만 무력한 구경거리로 밖에 되지 않았다)과 하나님께서, 제사들의 영적이고 합법적인 용법을 더 한층 정확히 보여주신 다윗과의 사이에는 은연 중의 대조가 있다. 저자는 헬라어의 용법에 따라서 '당신은 나에게 몸을 예비하셨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함에 있어서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성경을 잘못 인용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구약 성경에서 말씀을 인용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의 주 목적에 관해서는 성경을 거짓 뜻으로 곡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고 있지만, 당면한 문제에 관계가 없는 기타의 일과 같은 말들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인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7. 이에~~~~~~~두루마리 책에~~~~~" ; 히브리어의 본래의 그것은 두루마리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옛날의 책들은 원통 모양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이 '두루마리 책'이라는 말을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거룩하게 살아 갈 규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부적당하지는 않으나? 내게는 다윗이.그 자신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복종하고 있는 사람들의 명부 중에 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 더 한층 자연스런 설명같이 보인다. 율법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명령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수효 중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덧붙일 때, 그는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관계가 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원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완전히 합당한 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을 통해 우리는 즉각적인 순종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의 본보기로 그의 백성이 열심히 그의 모범에 따르기를 노력하여  "보시옵소서~~~~~ 내가 왔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함께 응답하며, 또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 그들의 부르심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다. 이 다음에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는 말도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굿(골122)에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우리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홈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바와 같다.

 

"9. 그 후에~~~~~~그 첫 것을 폐하심은~~~~~~";  이 귀절이 인용된 이유와 목적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 있는 완전하고 확실한 의가 율법적인 제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에 주의하라. 하 나님의 뜻은 제사가 폐지될 때 :완전한 규칙으로서 확립된다. 그러므로 짐승들의 희생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의하여 배제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 안에는 자리를 차지할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범죄를 위한 제사들을 거절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위선자들을 상대로 하여 말하는 것도 아니며,  왜곡된 예배의 미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드리는 제사들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교육을 받은 어떤 사람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제사들이 없을 때에도 사람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이 뜻을 좇아~~~~~~~" ;  다윗의 증언을 자신의 주제에 관련시키고 나서, 사도는 기회를 잡아 몇개의 귀절을 이제 그 자신에게 이용하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귀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말을 꾸미기 위함이다. 다윗은 그 자신 안에서 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들에게 통하는 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그것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살전4:3)라고 말할 때 이것은 바울의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맡기심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탁월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고, 이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그가 종의 형상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희생으로서 그 자신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명령을 완성하셨으며, 이리하여 우리는 정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덧붙여 말함으로써 사도는 시편의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는 문장을 암시하고 있다. 적어도 헬라어의 뜻으로는 그러하다.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그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므로, 그는 다른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레위 제사장들이 적합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짐승들의 희생은 공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홀로 충분하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무엇이나 수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11~14.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 이 말은 논증의 결론이다. 즉, 매일 희생을 드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는 완전히 모순된 일이며 적합하지 않은 일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레위 제사장들은 주 직무를 박탈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직무와 목적이  매일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쪽이 확립되면 다른 쪽을 폐지하는 것이  서로 반대되는 일들의 본질이다. 여기까지 사도는 충분히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주장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저 낡은 제사장 직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일이다.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유일하신 희생에 있어서 완전한 봉헌을 발견한다. '테텔레이오케' 라는 헬라어를 '나는 봉헌하였다',  '드렸다' 라고 번역하였는데, '완성하였다' 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앞에서의 나의 번역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들, 즉 하나님 예배에 관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을' 이라고 사도가 말할 때, 사도는 이 말 안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며, 만일 우리가 성화의 은혜를 다른 곳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오직 무익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편안히 누워 계시다고 사람들이 생각해서는 안되겠으므로 사도는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라고 말하고 있다. 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는 말에 의해  그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능력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둔다거나, 또는 그의 능력을 무덤 속에 파묻혀 버리게 내버려두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을 그 자신의 능력으로 가득차게 하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살아 계신다. 사도는 이 시편의 말들을 통해 이 상황의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곧 그리스도가 그 원수들을 완전히 정복해 버릴 때까지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구하고, 그리스도가 거기에 앉아 계신다는 진리에 안심하고 평온하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승리의 열매를 맛 보게 될것이며, 또한 그때, 사단과 죄와 죽음과 그리고 온 세상과 더불어 우리의 원수들은 소멸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육신의 멸망에서 해방되어 승리의 개가를 부를 것이다.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 예레미야로부터 인용한 이 증언이 두 번이나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적절하다거나, 공연한 것이 아니다. 사도는 이전에는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인용하였다. 즉, 구약의 약점을 교정하기 위하여 새로운 다른 언약이 약속되었으므로 구약은 폐지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제 사도는 다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도는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고 하신 이 오직 ,한 마디의 말에서 그의 논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죄는 모두 깨끗이 지워졌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결론은 충분히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일찌기 율법과 선지서들 안에는 죄사함에 관한 무수한 약속들이 있었지만, 교회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기를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희생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 하나를 좀더 면밀히 고찰해 본다면 열조들도 죄사함에 관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 똑같은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약속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그들이 얻은 죄사함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마치 그가 어떤 새롭고 이전에 들어본 일이 없는 것을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께서 다시는 죄를 기억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지금은 옛날과는 다른 방법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결론 지을 수가 있다. 이 차이는 말이나, 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실제적인 가치에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가 단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범죄를 기억하시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선지자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시지 않는 새로운 언약의 특전이라고 개발한 것은 무익한 것이 될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관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논쟁의 마지막에 왔으므로, 독자들은 간단히  다음의 것, 즉 미사의 희생에 관한 교황주의자들의 고안은 율법의 제사가 거절되는 바와 똑같이 완전히 거절 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그들의 미사가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는 반대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 되었을 때부터는 이제 제사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교황주의자들은 대답하되 미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와 다른 것도 아니요,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니고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사도는 이와 똑같은 제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될것이며, 또 그리스도의 희생은 유일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단번에 드려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도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위한 제사장 직분의 영예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홀로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 자신들의 제사를 피 없는 제사라고 부름으로써, 또 다른 변명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외없이 죽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미사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단번에 드린 제사의 상징이라고 변명을 한다.  그러나 한편 사도는 율법의 제사들 안에는 죄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폐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일로부터 그들이 고안해 내는 이런 종류의 적용은 소멸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요컨대 교황주의자들이 어떤 형식으로 도피하든간에, 사도의 논증에서 그들의 미사에는 모든 종류의 모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피하지 못한다. 첫째, 사도의 증언에 의하면, 홀로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 자신을 제물로 드리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러나 미사에있어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의 기존에 의하여 드려지고 있다. 둘째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유일한 것일 뿐만 아니라, 단번에 드려진 것이므로 반복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사에 있어서는 그들이 그 제사가 아무리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들 그것은 역시 매일 행하여지고 있음이 명백하며, 그들 자신도 그것을 시인하고 있다. 사도는 피와 죽음이 없는 제사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제사가 피 없는 제사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사도는 죄사함을 얻는 문제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가 십자자가 위에서 드리신 저 유일하신 제사에 피신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으며, 또한 반복적인 제사의식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폐지되었다고 하는 이 표적에 의하여 열조들과 우리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효과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매일 제사를 통한 상징을 요구하기 때문에 외부적인 표상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교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결과가 된다.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사도는 이제 앞에서 지금까지 가르친 것에 대한 결론내지는 요약을 하고 있다. 더우기 그는 참으로 적절하고 무게 있는 권고를 덧붙여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요지는 이렇다. 즉,  율법 아래서 하나님의 지성소에 가까이 하기 위하여 행해지고 있었던 모든 의식들은 그 진정한 실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에게는 이 의식들의 사용은 불필요하고 또 무익하다 는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주신 곳에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명백히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사도는 하늘을 지성소에 비교하고, 그리스도 안에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을 은유의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비유라는 것은 때로는 논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희미하게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사도가 율법의 상징들을 그리스도에게 관련시킴으로써 율법에서 예표된 것이 지금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할 때, 이 비유들은 많은 은혜와 빛을 우리에게 준다. 거의 모든 말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여기에는 그리스도 안에 보이는 진리가 낡은 상징들을 폐지한다고 함과 같은 하나의 숨은 대조법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도는 첫째로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 특권은 율법 아래 있는 열조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 족속들의 이름을 그의 양 어깨에 붙이고 12개의 돌들을 그의 가슴에 붙이고 들어가는 일 이외에 백성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지성소에 가까이 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즉, 상징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은 매우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열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왕과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라고 사도가 말하는 것은 피의 개재에 의하지 않고서는 지성소의 문은 대제사장의 엄숙한  지위하에서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피와 짐승의 피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짐승들의 피는 즉시 썩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활력을 오래 유지할 수 없지만, 한편 그리스도의 피는 어떠한 부패에 의해서도 손상을 받는 일이 없이 완전히 생생하고 순수한 혈색을 가지고 계속 흐르므로 세상 끝까지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죽임을 당한 짐승들은 죽은 물체였기 때문에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자신의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늘과 땅 위의 전면에 퍼지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 버림 당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계속적인 봉헌이다.

 

"20. 그 길은 ~~~~휘장 가운데로~~~~" ; 휘장이 지성소의 안쪽을 가리고 있지만, 또한 거기에 이르는 문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신격은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 숨겨져 있었지만, 그러나 역시 그는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자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가 길과 문이 되어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의 육신의 외부적인 면으로부터 평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그의 육신을 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육신은 휘장처럼 하나님의 위엄을 감추기 때문이요,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보게 하기 때문이다.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  '옛 제사장 직분의 것들을 이제 상기해야 한다. 비로소 그리스도는 대제사장 폐지에 관해서 사도가 앞에서 말해 온 모든 이전의 제사장들의 직무가 해제된 연후에라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 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가 별개의 질서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해 변화되었으며 그 이전 .것들은 모두 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모든 하나님의 집 위에 자리잡게 하셨으므로 교회 안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또 그 지도자와 지배자로서 다른 사람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22. 우리가~~~~~~~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사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사 안에 있는 모든 그것은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같이, 그는 또한 우리편에서도 이에 합당한 것을 하나님께 가져가기를 원하고 있다. 옛날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씻음으로써 그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고 있었다. 이 깨끗하게 하는 의식이 육체적인 것이었다 해도, 놀랄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배 그 자체가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고, 육신의 느낌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제사장이 죄인들 가운데서 택함을 받아 당분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거룩한 직무들을 집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기 위해서 고귀한 의상으로 꾸며 입었 지만, 그것은 이 세상의 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성소 안에 들어갈 때 성별되기 위하여 일단 언약궤가 있는 곳까지 와서 가축들 중에서 짐승의 제물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훨씬 우월하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깨끗하고 홈이 없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의로움의 원천이시며, 하늘의 명령에 의해서 대제사장이 되셨는 데, 한정된 생명의 잠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이것을 비준하기 위하여 맹세가 삽입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최상의 완전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모든 은사로써 아름답게 나타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하나님을 인간들과 화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보자로서 나타나시기 위하여 하늘 위에 오르신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 모든 것들에 합당한 것만을 가지고 가야 한다. 제사장과 백성들 사이에는 서로의 일치가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외부적 씻음들은 폐지되고 의식들의 모든 장치가 중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사도는 이러한 외부적인 상징들을 진실한 마음과 믿음의 확신과 모든 죄악을 씻어버리는 일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기 위하여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과 확실한 신앙과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서만 하나님께 올 수 있다.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 가장되고 속임수 있는 마음과 대비되어 있다. πinpopopiα(플레로포리아; 온전한 믿음, 확신) 라는 말로 사도는 믿음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는 오직 확실하고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사도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죄사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깨끗한 자로 간주되거나 또는 우리의 마음이 일체의 거룩하지 못한 생각으로부터 깨끗함을 받게 되어 육신의 자극에 의하여 유혹을 받아 방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 뒤에 이어서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은 '세례'에 관하여 언급한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사도가 율법의 옛 의식들에 관하여 암시하는 것이며, '물'이라는 말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에스겔도(36:25) 이에 관하여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라고 말한다. 이 말 전체의 요지는 즉, 우리가 만일 사람과 영혼이성별되어서 그리스도께로 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성별은 의식들의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에서 흘러나오고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성취되는 굳센 믿음,-깨끗한 양심, 몸과 영혼의 정결함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권고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자녀로 받아 들여졌으니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말한다.

 

"23. 또~~~~~~~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  사도는 여기에서 유대인들에게 오래 참을 것을 권면하고 있으므로 믿음보다도 오히려 소망을 말하고 있다.  소망은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끝까지 믿음에 의하여 육성되고 또 보전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는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 그 지체를 명백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면,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자기 나라의 백성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의 의식들을 너무 세심하게 지키는 사람들의 거짓을 강력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어느 정도 진실되게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고백에 의하여 나타내도록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그 다음에 말하고 있는 조건, 즉, '약속하는' 하나님은 '미쁘시다' 고 하는 조건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첫째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진실하신 분이라'고 하는 기초 위에 .놓여져 있음을 말해 준다. 더욱이 이 진실은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 들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이 먼저 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음성이든 간에 모두 믿음을 만들기에 합당한 것은 아니다.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은 오직 약속뿐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로부터 우리는 인간들의 믿음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음을 추론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24. 서로 돌아보아~~~~~~~~" ;  이 권면은 특히 유대인들에게 대해서 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민족의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 것이었던가 하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였기 때문에 모든 다른 민족들을 물리치고 오직 그들만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택함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의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특권 때문에 득의양양해 있었고 또 다른 여러 민족들을 멸시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오직 하나님의 교회에 포함시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건방지고 오만한 마음으로 교회라는 칭호를 자신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 오만한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 사도는 큰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나의 의견으로는 그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이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교제하고 교회의 동일체로서 그들과 결합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째, 그는 서로 돌아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부터 그의 교회를 모으고 계셨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는 항상 큰 분쟁이 있어서 이들을 연합시키는 일은 불과 물을 합하는 일과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이방인들과 교제하거나 연합하는 것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것은 자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들을 해롭게 하고 있던 이 악독한 바늘에 또 다른, 또 히나의 바늘, 즉 사랑의 바늘을 대비시키고 있다.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παρουσμδδ  (파로크쉬스모스; 격려, 자극)이라는 말은 투쟁의  격렬함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시기심을 일으켜 투쟁하게 되어서는 안되겠으므로 사도는 거룩한 경쟁을 하도록 즉, 서로 자극을 받아 피차 사랑하도록 그들을 권면한다.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  이 말은 윗 문장을 보강하고 있다. 여기 헬라어의 어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ёπ(에피)라는 말은 어떤 부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ёπισναγтотη(에피쉬 나고게)라는 말은 새로운 부가에 의하여 증원된 회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 말미암아(엡2:14) 하나님께서는 교회 밖 에 있던 사람들을 그의 자녀들의 수효에 추가시키셨다. 이리하여 이방인들은 전에 없었던 교회의 새로운 증원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그들 자신에 대한 어떤 모욕이라고 생각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그들과 함께 이처럼 섞여져 있다는 것을 그들의 정당한 핑게로 삼아 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들이 그 특권을 포기하도록 납득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양자가 되는 권리가 그들의 특권이고 배타적으로 오직 그들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이 이 평등성 때문에 교회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경고하는 것이 무익한 것처럼 보여서는 안되겠기에 이러한 죄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기억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제 사도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무슨 필요가 있어서 이 훈계를 하였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동시에 우리는 전반적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각각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전 인류를 통하여 지배적인 병폐이다. 그리고 특히 무엇인가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듯 보이는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자신들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그리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사람은 제각기의 대단히 까다로운 성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각기 될 수만 있으면 그 자신들을 위하여 따로 따로 자신의 교회를 만들기를 즐겨한다.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서로 질투하고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그들의 형제라고 부르고 그들을 자기들의 한 형제중에 포함시켜서 대우하려는 사람은 백명의 부자 중에 단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 이다. 만일 어떤 비슷한의 관습이나 또는 다른 유혹이나 또는 편리함 따위가 우리를 함께 묶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들 사이에서 항구적인 교제를 기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고는 우리가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하도록 격려를 받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합쳐주신 사람들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모든 사람에게 필요 이상으로 적절한 말씀이다. 확실히 똑같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합쳐진 사람들을 우리는 형제의 사랑과 친절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확실히 사단이 매섭게 우리를 엿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는 더 한층 열심히 일치하도록 노력하여 사단이 어떠한 방법으로도 우리를 교회로부터 떼어 내거나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버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아무도 정당하게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 오직 한 가지의 목표, 즉, 사랑을 행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선을 행하는 경쟁 이외의 다른 경쟁이 성행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의 목표를 가진다면 이 일은 성립될 것이다. 확실히 형제를 멸시하는 일, 역정내는 일; 질투 하는 일, 지나친 자기 평가 및 기타의 사악한 충동 따위는 우리의 사랑이 냉랭하거나 또는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입증해 준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는 말로부터 모든 분열의 첫 시작은 오만한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도를 지나쳐서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할 때 온다는 것이 명백하게 된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이미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불성실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오늘날 볼 수 있는 것들과 비슷한 배교와 반역의 실례들에 그리 놀라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얼마동안 거룩한 행실을 보여주었으며 우리와 똑같은 신앙을 표명한 사람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것을 볼 때,그것은 물론 우리에게 적지않은 분노를 일으키지만 그러나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동요하지 않아도 좋다. 사도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널리 퍼지고 있었던 병에 필요한 치료를 베풀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귀절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바울의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롬13 11)라는 말과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오히려 사도가 그리스도의 최후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재림을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인생을 살도록 노력하며 동시에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게 한다.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목적은 지금 방황하고 있는 이 흩어진 상태에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모으시는 일 이외의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이 가까와지면 가까와질수록 우리는 흩어진 자들이 함께 모여져서 결합되고 '한 무리', '한 목자'(요10: 16)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누군가가 사도는 어찌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아직, 멀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왔음과 그들 위에 거의 다가와 있음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처음부터 설립되었으므로 충성스러운 자들은 심판하시는 이가 이제 곧오 살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그들이 거의 어느 순간이든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어떤 잘못된 망상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왜 냐하면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부터 교회의 상태는 그 시대 전체가 마땅히 최후의 날이라고 불리어질 만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옛날에 이미 죽은 사람들도 역시 우리와 똑같이 말세에 살고 있었다. 교활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은 육신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단순성을 비웃지만 그들의 비웃음에 의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되겠기에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다(벤후 3 8)고 성령은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늘 나라의 영원성을 생각 할 때마다 어떠한 오랜 시간도 우리에게 길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업을 완성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때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나날을 마치 최후의 날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하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고 말한 후에 사도는 오직 권하여:*****더욱 그리하자는 말을 첨부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모든 신자들은 가능한 한 모든 측면에서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각자가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힘써야 하며, 방황하는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넘어진 자들에게 손을 뻗쳐야 하며 또한 외부인들을 끌어들여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만일 아직 그리스도 무리의 밖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 이 정도의 애를 써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와 함께 합쳐주신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많은 열심이 필요 하겠는가!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일반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역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유일한 구원이 박탈당했고 또한 분명히 멸망에 내맡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엄중한 복수가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고 사도는 지적한다. 노바투스(Novatus)와 그의 일당들은 옛날에 세례를 받은 후에 타락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죄사함의 모든 희망을 완전히 무차별하게 빼앗으려고  회책했었는데 이 증언으로 미끼를 삼았던 것이다. 이 거짓을 논박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터무니 없는 소리를 지지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서신의 신뢰성을 비난하는 편을 택하였다.  그러나 이 귀절의 정당한 뜻은 그것 자체만으로 아무런 외부적인 지지나도움없이도 노바투스 따위의 건방진 이론을 .논박하기에 대충분하다.

 

사도가 죄인으로서 묘사하고 있는 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타락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에서 여러 종류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의지로 교회의 교제로부터 떠나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폭로하고 있다. 개개의 잘못들과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이런 종류의 보편적인 반역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이 일은 이미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므로 사도는 마치 만일 이미 누가 받은 은혜를 알면서 그리고 '자진해서 버린다면'이라고 말하듯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이 가르침이 노바투스의 잘못된 설명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오직 배교자들에 대해서라는 것이 문맥으로 보아서 명백하다. 사도가 이렇게 하는 그것은 어떤 사람들의 버릇처럼 한번 교회에 받아들여진 자들이 교회를.버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는 선언하기를 그러한 사람들은 한 번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고의적으로 범죄하였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위한 어떤 제물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다른 방법으로 죄인들을 위해서 날마다 그 자신을 제물로 드리고 계시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다른 제물을 찾을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절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아무 제물도 남겨져 있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거절은 어떤 특정한 범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완전한 거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엄격하심은 확실히 두려워할 만하지만 그것은 공포를 일으키기 위해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포악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치료법이므로, 자기의 힘이 미치는 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과 그는은혜를 파괴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망 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해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날마다 화해를 위한 초청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속량을 발견한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구원도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자기 스스로 저버리는 자들은 죄사함에 대한 모든 소망을 박탈당한 자들이라고 해도 우리는 놀랄 것이 못된다. 이것이 즉 부사 Eτ6(에티; 아직) 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회생은 비록 신자들이 반복해서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신자들에게 유효하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은 언제나 그 위력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육신 안에 살고 있는 한, 신자들은 완전히 무죄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버리고 그 결과 그 자신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박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귀절은 그들의 망은을 강조하기 위해서 여기에 삽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고의적인 악의와  그 자신의 의향대로 한번 그의 마음에 켜진 하나님의 빛을 꺼버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주장할 아무런 변명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를 경외와 주저함이 없는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 일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대함으로써, 그것을 멸시한 데 대한 무서운 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  이 구절에서 은혜를 전혀 맛보지 않은 사악한 자들과 한 번 그것을 .맛보았더라도 자신의 과오로 그것을 고통을 영원하 잃어버린다는 것을 아는 사악한 자들은 양심의 거리낌으로 느낄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회한으로 몹시 마음이 찔리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할 뿐만 아니라 심히 마음에고통을 받아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한다.이 일은 그들로 하여금 불손하게도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게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혹한 심판을 견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잠간의 휴식을 주자마자 곧 그들을 다시 심판의 자리에 끌어내서 고통을 주어 괴롭히는 데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사도는 '맹렬한 불' 이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강렬한 충동 혹은 '광포한 격노' 따위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불'이라는 말에는 평범한 은유가 있다. 불신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불타고 있는 것처럼 그 때에 그들은 지금과 똑같은 감정으로 불탈 것이다. 궤변가들이 이 불의 성질에 관해서 어떤 예리한 추측을 해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그들의 의견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이 '불'을 벌레와 연결시키고 있는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전7:19). 그는 벌레라는 말을 불신자들을 괴롭히는 극심한 양심의 가책의 뜻으로 비유적인 사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  불은 그들을 소멸하고 멸망시킬 것이나 불은 결코 다 타버리거나 소모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이 불은 끌 수 없는 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지위를 거절하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원수들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기억시키고 있다. 중간 길이란 없다: 교회를 버리는 자들은 그 자신들을 사단에게 넘겨 주게 되는 것이다.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  이것은 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보다 더 큰 것에 이르는 논법이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것이 중대한 범죄였다면 복음을 거절하는 일에 대하여 마땅한 형벌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그것은 가공할 만하고도 많은 모독의 행위들로 에워싸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논법은 유대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참으로 적합하였다. 율법을 버린 자들에 대한 이와같은 엄격한 꾸지람은 그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일 수도 없었고 또한 불합리한 것같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 꾸지람이 아무리 엄격한 것이라하더라도 그것을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의 위엄을 확인하는 의로운 형벌로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위에서 사도는 어떤 개개의 죄들에 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일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확증한다. 율법 자체는 어떠한 종류의 허물이나 위반도 죽음으로 형벌하지는 않았고 다만 사람이 그 종교로부터 완전히 떠났을 경우의 배교에 대해서만 죽음으로 형벌하였다. 사도는 만일 누군가가 ,너희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면 너희는 그를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라는(신17: 2~5) 말씀을 인용하였다.

 

율법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요, 모세는 그 저자가, 아니고그 집행자에 불과하였지만 사도가 그것을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율법이 모세의 손에 의하여 후세에 전해졌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가치를 더 한층 높이기 위함이었다.

 

"두세 증인을 인하여" ;  이것은 바로 지금의 주제에는 아무 관계가 보없고 다만 고발을 당한 자를 정죄하기 위해서는 두세 사람의 증인을 필요로 한다는 모세의 정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로부터 사도가 주목 했던 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더 한층 명백히 결론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이 덧붙여지지 않았다면 허점으로 많은 잘못된 추측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배교에 관해서 말하고 있음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동시에 우리는 두 사람의 증인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정죄받을 수 없다는 거의 모든 정치가들이 관찰한 정의의 관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  율법을 버린 자와 복음을 버린 자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점은 어느 쪽이나 모두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방법은 다르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을 신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멸망으로써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 무서운 형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사도는 이처럼 기독교를 버리는 일을 세 가지 형식의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발아래 밟히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고, 은혜의 성령이 멸시된다는 것이다. 버리는 일보다 짓밟는 일이 더 나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존엄성은 모세와는 매우 다르다. 그것에 대하여 사도는 복음을 율법에 대비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의 인격을 모세의 인격에 대비시키고 있다.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  사도는 여러가지 은혜들을 비교로 들어서 망은을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우리의 성화의 원인이 되는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대단히 부질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짓은 믿음에서 떠난 자들이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가르침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 피의 문제이다.사도는 그것을 언약의 피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이 보증이 붙여졌을 때 약속들은 우리에게 유효 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우리가 성별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확증의 방법에 주목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에게 뿌려지는 것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한 피의 뿌림으로부터 속죄와 성화는 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는 피 뿌리는 옛 의식의 관습이 진실한 성화에는 아무런 소용이없고 다만 그것의 그림자 또는 상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 사도는 그것을 그 효력 때문에 은혜의 성령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과 그 능력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공된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을 믿음으로 비추고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양자로 인치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재생시키며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해주신 이는 은혜의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은혜의 성령이 그렇게. 불려지는 것은 마땅하다. 은혜의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은혜 와 더불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을 모욕하는 것은 가장 사악한 큰 범죄이다. 그러므로 이 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받았으면서 자기 자신의 의지로 그 은혜를 무익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종류의 모독을 대단히 엄하게 보복하신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며, 또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발 아래 짓밟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냉정하게 대하시며, 그들의 유일하시고 진정하신 안내자인 성령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신다 해도 조금도를 놀라운 일이나 아니다.

 

"30~31.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 이 두 귀절은 모두 신명기 32장 35~36절에서 설명하였다. 모세는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가해진 악에 대해서 복수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사도는 여기 복수에 관하여 말하면서 앞에서의 모세의 말을 부적당하게매우 곡해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의 불신앙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도가 여기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로마서 12장 19절에서 바울은 모세가 말한 참된 뜻을 추구하여 그것을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바울은 참으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면서 복수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이 모세의 증언에 의하여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특수한 문장을 보편적인 가르침에 적용시켜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모세의 의도는 .충성한 자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 행해지는 부정들에 대한 복수자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사실로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고유한 임무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복수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의 말에서 언제나 결론지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수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멸시하면 반드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이 증언으로부터 입증해도 모세의 이 증언이 결코 오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는 여기에서도 소에서 대해 이르는 논법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해를 받는 것을 벌하지 않고는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하나님은 확실히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시는 자가 될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평가해지는 악이라도 용납하시지 않았거든 자신에게 가해지는 악에는 복수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에게 가해지는 모욕이나 치욕을 무시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만큼 그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 주의하지 않거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고유한 임무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합당한 보복을 하시는일이므로 사도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하면 반드시 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보여주고 있을 뿐이라는 견해가 보다더 간단하고 무리가 적다.

 

"주께서 마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  여기에서도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모세의 뜻이 여기에서 의도한 것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 구절을마치 모세가 '심판한다'로 사용한 말을 '벌한다'라는 의미로 기록한 것처럼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모세는 바로 뒤에 설명의 형식으로 "하나님은 그의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라"(한글 개역 성경에는  "여호와께서***::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라고 됨)고 덧 붙이고 있으므로 '심판한다 라는 말은 분명히 통치자의 임무를 감당한다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사용법은 히브리어에서 종 종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귀절은 바로 지금의 주제와는 거의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검토하는 사람은 이 귀절도 적합하게 여기에 인용되어 있음을 인식할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치하실 때는 반드시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고 그것 안에 있는 혼란을 회복시켜 질서를 갖게 하신다. 위선자들은 가족의 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집의 질서를 잡으려고 하실 때 그들이 충성스러운 자들 가운데 부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일, 거룩하신 이름을 불 성실하게 남용하고 있었던 일에 관해서 처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두려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들을 위선자들로부터 구별하신다는 뜻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말하고 있다(시145;:20) 똑같이 시편125편 3절에서 예언자는위선자들이 일소될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고 해석ο그 자신들이 교회에 .속하는 자들이라고 더 이상 대담하게 자랑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며 이 심판이 완료될때이스라엘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하나님은그의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를 합법적으로 잘 통치하기에 유익되는 것은 무엇하나 빠뜨리지 않으시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 주의깊게 자신을 자제하고 또 그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엉뚱한 짓이 아니다.

 

이 일로부터 사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존에 빠져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결론짓는다. 할 운명의 인간은 제아무리 적대감에 불타고 있더라도 그 원한을 죽음의 건너편에까지는 가지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하나님의 능력은 그렇게 좁은 한계에 국한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는종종 인간을 피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아주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진심으로 떨고 두려워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런 무서움이 그 사람 전체에 엄습하여 어떠한 슬픔이나 고통도 이것에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많은 즐거움들을 우리의 육신이 우리에게 준다 해도 또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지원죄에있어서 자신들을 속이더라도 영원한 사망을 위한 대단히 많은 두려움을 경험들로 준비하고 계시는 진노의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것은 무서운 일인진저 라는 이 경고는 우리를 각성시키기에 충분하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존에 빠지는 것이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 낫다고(삼 하24: 14) 설명할 때, 다윗의 말은 이 문장에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다 윗은 하나님이 자비의 성실함에 신뢰함으로써 인간보다 하나님을 그의 심판 자로 모실 것을 택하고 있었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다윗은 하나님이 당연히 그에게 노하고 계신 것을 알았지만 하나 님께서는 화해하실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땅위에 쓰러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하 나님은 관대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가 인간의 노함보다 하나님 의 노하심을 덜 두려워한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 도는 죄사함의 모든 소망을 완전히 빼앗기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접근이 완전히 막혀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오직 극도의 엄격함을 기다릴 수밖에 없 는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가공할 만한 것 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말씀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윗 이 시편 18편 25~26절에서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십을 나타내지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 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고 말하는 것 은 이 뜻이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이후에~~~~~~생각하라." ;  그들에게 더한층 자극을 주고 행동을 촉진하기 위해서 그들이 전에 보여주었던 경건의 실례를 그들의 마음에 상기하도록 한다. 좋은 출발을 하였는데 도중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상당히 나아갔는데 되돌아간다는 것은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아래에서 충실하고 용감하게 싸웠다면 그 싸움을 기억하는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 유익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마치 이제 모두 끝마치기나 한 것처럼 게으름과 안일함에 빠지기 위한 구실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우리 앞에 남겨진 진로를 완전히 주파하기 위한 더 한층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마치 우리가 징병제도하의 병사들처럼 여러 해 후에 제대를 원한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징집하신 것은 아니고 우리의 복무를 바로 끝까지 계속 완수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그들이 아직 신병이었을 때 그들 자신이 한때 칭찬할 만한 전투 행위들을 수행하였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에 대한 권면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오랜 경험을 쌓은 후에 만일 그들이 이제 용기를 잃는다면 더한층 부끄러운 일이다. 빛을 받은이라는 말은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를 섬기기 시작한 때로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그가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너희들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곤란하고 '힘든 싸움 을 참았다. 그리하여 '이제는 너희의 경험이 너희에게 확신을 주어 더한층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들이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라는 것을 그들에게 기억하게 하는데 그들이 믿음을 갖는 것은 자신의 노력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력에 의하는 것임 을 그들에게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및을 받은 자라 함은 전에는 어두움 에 둘러싸여 있어 다른 곳으로부터 그들을 비추는 빛이 없었더라면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자들을 말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하거나 참은 일들을 상기할 때마다 그것들은 우리를 격려하고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한층 높은 목적에 도달하게 한다.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 사도는 적지 않은 시련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시험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 다. 그러나 사도는 더한층 큰 노력을 하도록 그들을 권면하기를 중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목적에 도달하기나 한 것처럼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려를 받을 필요가 없기나 한 것처럼 거짓된 자만심으로 말 미암아 스스로를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들이 "혹 비방과 환 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 들이 받은 핍박이 특히 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들은 핍박을 받 고 있는 신자들의 친구가 되었다고 사도가 말하고 있는 마지막 귀절도 주의 깊게 주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들이 싸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이것이 그들 전부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의 한 사 람이 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들도 그』자신이 스스로 이것을 .당하 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진실로 만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너희가~~~~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 그들도 인간적인 감정에 움직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재산을 잃은 것 이 슬픔을 가져온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슬픔은 사도 가 말하고 있는 이 기쁨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것이아니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인생의 불리한 입장 가운데 포함되고, 그들이 재산을 빼앗긴것은 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슬픔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더한층 높은 곳을 보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럼은 로 말미암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을 모두 완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s 하늘의 '보상을 기대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감정이 이렇게 이 세상으로부터 돌려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모든 신자들이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우리그리는 우리의 구원이 되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기꺼 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 여 그들이 참는 싸움에 관해서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을 하늘에 돌릴 때 그들은 영적 기쁨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하기 어려운 큰 육신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다. 

 

이 뒤에 사도가 "너희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앞이라"고 말하 는 것은 이 뜻에서이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재산을 수빼앗기는 것을' 기쁨으 로 참는 것은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보는 일이 기뻐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은 약속된 하늘의 보상을 기대하여 현재의 불행감으로 인한 슬 픔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하늘의 정보물에 대한 사랑 이 강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해도 제상에 |대한 매 력은 없고, 빈곤의 느낌이나 치옥의 {느낌도!,우리의」마음을 슬픔으로 결코 정복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조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무엇인가를| 인 내와 평정한 마음으로 참아가기 원한다면,저 지복을 종종 .생각하는 일에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한다. 그 지복에 비하면 이 세상의 모든 보물은 오직 분토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앞이라" 는 .말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 에게 약속하신 유업이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그의 모든 지식은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다.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 사도는 인내를 특히 강하 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신앙을 내던질 때는 저 약속된 보상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 일로부터 명백한 것은 믿음은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의 기초라는 것이다. 보 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해서 사도가 값없이 주는 구원의 약속에 손상 을 입히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수고가 주 안에서 결코 무익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에 관련해서 보상의 관념이 무상의 칭의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일에 관해서는 다른 데서 종종 언급했다.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가 끝까지 참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단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수많은 간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훌륭한 인내 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달릴 '노정의 반도 못가서 몇 천번 이고 좌절되고 말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우리에게 확실히 정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인생은 경주장과도 같은 것이므로 우리는 |목표를 향하여 분투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길에서 도중에 많은 장애와 곤란 이 나타나서 우리의 경주를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굳건한 용기를 가지고 그것들에 대항하고 기역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곁길로 들 어가게 하고 말 것이다. 사단은 교묘하게 움직여서 우리로 하여금 ,온갖 시 험에 부딪치게 하여 용기를 잃게 하므로 실로 그리스도인은 굳건한 인내심 에 의하여 지탱을 받지 않는다면 단 두 발도 떼어놓기 전에 반드시 피곤해 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야말로 우리를 끊임없이 전진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고, 또 약속된 유업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환유법으로[ 약속이라고 부르고 있다.

 

"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 사도는 우리가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우리의 용기가 약해질 때 그 용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빠르고 신속 하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것보다 더 적절한 조치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전 .장에서 어떤 장군이 그의 병사들에게 만일 그들이 잠시동안 견디기만 (하면 머지않아 전쟁이 끝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사도는 우리에게 만일 우리의 마음이 약해져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주께서 속히 오셔서 모 든 악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위로가 더한층 신빙성과 구권위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박국 선지자의 증언을 인용한다(합2:4). 사 도가 선지자의 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헬라어 번역에 따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우선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그것을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여 보기로 하겠다.

 

선지자는 그의 백성들의 무서운 멸망에 관해서 말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예언에 의해 두려워졌기 때문에 그에게는 오직 세상을 떠나서 그의 성루에 피 신하려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의 성루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하여 우리는 하늘에 올려지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서 있 었으므로 경건한 자들에게 소망을 가져오는 새로운 예언을 기록하도록 하나 님께 명령을 받았다.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귀찮게 [하고 제도 그가 조원하는 것 에 성급하므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출서둔다 해도 더딘 '것처럼 생각된다.^그러 므로 선지자는 약속은 지체함이 없이 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비록 더딜지라 도 기다리라'고고 덧붙이고 있다. 이것에 의하여 선지자가 의미하는 그것은 하 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사실 굉장히 빨리 오는 것인데, 마치 옛 속담이 무엇 인가를 원할 때는 빠른 것도 더딘 것처럼[여겨진다' 라고 발하듯이 기다리는 우리에게 이 약속은 늦게 |오는 것처럼 일본이는 것이다다음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 : 4)고 하는 말이 계속된다: 이 말 속에서 (선지자가 말하는 것 은 불신앙자들은 어떤 힘의 보호를 받고 힘에 의지한들 j견고히 (설 수 없는 데, 이는 견고한[ 인생이 오직 믿음에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들 은 문제아무리 (자신들의 좋을 대로 .무장을 해보아도 그들은 세상에서 :실패하 치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언제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신자들의 믿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을 통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지 자가 말하고 있는 의도이다.

 

.하박국이 약속에 관해서 발하는 것을 사도는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다. 왜 냐하면 그 자신의 약속을 수행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그- 자신을, [7계시 하시기 때문이다. 주된 내용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주께서는 우리를 돕 기 위하여 그의 손을 펼치러 오신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선지자에 {따라서 말하되 하나님은 그의 도움을 필요 이상 연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 일은 곧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마치 시간을끌어 종 종 속이듯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적절한 시기를 알고 계셔서 긴급히 필요한 순간에 놓치지 않고 '간섭하시는 것이다.오실 이가 오시리 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 문장에는 두 개의 절 이 있다. 상반절에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오신다고 말하고 있고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이 정한 때에 그렇게 하실 것이며 부적당하게 늦어지지 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인내는 믿음으로부 터 온다고 하는 것이 사도가 말하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믿음 에 의하여 지지를 받지 않으면 싸움에 이길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한편 요한도 "세상을 이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 4)고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높이 올라가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요, 우리가 이 현세의 모든 위험들과 모든 슬픔들과 불행들을 이겨내는 것도 믿 음에 의해서이며 우리가 폭풍우와 비바람치는 한가운데에서 고요하고 안전 한 장소를 발견하는 것도 믿음에 의해서이다. 사도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람들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 여주는 것이다. 산다는 말의 동사형이 미래시제인 것은 삶이 .계속될 것을 보여준다. 더 이상의 설명을 .위해서는 이 귀절이 (인용되어[있는 로마서 1 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을 보면 된다.

 

"한 뒤로 물러가면" ;  이 말은 선지자의 말 п(움플라)를 의미하는 말 이다. 즉 사람이 교만하거나 자신이 지나친 곳에서는] ¡정신이 결코 정직 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검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헬라어 기여본은 부분 적으로는 선지자의 의도에 일치하나 또한 다른 곳도 있다. 이 뒤로 물러가 는 일은 불경건한 자들에게 가득 차 있는 교만과 거의 다를 바 없거나 아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제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은 들이 그릇된 자신감에 취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버리고 모든 악으로부터 평 화와 평온함이 오기를 기대함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런 종류의 무익한 거짓 비방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모든 두려움과 존경심을 거절 할 때, 그들은 뒤로 물러간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믿음의 능력을 나타냄과 동시에 불신앙의 성격을 나타낸다. '불신앙이 교만한 이유 는 인간을 하나님에게 복종시킨다고 .하는 당연한 명예를 하나님께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악한 자들이 만사가 순조롭게 잘 되어가는 한, '어떤 사람 이 말하고 있듯이 그들이 감히 하나님을 가소로이 여기고 모욕하는 무 관심과 교만과 멸시에서 오는 결과이다. 뒤로 물러서는 일보다 더 [믿음에 위배되는 일은 없으므로 인간이 그 자신의 본성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났을 때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돌이켜주는 것이 믿음의 본성 이다.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 이 귀절은 마치 사도가 이 문장을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말한 것처럼 해석되어야 한다. {그의 그의도는 선지자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는 일이 아니고,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 귀절을 유의 하여 좀더 면밀히 조사해 :보도록 권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  사도는 헬라어 역 을 자유로이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헬라어 역은 마치 지금 그가 그것을 적절 하게 적용시키는 바와 같이 그가 지금까지 논증해 온 앞에서의 가르침에 가 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미 사교회를 버림으로써 자신들로부터 믿 음과 은혜를 박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이제 그는 그들에게 가르치기를 그들이 뒤로 물러가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 니라고 한다. 그는 마치 영혼의 보존을 그 죽음과 대비시키고 있는 것처럼 다시 그는 믿음을 뒤로 물러가는 일과 대비시키고 있다. 이 문장은 또한 우 리에게도 적용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한때 우리에게 복음의 빛으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순종하도록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도록 소명을 주시는 데에 그 은혜의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 의 :진정한 보존이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면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