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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7:25)

1. 성경 (히 7:1 ~ 28)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1)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2)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3)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4)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5)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6)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7)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8)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9)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0)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1)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2)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3)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4)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5)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6)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7)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8)(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19)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0)(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1)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2)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3)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4)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5)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6)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7)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28)

 

2. 묵상(Calvin선생주석)

"1. 이 멜기세덱은~~~~~~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지금까지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의 권면 가운데 유대인을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와 멜 기세덱 사이를 대조하는 참 뜻에 주의하도록 했다. 앞 장의 끝에서 그는 다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까지 주제를 벗어나 지엽으로 치우쳤던 것을 그 출발점으로 되돌리려 했다. 이제 그는 지금까지 가볍게 언급하여 온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멜기세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로 만들고 있는 것에 관하여 주의해야 할 점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고 있다. 사도가 그의 논증을 주의깊게 전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이교적 미신들에 사로잡힌 나라에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를 고수하는 한 사람이 발견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이웃이요, 또 한편으로 는 가나안 사람들의 이웃이었다. 이처럼 그는 사방으로 거룩하지 못한 백성 들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모두 완전히 불신앙 에 빠져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일족 이외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예배되었다고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가장 높은 순수성과 성실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야 하였는데도 그들 스스로 이미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를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임무를 스스로 행한 한 사람의 왕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또 하나님의 아들의 상징이었던 이 사람에게서 모든 탁월한 점이 발견되어지는 것이 진실로 필요하였다.  그리스도가 이 상징에 의하여 예표되었다는 것은 시편에 의하여서 명백하다. 다윗이 네가 -영원히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고 말한 것은 이유없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에 반하여, 이 귀절에서 중고한 비밀이 교회에 주어져 있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그리스도와 멜기세덱 자신을 비교함에 있어서 양자간의 닮은 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닮은 점은 이름에 있다. 멜기세덱이 의의 왕이라고 불리어짐에 있어서 신비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비록 이 찬사는 온화와 공정으로 다스리는 왕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칭호는 본래 그리스도께만 속하는 것인데, 그는 다른 왕들처럼 공정한 통치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하심은 한편으로 화목의 자유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기 때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성령에 의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모든 백성에게 의를 나누어 주셨으므로 그는 의의 왕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다. 이 일로부터 그리스도의 왕국 밖에서는 인간들 사이에 오직 죄만 지배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리하여 스가랴 선지자는 엄숙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왕국을 소유하러 파송된다고 말할 때 그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슥9: 9)" 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찬양하였다.

 

그가 이 말을 통해 뜻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족된 의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채워진다는 것이다. 사도가 기록하고 있는 두번째 닮은 점은 평강의 왕국에 있다.  이 평강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여 온 의의 결실이다. 그리하여 이 일로부터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지배가 미치는 곳은 어디나 평화가 있어야만 하며, 이것은 이사야 2장과 19장 및 기타에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 평강은 번영과 행복의 상태를 의미하므로 이 귀절에서는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조용하고 편안한 양심을 주는 내적평강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우리가 이 축복 의 진정한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길은 끊임없는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불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이 편안하게 되기까지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운명이다.

 

"3. 아비도 없고 " ; 나는 무명의 아버지로부터 라고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이 '아비도 없고'라고 읽는 편을 택한다. 사도는 멜기세덱의 가문이 다만 희미하거나 무명하였다는 사실보다 좀더 명백한 것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아버지를, 땅에는 어머니를 가지신다는 상징과 관련이 없다는 반대론에 나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사도는 즉시 "족보도 없고"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멜기세덱 자신을 일반적인 출생 방법에서 제외시키며, 또한 멜기세덱이 영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혈통은 찾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확실히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도 태어났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에서 그를 한 인간으로서 논의하는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멜기세덱 안에서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것만을 보려 한다. 그리스도에 관계 있는 모든 것을 다룰 때, 우리는 면밀히 관찰하여 하나님 말씀에 의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다음에 성령은 이 왕을 그 시대에서 가장 탁월한 왕으로 소개하면서 그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또, 죽음에 관해서도 전혀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것은 그에게 영원성이 돌려진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멜기세덱에게 예표된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실제로 나타내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멜기세덱을 태어난 일도 죽은 일도 없는 인간으로서 성경이 제시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처음도 끝도 없다는 진리를 한 폭의 그림처럼 설명하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 비밀을 다룰 때, 얼마나 큰 존경과 자제가 필요한가를 배우게 된다. 사도는 성경 중에 기록되어 있지않은 것은 자기 자신도 알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것을 모르기를 원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의 판단으로 무엇인가를 가정한다는 것은 정당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여기에서는(성 경 귀절로 보아서는) 그의 사적인 능력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징으로서 생각되어 있다.

 

그의 가족관계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한 바 없고, 그의 죽음에 관해서도 한 마디도 언급이 없는 것은 우연이나 부주의에 의한 생략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사실인즉, 성령께서 이 일을 자의로 하신 일이며, 그것은 우리를 위해 그를 평범한 인간들보다 더 높이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노아의 아들인 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억측은 그럴 듯하지 못하다. 만일 멜기세덱을 애써 어떤 명백히 알려져 있는 사람으로 보려고 제조한다면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사이의 이 세번째 닮은 점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 이 말은 표현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실제와 표현 사이가 가까와야 될것을 명심해야 되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꾸며냄으로 그를 실재와 유사한 인물로 보려는 자들은 어리석을 뿐이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의 얼굴을 그림 안에서 볼 수 있듯이 멜기세덱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에 충분하나, 사람 자신과 사람의 초상화는 다른 것이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나 성령이나, 혹은 천사였다고 꿈꾸는 자들의 공상들을 반박한다는 것은 보람없는 일이다. 하기야 누군가가 포스텔루스(Postellus)나 기타 그러한 공상가들과 논쟁하는 것이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의 의무라고 느꼈다면 별 문제지만 그 아무곳에도 쓸모없는 사기꾼은 그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상상했던, 제롬이 말한 옛날의 저 미치광이들과 똑같은 오만함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멜기세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을 비교함에 있어서 네째로 지적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것이다. 십일조 제도는 몇 가지 원인들에 의해서 발생하였지만, 사도는 여기에서 그의 당면한 주제에 소용되는 것을 들고있다. 레위족에게 십일조가 주어진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고 그들에게 땅이 약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세습적인 권리로 땅의 일부가 그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땅의 소유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십일조 형식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도 있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교회의 공적인 임무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백성들의 공동 비용으로 유지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레위인들에게 그 임무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십일조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들은 현재의 주제에는 관계가 없으므로 사도는 그것들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현재의 논증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백성들은 십분의 일을 거룩한 예물로 하나님께 바쳤고, 이것들을 레위인들이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이 일이 레위인들에게 결코 하찮은 명예가 아니었던 것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대리자들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으뜸가는 종이며 선지자의 한 사람인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그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이 그를 능가하는 영예를 가지고 있음을 시인한다. 만일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자기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면 멜기세덱의 계급은 실로 특출하고 탁월한 위엄있는 것이어야 한다. 조상이라는 말은 무게를 더하기 위해서 첨부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특별한 영예의 표시이다. 그리하여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된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들보다. 우월하지만 멜기세덱보다는 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가장 높은 영예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레위인들보다도 우월하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멜기세덱에게 바쳤다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된다. 이렇게 그는 십일조를 바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보다 못한 자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  이렇게 번역하는 편이 그들은 레위의 아들들이므로 라고 하는 것보다 적절하다. 사도는 제사장들이 십일조를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 아니라 레위족 전체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레위인들에게 백성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주신 것은 비록 그들이 모두 동일한 조상에게서 태어났어도 모든 이스라엘 민족 위에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타국민의 제사장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모두 이 제사장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리는 그들의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특별한 것이었으나, 멜기세덱은 가장 높은 지위를 남김없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만인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레위인들이 대제사장에게 바친 십일조의 십분의 일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논증의 방향을 이렇게 한정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보다 더 가능성 있는 해석은 내가 설명해 온 해석이다.

 

"6. 레위 족보~~~~~~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북을 빌었나니" ;  이것은 사도가 그리스도를 밀기세덱과 비교함에 있어서 .다섯번째로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빔을 받는다는 세상의 일반 원리를 들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보다 낮다는 말이 된다. "그는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아브라함을 특별히 찬양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멜기세덱의 위엄도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아브라함이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약속을 가지고 있다고 그가 말할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계약을 맺은 거룩한 백성의 맨 처음 시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오직 그만을 택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양자권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주셨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영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모든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에 복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복종한 아브라함은 얼마나 위대한가를 알 수 있다. 그 두 가지의 일이라 함은 그가 멜기세덱이 복을 빌 때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것과 하나님의 대표자에게 드리는 것처럼 그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는 것이다.

 

"7.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 ; 우선 축복 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축복은 어떤 탁월한 공 적인 영예가 주어진 사람이 구 자신이, 돌보고 있는 사적인 개개인들을 하나 님께 위탁하는 엄숙한 기도의 행위이다. .이밖에 다른 종류의 축복도 있는데.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때 일어나는 축복이다. ¡이것은 모든, 거룩한 백성들 사이에서 공동으로 행해지는 기도이다. '사도가 ¡말하고∫있는:이, 축 복은 보다더 위대한 권능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삭은 그 .아들 야곱에게 축복하였고(창27:27) 야곱 자신은 그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에게 축복하였다(창48:14)  이것은 아들과 아버지를 동등하게 하는 서로를 위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을 유효하게 하기 위해 보다 높은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는 민수기 6장 23절에서 찾 아볼 수 있다. 거기에서는 백성들을 축복하라는 명령이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후에 그들이 축복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 첨부되어 있다.

 

되풀이 말하지만 제사장의 축복은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원리에 의한 것이다. 제사장은 희생제물을 바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한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요, 대리자에 불과했다. 누가가 그리스도께서 손을 들어 사도 들을 축복하셨다(눅24: 50)고 기록하는 것을 우리는 이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가 손을 드는 의식을 제사장들에게서 빌 어온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버지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시편 116편 17절과 118편 1절에서도 이 축복 기도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개념을 사도의 논증에 적용해 보자. 제사장의 축복은 하 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동시에(제사장에게 주어진) 큰 영예의 표적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는 이것을 주제넘게 행한 것이 아니고 제사장의 권리로써 행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보다도 더 우월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구원의 언약을 맺기를 원하신 유일한 인물이다. 결 국 아브라함은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는 우월하였지만, 오직 멜기세덱보다는 뛰어나지 못했다.

 

"8. 또~~~~~~~다고 '증거를 얻은 자~~~~~~" ; 내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도는 멜기세멕의 죽음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그가 살아 있는 증거라 고 생각한다. 확실히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멜 기세덱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가 그리스도의 상징이기 때문에 매우 적절하다. 사도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그 제사장 직분에 관해서 논술하 고 있으므로, 여기에는 전혀 인간적인 억측이 끼어들 수 없고, 또한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어떤 지식을 찾는다는 것도 정당하지 못하다. 동시에 이 말 씀에 따라 어떤 얼빠진 사람들이 천진하게 생각하듯이, 아브라함을 만난 바 로 그 인물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결론지어서도 안된다. 이 진리는 그가 나타내는 인물, 즉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이 귀절에서 사도는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의 위엄은 영원한 것인 반면 [레위 사람들의 제사장 직분의 위엄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논증한다. 사도는 [추론하기를 시일조를 받도록 율법에 지정된 사람들은 죽을 운명에 있는 인간들로서 마치 그들의 생명에는 종말이 있는 것처럼 제사장 직분의 권리도 언젠가는 취소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에 관해서는 알아무것도 언급하지 않 고 오직 어떻게 십일조가 멜기세덱에게 드려졌는가만을 발하고 있다. 그러 므로 그의 제사장직의 권리는 어떤 주어진 시간의 길이에 한정되어 있지 않 고 오히려 ,그 권리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말을 첨가 한 것은 마치 후에 생긴 율법(보통 율법이라고 부르는)이 이전의 율법을 대 신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다면 멜기세덱이 한때 가지고 있었던 권리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 권리가 레위족에게 돌아간 다른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반대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워 사람들은 십일조로 생활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십일조가 주어졌으나 밀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이므로 하나님에 의 하여 한 번 주어진 것을 ,끝까지 보전하였다고 사도는 그 반론에 맞서고 있 다.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신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는 당시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었던' 레위조차도 똑같은 복종으로부터 면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침으로써 아브라함 자신과 자기 뒤에 오는 자들을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에 복종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리스도가 출생한 족보에 있는 유다도 똑같은 이유로 십분의 일을 바쳤던 것이라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의논의 여지가 없도록 확립되어야 할 두 가지의 일을 기억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아들들 가운데 어떤 한 사람처럼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그의 특별한 특권에 의하여 일반 무리로부터 제외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 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22:45)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기로는 레위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논증해 나가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상징이므로 우리는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와 대립시키는 어떤 추론 때문에 범죄해서는 안된다.  '종속되어 있는 그것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격언을 우리는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상징은 그 실체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이 실체에 대해서 대립적인 입장에 세워져서는 안되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대등한 것들 사이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밀기세덱 사이의 비교를 완전히 끝마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떡과 포도주를 바치는 일에 주된 유사성을 찾는 사람들의 설명을 거절하였다. 사도는 여기에서 한 문제, 한 문제를 면밀하고 적절한 주의를 가지고 검토한다. 그는 각 사람의 이름, 그의 왕국의 보좌, 그의 영원한 생명의 사실, 십일조법, 그리고 축복에 대해 하나 하나 들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제물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태만으로 시간을 낭비하여 이 보잘것없는 일에 시간을 쓰고서도 주된 것과 문제에 가장 중대하게 관련된 것을 그분 안에서 빠뜨렸다고 우리는 말해야 할 것인가?  옛날의 많은 기독교 초기 교사들은 이 사상의 경향에 대단히 만족하여서 그들이 떡과 포도주를 바치는 일에만 주의를 기울인 것에 나는 더 한층 놀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라서 된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제공했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의 제물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상징들이다. 이후에 사도는 이어서 옛날의 제사에 관해서 자세히 말한다. 그러나 그는 떡과 포도주에 의한 이 새로운 제사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교회의 작가들은 어디에서 이 사상을 얻어 왔단 말인가?  확실히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얻어졌던 것이다.

 

즉 하나의 잘못이 또 다른 잘못을 일으키듯이, 그리스도의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어떤 허락도 없이 제물을 그들 스스로 고안해 내어 하나의 희생의 사상을 덧붙임으로써 성찬을 변질시켜 버린 후 그들은 그들의 잘못을 .얼버무려 숨기기 위한 정당성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이렇게 바치는 것은 그들에게 매력 있는 것으로 보였고, 그리하여 즉시 그것을 아무런 생각없이 채택해 버렸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보다 더 지혜로왔다고 누가 인정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들의 전통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영은 우리 무지의 죄를 지적하실 터인데, 그것은 우리가 이같이 중요한 사실에 주의하지 않고 특별히 준비되어 있는 내용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나는 이 교사들이 모세가 일찍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제물을 스스로 발명했다고 결론한다.

 

사도는 멜기세덱이 하나님께 떡과 포도주를 바쳤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브라함과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베풀었다고, 즉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창14 : 18~19)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가 기록한 맨 처음의 것은 왕이 해야 할 행위로서, 전쟁과 여행 후에 피곤한 사람들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축복은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임무였다. 만일 만찬에 관해 어떤 신비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있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굶주리고, 또 싫증으로 피곤해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먹이시기 때문이다. 교황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미사 가운데서, 떡과 포도주가 있음을 부인하면서 곧 바로 떡과 포도주의 제물에 관해 어린애같이 수다를 떨어 우스꽝스러워진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의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  동일한 증언으로 사도는 구약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되풀이 되었다고 결론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도는 제사장의 기능과 인품을 논술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사장 직분을 제정하신 것은 율법을 비준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이 폐지되면,  율법도 또한 중지된다는 결과가 된다.  이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원칙은 제사장 직분이 뒷 받침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어떠한 언약도 견고하거나 확실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사도는 율법이 레위의 제사장 직분 아래에서 옛날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 제사장 직분이 율법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제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만일 교회의 임무가 아론의 .반차 아래에서 완전하였다면, 왜 다른 반차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완전함이 있는 곳에는 변화란 없는 법이다.  따라서 다윗이 말하는 바와 같이 새로운 반차가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임무는 완전하지 못하였다는 말이 된다.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  이 말이 괄호로 묶여진 것은 율법이 제사장 직분에 속해 있었던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사도가 목적하는 바는 모세의 율법에는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다. 그는 제사장 직분이 폐지되었다는 사실로 그 목표를 보이고 있는데, 만일 낡은 제사장 직분이 율법을 확고한 기초 위에 확립할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결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떤 사람이 율법이 폐지된 것은 제사장 직분의 종말의 결과였는지 어떤지를 의심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율법이 제사장 직분 아래서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하여 확립 되었다고 말해 준다.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 즉"율법과 제사장 직분의 사정은 동일하므로,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입법자이다. 이리하여 아론의 권리뿐만 아니라 모세의 권리도 그리스도에게 옮겨져 있다. 이것의 주요점은 모세의 임무가 아론의 임무와 똑같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두 가지가 모두 폐지되어 버렸는데, 그 이유는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법도" ;  이 귀절이 특히 모세에게 언급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율법은 선한 생활의 규칙과 자유로운 삶의 언약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율법 동안에는 여기 저기에 우리에게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가르쳐 주는 훌륭한 귀절들이 많이 있다. 이것 중의 어느 것도 그리스도에 있어서 폐지된 것은 없으며, 다만 낡은 제사장 직분에 수반되는 그 부분만이 폐지 되었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모세와 비교되어 있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공통적 인 것은 아무것도 논술되지 않고, 양자의 서로 다른 점들만 논술되어 있다. 양자에게 공통적인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베풀며 거룩하고 경건하 게 살아가는 규칙을 규정하고,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예배를 가르치며 신앙 과 인내와 모든 거룩한 행실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세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모세는 복음이 아직 완전히 명료하게 계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을 휘장 아래 가려 두었다는 점, 실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모세는 예표와 그림자에 의 하여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는 점, 무지한 백성들을 납득시키기 위하여서 모세는 그 자신을 백성들의 능력에 맞추어 어린 아이와 같은 초보 이상의 것은 백성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 의 율법이란 말이 특별히 모세에게 속한 부분적임을 지칭하고 그리스도의 임무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이 임무는 옛 제사장 직분에 속해 있었으 므로, 제사장 직분이 폐지되었을 때 이 임무도 동시에 끝났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종과 해석자 가 되기 위해 제사장으로서 세워지고 또 한 입법자의 권한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말이 '복음에 적용 되고 있음은 좀 부적당하다. 그러나 이 부적당은 정말 불합리한 것이 아니 고 오히려 바로 이 대조법에 의하여 논술에 매력을 더하는데, 로마서 7 장 에 있어서와 똑같다. 또한 교황이 그 교령집()에 지금 교황은 아론이 옛날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똑같은 권능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율법이 제사장 직분과 더불어 교황에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라는 항목을 삽입한 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타락이었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그리스도가 새 로운 언약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가지고 오신 때부터 여러 의식들이 중지되 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로부터 어떠한 권위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에게 옮겨졌다고 결론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 한 분 만이 모세 및 아론과 비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무슨 구실로 그러한 권리를 그 자신에게 주장하는 것일까? 내가 여기에서 논증 하는 것은 다만 그 심한 뻔뻔스러움을 논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 모독적인 뻔뻔스러움을 보여주려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그리스 도의 종들 중에서도 선한 종이라는 자가 그 주인의 영예에 관해서 얼마나 무관심하며 그 자신의 폭정에 어떤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얼마나 무섭게 성 경을 침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보람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사도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그리스도라고 고백하 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으므로, 그는 옛 제사장 직분에 종말이 왔다 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옛 제사장의 자리를 대신한 이 새로운 제사장이 레위와는 다른 지파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제 율법에 따라서 제사장의 위엄은 특별한 특권으로서 레위 지파의 소유로 남아야 할 것이었 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발한다!. 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고그러나 특별한 확실성은 약속 안에 있었다. 그들이 이 분을 그리스도라고 인정하였을[때, 그들은 또한 이 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약속 된 분이 어떤 다른 기원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었기하는 때문이다(다윗은유다 지파임).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 하도다." ;  사도는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른 논증을 첨가한다. 그는 지금까지는 제사장의 인격으로부터 논증하였는데, 이제는 제사장 직분의 특성과 제사장직이 제정된 이유로부터 논증한다. 옛 제사장 직분은 외적 의식들을 위하여서 제정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오직 영적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옛 제사장 직분이 변역하기 쉬운 일시적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영원한 성격을 증명해 준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 ;  이 말씀은 육체적인, 즉 외적인 의식의 의미로는가를 해석된다. 우리는 아론과 그 아들들이 어떻게 제사장 직분에 임명되었는가를 알고 있다. 그리스도에 있어서는 하늘로부터 온 성령의 숨은 능력에리는 성취된 일이 아론의 경우에서는 기름과 여러가지 의상들과 피를 뿌리는 일과 기타 땅에 속한 의식들에 의해서 예표 되었다. 이러한제도는 제사장직의 성질에 적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사장직 자체는 변역하기 쉬 운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사실은 후에 고찰할 것이지만 제사장직이  그렇게 육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에 영적인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서 사도는 오직 그리스도와 아론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그림자들의 의미가 아무리 영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림자들은 역시 단순한 그림자들에 불과하였고, 또한 이 세상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땅에 속한 것이라고 불리어진다.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그리스도는 영원한 제사장이 므로 그의 임직은 아론과 다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이루 있다.i 즉 그리스도의 성별은 죽을 인간인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께서 하셨.고, 또 기름으로나 산양의 피로나 의상의 외관으로가 아니라 하늘 의 능능력에 의해 이이루어진 것으로, 사도는 이 하늘의 능력과 세상의 허약한 어져 성령 요소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장직의 영원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를 알게 된다.

 

"17.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이 귀절에서 산 도는 영원히 라는 문구에만 .강조를 둔다.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에 관 해서 말한 것을 강화하고 있다. 그는 지적하기를 그리스도가 영원히 제사장 이 되셨으므로 모든 레위족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하는 바와 같은 반대론이 나올 수도 있다. 즉 히브리어의 "르올 람" 이라는 말은 반드시 '영원'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느시대의 기간이라든가 혹은 어느 긴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는 옛 제사들에 관해서 .말할 때 종종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출12:17, 19:9) 말을 사용한다. 나는 율법의 제사에 관해서 언급될 때는 언제나 '영원히' 라는 말이 '율법의 때'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점에서 세계가 새로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자기의 임무의 지위를 말할 때는 언제나 그 가장 긴 기간을 그리스도의 때보다 더 이상 멀리 연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영원히' 라는 기간이 낡은 제사들에 적용 될 때 외적인 의식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신비적인 의미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만족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영원히' 라는 말은 모세와 그의 임무에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이 모세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지배하에서 세계는 새로와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일어나고 영원한 제사장 직분이 그에게 주어졌으니, 그리스도의 시대가 종말을 가져오거나 어떤 시간의 길이 안에 한정되는 따위의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이 단지 영원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르올람" 이라는 말의 뜻은 언제나 이것에 관련해서 판단되지 않으면 안된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사도의 논증이 율법은 제사장 직분과 더불어 끝났다는 내용으로 바뀌었으므로 그는 율법이 폐지되어야 했던 이유는 그것이 연약하고 무익했다는 점이라고 설명한다. 사도는 율법을 의식에 관련해서 말하는데, 이 의식들 자체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고, 또 어떤 구원의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항상 증언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 제사들을 통하여 마음을 가라앉히시며 죄를 소멸시키신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약속은 진실로 본래 제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것이었다. 모든 예표들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었듯이 그것들 모두의 능력과 효력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나온 것이다. 예표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고 아무런 효력도 줄 수 없으며, 그것들의 모든능력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이러한 예표들을 그리스도에게 대립시키고 있으므로, 사도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그의 논증을 진술하여 예표와 그리스도사이의 진정한 차이를 묘사하고 있다. 예표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는 순간 그것들에 남는 것은 오직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연약함 뿐이다.

 

요컨대 낡은 의식들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한 아무런 유익도 없다. 사도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면서 어느 정도의 의식들을 지킴으로 그 은혜를 더 한층 확신케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없을 때 율법은 무용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도가 그것을 '전엣 계명'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이 가르침을 더 한층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전의 법령이나 법률이 나중 것들에 의하여 폐지된다는 것은 극히 평범한 일상 관례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다윗보다도 훨씬 이전에 공포되었지만, 다윗은 그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을 때 새로운 제사장의 탄생에 관한 예언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옛 율법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율법이다.

 

"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저자는 율법에 관해서 다소 신랄하게 다루었으므로 이제 그 결함을 부드럽게 하는데, 말하자면 그것을 수정하고 있다. 저자는 율법이 결국 구원으로 인도하는 어떤 길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유용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율법은 완전하게 될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논증하고 있다. 율법은 잠시 시작을 담당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더 완전한 것이 그것에 뒤따라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제까지나 유치한 초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기니' 라는 말로 저자가 의미하는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좀 더 진보된 가르침에 나아가기 위해 길을 담기 위하여 초보적인 것들을 배우듯이, 어떤 준비가 율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에피'라는 헬라어의 전치사는 어떤 일이 다른 일의 결과일때 그 결과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내 생각에 이 귀절은 그러나 생긴것이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첫째는 멜기세덱의 예표에서요, 둘째는 시간적으로 뒤에 온 율법에서이다. 또한 율법이라는 말을 저자는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 이외에 덧붙여진 레위의 제사장 직분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 더 좋은 소망" ;  이것은 그리스도의 통치아래 있는 신자들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나, 또한 현재 자신들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층 더 나아지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열조들과도 관계되어 있다. 이리하여 누가복음10장 24절에서는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교사인 율법의 인도함을 받아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분투해 나아갔던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여기에는 우리와 열조들과의 대조가 암암리에 표시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정면으로 그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에 있어서 그들보다 우월한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직 멀리서 그림자들로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말에는 또 회막이나 성전의 형식이 암시되어 있다. 백성들은 멀리 바깥마당에 물러서 있고, 제사장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성소에 가까이 가는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회막이 제거되었으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열조에게 금지되었던 그자신의 면전에 직접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아직도 율법의 그림자들을 고수하거나 회복하려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어둡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우리에게서 빼앗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자유가 복음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간격이라는 장벽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커다란 은혜를 자기 스스로 알면서 고의로 버리는 것이다.

 

"20. 또~~~~~~~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 ; 율법이 복음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또 하나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아론의 제사장 직분 보다도 우월한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 제사장들을 임명할 때 하나님은 맹세를 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주께서 맹세하시고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 그리스도께 영예를 돌리고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저자가 다시 시편을 인용하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맹세하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제사장 직분이상으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게 더 한층 위엄이 돌려져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또 '제사장은 언약의 보증이 되게 하였다' 라는 이 원칙을 언제나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사도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우리와 더불어 맺은 언약은 모세가 그 해석자였던 낡은 언약보다 훨씬 우월한 언약이라고 결론짓는다.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  사도는 이미 여기에 기록된 비교에 관해서 언급하였었다. 그러나 문제는 더 한층 크게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도는 그것을 다시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한다. 다만 논증의 방향은 이전과 다르다. 앞에서 그는 옛 제사장 직분은 이 직을 주관하는 자들이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끝나야하는 것이라고 결론하였다.  그러나 이제 사도는 왜 그리스도가 영원히 대 제사장인가를 단적으로 대조법에 의해 논증함으로써 지적한다. 옛날의 제사장들은 그들이 죽으면 그 제사장 직분도 끝나기 때문에 그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어떠한 죽음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므로 그는 유일하고 영구적인 제사장이다.  이리하여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결과도 다르게 된다.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결실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우리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결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물론 우리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죽음이나 변화가 있는 곳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것은 헛된일이다. 이리하여 옛 제사장 직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한다. 저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이라고 말할 때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신 구원'을 자신만 향유하는 신자들을 가리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사도는 중보자안에서 신앙을 찾도록 지적하고 있다. 인간 최고의 선은 생명과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합되는 일이다.  각 사람은 그 자신들의 무가치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중보자의 고유한 임무는 우리를 돕고 , 그의 손을 우리에게 뻗쳐서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 율법의 낡은 그림자들을 암시하고 있다. 즉, 대제사장은 양 어깨에 12지파의 이름들을 붙이고 있으며, 가슴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표지가 붙어 있었지만, 대 제사장 혼자만 지성소에 들어가고, 그동안 백성들은 바깥 마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의지하고 있으므로 신앙으로 말미암아 곧 바로 하늘로 들어간다. 왜냐하면 이제는 우리를 방해하는 어떠한 장막도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공공연히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친히 대면할 수 있도록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보증의 성질과 정도는 어떠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살았으며, 하늘에서 통치하기 위해 영원한 지복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위하여 있었던 일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의 나라와 그의 영광은 그것들의 목표를 우리의 구원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저자는 그리스도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즉 백성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도록 중재하는 일이 제사장에게 속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이 일을 실행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죽은 자중에서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중재 기도를 계속 수행하심으로 제사장의 이름을 합당하게 정당화시키신다.

 

"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  저자는 여러가지 것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이야기들을 전개한다. 이 여러가지 연결된 것들은 제사장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들이나 특질들, 이를테면 제사장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일체 더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예는 오직 그리스 도에게만 합당하다. 율법에 의한 제사장들은 그 임무를 정당하게 감당하기에 필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말은 레위직 제사장 직분 동안에는 완전함이 전혀 없었던 것이며, 이 제사장 직분은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에게 봉사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금도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실로 대제사장의 외적인 장식은 이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론이 신성한 의식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입도록 명령한 저 고귀하고 찬란한 의복들의 의미는 모든 종류의 덕 가운데서 거룩함의 상징들과 인간적 탁월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실체가 없었으므로 그러한 예 표들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홀로 합당하신 제 사장이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 이 귀절은 앞뒤 모든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아론 안에는 얼마간의 거룩함과 결백함과 순수함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 주 미미한 것이었다. 이것들도 많은 얼룩으로 더럽혀졌다. 그러나 그리스도 께서는 인간의 무리에서 초월해 계시므로 홀로 죄에서 떠나계신다. 크리하 여 진정한 거룩함과 결백함은 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그리스도 께서 우리와는 구별되는 분으로서 묘사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그 교제에서 우리를 거절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보다 훨씬 확탁월한 속성, 즉 모 든 더러움에서 떠난 속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의 중재로 뒷받침되지 않는 기도는 모두 거절을 받는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을그러나 천사들도 또한 죄인들과 구별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만일 전사들이 죄인들과 구별된다면, 천사들이 제사장 지분의 임무를 수행 하는 데 무엇을 방해하겠으며, 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는 데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쉽다. 하나님의 명령 없 이는 어떠한 제사장도 합법적인 임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영예를 천사들에게 주신 일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없는데도 그들이 주제넘게 이 임무를 행하려 한다면; 그것은 모독적인 월권 행위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곧 다음 장의 첫머리에서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분은 인간이어야 한다. 결국 사도가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이 ,마지막 조건 (하늘보다 높이 계신 자라)이 그 자체에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충분한 대답이 된다. 누군가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하는 이가 아니면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연결시킬 수 없다. 이 일 은 천사들에게도 허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든 하늘보다 높이 올려졌다고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일하나님께 화목시키는 것 은 오직 그리스도의 독점적인 대권()이다. 모든 하늘보다 높이 올리어 진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질서 위에 놓여졌기 때문에 그는 천사들보다도 탁월하다고 입주어 말하는 것이다.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 가 없으니~~~~~" ; 저자는 그리스도와 레위적 제사장들과의 대조를 계속하면서 옛 제사장들에 있어서 두 가지의 특별한 결함을 말하고, 이 결함 때문에 옛 제사장들은 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여기에서 그 길게 간단히 문제의 핵심만 언급하고 있다. 후에 그는 개별적 내용들을 좀더 다. 이 설명하는데, 특히 날마다 드리는 제사에 관한 부수적 내용을 설명한 항목들에 희생들에 관한 것이 주요한 문제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한 각 의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한다. 옛 제사장 직분에 있어서 결함 하나는 대제사장이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서 희생을 바친 일이었다. 하 님을 나님께서는 그에게 노하시는 것이 당연한데 어떻게 그가 남을 위해서 하나 진정시킨다고 하겠는가? 이리하여 옛 제사장들은 죄를 속량하는 과업을 감당할 수는 전혀 없었다. 또 나의 결함은 그들이"여러가지 제물들을 바친 일이며, 그리하여 깨끗하게 함이 '되풀이되어도 최는 여전히 남기 !때문 에 진정한 속죄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의 경우는 전혀로다르 다. 그는 죄의 어떠한 더러움에 의해서도 물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신을 위해서 희생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크가' 자신을 {헌신하여 단 한 번 희생됨으로써 세상 끝까지 충분하게 된 그것은 자신을바치셨기 때문이다.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 저자는 제사장 직분의 약점은 인간의 악으로부터라고 추론한다: 그는 마치z율법이 진정한 제사장들을 임명하지는' 않았으므로 이 결점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실패는 "맹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교정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인간의 무리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죄과를 범하기 쉬운 소질이 전혀 없으며, 지고한 완전함으로 꾸며졌고 또한 부여받으셨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시 맹세가 율법보다 뒤에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기억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율법의 제사장 직분에 만족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은 좀 더 나은 것을 정하려 하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제도에 있어서 나중에 오는 것이 앞에 온 것을 좀 더 나은 상태로 진보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한된 기간 동안 유효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