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히5:1 ~ 14)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1)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2)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3)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4)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5)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6)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7)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8)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9)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10)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1)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2)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3)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1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 사도는 그리스도를 레위 제사장들과 비교하고 그들과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지 전체의 요점은 그리스도의 직무를 잘 이해시키고 율법 아래서 제정된 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제정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낡은 제사 직분의 폐기론 쪽으로 전환해서 진행시킨다.
첫째로저자는 제사장들이 사람 가운데서 취해진다 고 발한다.
둘째로 제사장들은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 전체를 위해서 행동했던 것이라고 발한다.
세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빈 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희생물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네째로 그들은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좀 더 잘 보살피기 위하여 인간의 유약함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으며
마지막으로 제사장 직분은 그들이 무모하게 맡으려고 덤벼들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그의 인정을 받았을 때에만 가능한 영예의 직분이므로 이 점들을 차례로 간단히 논하여"보자.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우리는 이 원리들을 현대에 적용시켜서 마치 제사장들이 드리는 희생제물이 오늘날도 똑같이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장황하고 번거로운 반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여러가지 제사형태와 비교할 때, 그 제사형태가 시간적으로는 앞선것이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끝나버린 사건이라는 것은 더욱 명백해지지 않는? 이것은 문맥에서부터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을 미사(mass)의 희생제도로 보려는 사람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나는 본서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사도는 제사장이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진실로 인간이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제사직분을 맡은 자에 의하여 겨우 하나님 앞에 설수 있다. 만일 그 제사직을 맡은 이가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앞에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는 사실은 그의 존엄성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존엄성을 더해 준다. 그는 인간이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그가 우리의 중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바울은 명백히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이라고 부른다. 만일 아들이 천사들이나 기타 다른 곳으로부터 선택함을 받았다면 그는 우리에게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될수 없었다.
"사람을 위하여" ; 이제 두번째 문제점은 제사장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임명되었다. 고 언급한다. 우리 모든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의해서 오게되고, 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 귀절은 더욱 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맡은 '직분'이라고 하는 말에 잘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의 뜻이 가능하다. 즉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카디스타타이'(임명하다, 정하다)라는 동사는 수동이나 능동의 뜻으로 쓰일 수 있어서 '임명하다' 또는 '정하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이 말을 수동의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것을 '제사장직을 위하여 임명되어 있다'고 번역한다. 이리하여 그 '일들'은 명사를 좌우하는 전치사로 생각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해석인 제사장은 '하나님에 관한 일들을 돕는다'(정한다)는 나에게 똑같이 호감을 준다. 후자 쪽이 구문상 부드럽고 뜻이 더 풍부하다.
어느 쪽을 취하든 간에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제사장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못한다. "거룩하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일의 직분을 가질수 있겠는가? '제사장'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맡아 주시기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자들이었다.
"예물과~~~~~~드리게 하나니." ; 사도가 말하는 제사 직분의 세째 .문제점은 예물을 드리는 일이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에서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라는 두 가지 말을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중 처음 것은 나의 생각으로는 여러가지 제물의 종류를 포함시킨 것, 말하자면 하나의 제사직의 총칭이다. 두번지는 특별히 속죄의 희생을 의미한다. 사도가 의도하는 전체의 요점은 제사장이 어떤 동물을 제물로 바칠 때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유일한 화해자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생이 없이는 사함도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가 문제가 될때는 언제나. 이 보증이 반드시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그러므로 천사들도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희생도 준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나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제거해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이는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 제사직의 네번째 문제점은 첫째의 문제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네번째 문제는 그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첫째 부분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똑같은 육의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인류는 한사람의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저자는 다른 역할을 말하고 있다. 즉 제사장은 죄인들과 똑같이 고통을 나누어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온유하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서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헬라어 '메트리오파데인'(마땅히 분담하다)라는 귀절에 대해서는 헬라 계통과 라틴계통의 .여러가지의 해석을 하고 있다. 나는 다만 제사장은 '쉼파데이아'(여기다)라고 사도가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레위 제사장직에 관해서 말한 것은 모두가 꼭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수 있다는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죄에도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희생을 드릴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제사장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우리의 연약함을 완전히 담당하셨지만, 그가 죄가 없고, 죄에 의하여 더럽힘을 당하지 아니한 것은 이 논증만으로 충분하다. 옛날의 레위제사장들에 관해서 본서는 지적하기를 그들은 인간의 연약함에 복종하고 있으므로 그들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그들은 자신의 희생의 몫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기꺼의 용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직분은 위에서 말한 제한,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와 똑같이 감당하시고 체훌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없었다는 결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이 직분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죄가 없었지만 여기에서 언급된 대로 그가 지극하 연약하신 분임에도 그가 우리를 도우려 하시고, 긍훌히 여기시고, 또 기꺼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불행을 동정하시려 한것 은, 요컨대 그리스도는 오직 우리의 육신과 본능을 똑같이 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측은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동정과 자비심에서 온 '뒤나메노스'라는 분사는 우리가 보통 말할 때 쓰는'할 수 있는'이라는 뜻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적합, 또는 적당이라는말로 표현될수 있다. 사도는 "무식하고 미혹한 자"라는 히브리어의 용법에 따라서 죄인들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쉐가게'라는 말을 모든 종류의 범죄의 뜻으로 사용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좀 후에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 ; 이 귀절에서는 제사직의 유사성과 한편으로는 그 차이점이 주목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 직분을 정당한 것으로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하여 택함 받은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 직분을 올바르게 또는 합당하고 유효하게 실행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아론은 각각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새롭고 다른 방법으로 뒤를 잇는 자가 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정해졌는데,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일시적이고 당연히 끝날 것이었음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논지의 방향을 알만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정당하다는 것을 변호하려고 한다. 사도는 하나님이 그 직분을 주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제사직을 정당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옛 질서 (옛 제사장 직분)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질서에 그 직분을 할양하였다는 것을 그가 확증하지 않았다면 그 직분에 대한 정당성은 넉넉하지 못할 것이다. 사도는 아론이 제사장 직분에 임명된 조건을 회고함으로써 이것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허락하시는 그 이상으로 제사장 직분을 확대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는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처음 질서가 얼마동안 계속되기를 결심하셨는가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임명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론과 및 나머지의 그 후계자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큼의 권능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며, 인간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서 부여한 권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내용에는 제사직의 후계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었지만, 여기에서 좀 더 보편적인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즉 교회에서는 인간의 판단에 의한 어떠한 지배형태도 만들어져서는 안되며,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할 자세로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욕심과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하신절차에 따라 그 직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은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사도는 여기에서 다만 인물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권위없이 인간이 스스로 날조해 낸 직무는 거룩한 것도 정당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므로 교회 관리의 수단과 질서를 규정하는 권한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보유해 두신다. 이것에 근거해서 나는 교황주의자들의 제사장 직분은 거짓이라고 결론 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밀실에서 직권을 날조해 내기 때문이다. 죄사함을 받기위해서 하나님께 희생을 바치라고 명령하는 교회는 아무곳도 없다. 이 목적을 위하여 제사장이 임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은 그 사제들을 임명하여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보다 우월하지도 못하면서 어떤 새롭고 특별한 법이나 되는 것처럼 군립한다) 제사장들은 정당하게 임명된 자들로 간주될수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스스로 이 영예의 직분을 떠맡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여 된 것이다. 이 일은 개인의 경우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일인데, 어떠한 개인도 이 영예의 직분을 자신을 위하여 자기의 것으로서 삼을 수는 없다. 이 직책은 언제나 공적 권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좀 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직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직분을 거룩하게 임명된 직분이라고 언급하고자 한다.
혹 어떤 사람이 어느 때 자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고 사양할는지 모르겠으나 그 직분이 거룩한 직분이고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이상 그 직분은 사실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야심이나 악한 수단으로 이 직무에 살짝 끼어드는 자들이 많지만 그들의 소명에 관해서는 전혀 확증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람들을 당장에 거절해버려서는 안되며, 특히 교회의 공적인 회의에 의해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을 때는 분명히 거절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200년 동안 가공할만한 부패가 제사장 직분을 둘러싸고 강력하게 만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직무 자체에 관해서는 영광스러운 권리가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 직분은 하나님의 소명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묵과하고 있는데, 교회의 자유가 압박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부터 명백한 사실은 가장 큰 결함이 이 직분의 성격에 있는 것이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결코 명령하신 적이 없는 것도 멋대로 날조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황주의자들은 더 한층 용인할 수 없는 직분이 된다. 그들은 (거룩하고 신적인 것으로 보이기 위하여) 자신들이 소위 신성한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아무런 관련도 없이 자신들이 스스로 그 직분들을 택하였다.
"5.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이 증언은 다소 무리한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난 목적을 생각한다면 그 특질이 필연적으로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제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편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탄생은 아버지께서 그를 인간들 사이에 주셨다고 하는 증언으로 우선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 속에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요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난 인간 관계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어떠한 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아무런 .영광도, 그리고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로서 보여주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탄생은 그의 제사장 직분을 포함하고 있다.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사도의 목적이 여기에 더욱 명백하게 표명되어 있다. 이 귀절뿐만 아니라, 또한 이 귀절에 인용한 시편 전체도 차분히 음미하여 볼만한 훌륭한 문체이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 즉 그의 왕국에 관해서 시편보다 명백하게 예언한 곳은 달리 없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모든 반대론을 제기하기에 분주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이가 다윗이었던 것처럼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왕들이 제사장 직분을 행사하는 일은 불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웃시야는그가 행해서는 안되는 직무를 행하려고 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여 문둥병이 걸렸다(대하26:18). 그러므로 여기에 언급된 것은 다윗도 아니고 그의 뒤를 이은 어떤 왕이나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한 일이다. 만일 왕들이나 제사장들이 때때로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코하님' 이라는 말로 불리어지는 것을 근거로 제기한다면 나는 옳다고 인정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 귀절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교해 보면 애매한 점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시편의 저자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이 왕은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코헨' 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제사장 직분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한 사람이 동시에 왕이자 제사장이라는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예였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서는 아주 신기한 일이었으므로 저자는 멜기세덱을 메시아의 원형으로서 제시한다. 마치 그는 그의 왕으로서의 존엄성은 그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였다. 왜냐하면 상징적으로 이 일은 이미 멜기세멕의 안에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고 말하던 것이나 다름없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귀절이 메시아를 가리키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며, 또한 이 귀절이 메시아의 제사장 직분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헬라어로 '카타 타크신' (반차를 좇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은 히브리어로는 '알디브라티' 라는 말인데 이 히브리어는 '~~~와 같은 모양으로' 또는 '~~~~~의 형식에 따라서' '~~~~~의 방법으로' 의 뜻이 있다.
이것은 이미 내가 말한 것에 일치한다. 즉 동일한 인물이 왕의 직분과 제사장의 직분 양쪽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백성들 사이에서는 보통이 아닌 일이었으므로 저자는 메시아가 표상되어 있는 옛 원형을 보여준다. 그밖의 것에 관해서는 저자가 기록한 문맥 중에서 더 한층 자세히 설명해 나간다.
"7. 그는" ; 그리스도의 외형은 십자가에 의하여 몹시 곡해되고 있으며,인간들은 그리스도의 겸손의 목적을 고려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위에서 말한 점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놀라운 자비는 그가 우리의 행복과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받으셨다는데서 더욱 빛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명백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불행을 짊어지신 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이 확증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리스도가 왜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에 대해서 근본적인 이유와 표면적인 이유로 나누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복종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며, 근본적 이유라 함은그가 이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제사장으로서 성별되기 위한 것이다.
"육체에 계실 때."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이 세상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육신이라는 말은 물질적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의 특성을 의미한다는 결론이 된다. 즉 고린도 전서 15장 50절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라고 말씀한 대로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었던 날들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지금도 육신을 벗어버리셨다고 생각하는 몽상가들은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것이다. 진실한 인간이 된다는 것과 비록 축복받은 불멸의 몸을 부여 받았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시련과 연약함에 복종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일이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살아계신 동안 육체의 시련과 연약함을 겪었지만, 이제 그가 하늘에 오르신 이상 그는 육신의 질고들을 버리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를 관찰해 보자. 그리스도는 아들이시고, 아버지에게 구원을 청하면 들어 주실 분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복종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육신에 계실 때라고 말함으로써 저자는 우리의 비참한 인간적인 삶의 기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지적하며, 그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 만일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i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으면그것은 확실히 고되고 견딜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여기에 따르는 세개의 귀절도 역시 우리에게 위로를 더해 준다. 그리스도는 아들이시며 그 자신의 존엄성으로 말미암아 다른 인간들과의 공통적인 운명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지만 우리를 위하여 그 운명에 복종하신 것이다. 오늘날 누가 감히 이와 똑같은 질고의 운명을 받을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좀 더 생각해 볼 이유가 있다. 만약 우리가 역경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분이 우리 앞서 가시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자녀들이라고 간주된다는 사실은 오직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시는 은혜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며, 이 영광을 당연한 권리로서 그 분만 유일하게 가지셔야 하기 때문이며 우리를 그 자신의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두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때가 왔을 때, 그리스도가 악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구원의 방법을 간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것을 말한 것은 누가 그리스도가 강심장을 가져서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를 주시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그리스도가 어떠한 고통에서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그가 받은 수난은 우리에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영적인 고통을 참으셨다는 것은 그가 받은 심적 갈등으로 보아 그리스도와 우리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저자는 그리스도가 죽음과 모든 쓰라린 고통을 감수하신것은 그가 그 고통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떠한 쓰라린 아픔에도 압박을 받아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심한 고통의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고통과 눈물은 그의 마음 속에 짓눌린 엄청난 고뇌를 증명한 것이다.
심한 통곡과 "눈물"이라는 말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쓰라린 고통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어떤 암시에 의하여 형식적인 표현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보통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기도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사도가 말하고 있는 기도는 복음서들에 들어 있는 바대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 39)"라는 기도이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 : 46)" 라는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두번째의 기도는 그리스도가 크게 부르짖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눈에 눈물이 메말라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무한하신 고뇌로 인하여 온 몸에서 피와 땀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어쨌든 그가 기도할 때 그리스도께서 고뇌의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참으로 서러움에 짓눌려 있었고, 그래서 전력을다해서 도와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드린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큰 슬픔과 고통을 겪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우리의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괴롭힐 때는 언제나 우리와 똑같은 짐을 지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일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앞서가는 한 우리는 용기를 상실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 외에는 구원하실 이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 이상으로 더 좋은 기도의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직접 간청하셨다. 사도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기도를 올렸다'고 말할 때, 그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사도는 그리스도가 올바르게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 진실하신 구원자에게 의지하셨기 때문이다. 통곡과 눈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열심으로 정성을 다하여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저 형식적인 기도를 드려서는 안된다. 열심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의 경외하심을 인하여라고 번역했는데,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 사도는 그의라는 형용사 없이 다만 ei)AdtBeca(율라베이아)라는말을 사용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전치사는 원인이나 동기를 보여주는 υπёρ(휘페르; 을 위하여)나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고 απб(아포; '로부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헬라어 ελ&βεια(율라베이아)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두려움' 또는 : 불안', 등을 의미하므로 사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두려워하고 계신 것으로부터 떠나도록 들었다는 것 이외의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행들에 의해서 그리스도는 정복을 당하지도 않았고, 또그러한 것들에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죽음에의하여 정복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아들은 이 투쟁을 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내려오셨는데, 그것은 불신앙의 지배를 '당하기 위해서 오신것이 아니다. 이 불신앙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김심판의 두려움은 뼈아픈 노력 없이는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은 곧, 아버지가 존중하신 그리스도의 존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그것은어림없는 소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경건 이라고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그러나 내가 행한 설명이 훨씬 더 적합한 것이며, 따라서 기타 들어떤지루한확인이 필요없다. 사도가 세번째 문제점으로 첨부시킨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가 드린 고통의 기도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그 기도가 거절당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단 한 번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긍훌하심과도우심을 빼앗기신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도 끝까지- 응답하시지 않을 것처럼생각될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엄격하고 딱딱한규칙을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기분내키는대로 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엇이나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도 하나님께는 합당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전적으로 마음을. 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 판단하기에는우리가 거절당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지진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두려워하셨던1 죽음을 경험하셨는데,어떻게-해서:그는자신이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수 있는. 응답을 얻었는가?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즉 그의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하는 데 대하여 우리는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리스도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그는 죽음 속에 하나님의 저주를 보았기 때문이며, 인간 :죄악의-모든 형벌을 :대항하고 그 어둠 자체의 권세를 대항해 싸우기가 그만큼 두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두려워했고 불안에 빠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원하는 승리를 얻었다. 그는 정복자로서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아버지의 구원의 손길에 의하여 떠받쳐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단과 죄와 음부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운후에는 영광스러운 승리를 하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저것 구차한 간구를 하지만 그것을 다른 목적으로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구하는 것을주시지는 않으나, 무엇인가 우리를 도울 길을 찾아 필요한 것을 주신다.
"8. 순종함을 배워서." ; 그리스도의 수난의 제일 목적은 이 방법을 통한 순종의 훈련이 그에게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를 소나 말처럼 억센 짐승들을 길들이듯이 우격다짐으로 순종을 강요했던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훈련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기꺼이 자진해서 아버지께 당연한 순종을 드렸다. 그리고 그의 순종은 우리를 위하여서 행하신 것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자신이 복종하신 실례와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뜻을 충분히 배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참된 순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바로 그의 최대의 자아부정이며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두려워했던 죽음에 직면했을 때 자진해서 그 자신을 아버지에게 넘겨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까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모범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가지 환난을 통하여 또는, 최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배우고 연단을 받아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그러한 복종이 더욱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시련들을 통하여 주의 멍에를 메도록 우리를 복종시키셔야 하는데, 우리가 반항적이고 길들이기 힘든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 마음의 쓰라림은 십자가로부터 오는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로부터 오는 은혜이다. 하나님께로 돌이켜 순종하는 일 이상으로 더 바람직한 일이 과연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순종은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탄한 처지에 있을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삐를 늦추기라도 한 듯 날뛰다가 몸을 망치게 되며,또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의 멍에가 벗겨지기라도 하면 우리의 육신의 욕망은 즉시 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우리의 의지를 억제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의 복종은 진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우 리가 하나님께 완전한 복종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완전히 죽기까지 할 각오로 순종해야 함이 분명하다고 본다. 비록 그 죽음이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렵다 하더라도 우리는 삶보다는 차라리 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순종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9. 온전하게 되었은 즉" ; 그리스도가 어째서 고난을 당하셨을까 하는 것은 이른바 최종 목적을 위해서는 그가 직접 제사장이 되어 고난에서 참예하는 길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가 언급하는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은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희생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난이나 죽음은 결코 그의 존엄성이나 탁월성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그 큰 영광과 존귀를 그 구원을 이루시는 구세주에게 돌려야 하겠는가? 이 귀철은 다만 그리스도의 모범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 더 나아가서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과를 지워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순종함으로 아담의 불순종을 치료하셨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셨으므로 그는 우리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
"거룩하게 되었은즉" 이라고 하는 편이, "온전하게 '되었은즉"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확실히 여기에 사용되어 있는 헬라어 '텔레이오구데이스' 라는 말은 양쪽을 다 의미한다. 그러나 이 귀절은 제사장 직분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아주 당연하고 적절하게 거룩하게 되는 것(성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다른 장소에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17 :-19)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말씀으로부터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여기에 적절하게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 만일 그리스도의복종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의순종의 열매는 오직 그분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다.그렇게 말함으로써 사도는 우리에게 신앙을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 그리스도나 그의 주시는 은혜들도 우리의 것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전 우주적인 용어인 모든 자에게 라는말을 삽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에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들은 아무도 이구원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10. 하나님께~~~~~~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사도는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비교를 자신이 이제까지 언급해 온 것보다 좀더 계속 추구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마음을 일깨워주고 좀 더 주의를 주는 것이 보람있기때문에, 이제 본론을 떠나 옆길로 들어가면서도 그는 이 주 논점을계속 잊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사도는 이 문제에 관하여 할 말이 많다고말함으로써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 말들이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고쳐야 할 것이다. 사도는 그들에게 그가하는 말이 어렵고 딱딱하지만,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지혜를 예리하게 해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무엇인가 천하고 쉬운 것은 보통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만, 만일 어떤 분명치않은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바짝 정신을 차려서 듣는 경향이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여기서 곤란하다고 지적한 문제는 주제에 있는 것이아니라 그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진실로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고 어떤 곤란이나 애매성이 없이 우리에게 너무나 확신 있게 말씀하십으로써 하나님의말씀은 참으로 우리의 빛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 말씀의 빛은 우리의어둠 때문에 가리어져서 흐리다. 이것은 한편 우리의 우둔함에 의하여 또는우리의 어리석음에 의하여 발생한다. 우리가 너무나 우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훈을 이해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악에 우리의 타락한감정이 더 부가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에 대해서보다도 공허한 것에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더 쓰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는 적개심이나 이 세상에 대한 염려, 또는 육신의 욕망 ,등에 의하여 늘 방해를 받는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이 사람에 관하여는칼빈 사역)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 사사로운개인으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그리고 얼마동안 그리스도의인격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의 밀기세덱을 가리키는 것이다.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 , 이 꾸지람은 히브리인들을은 마땅히다는 것은태만에서 일깨우는 훌륭한 자극이 되고 있다. 사도는 말하되 그들선생이 되어 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초보자의 .부류에 속해 있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지적한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보통 가르침을 받는 학생만도 못한 정도이다. 너희는 기독교의 아주 초보적인 진리도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들을좀더 부끄러움의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마치 알파벳 순서를 말하는 사람에게 하듯이 초보 라는 말을 그는 사용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전 생애를통해서 계속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이완전한 지식에서,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아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배움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까지나 초보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계속 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한 '것이(사28:10)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라고 이사야는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의 발전하는 것은 시작한 후부터의 시간과일치하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우리의 연수뿐만 아니라 우리의매일매일의 일수까지도 계산에 넣어져서 각자는 스스로 진보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의 회상에 마음을 두는 자나 미래에 마음을쓰는 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 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같은 유치한 초보에 머물러서 그 생애를 보내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 태만에 대한 지탄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서 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도 그 지식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 덕을 세우는데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바울은 고린도 전서3장 1절에서 똑같은 은유를 사용하여 이와 똑같은 죄, 적어도 별로 다르지 않은 죄에 관해서 고린도 사람들을 책망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젖이라 함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기초로서 배우기 시작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베드로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벤전2:2)고말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악의 시절과 감각적 시절 등, 두 가지의 갓난 아이 시절이 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바울도 다른 곳에서(고전14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하고 있다. 좀더 고차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령의 미련한 사람들은 수치스럽게도어린 아이라고 불리어져도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를 충분히 성숙한 정도에까지 한 사람의 완성된 인간으로성장시켜서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동요하고 표류하는 어린 아이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훈의 목적이다. 물론 아직 그리스도를 맛보지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이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관용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과 더불어 성장하여야할 사람이 만일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변명의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사야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을 이제 젖이 떨어져 품을 떠난 갓난 아이와 같은 자들이라고낙인을 찍는 것을 볼 수 있다(사28:9)
확실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이들을 위해서는 젖을 공급하고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는 단단한 식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갓난아이가 그 유모의 젖으로 양육을 받는 것은 언제까지나 젖꼭지에만 매달리기위함이 아니라, 차츰차츰 젖을 떼고 더 단단한 식물을 받아들이기 위함인 것이다. 그와같이 우리가 처음에는 성경으로부터 젖을 말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나중에 먹을 먹기 위함이다. 여기서 사도는 젖과 단단한 식물을 구별하고 있다. 그 어느 쪽이더라도 건전한 교훈은 곧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무지한 자들은 전자의 방법으로만 시작하고, 무엇인가 좀 배운 자들은또 후자의 방법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사도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유약성 때문에 여전히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한 말이다. 왜냐하면 다른 면에서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은젖도 반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가 여기에서 비난하고 있는 것은 마음의유치함 때문인데, 이 자라지 못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러한 아이들은 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의의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제 조금 후에말할 '완전함'을 뜻한다. 내가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가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앞에 의롭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이 말을 단순히 우리 목적을 완성으로 이끄는 지식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8절에서 이 임무를 복음에 돌리고 있다. 마치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무지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어떠한 순수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복음의 가르침은 그들 안에서 결실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목표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또한 거기에 가까이 접근조차도 할 수없기 때문이다.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것이니~~~~~~" ; 사도는 성경(고전2 : 6, 14:20; 4:13 )에서처럼 갓난 아이에 비해 분별 있는 나이에 도달한 자들을 장성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년(어린 아이와 노년 사이의 연령), 즉 성년의 연령은 인생의 성숙한 연령을 말한다. 그는 영적인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모든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는 수련에 의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습관을 갖는 자들이 되도록 요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방어로써 사단의 거짓에 대하여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에만 오직 올바른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성령의 검'이라는 말의 뜻이다. 바울이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않게 하려 함이라"(입4:14)고 말할 때 그는 건전한 가르침의 이 효용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와 거짓과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신앙이란 말인가? 그것은 어느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기 쉬운 것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것을 오직 마음에만 맡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지각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단이 그 속임수를 가지고 우리 안에 몰래 숨어 들어서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싸움을 위하여 같고 닦고 또 모든 방패로 무장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단념해서는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명백한 것은, 즉 교황제도 안의 기독교가 '어떠한 것이나하는 것이다. 즉 거기에서는 심한 무지가 단순하다는 구실로 권장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진실한 지식을 찾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사도가 끊임없이 손을 대라고 명령한 것에 손을 댈 수조차 없는 사사람들이 어떠한 정신으로 조종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는 아주 쉽다고 나는주장한다. 그들은 사도가 여기에서 그렇게 엄하게 비난하고 있는 태만을 실제는 칭찬할 만한 척 가장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필요한 것으로 여기서 선언하는 진정한 판단과 유일한 척도인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해 버린다. 그 악마적인 금지로부터 이탈하여 배우는 자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역시 성경을 듣고 읽는 모든 일에 무관심하여 있다. 우리가 이연습을게을리할 때 우리는 무감각하게 되고 '모든 분별력을 잃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