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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3:19)

1. 성경 (히3:1 ~ 19)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2)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3)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4)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5)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6)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7)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8)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9)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0)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1)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2)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3)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4)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5)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6)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8)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저자는 앞 에서 말한 가르침을 참으로 유익한 권면으로 종합하여 결론하였는데, 유대 인들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위대성을 인식하는 데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된 다고 말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위대한 교사 또는 대제 사장이라고 불렀으며, 간단한 몇 마디로 그리스도를 모세 또는 아론과 비교 한다. 저자는 여기서 두 가지 표현을 (같이 포함시켜서 말한다. 즉 저자는 그리스도를 양성()의 명칭으로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의 교회에서 양성의 인격(duplicem sustinet personam)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선지자와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아론은 제사장의 임 무를 수행하였으나, 그리스도에게는 이 두 가지 직분이 다 주어졌다.

 

그러 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본성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아그리스도 대신에 무엇인가 헛된 그림자 나 환영을 붙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본래의 능 력으로 옷입혀져야 한다. 첫째, 생각하라 고 하는 동사는 중요한 단어이 다. 그 말은 즉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주목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주를 멸시할 때 반드시 중한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한 그 말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게 되면 모든 과오와 암흑의 권세를 능히 추방하고 소 멸시켜 버릴 수가 있다는 뜻도 된다. 그들에게 이 말씀을 통해서 큰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하여 저자는 그들의 부르심에 관해서 상기시켜 준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불러주신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니다' 라고 발하려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에게 .남은 [일은 오직 너희의 눈 을 너희 나갈 길의 안내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리는 [일뿐이다. 성도들의 부르심은 오직 그들 자신의 방향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에만 확 고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고 하는 말이 다만 유대인들에 관해서만 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고자 원하는 모든 자들에 적 용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유일하신 교사이시며, 또한 그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 앙을 확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믿는 도리'라는 말은 여기에서는 '신앙'이 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아니면 무익하고 헛된 것이다 라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 도직에 대한 찬사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굳게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두 가지로 찬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 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교사 로서 우리 위에 세우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그에게 명령된 임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하셨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의 일은 가르침에 권위를 주기 위해서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선포하고 있듯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들려져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 도께서는 그 자신이 펴고 있는 가르침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라고(요7 16) 증언하고 있다. 또 다른 곳(눅9:48)에서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으셨다 는 것과,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실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이시 라는 점에 있다.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그 사명을 충성스럽고 순수한 마음으로 수행하였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신뢰를 얻기 위하여 모든 진정한 사명자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점이다. 만일 이 두 가지 필수조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면,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 계 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 될일 것이다.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그리스도를 모세와 동등한 인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저자는 그리스도가 얼마 나 더 우월한가를 보여준다. 이 일을 저자는 두 가지의 논거에 의하여 (증명 한다. 즉 모세는 교회의 치리자이자 또한 교회의 한 .일원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전체 교회를 세우시고 관할하는 건축자이자 그 최고 통책임자이시다. 둘 째로 모세는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은 한 사람의 종 으로서 다른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므로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담전3 : 15)이라 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은유이다. 교회는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신자들 각 사람은 산 돌'(벤전2 5)이라고 불 리어진다. 그리고 때로는 집에 갖추어지는 그릇'(딤후2 : 20)에 '비유된다. 전체의 일부도 아니고, 전체에 포함되지도 않을 만큼 주님처럼 홀로 탁월한 자는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건축자로서 그 안에 계시고 역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므로 하나님에 관한 말 씀은 무엇이나 그리스도께도 적용됨을 알아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해서 그리스도 역시 건물의 (기초이기 때문에, 우리의 형제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와 같이 교제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그가 하나님에 의해서 건물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도 건물의 일부가 아 니냐고 말하거나, 그도 역시 건물의 건축자가 될 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역시 우리를 지배하고 계시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주이시며,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 지만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만물에게 특생명을 주시고 만물을 회복시키고 계신다. 성경은 갖가지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표현해 준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단 하나도 본 저자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저하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서의 논지는 모든 사람은 다 제각기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머리가 되시기 때문에 그 분만 홀로 이 조건에서 제외 된다. 만약 또 반론을 제기하는 자가 있어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보다 한술 더 떠 서 모세도 역시 건축자가 된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 이름이 선지자들과 교 사들에게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주께서 하늘로부터 능력을 불어넣어 주 시지 않으면 한낱 기관이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부적당한 일이라고 대답하겠다. 더우기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수고하면서 그 들 자신도 건물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경우 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 아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동시 에 성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보통 무리들보다 탁월하시기 때문이다.
 
"4: 집마다~~~~~~~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이 말씀은 세계의 창 조에 확대시켜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나는 현재의 일에 국한시켜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 으로 해석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손으로 교회를 세우셨다(시87:5). 바 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 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앱4:15~16)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 은 종종 그 자신의 사명의 결실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어떠 한 인간의 활동을 사용하든지간에 모든 것을 완성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이다. 도구는 제작자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또한 모세는~~~~~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 두번째 의 차이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모세 자신에게도 복종해야 할 가르 침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종의 형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그에게-모든 인간들이 복종해야 할 교사이자 주님이셨다. 그리스도는 우 리가 1장과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만물의 후사로 정하신 분이다.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 : 이것을 나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설 명하고자 한다. 즉 모세는 옛 사람들에게 그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선포해 야 할 가르침의 전달자이지만, '동시에 제또한 그는 선포의 시기가 아직 차지 않았을 때에도 복음의 증언을 하였던 분이다.. 그는 확실히 율법의 목적과 성취가 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사례이다. 여 기서 장래의 말할'이라고|,번역한 헬라어에 사용된 미래분사의 시제는 이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요컨대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게 명령 하신 것을 충성스럽게 백성들에게 전하였지만, 일정한 제한이 부과되어 있어 그 제한을 합법적으로 넘기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옛날 선 지자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때가 찰 때까지 복음의 완전한 계시를 연기하신 것이다.
 
"6.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임명을 받은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그의 서신을 ,받게되는 로마인들도 바로 이방인에 속한다(롬1: 6)고 부언하고 있다. 이것은 그 들의 신뢰를 얻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본서의 저자는 이제 이미 그리스도를 고백한 유대인들을 권면하여 믿음 안에서 오래 참고, 하나님의 권 속의 일원이 되라고 말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는 앞에서 하나님의 집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한다고 언급했다. 이 귀절 뒤에 만일 그들이 그리스 도에게 복종한다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 이 라는 교훈을 첨가하고 있다. 그들이 이제 복음을 반아들이기 시작하였으므로, 저자는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으면"(만일 그 들이 견고히 신앙을 가지면-칼빈 사역)이라는 조건을 붙이고 있다. "나는 '소망'이라는 단어를 .'신앙' 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고 있다. 소망은 실로 신앙의 힘을 보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들처럼 의심하면서 복음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신앙이 없거나 또는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신앙은 반드시 정신의 안정된 평온을 가져오는 것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언제나 대담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확신이 생긴다. 이것들은 언제나 나타나는 신앙의 두 가지 효과, 즉 대담함과 자랑이다. 우리가 로마서 5장과 에베소서 3장의 주석에서 말한 바와 같다. 교황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이것에 반대되므로, 비록 다른 악의 내용이 없다 하더라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며,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확신은 그들의 근거없는 공상들 에 의하여 불명료하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추측에 의하여 명백히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 확신에 의해서만 우리가 전하나님의 성 전으로 성별된다고 가르친다. 사람이 만일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를 모른 다면 무슨 견고한 확신이 있겠는가? 교황주의자들이 발명해 낸 망맹신의 피 물은 오직 오류에 이르는 방종에 불과하다.

 

이 귀절은 우리의 일생이 어떤 경주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바로 그날까지 항상 성장하고 전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저자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계속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이 더욱 무게를 갖게 하기 위하여, 저자는 다윗의 증언으로 이것을 확증하고 있다. 그들은 더한층 예리하게 꾸짖음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들을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다른 인물을 끌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저자가 만일 그들의 조상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의 말을 그다지 기분좋게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다윗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상태는 훨씬 처음부터 하나님은 온건하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을 요약해 보면 창조의 : 하나님의 목소리에 청종하기를 원하셨고, 마음이 강략한 것은 참지 못하셨으므로 마음의 강략함은ο엄격히 처벌하였다.

 

그처럼 오늘날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과 똑같이 엄하게 우리의 고집을 꺾으실 것이다 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중에 누가 ~~~~~~염려할 것이요"라고 저자가 말한 부분까지 와서 끝나고 있다. 문맥의 뜻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해서 나머지의 부분은 괄호 안에 넣어서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럼 이제 한 절씩 순서에 따라 논하여 보자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이것은 다윗의 이름을 인용 하는 것보다도 더 한층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이러한 화법에 이숙하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지서에서 발견되는 말씀들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귀절은 앞 귀절의 일부분이므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번역하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확실히 다윗은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양이라'고 부른 후, 즉시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그 귀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찬송하도록 권면하는 사람들에게 ,복종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특별한 예배이며, 어떠한 희생보다도 우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제일 우선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는 말이 계속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역이 하나님의 은혜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고의적인 부패에서 흘러나오는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돌과 같은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강퍅함을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우리 안에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부드럽게 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고집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어떤 외부의 영향이나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 관하여 각자가 그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다. 성령이 모든 불신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자신들을 대립시키고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고집스러운 교사 또는 일꾼들이라고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불신자들의 죄과를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 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돌리게 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오히려 인간들은 언제나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늘로부터 다른 새 마음이 주어질 때까지는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의 마음은 악을 향하여 달리기 쉬우므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길들여지고 억제되기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저항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8. 노하심을 격동하여~~~~~~" ;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불복종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유익하였다. 그들은 그 자신의 종족적인 자랑에 어리석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의 악덕이 마치 진실한 덕이나 되는 것처럼 .모방하는 일이 예사였으며, 조상들의 실례를 구실로 삼아 자신들을 변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므로 한동안 그들의 조상이 그렇게까지 하나님께 불복종했었다는 것을 듣고서 그들은 이 훈시가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사도시대에도 이 두가 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본서의 저자는 다윗이 이전에 말한 것을 기꺼이 사용하였다. 그가 지목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어디까지 조상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할 것인가의 보편적인 원칙을 추론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어떤 조상들이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확실히 유대인들이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으뜸이라는 것이 타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들의 자손에게 그들의 조상들을 본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명백히 명하고 있 다. 저자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다윗은 모세가 우리에게 말하는 장소에 주어진 두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곧 다툼과 모방을 의미하는 '므리바'와 시험을 뜻하는 '마사'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중에 함께 계신 것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물이 없어 갈하여 고통 중에 있었고 모세와 다툼으로 하나님을 격동케 했기 때문에이었다. 또한 특히 이 예를 택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 보다도 기억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대부분의 다른 모든 예들의 경우 시간의 순서에 따라 열거 되어서 마치 모세의 네번째 책(민수기)의 10장에서 20장까지 계속되는 일련의 시험 중에서 가장 좋은 예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의 범죄의 극악성을 더 크게 증가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그렇게 여러번 체험하고도 아직까지 하나님과 대적하여 그처럼 파렴치한 언쟁을 하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신뢰를 배신하다니 진실로 이 얼마나 큰  망은의 실수인가?  저자는 그래서 하나의 예를 인용함으로써 많은 것에 대처하기 위함이었다. '시험하던' 이라는 말은 우리가 프랑스어로 d h e r comme en depitant, 즉, 마치 '성이 나서 도전한다' 는 의미로 아주 나쁘게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몇번이고 그들을 도우셨는데도, 그들은 그의 도우심을 여지없이 잊어버리고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어디 있느냐고 조소한 것이다.
 
"9.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  이 귀절은 그들이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라고 설명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렇게 많은 시련에 의하여 교훈을 받았으면서도 도무지 발전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불경건의 죄책을 더 무겁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완전히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이 전적으로 무시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경솔함과 어리석음을 나타내 준다. 40년 동안이라는 짤막한 구절은 시편의 그 다음 시구들에 연결되고 있다. 우리는 사도들이 성경의 증거를 인용할 때, 말의 정확한 뜻을 캐기보다는 문제의 요점에 더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확실히 하나님은 이 백성이 40년 동안이나 그에게 짐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그렇게 많은 은혜들이 그들을 가르치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에게 충실하고 꾸준하게 선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일어나서 대적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기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이 나를 노하게 한 것은 한 번이나 혹은 잠시 동안이 아니라, 40년 동안 계속 범죄하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세대' 라는 말은 한 시기, 혹은 어떤 세기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10. 내가~~~~~~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 이것은 하나님의 선포이다. 이 선포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건전한 정신을 잃었다고 확언하고 있으며,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요컨대 하나님은 그들이 소망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건전한 감각도 이성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오랫동안 여러가지 시련을 겪고 난 뒤에 결국은 완고한 광기밖에 남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회복될 소망이 없는 자들같이 항상 그는 말하고 있다.
 
"11.  내가~~~~~~ 맹세한 바와 같이" ;  그들이 약속받은 안식을 .빼앗긴 것은 그들의 광기에 대한 형벌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영원히 거할 땅을 그들의 안식처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난 나그네로서 광야를 방황하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영구적인 기업의 땅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의 안식처라고 부르신 그 안식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지 않고는 안식 할 어떠한 집도 없다. 우리의 확실한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향하여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고 ,말씀하신 것에 근거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사실은 그들의 악이 지독했다는 것을 더 한층 명백하고 강렬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강력하게 불 타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이것은 서원의 형식이며, 인간이 말할 때의 저주와 같은,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몇 마디의 이탈이 더 보충되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말씀일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렇지 않다면(내 안식에 들어온다면) 내 생각이 참되지 못하거나 그때부터 내 안에 신실이라고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모순과 결점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 말씀은 경외심과 존 경심을 갖도록 용기를 북돋아준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운 저주를 습관적으로 말하듯이 우리가 너무 경솔하게, 또는 생각없이 서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귀절에 관해서 그들이 르비딤 장막에서 ,하나님을 시험 하였을 때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시원에 의하여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 가는 것을 거절당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 전에 이미 불순종으 로 거절당하였던 것이다.하그들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 그들은 더 이상 전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시험한 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한 첫째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징벌을 받아도 건전한 제정신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거듭 무례를 범하였다는 것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저자는 그들이 갖가지 죄로 말미암아 '점점 더 하나님의 분노를 계속 증대시켰으므로 그들은 엄연히 하나님의 엄격한 형벌에 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세대를 내가 약속한 사망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거절한 이유는 그들이 40년 동안이나 완고한 광기로 무수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염려할 것이요." ; 사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이라는 을 한 것은, 나는 :문자 그대로 염두에 두는 편이 말을 바꾸어 자세히 설명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에 그리스도의 신앙에서 떠난다면 그들의 불신앙이야말로 고약한 악의와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저자는 이미 기독교의 기초지식을 배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으므로 그는 즉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라고 덧붙여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탈의 죄는 반드시 배신의 죄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저자는 이 .사악한 불신앙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교정책은 신자들이 서로 격려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악을 향하여 달리기 쉬운 성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한 여러가지 협조가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은 계속 반복하여 격려를 받지 않으면 곧 잠들어 버리고,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으면 곧 냉랭하게 얼어붙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자극을 받지 않으면 또한 마비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저자는 사단이 그들의 마음 속에 몰래 들어가서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들을 거짓으로 속여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이 다른 자들을 서로 격려하고 피차 자극하도록 권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고의 절차를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단이 처음부터 단번에 우리를 공격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해 싸우도록 이런 광기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은 음험한 간접적인 수단으로 우리를 조금씩 공격해서 마침내는 우리를 그의 속임수에 걸리게 하기 때문 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눈이 어두워지게 되고 공공연한 반역으로 줄달음 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험에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위험에 처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속임을 당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없다. 이처럼 마귀에게 속임을 당하면, 필경 마음이 완고하게 된다. 이 일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자극하 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주의하라고 명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로 각 사람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게 함으로써 한 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사람도 자신들의 태만으로 인하여 멸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령한다. 선한 목자로서의 완전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한 마리의 양이라도 무시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양무리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파수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  이제 저자는 다윗이 말한 것을 그 자신의 목적에다 더한층 뚜렷하게 적용하고 있다. 즉 시편에서 언급되어 있는 오늘'이라는 귀절은 다윗의 시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그의 거룩하신 입을 여실 때 말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파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있다. 똑같은 사이유로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 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기쁜 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구원의 날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 만일 우리 가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그 기회를 잃은 후 에 슬퍼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도 않게하 라"(요12 35)고 말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동안'이라는' 불변화사는 하 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만일 우리가 하나님 따라가기를 게을리 한다 면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 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편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문을 우리에게 도닫아버리시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제공된 은혜를 멸시하는 자들은? 신음해 보았자 너무 늦다 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십이 내일까지 계 속될 것인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연기하지 말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즉시 대답하고 나서자: [그와 같은 즉각적인 복종이 없는 곳에는 신앙이 없다.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저자는 그들이 시작을 잘 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은혜를 구실로 육신의 방종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참을성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오직 혀끝으로 맛만 보았을 뿐인데도 마치 완전한 규정상에 확도달하기나 한 것처럼 생각하여 더 이상 진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경주 도중에서 또는 바로 출발점에서조차 중지해 버릴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경쟁코스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면 더 이상 무엇을 원하리요' 라는 피상적인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신앙에 의한 것이라면, 그 소유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도록 우리는 신앙을 굳게 잡아 야 한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즉,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이 위대하신 은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시작이라고 말할 때 신앙이 겨우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헬라어의 υπбστασι$(휘포스타티스) 는 단어는 때로는 확신 (한글 개역 성경에는 '확실한 것' 으로 번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그 뜻으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실체'(subsistence)라는 명사를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하기는 했어도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이 가 진 모든 것은 신앙 없이는 오직 허무할 뿐이므로 신앙은 실체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대답 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단순히 신앙에 머무르려는 것이다. 견고히 라는 형용사는 이런 해석에 어울릴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기초 위에 견고히 서있으면 절대로 흔들릴 위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의 불확실한 기초신앙을 끝까지 지속시키고 확 실하게 진보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15. 성경에 일렀으되~~~~~~~" ;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를 날마다 부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복음 선포에 대한 신앙적인 답변을 하자면, 분명히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 선포는 신앙의 증대를 이룩하게 된다. ёν τ@ λЕтеσθι(엔 토 레게스다 이) 성경에 일렀으되"라는 성구는 다음과 같은 말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 나님은 말씀을 전하시다가 중지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우리가 그러므로 다 만 즉흥적인 마음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날마다 우리는 똑같이 겸손하게 그에게 복종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  다윗은 조상들에 관하여 마치 당시 의 사람들이 모두 불신앙자였던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다소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사도는 다윗이 너무 가혹하게 말한 것을 좀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기록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말씀이 이 목적을 위하여 만인에게 전파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함이고, 이 복음을 만인이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며, 그리고 대다수의 반역으로 전 백성의 몸이 찢기고 절단되어질 때 이와 같은 .불 신앙은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자의 수는 그렇지 않은 자의 수보다도 훨씬 많았는 데 격노케 하던 자라고 저자가 말한 것은 유대인들을 다만 성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모범을 그들이 따르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마치 하나님은 불신앙의 조상들을 따르는 것을 금하고 당신들에게 믿음의 조상들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당신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조상들이 가던 길을 완전히 버리도록 명령하면 너무나 가혹한 것 같아 말하는 방법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  이 말은 '모세의 손에 의하여' 라는 뜻이다. 그는 그들의 탈출을 실행한 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암암리에 비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가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17. 하나님이~~~~~~~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저자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하여 노하시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도 이것을 고린도전서 10장 5절과 6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고대의 자기 백성들에게 가해졌다는 그들이 자초한 형벌의 수만큼이나 하나님의 복수를 불러일으킨 아주 중대한 악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또한 불신앙의 모든 악마의 우두머리라는 점을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불신앙을 맨 마지막에 열거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저주의 제1원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확실히 맨 처음 그들의 불신앙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계속 범죄에 범죄를 거듭하여 그들의 악을 중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속되는 징벌을 그들 스스로 자초하였다.

 

자신들의 불신앙 때문에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을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어떤 때는 탐욕으로 말미암아, 어떤 때는 불평 때문에, 어떤 때는 음행으로 말미암아, 어떤 때는 이교도들의 미신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몸을 더럽힘으로써, 그 강퍅함을 계속하였고, 그들의 사악함이 더욱 분명하게 입증되기에 이르렀다.그러므로 그들이 처음부터 , 보여주었던 그 불신앙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멸시는 언제나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약속된 씨앗은 안식을 하나님에게서 빼앗기게 되었지만 후 그들의 계속된 모든 범죄의 이와 똑같은 식으로 유래한 것이다
 
그 다음의 질문은 '모세와 아론 및 그들의 동족도 이 수효에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는 개개인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집단전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확실히 일반적인 불신앙에 휘말려들지도 않고 그들의 불신앙을 즉시 회개하고 그 원점으로 돌아온  많은 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신앙도 한 번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번, 그것도 순간적인 것이었다.  사도의 이 말속에는 대유법이 있는데, 어떤 군중이나 민족의 집단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성경에서 잘 사용되는 말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