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히2:1 ~ 10)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1)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2)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3)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4)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5)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6)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7)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8)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9)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여기에서 저자는 이제까지 그리스도를 천사들에 비교하여 유의하여 온 일을 명백히 진 술하고 있다. 즉 그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 다. 만일 천사들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이 경솔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면, 또 이 율법의 위반이 엄중한 처벌을 초래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작법 자()로 하고 대단히 많은 기적들에 의하여 확증된 복음을 멸시하는 자 들에게는 도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저자는 묻는다. 이 문제 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를 천사들보다 더 높이면 높일수록 율 법보다 복음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 그 가르침을 추천하는 것은 그 저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런데 율법과 복음의 가르침이 둘 다 똑같이 하나님께 로부터 온 것인데, 복음이 율법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마치 율법을 제 2위의 지위에 떨어뜨림으로 하나님의 위엄이 축소된 것같이 보이기 때 문에 어떤 사람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복음이나 율법을 똑같이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계시하시면 하실수록 그의 계시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하고자 하는 의욕 이 비례적으로 더 증가하는 것은 명백하다. 하나님이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미하게 나타내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하 나님의 위대하심을 언제나 공평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율법은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율법도 그리스도의 손으로 주어진 '것이라 면 사도의 논증은 무효인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렇다. 즉 두 가지 계시의 형태를 비교할 때 .하나는 감추어진 계시로서, 다른 하나 는 나타난 계시로서의 두 형식으로 똑같이 증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 법을 부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오직 희미하고 가면을 쓴 것처럼 나타내 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고, 율법이 천사들에 의해 서 주어졌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공공 연하게 드러내지를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할 때 그의 영광은 (충분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복음의 인저자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옳다고 떨여겨진다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 또는 떠내려 지나갈까 라고 통해도 좋 다. 이 말씀 안에는 중요한 문제는 없지만,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분 명히 대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즉 삼간다와 떠내려 지나간다' 와는 대립어이다. 앞의 문구는 보존, 유지함을 뜻하고 뒤의 문구는 마치 가 루를 치는 체나, 혹은 구멍이 뚫린 통처럼, 무엇인가 그 속에 쏟아넣은 것 을 도로 쏟아냄을 뜻한다. 나는 사무엘 하 14장 ,14절에 "우리는 필경 죽으 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라고 한 기록에 의 할 때 죽는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교한다면, 들어 있는 것과 쏟아낸다의 비교로서 생각되어야 한다. 들어 있는 마음은 (즉 주의깊은 마음은) 밀봉되어 있는 그릇과도 같고, 혼잡한 마음은 많은 구멍이, 뚫린 그릇과도 비슷하기 때문이 다
"2. 견고하게 되어~~~~~~" ; 이 말은 신중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위 있는 그의 진실성을 확증하신다. 이 말씀은 율법의 형벌들에 의하여 더 욱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율법을 무시하고도 형벌을 받지 않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확실성은 '그 권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율법에 더 부가된 벌칙은 선행을 하라는 말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왜 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복수자가 된다는 하나님의 교훈은 확실히 헛되거나 무력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 이 말씀은 복음에 나타난 은혜가 위대한 것인만큼 복음을 거절하는 일뿐만 아니라 둥한히 하는 일까지도 형벌 또한 엄격함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물이 그 정당한 .가치 그대로 우리에게 평가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대하나님의 선물이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를 위한 것으로서 그 정당한 평가를 얻지 못할 경우라 면 형벌은 그만큼 더 우리의 .망은을 징벌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위 대하신 분인만큼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는 그만큼 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교훈이라는 말을 사 용할 때 환유법에 의해서 적용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는 인간들이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구원얻기를 원하시므로, 인간들이 그와같이 복음을 무시했거나 거절하였을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구원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만든 자에게 구 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를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다 른 곳에서 찾는 자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 밖에서 연구원을 얻으려는 자로서 미친 자들 중에서도 가장 미친 자들이다. 이 감탄이야말로 진실로 오직 복음을 칭송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지탱하기 위한 하나의 초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보완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고, 그 말씀 자체 안에 우리의 확실한 구원이-포포 함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기있기 때문이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이제 저자는 복음의 맨 처음 통 보자였던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들과 대비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 들에게 있었던 의구심을 미리 제거해 주고 있다. 1「그들은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고, 그들의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만난 일이 없었다. 그 러므로 만일 그들 자신을 신앙으로 인도하여 준 사람들만을 천사들로 생각 하였다면, 그들은 그 천사들에게서 배운 것을 그리 존중하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우리에게 전달되어 은 이 가르침도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한다. 즉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주어진 가르침을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확증 한 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저자가 구원이 마치 근거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의심스러운 증인들이 날조해 낸 이야기도 아니 며, 책임 있고 신실한 사람들이 말한 보고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귀절 은 본서가 바울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표시이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사도인 제자 인민중의 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겸손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어떤 야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 니고, 사악한 자들이 그것을 구실로 하여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될 수 있는 한 훼손시키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복음을 들음 으로써 받은 것이지, 경계시에 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본서를 기록한 자가 바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4. 하나님도~~~~~~증거하셨느니라." ;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받 아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또 하나의 엄숙한 서 명이라도 하듯이 사도들의 말씀 위에 이적으로 확인 도장을 찍으셨다. 그러 므로 그러한 많은 증거들에 의하여 비준된 복음을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들에 대해 서도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그 중요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저자는 이적 들을 세 가지의 말로 표현하고 있다. |5첫째, 이적은 표적이라고 불려지는 데, 그 이유는 이적이 인간의 마음을 격려해서 눈으로 보는 것보다 고상한 무엇인가를 찾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이적은 기사라고 불려지는데, 이 적은 새롭고 심상치 않은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째로 이 적은 능력이라고 불려지는데, 그 이유는 이적들이 주께서 그 자신의 능력의 특별하고도 비범한 증표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증거하셨느니라 고 한 말씀 은 이적의 올바른 사용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적은 복음을 확증하기 위 하여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이적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표적이 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 리는 발견한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그 자신들의 거짓된 이적들을 날 조해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약화시키려 시도하는 그 미신 행동은 진실로 헛된 일이라 하겠다. σiv(쉰; 와 함께)라는 접속사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조화로 말미암아 복음적 신앙 이 확증되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적들은 그 보충적인 증언 들로 말미암아 인간의 음성과 조화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저자는 성령 의 나눠주신 것으로써"라고 부언하고 있다.
이 나누어주십 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가르침을 성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적은 복음의 가르침의 부속물 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선물을 나눠주신 것은 복음을 선전하는 것 을 돕기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찬미의 마음을 일으켜서 복음의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 가 무엇이겠는가? 이러므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의 뜻을 따라 라고 하는 귀절은 저자가 말하 고 있는 능력들이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에게서도 1나올 수 없다는 것 과, 그리고 그 말씀들이 우연히 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신빙성에 확인 도장 을 찍는다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말한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기억나게 한다.
"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저자는 다시 또 하나의 다른 논증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복 종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온 세계의 통치권 을 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권한도 이러한 영광에서는 까 마득히 떨다. 그러므로 오직 홀로 지극히 높으신 지위를 차지하시는 그리스 도의 탁월성을 가로막는 천사의 장애물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첫째, 우리는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시편을 음미하여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통치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부적당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도시 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축복을 자세히 말하고 있다. 하늘 과 천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세를 고찰한 후에 다윗은 인간에 관하여 말하 기를 인간 속에 하나님의 놀랄 만한 은혜가 특별히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누군가 한 사람의 인간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 고 온 인류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귀절들이 그리 스도 자신을 지적하지 않는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고 나는 대답하겠다. 확 실히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이 이 세계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 을 통치하도록 정하였으나, 인간의 배반으로 인하여 이 모든 지배권을 박탈 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주인인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참으로 충성하고 그를 시인하며 예배하기를 거절한다면, 하 나님은 이전에 주신 권한을 그에게서 빼앗아버린다는 것은 마땅히 인간의 배은망덕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다. 아담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게서 단절되자마자 이전에 받았던 모든 축복들을 빼앗겨 버렸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물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후에는 그 사물들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또 그것들 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 권리를 박탈한 표적이 있기를 원하셨다.
이를테면 들짐승들이 광포하게 우리들에게 덤벼들 때 우리들의 존재를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우리들이 그 짐승들을 두려워하고, 또 는 짐승들 중의 어떤 것들은 절대로 우리들이 복종하도록 훈련시키지 못하 며, 어떤 짐승들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겨우 훈련이 가능할 뿐이고, 그것들 은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을 해치며, 대지는 경작하여도 우리들에게 보상 해 주지 않고, 하늘도 대기도 바다도 그 밖의 모든 자연력도 종종 우리에게 적대시한다는 사실들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복종 상태에서도 아 담의 후손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이 도 적질을 해서 손에 넣은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바에야 무엇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 겠는가?? 이것을 근거로 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아담 때문에 잃은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회복될 때까지는 결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런 뜻에서 바울은 식물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거 룩하게 된다(딤전4:3~5)고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른 곳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은 더러워진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딛 1:15)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서신의 처음 부분에서 본 대 로, 그리스도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만물의 후사로 결정되었다고 하는 가르 침이다. 이렇게 모든 기업을 오직 한 사람의 후사(즉, 그리스도)에게만 돌 림으로써 저자는 기타의 모든 나머지 사람들을 일체의 이방인으로서 배제 하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왕국으로부 터 추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속을 위하 여 예비하신 식물을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빼앗는 것은 정당하지 못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이 권리에 참여하도록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 복과 함께 전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바울도 또한 아담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후사가 되었다' (롬4 : 13)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분명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 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축복으로부터 발배제되어 있다면 우리들은 시편이 말하고 있는 지 배권을 .아담때문에 잃었으므로, 그 선물은 우리에게 다시 회복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회복은 그 원천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다. 그러므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탁월함이 언급될 때는 ¡언제나| 우리는 그 리스도에게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 서신에서 장차 오는 세상이라고 명백히 언급하고도있는 것은 여기에 관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장차 오는 세상을 ,새로와진 [갱신된 세상 의 뜻으로 사용한다. 이것을 더한층 명백히 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들 머리 속에 두 개의 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부패된 낡은 세계와, 둘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갱신된 새것으로서의 후시대의 세 계이다. 처음 창조의 상태는 부패하였고, 그리고 인간 자신에 관한 한, 인간 과 더불어 타락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회복이 있기까지는 이 시편 의 기사는 성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미 명백하게 된 것은 장차 오는 세상"이라는 것이 다만 우리들이 부활 후에 기대하는 것과 같은 사태로서 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이 시작될 때부터 시작하여 최종적인 :구속이 완 성되기까지의 상태가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왜 다윗의 이름을 나 타내지 않았는가는 명백하지 않다. 확실히 그가 누가 라고 말한 것은 경멸 하는 뜻으로가 아니라, 마치 선지자의 한 사람이나 또는 유명한 저자들 중 의 한 사람을 지칭하듯이 경의의 표로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7. 주께서~~~~~ 저를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 이제 이 귀절의 설명에 새로운 난관이 제기된다. 나는 이미 이 귀절이 하나님의 아들 에 대해서 언급하는 해석이 되어야 정당한 해석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지 금 서신은 다윗이 이해하였던 것과는 다른 뜻으로 어구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사도는 βραχυ τ(브라퀴 티)를 그야말로 잠간 동안 을 의미하는 시간으로 언급하고,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었을 때의 겸 손을 의미하며, 또 그의 영광을 부활의 날에 한정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 다. :다윗은 이것을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 전체에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문구들의 정확한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 이 서신의 목적은 아니었다고 말하겠다. 만일 바울이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문제에 빛을 내기 위한 암시를 이 말씀에서 찾는다 해도 아무런 부당함이 없을까지 줄 안다.
마치 바울이 로마서 10장 6절에서 모세의 증언을 인용하여 하늘에 올라가 겠느냐라고 말하고 나서, 바로 후에 주석가로서가 자기의 논의에 생색을 내기 위한 것으로서 하늘과 음부에 관한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법이다. 다윗의 뜻하는 바는 이러하다. 즉 주여, 당신께서 인간을 그처럼 높은 존엄성에 이르기까지 높여주셨으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나 천사들의 명예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인 간에게 온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이다. 본서는 이 뜻을 뒤엎으려고 한 것은 전혀 아니고, 또 다른 뜻으로 해석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있어서 오직 잠시 동안 과시된 그리 스도의 굴욕과,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부여받은 영광을 주의깊게 관찰하도 록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지적한 것을 해설함으로써 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말씀을 암시함으로써 이와같이 기록하고 있다. '생각하신다'와 '권고하신다'를 저자는 .똑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권고하신다의 편이 좀더 풍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그 결과들에 의하여 기술하기 때문이다.
"8.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어떤 사람은 아 논의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뜻, 즉 만물은 다윗이 말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복종하고 있다. 그리고 만물이 인류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개개의 모든 인간 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유효하지 못하다. 왜 냐하면 그 소전제조차도 그리스도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15장 28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만물은 아직 그리스도에게도 복종 .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문맥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는 예외없이 만물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확언한 후에 저자는 말하자면 반대론을 덧붙여 말했는데, 그러나 만물이 아직 그리스도의 지배에 복종하 지 않고 있다 고 논한다. 그리고 이 반대론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저자는 그 리스도에게서 완성된 것을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뒤따르는 영광과 존귀에 관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마치 저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 찬가지이다. 즉 그의 우주적 복종은 아직 우리들에게 명백히 실현되고 있 지는 않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가장 높으신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다는 것과, 그리고 오늘날 지금까지 결여되어 있는 것은 때가 되면 최종적으로 성취되리라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첫 조항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만을 주고 있다:,그 이유는 이 서신이 너무나 수월한 추론을 하여 다윗이 일반적으로 만물을 가리키고 {있으므로?그리스 도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 생각한다는 불만이다. 왜냐하 면 다윗이 그 후에 열거하고 있는 각종의 종류들, 즉 들짐승들, -바다의 물 고기들, 공중의 새들이 그러한 복종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즉 이 귀절의 전체적인 진술은 이러한 종들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
왜냐하면 다윗의 유일한 목적은 그 지배권 의 보기를 가장 현저한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또 그의 지배를 가장 낮은 존재의 사물들에게까지 확산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선의와 그리스도 에 대한 관계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우리가 알도록 하 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절을 당신은 만물을 복종케 하시 고 영원한 축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필요들에 이 바지하는 사소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무엇이든 동물들에 있어서 하급 지배는 상위의 지배로부터 유래하고 있다. 일에 관해서 현재 사람들은,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 답은 앞에서 인용한 바울의 서신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것에 관해서는 본 서신의 제 1장에서 다소 언급해 두었다.
그리스도는 많 은 원수들과 늘 싸우고 있으므로 아직도 그 왕국을 평화스러운 상태로 유지 하신다고는 분명히 도말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는 부득이- 해서 싸우시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싸우신다. 왜냐하면 그의 원수들은 세상 끝날까지도 굴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원수들을 대항하도록 우리 를 단련하고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9.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 여기에 사용된 헬 라어 βραχυ τc(브라퀴 티 ; 잠간 동안)라는 문구의 뜻이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되므로(잠간 동안 이라는 시간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조금이라 는 물량의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음-역자 (주) 내가 앞에서도 이미 말한 바 와 같이 저자는 말씀의 진정한 뜻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 자신의 동안에 존 재하는 그대로의 사실 자체를 고려하고 있다. 저자는 부활의 영광을 생각해 보도록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다윗은 이 영광을 하나님께서ν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신 모든 선물이라고 확대하고 있다. 저자가, 선지자의 말을 이렇게 꾸며서 말한다 해도 아무런 부당함이 없는 것은 본래의 뜻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 이 말은 마치 비바울이 빌립보서(2:8~11) 에서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시고 그가 이룩하신 영광의 자리에 높여지셨 다 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처음에 자기 자신을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에는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케변가들이 억지 해 석을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이루었다고 해서 는 안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그 와 같은 영광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 신 것은 만물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게 하기 위함이다(빌2 그래서 우리는 최종 목적으로서, 만물이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저자는 그리스도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서는 안되겠 기에 그리스도가 죽으신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가 죽으심으로 그렇게 많은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가 의 죽음을 멸시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탄이 모 든 것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말할 때의 저자가 의미하는 것은 마치 어떤 의사가 쓰디쓴 약을 어느 대한자에게 마시게 하려 할 때, 그 환자가 그 약을 거절하지 않고 잘 받아마시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먼저 한 모금 마시는 것처럼 하는 은유를 크리소스톰이 인 용하듯이 그리스도가 타인의 모범이 된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 니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시고, 우리를 저주의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고 있다. 즉 이 일은 하나님의 사랑 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는데, 그가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이유는 자기 아들 보다도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무한 하신 사랑(롬8:32)을 베푸신 것이다. 아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가 죽음을 맛 본 것처럼 설명하는데,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부터 '승리자로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에 혀끝으로 죽음을 맛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나는 이 것을 거부하거나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서에서 그렇게 세밀하게 말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여기에서 사도의 목적 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추신 행위를 신자들에게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여 주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입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 도를 보통 인간들과 동류로 여기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십자가는 그를 모든 인간들보다도 더한층 비천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 스도가 과소평가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비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이다.본서는 바로 이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당 연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 을 위한 우두머리로서 성별되셨기 때문이다. 첫째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 의 명령을 굳게 지킬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이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만물은 역시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해 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셨다는 그 이상 의 기쁨은 없다. 여기서 저자가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는 데는 취지가 있다. 저자는 단 한 마디로 하나님을 지칭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저자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은 최 상의 것임을 우리에게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 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만물의 올바른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이렇게 성별됨이 합당하다고 저자가 지적 하는 것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 을 다스리심에 대하여 사용하는 명상적인 수단을 가리키고 있다. 즉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갖 고난으로 단련되고 그들의 온 생애 가 십자가의 생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장자인 까닭에 십 자가로 .말미암아 그 제일 첫 자리에 앉으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 이 일반적인 관습이요,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장 29절에 서 바울이 말하는 머리와 지체의 일치이다. 신자들이 비참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위하여 성별되었다는 것을 듣고, 그들이 십자 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입맞춤으로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하는 특별한 위로가 되는 것 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치욕은 삼켜지고 십자가의 영광이 빛을 발 하는 일이 없이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성별된 것, 즉 하나님께서 거 룩하게 하시는 것을 누가 경솔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영광에 대한 준비가 되게 하여 줄 그 십자가를 누가 굴욕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 는가? 이 두 개의 명제들은 여기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하여 언 급하고 있다.
만물이 말미암은 자의 창조 문제가 언급될 때, 창조는 아들 자신에게로 돌 려진다. 왜냐하면 만물은 아들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본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 암아 그들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성별한다, 깨끗하게 한다 라고 번역한 (곳을 다른 사람들은 온전케 한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 πλεωσιι(플레이 오사이)는 그 뜻이 애매하므로, 내가 가정한 뜻이 문맥에 더한층 적합함은 명백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검것은 어떤 엄숙하고 정 당한 배열을 해야 하는데,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은 제일 첫 순서 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래의 성도의 신분에 도달하 고, 또 그들을 세상의 남은 자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 래서 본서는 계속하여 성화에 대한 언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