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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히1:5)

1. 성경 (히 1:1 ~ 14)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1)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2)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4)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5)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6)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7)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8)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9)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0)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1)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2)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3)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1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옛적에~~~하나님이" ;. 이 머리말의 목적은 기독론을 소개하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이 귀절에서는 우리가 이 가르침을 존경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것에만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가르치고 있다. 이것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 귀절에서 볼 수 있는, 대조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이 선지자들과 대조되어 있고, 둘째는 우리가 조상들과 대조되어 있으며, 세째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사용하신 여러가지 말씀의 양식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계시와 대조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저는 우리 앞에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제기한다. 그것은 율법이 복음과 대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율법의 저자와 복음의 저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이다.  그러므로 이 대조의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서 다음의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는 선지자들로                                        이제는 그의 아들로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모든 마지막 날에 ,
               우리 조상들에게,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율법과 복음의 일치가 확립되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변함이 없고 동일하신 분이며, 그의 세계는 변함이 없고, 그의 진리는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율법과 복음 모두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과의 차이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옛적에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에게 말씀하신 방식과 오늘날 우리에게 발씀하신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첫째, 조상들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사용하셨지만 우리에게는 그 자신의 아들을 대사로서 주셨다. 이리하여 우리의 상태는 이런 점에서 옛날보다 좀 더 나은 편이다. 또한 모세는 아들보다 훨씬 못한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선지자들 서열 속에 포함된다. 또 계시의 방법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편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물론 구약(the Old Old Testament)에 그여러가지 '환상'들과 계시들이 있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에는 당연히 있게 될 사물의 확고하고 안정된 질서가 아직 거기에는 없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바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귀절의 뜻이다. 만일 그 양식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바로 그 끝까지 그 동일한 양식을 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다양성은 불완전의 증표였다는 말이 된다. 또 나는 이 두개의 말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즉 "여러 부분으로" 라는 말은 여러가지 시대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의 헬라어는 πολμερωS(폴뤼메로스)인데,  문자 그대로의 뜻은  많은 부분으로 이를테면 어떤 일을 후에 좀 더 자세히 말하려고 생각할 때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둘째의 문구 πολτρбπωs(폴뤼트로포스)는-----나의 의견으로는-----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이나 형식 자체가 다양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저자가 말함은 이제 우리는 어떤 새로운 계시를 기다려  더 이상 서성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것은 말씀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적 말씀 (즉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아야 할 완전한 결론적 말씀) 이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말세' 라든가  '마지막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뜻이다. 또 사도 바울이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 11)고 기록한 것도 이런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까지 도달하면 거기서 안식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마지막 말씀을 하신다면 우리도 그만큼 나아가야 하는 것이 옳다. 이러한 두 가지 점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는 큰 장애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다 완전한 교훈을 다른 시대로  넘기신다는 것을 가능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으로 만족하였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진하지 않았다.  한편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이래와는 역행하는 악페가, 세상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즉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지나쳐 가려고 시도한다. 전체적인 교황제도라는 것은 사도가 제한하고 있는 이 한계를 넘는 것 이외의 다른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운영은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까지 오도록 초청하시고, 동시에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마지막 말씀 (그리스도)을 딛고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 지혜의 한계는 이 복음 안에서이다.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 자자는 이렇게 찬양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존경하도록 인도한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는 자들이 된 데에 있다.  사도는 또한 선언하기를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은혜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가 그의 부유함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비참한 자들이며, 아무 은혜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말이 된다. 또한 사도는 만유를 다스리는 이 영예는 당연한 권리로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하는 것인데, 보이는 만물이라고 그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계속하여 말하고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속성은 여러가지 다른 이유로도 그리스도에게 돌려져야 한다.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에 의하여 창조되는데, 이 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혜이며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사역의 지휘자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원성의 증거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의하여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에 계셨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시간의 길이를 알려고 해도 시작을 알 수는 없다. 마치 그 자신이 세계를 창조하지나 않은 것처럼 세계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해서 하나님의 아들의 권능을 상시키는 것 은 아니다 능동적 표현과 수동적 표현을 비교함-역자{주). 하나님 아버지를 창조자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서 보통 발하는 방법이다. 또 어떤 귀절에서 그 지혜(내가)로 말미암아(잠8:27)라든가, 말씀으로 1말미암아(요1: 3),「 혹 은 아들로 말미암아(골1:16)라고: 부가되어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지혜 지자체 가 창조자라고 불리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하 나님 자신에 있어서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위격적()별이 있 다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질()의 일치라고 할 때 하나님의 본질인 것은 아버지의 본질인 동시에 아들의 '본질이라는_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그것은 무엇이든 또한 아버지 와 아들에게 모두 공통적으로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가 그 자신의 위격(位格 : person)이 고유성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아니다.
 
후사라는 이름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돌려진다. 왜 냐하면 그는 인간으로 만들어져 우리와 똑같은 성질을 옷입음으로 자신에게 우리에 아들로 세워서 죄로 말미암 서 후사로서의 신분을 보이고 우리가 아담에 있어서 잃어버린-것을 게 되찾아 주게 된 것이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모든 선한 것들의 후사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첫번째 인간은 (아 그 자신과 그 후예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리하여 그들로부 그러므로 .만유의 때에만 우리는 터 하나님의 축복과 모든 선한 것들이 모두 박탈되었다. 후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자신의 :교제에 .받아들일 당연한 권리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선한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리스도가 상 속자이신 것은 그리스도의 풍요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하게 하기 위함 이다. 사실 도사도 자신도 여기서그리스도에게 이 칭호를 :붙이는 것은 그리 스도 없이는 우리가 어떠한 선한 것도 가질 수가 없음을 알게하기 위함이 다. ,만일 /모든' 이라는 말을 문법상 남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귀절은 다음 과 ,같은 이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바 되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것을 중성으로 해석하며, 여기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갖 치 않으면 우리는 하늘과 땅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정당한 소유를 박탈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고 싶다.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옷 입으셨다는 것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_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 체의 형상이시라"는 말로써 기술된 것은 당연히 r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의 이말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는 존엄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 증거로는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이 두 귀절은 모두 같은통속적인 1평범한회말이 다. 이처럼 아주 위대하고 매우 심원()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피조적 사 물로부터 얻어진 비유(similitudine)의 방법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 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신 아들이 어떻 게 해서 아버지의 광채로부터 빛을 받아서 빛나는 '영광인가 하는 것을 너무 세밀하게 논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지상의 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숨은 위엄을 표현하는 일에는 어느 정도의 부적당함(improprium quodammodo) 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며, 그리고 어떤 은혜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시 는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이러한 사물이고적절히 하나 님께 적용되어 있다. 또한 이 귀절은 공허한 이론을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해서 진실하고 확고한 가르침을 설명하려 한다는[점에 주의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칭호들을 우리우자신들의 유익 에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 칭호들이 그리스도에게 돌려져들있는[것은 우 리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들을 때 아버지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서우빛을 ,발할때까지는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며,:그리스도가. 아버지의г본체의 바로 그 형상'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위엄이[:그리스도의 형상 속 에 새겨진 것으로서 나타날 때까지는 숨기어져 있다는[것을 우리 마음에 새 겨두자. 이 관계를 무시하는 사람들(즉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에게 돌려져 있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라는 것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한층 공상적인 이론을 내세우기에 열을 올리지만 그 수고는 헛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사도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의 의도는 신격()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 고, 내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신앙을 결실 있는 유익한 것으로 키우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직 우리에게 계시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본질 동안에 있는 광채 는 너무나 강력하므로 그 광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취지 않으 면 그 광채는 우리의 눈을 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빛은 그 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비추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가 없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가 신앙의 참된 지각과 우리 자신의(확실한) 경 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아는 것은[2진실로1유익한 -지식이 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형상에 관해서도 우리는 어떤 동일한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Aπαbraσμα (아파우가스마; 여기에서 광채 라고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가 여기에서는 우리의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빛이나 광휘라는 뜻 이외는 아 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Xapaxtijp(카라크테르; 본체의 형상이라고 번역되 어 있음-역자. .주)라는 말은 숨기어진 눈에 보이지 않는 본체의 살아 있 는 형상을 뜻하는 말이다. 앞의 용어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빛도 없고 끊임없는 암흑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그것으로부터 비침을 받아야 할 그 유일한 빛이므로, 말하자면 빚은 그러한 보발광()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비추어진다. 그 다음의 용어 는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실로, 그리고 완전하게 .알려진다 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은 다만 베일로 가리워지고 숨기어진 듯 희미한 형상이아니고 하나님 자신 을 뚜렷이 나타내신 하나의 정확한 형상이시며, 마치 한 개의 동전이 그것 을 찍어내는 모형의 형상을 정확히 지니고 있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되, 아버지의 부분체는 어떤 점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새 한다. 대한 υπоστασι$(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은 (나의 의견으로는) 아버지의 존재 겨져 있다고 다른 번역자들과 똑같이 내가 본체(substance)라고 번 e (esse) 또는 본질 (essence)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그 인격(person)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 안에 새겨져 있다고 말하는 것 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본질(essence)은 완전 히 하나이고, 또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본래 갖추고 있는 모 든 것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도 나타나 있어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아버지 안에 있는 것도 또한 안다고 하는 것이 진실하고 적절한 표현이 된다. 정통 적 교부들도 또한 본체(hypostasis)는 하나님 안에 3위로 존 재하고 ουαια(우시아: 본질)는 오직 하나로 존재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 리고,힐라리우스(Hilary)는 철두철미, substantia(본체)라는 라틴어를 위격 (persona)과 동일한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 그리스도의 본성 자체 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의 본성을 논하고자 하는 것 이 여기에서의 사도의 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오직 하나님 에게만 속하는 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의 별 개의 위격을 구별함으로써 아리우스파(the Arians)와 사벨리우스파(the Sabellians)를 충분히 논박한다. 그러므로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하나님이지만 그 작자가 그 자신의 본체를 가지고 있어 각각 구별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만물을 붙드시며" ;  붙드시며 라는 말은 모든 창조물을 그 고유한 상태로 유지하고 보살핀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모든 만물이 만일 그리 스도의 자애로 말미암아 지탱되지 않는다면 만물은 즉시「파멸하고 말 것이 라고 보고 있다. 그의 라는 지시대명사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나 또는 아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똑같이 무리없이 해석될 수 있다. 즉 그것은 지의' 또는 '그 자신의 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뒤의 해석을 아버지 져 받아들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뒤의 해석이 더 널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있으며, 또 문맥과 가장 잘 맞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라면 그의 능력 의 의 의 말씀으로 말미암아"라고 쓰여 있지만, 문법상 여기의 소유격은 히브리어 는 관용어법에 따르면 형용사의 뜻을 가지고 있다(그리하여 그의 능력 있 문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식으로 생각함이 좋다). 어떤 사람들이 성경 본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붙드 시는데 하는 설명에는 그 자신의 말씀이시므로 결국 자신이 자력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한 "무리한 설명을 대한 필요가 전혀 기에서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는 여 사용되고 있는 '호레마'라는 말이 아니라, λoros(로고스)라는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이라는 말은 여기 세계를 에서는 단순히 의지를 뜻하는 것이며, 그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전 오직 그 의지에 의해서만 유지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결을 완성하시는 과업도 거절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서신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가르침의 둘째 부분이다. 전체적 논 다음과 같은 두 개의 항목 아래 진술되어 있다. 그 하나는 최고의 권 하이 또 주어진 그리스도께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는 낡은 희생 의식들에 종지부를 찍어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총론의 운형식을 이루고 있는 이이 첫째 문장은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저자가 '그 자신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할 때; 어떤 정반대의 말이 은 연중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 의 이 목적을 위하여 모세 율법의 그림자들에 의한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리스도와 레위족 제사장들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보 여준다. 레위족 제사장들이 죄를 사하여 주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 능력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우리를 정결케하는 능력과 .값을 그리스도에게 돌림으로써 모든 기타의 수단이나 매개들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이 말은 마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인간에게 ,구원 을 주신 후에 만물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졌다. 고 저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 저자가 이 귀절을 추가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를 위하여 획득하신 구원은 일시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칫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으로써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 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실제보다 못한 분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우리를 경 고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여져서 제국()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려졌다는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영광의 최고점이다. 우편에 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은유적(per similitudinem)으로 사용되어 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장소에 한정될 수도 없고, 또 하나님에게는 좌편도 우편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고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왕 국을 뜻하는 것이며, 또 바울이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2:10)라고 말하는 그 권능을 가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아버지의 |우편 에 앉아 계신다 는 것은 다만 아버지의 대리로서 지배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치 모든 것을 지배할 완전한 권한을 부여받은 부왕()이 행하는 것처럼 그 말에다가 '높은 곳에' 및 '위엄의 라는 표현이 부가되어 있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며 거 기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속죄로 인하여 사랑을 받아야 함과 마찬가지로 그는 또한 이 위업으로 인하여 경배를 받아야 한다.
 
"4. 얼마큼 뛰어남은~~~~" ; 그리스도를 모세와 기타 모든 자들보다 뛰어난 자라고 말한 후에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를 천사들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한층 더하게 한다. 율법이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상식화된 전설이었다. 유대인들은 전 성경을 통하여 여기 저기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들에 관한 존경할 만한 이야기들을 들었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놀랄 만큼 미신에 빠지기 쉬운 경향이 있으므로 그들 역시 천사들을 지나치게 칭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해버렸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방해하지 않도록 천사들을 제각기 그 본래의 제 위치에 묶어 두어야 한다. 그 첫 증명을 저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 때문에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시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군데의 성경 증거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이 칭호 (하나님의 아들)로 구별되었음을 입증한다. 이 두군데의 '증언'들을 모두 자세히 조사해 보면 우리는 이 문제의 대의에 도달할 것이다.
 
"5.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  이 말은 다윗을 가리키고 있는 말임은 부인할 수 없으나, 여기서 가리키고 있는 다윗은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Christi personam sustinuit)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편(제 2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윗에게서 예표되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생하게 나타났다. 즉 다윗이 그 주변의 많은 원수들을 여기 저기서 정복함으로 그 왕국의 국경을 넓혔다는 사실은 "내가 네게 이방을 유업으로 주리 라"고 하는 약속의 예표였다. 그러나 동에서부터 서로 펼쳐져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광대한 넓이에 비교한다면, 이 다윗의 왕국은 얼마나 협소한가 또한 다윗이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도 그리스도 안에 빛나는 저 영광에 비하면 아주 약한 미광에도 미치지 못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이름은 오직 유일한 특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이름은 다른 아무에게도 옮길 수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이름은 모독된다.
 
하나님께서 인치신 것은 그리스도이시지 다른 아무도 아니다.  그러나 사도의 이 논의는 그 기초가 불 충분한 것같이 보인다.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아들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 외에 무엇으로 설명하려 하는가? 그리스도가 아들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이 군주들과 기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너희는 신이요 너희 모든 자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귀절의 인물들과 공통된 이름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가 모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렘31 9)고 불렀을 때, 모든 이스라엘을 훨씬 중하게 말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로 아들이라는 이름은 전 이스라엘에게 주어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 다윗이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 곧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89 6)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 두더라도 그렇다. 그 대답은 용이하다. 그것은 즉, 군주들은 어떤 점에서 이 이름으로만 불리어진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경우 그것은 택함의 공동적인 은혜를 표시하는 것을 말하며, 천사들은 천상의 영이고 또한 축복된 불멸성에 있어서 신적인 어떤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어진다는 것이다.

 

다윗이 아무런 어떤 조건없이 그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격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다윗은 자신의 영예가 천사들이나 ,군주들보다도, 그리고 진실로 모든 이스라엘보다도 월둥하고 뛰어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만일 다윗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지고도 다른 사람들 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은 부적당하고 적합하지 못한 호칭일 것이다.  사실 다윗은  보통 무리들 중에서 취하여진 것이다. "네가 내 아들이라"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에 관하여만 언급된 말이므로 어떠한 천사도 그러한 영예의 명칭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만일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윗에게 천사들보다 우월성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고 반대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즉, 죄에 대해 속죄를 행한 대제사장이 보통 '중보자' 라고 불리어졌을 때, 아무런 불법도 천사들에게 행하여진 것이 아니었던 바와 같이 다윗이 그리스도의 상징인 한, 다윗을 천사들보다 우선하는 것에 아무런 부적당함이 없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로서 이 칭호를 얻은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 칭호를 그리스도에게서 넘겨 받았다. 이와같이 성례전도 그 자체로서는 죽은 것이지만 그것들에는 여러 개의 이름들이 붙여져 있어 천사들이 그 이름들을 얻으려고 하면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부터의 논증은 그 기초가 확고하게 놓여진 것 같이 보인다. '낳았다' 는 말에 관해 간단히 말하고 넘어갈 것은 이 말이 여기에서는 상대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거스틴은 이곳을 해석하면서 '오늘' 을 영원, 또는 항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복잡한 해석은 천박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시간이 있기 전에 출생하신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계시한 후에야 겨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에게 언급하고 있는 이 귀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4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 선언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 셨으니)은 일종의 영원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선언보다 먼저 있었던 선언은 숨겨져 있었고 내적이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만일 아버지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계시로 그것을 증명하시지 않았다면 그것에 어떤 관심도 두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 . 비록 여기에서 언급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에 관해서이기는 하지만, 이 두번째의 인용문을 위해서도 앞에서와 똑같은 관찰이 적용된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른 점들에 있어서 천사들보다 낮은 존재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나머지 평범한 무리의 신분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아브라함의 아들 중의 한 사람이기에 또는 족장들 중의 한 사람이기에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모든 기타 사람들보다 탁월한 자이기에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려는 것이었다. 솔로몬을 아들로 사람은 바로 그 특권은 모든 다른 사람들을 동등한 영예에서 배제했다. 이 귀절의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자로서의 솔로몬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 세계의 왕국이 거기에 언급되어 있는 아들 위에 세워져 있으며, 그 왕국은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솔로몬의 왕국은 좁은 경계 안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 지속 기간이 아주 짧아서 그가 죽은 직후에 바로 그 왕국은 분열되고, 얼마 후에 그 왕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 또 시편에서는 해와 달이 증인으로서 소환되어 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 해와 달이 하늘에 빛나고 있는 한 그 왕국은 아무런 해를 받음이 없이 존속할 것이라고 맹세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다윗의 왕국은 짧은 기간 후에 멸망하고 결국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또한 선지서들 안에 있는 몇 귀절들로 미루어 보건대, 그 약속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된 것 이외의 다른 어느 뜻으로도 해석된 일이 결코 없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것이 새로운 설명이라고 반대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습관이 용기를 얻게 된 것도 이 귀절로부터이다.
 
"6. 또 맏 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높다는 다른 논증으로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경배 하도록 명령되었다는 점을 말한다. 이 말은 결국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머리요, 또 장이라는 결론이 된다. 이 귀절을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이유로 잘못됐다거나 그리스도에게 잘못 적용했다고도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서 진실하신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고 대답한다 해도 반드시 모든 사람이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의 일반적 속성으로부터 논의한다. 하더라도 어떤 의심스러운 점을 입증하기에는 별로 힘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들어 오셨을 때에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이 일은 만일 시편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관해서 정당히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은 진실되게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이 시편은 기뻐하라는 외침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땅에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에게, 즉 바다 건너의 나라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주께서 통치하실 것이가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시편을 끝까지 다 읽어본다면 우리는 거기에 오직 복음의 전파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통치만을 발견할 것이다. 즉 이 시편의 주제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그 왕국을 점유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엄숙한 사명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세계, 즉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리스도의 통치로부터 일어나는 어떤 기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말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들 가운데 오셨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천사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는 신들을 뜻하는 엘로힘 (Elohim)이다. 선지자가 천사들에 관하여서 말하고 있다는 것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  왜냐하면 이 문장의 뜻은 이 왕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는 높은 권세는 하나도 없으며 그가 오실 때에 온 세계가 기뻐해야 한다라고 되기 때문이다
 
"7. 천사들에 관하여는(또 전사들에게→칼빈 사역)~~~~ "  ; 천사들에게 는 천사들에 관하여 를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이 구절을 사 도는 본래의 뜻과는 다른 뜻으로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윗은 여 기에서 우리가 세계의 통치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질서를 [기술하면서 주님 이 보낸 사역자로서 바람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확실하 다. 왜냐하면 주께서 바람을 주의 심부름꾼으로 쓰시기 때문이다. 똑같이 주께서는 주의 번갯불로 땅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실 때에 주께서는 주의 사역자들이 주의 명령에 얼마나 신속히 복종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것은 천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비유의 도움을 빌어서 마치 사도가 명백하고 문자 그대로인 의미(그들이 말하는 것처럼)를 비유적 으로 천사들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한다. 나로서는 이 증언은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용되는 편이 더 만 족스럽게 여겨진다. 즉 다윗은 바람을 천사에 비교하면서 천사가 하늘에서 수행하는 의무를 이 땅에서 바람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바람 은 일종의 눈에 보이는 영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모세는 세계의 창조를 서 술함에 있어서 우리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사물만을 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더 높은 사물들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마 찬가지로 다윗은 세계와 그 자연을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질 서로부터 이해해야 할 것을 마치 화판위에 그려 보이듯이 우리에게 그려 보 인다. 그래서 나는 사도가 적당하게 바람에 관해서 언급되어 있는 것을 천 사들에게 돌리는 것은 유사논법이라고 생각한다.
 
"8. 아들에 관하여는~~~~~" ; 시편은 결혼을 묘사하기 위하여서 솔로몬이 읊은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여기에서 자신이 애굽 왕의 딸과 결혼한 것을 자축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 또한 .단순히 솔로몬에 대해서만 기록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더한층보고상한 것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 으로 인정해야 될 것이 두려워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보좌라 고 말하거나, [또는 여기에 있는 ['세웠다' 라는 동사를 마음 속에 보충하면 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당치도 않은 이론을 내세운다. 앞의 [설명에 따르면, (엘로힘)이라는 명사를 속격()으로 보아 하나님의"보좌, 즉 그분의 보좌 로 해석한 경우이고, 두번째 것은이 문장이 불완전한 것 임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귀절을 차분한 마음으로 그리고 논쟁을 구하는 일 없이 읽는 사람은 메시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외면하지 않을 것 이다. 그리고 엘로힘 이라는 명사가 '천사들 과 재판관들 에게도 차별없 이 적용된다고 반대해 본들 소용없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단순히 어떤 한 사람에게 사용되는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말에 대해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이외 에 도대체 누구의 보좌가 영원히 (확고한 것으로서 기술될 것인가? 그러므 로 왕국의 영원성은 신성의 증거이다.  그 다음 그리스도의 왕국의 홀()은 공평의 홀이라고 불리어진다. 희미 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솔로몬 안에서도 어떤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즉 솔 로몬은 공명한 왕이며 공평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자로서 나타나 있기 때문 이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의는 ,더한층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적 홀()인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닮아 가도록 개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정의()의 목적을 이해함에 있 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가 지배하게 하신다.
 
"9,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  확실하 이것은 솔로몬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솔로몬으로 왕이 되게 하신[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 형제들의 누구보다도 :더?좋아하였기 때문이 다른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의 형제들과, 같은 |왕자들 |중 하나에 불과하였 다. 그러나 이것은 비록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지만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자신의 ,공동상속자들로 삼으신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한 '것으로 생각하였을 때 더한층 적절하다.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_한량없이 넘치도록 기름부음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것은 우리들 각자가 그 몫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만큼의 양이지만 그리스도의 것은 측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기름부 음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중만함으로부터 일반기 위함이다. 자신이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생에서 아흘러나오는' 물줄기처럼 '그에게 의치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에 이 기름부음을 받 았기 때문에 그의 하나님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자라고 :말해진다.그의 인간성인 면을 제외하고는 그가하나님에게 종속()한다는'것은'터무니 없는 일이다.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 언뜻 보기에는이이 증언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있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생각될는지 모른다. 특히 여기에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분명치 않은 귀절에서 그러하다: 논증하 고 있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유한 속성이다.코그러 나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은 전혀없고 제시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 의 명백한 위엄이다. 뿐만 아니라 확실히 그리스도는 시편 아무데도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이 암시적 귀절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에게 분명히 주위탁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이 귀절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일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있어서 비로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분께서는 일어 나서 시온을 긍훌히 여길 것이니 이에 열방이 주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로다'.스또는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온 세계가 하나님 에 대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예배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찾기란 헛된-일일 답 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것들도 모두i그리스 도 자신에게 적용됨으로써 비로소 적절하다. 곧 그가 통하늘과 고망을|창조하신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의 존재는 영원하여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것인 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위엄은[가장 높은 -상태에까지- 높여지고 '그리 하여 모든 피조물의 서열() 사밖으로?옮겨지는 것이다.'하늘이 소멸망할 것 이라고 한 다윗의 말에 대해 어떤:사람들은-설명하기를 다윗이 확고히 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있을 수 있는r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모든' 피조물 들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고 [있는 :것을: 3우리가 [알고 있으므로-이러한 거무리 그 한 설명을 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고통 중에 있는 i자들의 '기대와도 같 이 하늘도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는 말은 ,하늘이[멸망으로r 떨어져가고 있음 조 을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는가? ≤이와반대로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다 그리스도의 영원성은 특별한 [위안을 의로운 자들에게 가져다 준다. 시편은 의인들이 이 회복에 참여하게 지되며,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자신의 성품을 그 자신의 지체에게 전달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_말을 맺는다.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 커 다시 저자는 다른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찬양하여 그리 스도가 얼마나 천사들보다 뛰어나신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있다. 인 여 용구는 시편 110편 1절로서 오직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개설명될[14] 있는 곳이 한 다. 왕이 제사장 직분을 침범하는 것은 불법이었고(대하26: 18~19에 나오는 웃시야의 문둥병 경우) 다윗이나 그의 왕국-계승자들 독제사장으및 로 임명되지 못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결국 새 왕국과 새 제사장직이 동시 에 왕과 제사장인 인물로 미말미암아 여기 나타나는, 것이다.[7] 더우기 영원한 모 제사장 직분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이 시편의 바로 첫머리에서 이미 j그리스도는 하나님의|.오른편에 놓여져 있는데, 이것은(내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다음가는 들 능의 자리를 그리스도에게 준다는 뜻을 가진 들어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원 아버지의 대리자이고, 아버지의 권능을 .행사하기 위한 아버지의 김주부관( )이며,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이 하는 은유이다. 모든 천사들 중에서 그처럼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는 천사 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 모든 천사들보다도 훨씬 :뛰어나신기분이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  이 말은 그리스도의 왕국은 를 공격하는 그의 대적들이 근절되지 않는 한, [위험에서 -벗어날 가망은 없 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왕국을 뒤엎으려고 시도하는 자들 이 강력하고 유력할 때는 갖가지의 간책()과 술책을 다하고 폭력을 써서 모든 방법으로 되풀이 시도하기 때문이다. '확실히'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 는 것을 믿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보좌로부터 결코 .끌어내려지는 일 이 없다는 것과 :오히려 그리스도는 모든우그의 원수들을 발 아래에 둘 것이라 는 이 약속은 모든 두려움을 우리들에게서 소멸시켜 준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하겠다. 하나는「그리스도의 왕국은 결코 명은 하지 않고 그 왕국을 교란하려는 수많은 원수들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점 이요, 둘째는 이 원수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 버지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위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끝 날까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발 아래 억제되고 짓밟힐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리스도가 그의 원수들을 발 아래 짓밟을 때 끝나는 것 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영왕국은 운영원토록 계속될 것인데, 바 울이 고린도 전서 15장 25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지금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지기를 원하시지만, 그 때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우 리에게 나타나실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스도는 역시 인간과 천사들의 주가 되심을 그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한 충분한 대답은 지금 인용한 고린도 전서의 귀절에서 찾아야 한다.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고 보내심이 아니뇨" ; . 비교를 보다더 명백히 하기 위하여서 저자는 이제는 천사들의 본성과 '신분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말한다. 저자가 천사들을 .영들'이라고 부를 때, 이 칭호로 확실히 그는 그들의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말마암아 그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피조물들보다 우월하기도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 직후에 천사들의 '임무를 정하면서 λετοbprca(레이투르키아'; 봉사)라고 말함으로 그 본래의 위치가 지배한다는 것과는 반대되는 자들임을 보인다. (저자는 그들이 ('섬긴다 라고 ,말함으로써 더한층 명백히 그것을 정의하고 있다. 앞의 말(봉사)은 오천사들이 ; 직무 담 당자들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섬기는 자들 이라는 말은 더한층 낮고 더한층 천한 뜻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전천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영예스 러운 섬김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섬긴다고 하는 바로 그 ι사실은, 곧 천사들 이 모든 주이신 그리스도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해 준다. 만일 누가 반론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도 똑같이 하나님의 종,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종, 우리를 섬기는 자로서 여러 곳에 기술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리스도께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신 것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그는 그의 권세 를 조금도 감축당하지 않고 유지하신다. 한편 천사들은 섬기기 위하여 창조 되었고 그들의 신분은 모두 이 섬기는 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커다 란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천사들에게 본성적인 것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는 우발적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육체를 옷 입은 점에 관해 서도 그렇다. 그들에게는 필연적인 것을 그리스도는 자원해서 떠맡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와같이 종이 되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지배하 는 위엄이 감손되는 일은 육신에 있을 때에도 없는 것이다. 신자들은 이 귀 '절로부터 그들의 구원을 돌보기 위하여 그들의 종으로서 천군천사가 배정되 어 있음을 들을 때 커다란 용기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하여 금 우리를 위하여 분주히 일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에 대한 엄청난 확신이 『생기게 '되는데 이와 같은 보호가 위험을 막고 있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위험에서 벗 어나 있다는 확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주 깊이 고려하시 며, 우리와 함께 사단에게 대항하는 조력자요, 또 우리를 돌보기 위하여 모 든 방법으로 노력을 다하는 조력자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이 축복은 특히 그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우리의 조력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 론 이와는 대조적인 성경적 증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 이 증거에 의하면 천 사들은 때로는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서도 보내어진다는 논증이 가능하다. 다니엘 10장 20절에는 바사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의 천사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이렇다. 그 버림받은 자들이 천사들의 사역() 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촉진시킨 것이다. 이 버림받은 자들이 획득한 성공과 승리 는 본래의 목적이 되는 교회에 항상 관련해 왔다. 확실히 우리는 우리의 죄 그 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을 당한 자들인고로, 그리스도 안에 없 서 이루어진 화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천사들과의 어떤 과제도 가질 수 없다 를 는 것은 야곱이 그의 환상 중에서 본 사다리에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