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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히브리서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히2:16)

1. 성경 (히2:11 ~ 18)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1)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2)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3)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4)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5)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6)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7)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  저자는 앞에 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 지체들과의 연합이 그리스도 자신 안에서 성 취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그 리스도가 우리의 육신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히브리 저자는 말하기를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하 였다. 즉 그, 말은 우리의 구원의 창조주와 그 구원에 참여하는 우리가 (내 가 이해하는 바 대로) 동일한 성질에 속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아담을 뜻하는 것으로써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이 그렇게 불합리하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하나님과 동일한 성질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문법상 중성이라고 해석한다.
 
마치 저자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동일한 지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바와 같다. 이것은, 즉 우리가 긴밀한 교제의 끈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성성을 우리 자신의 본성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성결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만이 아니라, 성결의 능력이 우리의 인간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성 자체 안에 이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인간성 안에 성성을 완전히 쏟아넣어 주셔서 우리가 모두 거기에서 성성을 꺼내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17:19)"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가 많고 깨끗하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그 교정책을 우리는 먼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체 안에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고 있는 영적 일치와는 달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가지는 영적 일치를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거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말씀의 도리에 전혀 어긋나는 일이 없는 한 나는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해석에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이 귀절은 시편 22편 23절에서 따온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가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는 자체가 다윗이 그리스도 자신에 대하여 중요한 인증 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편으로부터 더 많은 귀절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혹은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었다", 혹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와 같은 귀절들이다.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실체로 .나타난 귀절들, 즉 수난의 이야기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언급하고 있는 생생한 표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부르신 데 대한 시편의 목적은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라고 한 이 모든 것들의 완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윗 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조그마한 지역에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그것을 확대시켰다. 이전의 그리스도의 왕국은 다시 말해서 어떤 한정 된 경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그것은 역시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들려온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고난을 주께서 부끄러워하시지 않았다고 언급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고도 적절한 표현이다. 사실상 주님과 우리와의 간격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같은 형제라고 불러서 영화롭게 하는 것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 자신을 지극히 낮추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주의 종들보다도 더 못한 자들로 간주될 만한 무가치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위대하신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에 의하여 더 한층 위대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벌써 종의 형상인 죽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후의 불멸의 영광을 입은 자로서 말씀하시기 때문이 다.
 
이 칭호는 주님께서 우리를 주와 함께 하늘에까지 올려주신다고 말씀하는 것과 똑같은 뜻을 갖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형제라는 이름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과 모든 하늘 의 축복을 누리도록, 말하자면 주께서 이 특권을 우리에게 옷 입혀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특권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임무인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복음의 선포는 목회자가 매일 수행해야 할 직무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그 지식을 앎으로써 하나님의 선이 우리 모든 사람들 가운데 널리 알려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복음은 어떠한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전달되든지 간에 그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후서 (5 : 20)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그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행동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크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인간들 자신이 아니라, 인간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전하고 계시다 는 것을 분명히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을 위탁하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더라도 그는 이 임무를 무익하게 저버리시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그 임무를 제자들을 통하여 완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2. 교회 중에서~~~~~~~" ;  이 귀절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선포가 복음의 가 르침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더한층 분명히 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자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찬미가 마음 속에나 귓전에 메아리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모범을 보여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찬송을 공공연하게 크게 부르라고 우리를 권고하신다.렇 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듣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받은은 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감사하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감사의 증거를 공공연하게 제시하고 또그렇게 하여 서로 은혜를 받 도록 피차 권고해야 한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강력한 권고의교훈 이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찬미에 자기울이며 그가 :우리의 지휘자가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한층 열렬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다.
 
"13.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어 귀절은 시편 18편 2절에서 발견되었는 데, 이 말씀이 여기에 인용되었다고 사신뢰함이 좋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5장 9절에서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관한 다른 귀절을 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밖의 순서 자체의 논의는 다윗이 여기에서 다른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그가 그렇게 위대하게 묘사한 그분은 어떤 희미한 그림자도 다윗에게서 찾아보기 가 진실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열방의 '으뜸"(시18:43)으로 삼으셨으니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이국의 백성들까지 '자신의 소문만 듣고도 자신에게 와 서 복종한다고 자랑하고 있다. 다윗은 확실히 그 이웃의 잘 알려진 몇몇 족속들을 강제로 굴복시켰다.
 
그리하여 자신의 족속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수많은 다른 왕들의 위대함에 비한다면 어느 정도인가 ? 더우기 자 발적인 복종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가 알지 못한'먼 나라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시편의 끝머리에 언급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방인들 사이에 엄숙하게 전파한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러므로 여러 민 족들의 '으뜸'으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가장 먼 땅 끝에서도 분 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은 그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감동하고, 즉 그분에 대 한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아 i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그들 은 군대에서처럼 멍에를 메도록 강요받는 것이 아니고, 그의 가르침을 들음 으로 감동을 받아 스스로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자신을 주께 바치기까지 되었다.
 
이 시편에서 언급되어 있는 그러한 종류의 가장되고 거짓된 복종의 양 은 교회 안에서까지 보이는 수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양양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표명하면서도 그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이 오직 그리스도에 관해서만 언명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일이 .당면한 우 리의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와 그리스도는 동일하다고 해서 그 리스도가 하나님을 크게 의지하였다는 결론은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그 논증이 정당하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리스도가 한낱 인간적 요구에 복종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와 같은 의지하는 믿음도 필요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의 도움에 의존하고 계시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 있다 는 말이 된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무익하거나 무의미 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비 참한 자요, 버려진 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 뢰는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의 실증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는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약점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그 약점을 자기 스스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지도자와 교 사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함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 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데 누가 그 길을 잃을까 두려워할 것인가? 나는 말하건대,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이 헛된 것이 될 위험은 전혀 없다. 그리스도 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는 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볼지어다~~~~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나" ;  이사야 8장 18절은 이사야가 자신에 관하여 발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사야는 백성들 에게 해방의 소망을 주되 그가 약속한 것을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않 았을 때, 백성들의 완고한 불신앙으로 그가 낙심하여 용기를 잃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백성들 중에, 신앙이 깊은 소수인들에게 그가 .말하는 교훈을 분 명히 가르칠 것을 이사야에게 명령하고 있다. 마치 그의 가르침이 많은 사 람들로부터 거절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무리가 있을 것 이라고 말하기나 하듯이 말이다. 이사야는 이 대답에 의지하여 용기를 회복 하고 언급하기를 그에게 주어진 제자들은 언제나 기꺼이 하나님을 따라 갈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왜 사도가 이 귀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로 같은 이사야서에서 유대와 이스라엘 왕국에게 넘어지는 바위와 거치는 돌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도에 의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귀국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손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이다.고이 성취가 우' 리들과 교부들에게 전해진으영광스러운 속죄에 관한 일종의 전주곡이었던 것 처럼, [우리는 극히 소수의 유대인들만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실험은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일반았다는 사 실은 그들이 장차 맹목적인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되면 이번 에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여 멸망하게 되었던 것의 조짐이 요, 징조였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전지자들 '안에 서 발견되는 교회 부흥에 관한 약속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언급하 고 있음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이 왕국은 :백성들을 회복함으로 써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돈이 결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때에 그로 인하여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운명하여 율법 과 예언을 확증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직 이사야에 대해서 뿐만이 아 니라, 앞으로 을 시대에 ,백성들의 ,불신앙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님의 모든 사자들에게,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교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전지자들보다도[ⅳ더 무례하게 취급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맹렬히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가르 침이 아무리 교회의 온 식구들에게 거침돌이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이 전복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이: 제자 들 가운데 확증되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명령은 그를 따르는 모든 교사들에게 확신을 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게 하는 존재로서 그들의 머리가 되시며 그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교사로서 명령하신다. ;이같 이 세상이 불순하고 배은망덕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나 그들 스스로 하 나님께 순종하려 하며 그가 주신 ,명령을 지키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사야서의 귀절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장 .바르게 적용 된 것을 볼 수 있다. 본 서신의 결론으로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과 우리를 똑같이 하나님 아버지께 바칠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 게 연합시키시게 되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일한 신앙의 법칙 아래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들은 하나의 지체가 된다. 우리가 보다 좀더 고무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말 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의 친구가 된다는 것보다 더 용기 f있는)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그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모범으로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최고 지도자로서 모시고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된 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이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 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시인한다는 것보다 더 ,바람 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고승인한다는 것은 믿음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를 떠나게 되는데, 이보 다 더 혐오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자녀 나라는 귀절은 여러 장절에서 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제자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  이 말씀에서 복종의 첫째 이유가 제시된다. 즉 하 나님께서 우리를 그 자신의 아들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만을 아버지에게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하나 님께서 우리를 그 아들에게 주신 것이 영원한 택하심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다. 아버지께서 생명으로 택한 자들을 아들에게 맡기어 아들로 하여금 아 버지를 대신하여 그들을 돌보시게 하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 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그리즈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 일을 -말함이다. 우리가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께 복종 할 때, 하나님의 긍호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 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길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 님께로 인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우리에게 다시없는 신앙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이와 같이 누가 그리스도의 믿음과 보호 아래 에서 두려워할 것인가? 그러한 보호자에 의하여 보호받는 자라면 어느 누가 그 위험들을 겁내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볼지어다 나와***** 게 주신 자녀라"고 말씀하실 때 다른 곳에서 그가 아버지께서 받은 자들 중 의 어느 한 사람도 멸망치 않는다고 약속하신 것(요10: 28)을 실제로서 성취 하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비록 세상이 아무리 -맹렬하게 복음을 모욕하고 거절한다 할 지라도 양들인 우리는 역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분별할 수 있도록 주의하 자.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모든 계층,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이 불신앙으로 인하여 동요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수하에 모인 자기 백성들을 책임져 주시는 한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다.
 
사악한 자들이 그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심지 않은 나무들이 뽑힌다고 하신 말씀같이 뽑히게 지된다(마15 13). 한편, 하 나님은 자기의 백성(딤후21)을 알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보증하시어 단 한 사람도 구원에서 빠뜨리지 않도록 출하신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구원의 확증으로써 만족하도록 하자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  이것은 위에서 말씀한 것의,어째서 우리설명한 것이-죽으신 것은읽을 만한 가확증하고 있결론인 동시에 저자가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하나님의 아들이와 같은 육신의 옷을 입지 않으시면 안되었는가를 좀더 자세히다. 그는 육신으로도 우리와 똑같은 모양을 입으셨고, 또 그가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함이다. 이 귀절은 주의해서치가 있다. 왜냐하면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인간성의 일본질을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가 오느냐조건과 성질을우리의 신앙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똑같은나누어 갖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셨다고 저자는 개발하고 있다.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이로써 우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은 명백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하는 자기의 조건을 달게 받기 위하여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로서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절정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인 이상, 그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저자는 아들의 죽으심의 결과에 관해서 아주 간단히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은 대단히 생생하고 효과적인 표현으로 서술하고있다. 즉 아들은 우리를 악마의 폭정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우리가 안전하게 되었으며, 죽음으로부터 구속함을 받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죽음을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이 말씀이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좀더 주의깊게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마귀를 없이 한다고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말씀은 어떠한 권세도 우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마귀가아직까지 힘을 가지고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지독한 :책동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해치려는 능력은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무디어지고 만 것이다. 우리와 싸워야 할 원수가 우리에게 대항할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위로가 된다. 이 말이 우리를 향해 한 말씀이라는 것은 그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라는 귀절에 의하여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본서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마귀의 세력이 이미 결절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마귀의권세가 사망의 권세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마귀의 영향력이 우리에게 파면적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오직 사단의 포악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소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단 자체를 여지없이 때려눕혔기 때문에 사단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마귀에 관하여성경의 관례에 따라서 단수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귀가 오직 하나만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마귀가 모여서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몸의 머리를 떠나서는 지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15.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 이 귀절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의 생애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 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모든 자들의 죽음은필연적으로 몹시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이는 죽음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저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라면 그 죽음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일생을 통하여계속되는 저 죽음의 노예상태나, 또는 비참한 영혼들이 울부짖는 끝없는 고뇌의 불안이 바로 이 죽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죄의식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자진하여 받음으로써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우리에게서 제거하여 주시고 우리를 그 죽음에서 건져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아직도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앞서 가시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일어떤 사람이 죽음을 무시하고 그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깊은 그리스도의 신앙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두려움은 거의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므로, 그두려움은 역시 불신앙의 표시임이 확실하다. 죽음은 여기에서 오직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진노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형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 죽음은 영원한 가저주를 가져온다.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의 판결을 반을 때 그곳에는 반드시 흑암의 권세들이 나타난다.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 ; 이렇게 비교함으로써 저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육신의 옷을 입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명예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천사들을 위하여 그만한 일을 하셨다는 말씀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두려운 멸망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탁월한 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줄 어떤 유례 없는 계기가 있기를 원하셨다. 그것은 천사들에게까지 보여주시지 않았던 증거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천사들보다 더 사랑하신 까닭은 우리에게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상태가 더 비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자랑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더 크신 자비를 우리에게 주신 것 밖에는 자랑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 스스로가 땅 위에 널리 가득 찬 선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성경의 증언에 관해서 동사의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전에 증언 되었던 것을 저자가 우리 눈앞에 보여주듯이 설명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이 단 한 귀절에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씨로서 태어난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말시온(Marcion)이나 마니교도, 또는그러한 종류의 미치광이들을 뒤집어 엎기에 충분하다. 만일 그리스도가 이전에 종종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지금 와서 오직 인간의 외형을 입었을 뿐이라면,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천사의 본성을 입은 적이 있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도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본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었을 때, 그리스도는 진실한 인간이었으므로 두 개의 본성 안에 한 인격의 통일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이 귀절은 네스토리우스(Nestorius)를 지지하지 않는다. 네스토리우스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 진실한 인간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육신으로만 살았던 분으로 생각하여 두 개의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본서의 입장과는 전혀 그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본서의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똑같은 본성을 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한 형제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를 다만 사람이라고만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씨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사도는 명백히 아브라함의 자녀' 라고 지칭함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말에 더 많은 신뢰를 갖도록 하고 있다.것은 이 귀절이 성경으로부터 취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그리스도의 인간성 동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육의 본질과 감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 본래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는또한 인간의 감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결과가 무엇이며, 그리고 왜 하나님의아들이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는가 하는 것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진실한 신앙의 교훈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결실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은 죽은 것이요 쓸모없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하여 발하기를 그리스도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고 인간의 육을 취하시게 되었다고 가르쳐준다.
 
나는 이 말을 그가 자비하고, 그리하여 충성된 분하려고 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의 '노여움을가라앉히시고, 불행한 자를 돕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고, 눌림받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 제사장에게는 그 첫째 임무이고, 가장 으뜸가는 필수적인 자격요건은 우정이 있는 곳에 일어나는 자비심이다. 항상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있는 '자가 타인의 고뇌에 감동되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확실히 로마의 시인 버어질(Virgil)이 다음과 같아 말한 것은 평상시의 인간 경험에서 나온모르말이다.
"비참했던 나의 경험으로 인하여 나는 빈궁한 자를 돕는 것을 배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비의 감정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불행이나 비참의 경험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처럼 불행으로말미암아 시험을 받은 경험이 없으면 우리를 도우려 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불행에 의한 '시험도 다른 것들과 똑같이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악들이 우리를 괴롭힐 때마다, 이것을 우리의 직접적인 위로로 삼아야 한다. 즉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경험하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그가 마치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그 시련 속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충성이라는 말은 진실하고 정의로움을 뜻한다. 이 말은 거짓된 인간, 혹은 자신의 직분을 책임지지 않는 인간의 일반대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불행을 몸소 경험하셨기 때문에 몹시 동정하시어 ι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도움을 간청하려고 하신다. 하지만 그것뿐이겠는가?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옷입으시고 화해의 가치를 우리 자신의 육신 안에 갖추도록 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진실로 우리가, 주와 .공통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과 ,함께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로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일"(τα πρ∂ τov θευ 프로스 톤 데온)이라는 귀절에서 저자는 인간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목적을 가졌다고 지적해 준다. -신앙의 자유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첫째의 보방법이므로 우리는 [우리에게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중보자 가 필요하다.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 저자가 말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난으로 시험을 받았기-때문에- 언제든지 능히 우리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시험 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단순히 경험이나또는 실증을 의미할 뿐이고, 능히 도우시느니라! 는` '능히:도우시기에 합당하시니라', 능히 쉽게 도우시리라', 능히 도우시기에 적합하시니라' .등으로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