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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2024 사순절 이십칠일차 묵상

1. 성경 (요16:25~33)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5)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6)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7)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8)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29)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1)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2)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가 불신자들과 버림 받은 자들에게 이해 할 수 없는 마치 더듬거리는 분이 되고 말것으로 경고하고 있으며(사28:11) 바울은 복음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감추어지고 있는 것은 사단이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듯이(고후4:4), 연약하고 무지한 자들에게는 그것이 더 없이 혼잡하게 들리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곧 우리의 마음이 불신자들의 그것처럼 완전히 어둡게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도 안개 속에 가리워지는 것 같은 상황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분간 당혹하게 만들어 자신의 빈곤을 의식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통해서 깨우쳐 주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말씀이 그들에게 친숙하게 되고 잘 알려지는 큰 진전을 보게 하신다. 이것이 다음 귀절의 “때가 이르면”의 의미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 이 말씀으로 그는 그의 가르침의 목적이 본질적인 행복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이 그들에게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 다른 곳에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알도록 하려는 뜻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거기서는 곧 그들과 나머지 백성들을 구별하는 가운데 백성들에게만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마13:13).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사도들의 무지가 당시 그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래도 그들의 스승의 의미를 희미하게 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불신자들의 부류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그의 말씀이 앞으로 곧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그들에게 허용하실 분명한 이해의 빛에 비교하면 비유적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은 모두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전혀 모르고 있던 자들에 비교하면 훨씬 뛰어났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성령이 가져온 새로운 지혜에 비하면 그들은 아직도 글을 배우는 어린 아이들과 같았다.

 

”26 그날에 ~~~~” ; 그는 여기서 왜 하늘의 보고가 그처럼 풍성하게 열려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필요 사항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변호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성구에서 그가 중재자가 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아주 사랑하시게 될 것이므로 그는 어려움 없이 그들의 요구 사항을 모두 기꺼이 들어 주실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 ; 이 말씀은 우리의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유일한 결속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뿐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에게 우리는 거짓 없는 신앙을 통해서 연합 되어 있는데 이 신앙은 그가 사랑으로 묘사하는 진지한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영접 하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그를 진지하게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이 말씀으로 신앙의 위력과 성격을 잘 표현하신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구원의 시작이 우리에게서부터 출발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귀절은 이러한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그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것이다”라는 것이요 요한은 (요일4:19)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없는 것들을 불러 잇게 하시고,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자신은 낯선 사람들에게 합하시며, 돌 같은 마음에서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어 내시며 자신을 찾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을 제시하신다는 이 교의만큼 확실한 것도 없으므로 더 이상의 성경 귀절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선택자들의 수에 들어 잇을 경우에는 그들이 부름받기 전이라도 은밀한 방법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5장 10절에서 가르치듯이 그들이 아직 화해 받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들을 하나님의 원수로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은 전에는 적대적인 심판관으로 알고 벌벌 떨었던 그분의 부성애에 대한 보증이 이제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 이 귀절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의 그분에 대한 신앙이 그의 신령한 능력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확고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 신앙의 두 기둥인 그의 죽음과 부활도 거기에 하늘의 능력이 연합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별 소용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마땅한가를 이해하게 되었다.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곰곰히 생각하며 그분의 손길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그를 영접해야겠다. 곧 우리는 그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하는 식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와 목적으로 그가 오셨는가 하는 점을, 곧 그가 우리에게 지혜, 성화,의 그리고 구속이 되기 위해 오셧다는 점을(고전1:30) 또한 이해해야겠다. 

 

“29 제자들이 말하되~~~~~” ; 지금까지 낙심하고 깨어져 있던 자들이 마음이 갑자기 기뻐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 위로가 얼마 만한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물론 아직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도를 다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이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낌새 만으로도 그들은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31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 제자들은 너무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연약성을 기억하고 그들의 미미한 역량의 한계를 지킬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는 우리의 결핍이 무엇인지 우리가 얼마나 완전한 신앙과 거리가 먼 가를 깨닫지 못한다. 곧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때에야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완전한 것으로 상상하고 있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빈약한 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곧 자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박해는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과 같으며 신앙의 왜소성이 명백하게 들어날 경우 지금까지 들 떠있던 자들은 떨기 시작하면서 뒷점으로 물러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질문은 반어적이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의 믿음이 든든하다고 지금 자랑하는 거냐?  너희들의 텅빈 상태를 드러 낼 시련이 곧 있을 것이다”하는 말씀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이 너무 기고만장해 갈 경우 스스로 자제할 필요가 있다.

 

”32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 이 정정의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그리스도를 저버린다 해서 그분이 손해 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진리와 영광은 세상의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근거하고 있는 만큼 그가 온 세상의 버림을 받는다 해도 그는 온전히 그대로 남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외부적인 도움이 필요치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편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빌려와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으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누구든지 이 점을 제대로 숙고하는 자들은 온 세상이 요동 한다 해도 제자리를 확고부동하게 지킬 것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넘어진다 해도 그의 신앙이 거기에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 그는 다시 지금까지의 위로가 얼마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로서 그는 그들이 세상에 잇는 동안 수 많은 고통과 환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이 수많은 환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경고해서 그들이 언제라도 인내할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있다.

 

”담대하라” ; ~~~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벗어 나려고 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서 싸울 때만이 전쟁터 한 복판에서라도 위험을 거뜬히 벗어날 수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는 경건한 자들의 구원에 반대되는  모든 것, 특별히 사단이 우리를 잡으려고 깔아 놓은 모든 타락이 포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