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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2024사순절 이십사일차 묵상

1. 성경 (요16:12 ~ 15)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2)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4)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2.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 '감당하다'(* , 바스타조)는 문자적으로 '훔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2:6). 그리고 어떤 때에는 '무엇을 옳긴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10:31). 또한 19:17에서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대부분 짐을 지는 것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행 15;10;갈 5:1). 본절에서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바스타조'가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하시는 바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모든 교훈을 이해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이해력이 연약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연약함은 성경의 여러 곳에 묘사되어 있다(마 16:6-12, 21-23;17:17;막 16:14). 그리고 이런 이해력의 부족으로 인해 그들은 부끄러운 일들을 행했떤 것이다(18:15-27;막 14:50).

 

(2) '지금'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운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영으로서 임하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듯을 다 아심과 동시에 예수가 선포하신 말씀의 목적을 아시며 또한 제자들의 생각도 아신다. 그는 영이시기에 무지에 싸여 잠자는 제자들의 영을 깨워 영적 비밀을 깨닫도록 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며 그뿐 아니라 그 말씀이 그들 속에 살아 움직이며 그들의 삶이히 4:12)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들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명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성령을 통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증거자가 될 것이다(행 1:8)./ 호크마주석]


”13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의 영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사도들이 그의 부활 후에 곧 보았지만 그러나 당시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영적인 나라의 장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죽음 뒤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을 그들에게 약속하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은 지금 그들이 깨닫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훨씬 뛰어나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처음부터 제4장 마지막 부분에 걸쳐서 하늘의 천사들마저 교회를 통해 배우며 놀라는 이 감추어진 지혜의 보화를 설명하고 있다(엡3:10).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교황의 고문서나 박물관에서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 이것은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는 귀절에 대한 확증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진리의 원천이요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본질적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게 하려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이 신령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다”라는 말씀과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으로 성령의 위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곧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거나 성부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성의 수준에 맞도록 응용해서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신성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지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마땅히 존경하며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베일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서 나온 헛소리가 아니라 그의 하늘의 보좌의 은밀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성령이 오시는 것은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영광을 확증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제자들에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초보적인 것만 가르치셨으며 제자들을 더 높은 고등 교육기관으로 보내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복음을 옛날 백성들의 가정교사라고 불리우고 있는 율법(갈3:24)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과오들은 로마교와 마호메트교가 그 원천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성령에 대한 거짓된 주장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상실하고 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구별하는 순간 모든 종류의 광기와 협잡의 수문은 터지고 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도 비슷한 술책을 시도하고 있는 광신자들이 많다. 기록되어진 가르침이 그들에게는 마치 문자로만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꺼이 여러 계시로 구성된 새로운 신학을 뜯어 맞추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가 보낼 성령에 의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공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곧 그는 성령의 역할은 단지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영원히 고수하고 확증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다. 그러면 성령의 가르침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도장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명령하는 그 음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 이유가 그리스도의 “내 것을 가지고”라는 말씀 속에 나오고 잇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성결, 그의 죽음에 의한 죄의 도말, 우리의 옛사람의 십자가의 처형, 그의 부활의 효력을 통한 새 생명에로의 개조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축복의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것은 우리를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에게서 이끌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전1:30)”는 바울의 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를 전시해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부요가 아닌 것은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뜻에서이다.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그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모든 것의 출처가 아버지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말씀은 그가 중보자로서 그렇게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그의 충족성에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그는 언제나 우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해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곁길로 밀어 버리고 다른 길로 우회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씀을 “성자도 동일한 하나님인 만큼, 성부에게 있는 것이 성자에게 공통된다” 하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의 감추어진, 말하자면 본질적인 능력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부과된 우리에 대한 직무를 두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그의 부요를 선언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누리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령을 우리가 그의 손을 통해 아버지에게 받는 은사로 말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