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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2024년 사순절 이십일일차 묵상

1. 성경 (요16:1 ~ 8)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2)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3)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4)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5)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7)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8) 

 

2. 묵상 (호크마주석)

"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 혹자는 '이것'이 예수가 지상 사역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교훈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H.R. Reynols).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15:20-25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eyer, Godet, Barrett, Lindars). 그리고 버나드(Bernard)는 핍박 외에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으로 보아 '이것'은 '핍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하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15:26, 27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내용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은 '이것'을 의미하는 헬라어로 '타우타'(* )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는 복수로서 두 가지 이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버나드(Bernard)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한편 본 구절과 같은 표현이 15:11에도 나오지만 본 구절에서는 부정문이 뒤이어 진술된다. 15:11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연합이 강조되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진술된 반면 본 구절은 '핍박'이 강조된 뒤에 언급되고 있으므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 - '실족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넘어뜨리다'를 의미하는데 본서에서는 본절과 6:21에만 언급되어 '기독교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 즉 '배교'(背敎)를 의미한다(C.K. Barrett). 그렇지만 이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마태복음에서는 '배교'(마 11:6;26:31)뿐 아니라 '죄를 범하는 것'(마 5:29)을 뜻한다. 여기서 예수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큰 징계인 '출회'(혹은 출교)와 사형을 염두에 두고 계신(2절)것 같다.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체포될 때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수제자 베드로조차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들 혼자의 힘으로 앞으로 닥쳐올 박해를 견딜 수 없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이 그와 같은 박해를 만날 때 그의 말씀을 기억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이다.

 

[Calvin주석}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이것은 그가 하신 말씀 가운데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는 무수한 투쟁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먼저 올바른 무기로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또 다른 의미는 그들이 이 가르침을 심사숙고할 경우 그들은 쉽게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내용이다. 더욱이 우리는 당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전파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먼저 이해할 점은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비무장 상태로 전쟁터에 내보내시는 것이 아닌 만큼 어느 누구든 자신의 태만이 아니고서는 이 전투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투의 마당에 들어설 때까지 그저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시켜서 필요한 경우에는 우리가 전투에 참여할 수 있어야겠다. 그리스도의 이 권면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는 한 승리는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하는 말씀은 우리를 올바른 길에서 돌아서게 할 위험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습득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정거리 밖에 있을 때엔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막상 전투에 참여해야 할 때가 되면 마치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듯이 넘어지고 만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무기를 우리의 것으로 잘 활용하는 가운데 결코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2.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 우리는 제자들이 유대인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회'는 '유대 공동체'에서 쫓겨 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유대 랍비들은 '출회'를 몇 가지로 세분 하였으나 구약적 의미에서 '출회'는 '하나님의 백성'에서 제외되어 유대인들과 교제의 떡을 뗄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9:22 주석 참조).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신앙과 예수를 배척하는 유대교의 긴장 관계는 제자들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였다. 즉 '출회'는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쫓겨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당시대의 문화, 교육, 경제 외에 사소한 마을의 공고문이나 사장 정보등으로부터도 분리되는 현실적인 고난이었다. 실제로 유대 지도자들은 급속히 성장하는 기독교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유대 기독교인들을 회당으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시키는 일들을 강행했으며 주후 90년경에는 람비 가말리엘 2세(Rabbi Gamalie II)가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도교인들은 '출회'라는 고난의 역사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돈독히 하여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출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9:22 주석을 참조하라.


"때가 이르면" ;  - '때'로 번역된 '호라'(* )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 '호라'는 본서에서 관사와 함께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구분되어 언급되었다. (1) 아직 이르지 아니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2:4;7:6, 8, 30;8:20) (2) 이미 성취된 '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12:23, 27;13:1;16:32;17:1). 두 가지 때의 관계를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로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본절의 '때'는 예수의 사역과는 관계가 없다. 이 '때'는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나신 후 있게 될 제자들 및 성도들의 순교의 '때', 박해의 '때'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요한이 관사를 생략한 것은 예수의 사역과 관련된 때와 구분함과 동시에 박해가 어느 시대이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  - 이와 같이 말하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들은 앞에서 언급되었던 것으로 (1) 출회시키는 일과 (2) 죽이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하는 열광적인 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개심(改心) 전에는 하나님 섬기는 열심으로 성도들을 죽이고, 외국에 있는 성읍 다메섹까지 찾아가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고 고백했다(행 26:9-12). 그리고 영국에서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당했다. 그외에 종교 개혁 지도자들이 로마 교회로부터 숱한 박해와 순교를 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맹신이 빚은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도 이 같은 유대 지도자들의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힌 맹신의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이런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핍박에 대해 미리 가르치신 이유도 그들이 그 일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Calvin주석]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 그들이 죄수처럼 경건한 자들의 집회에서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에게서 추방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들의 마음을 적잖게 당황케 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공격에 꿋꿋이 맞설 것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것은 비록 그들이 회당에서 추방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사람들의 악한 판단으로 기가 꺾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욕을 담대하게 견디어 내면서 인간들에게 부당하고 악하게 정죄받고 있는 우리의 명분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 만족할 줄 알아야겠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파문이 형편없이 오용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의 교회 안에 세워 두신 규율을 폐지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곧 비록 사단이 하나님의 모든 규율을 있는 힘을 다해 파괴하려 들지만 우리는 그것이 타락했다 해서 하나님께서 영속적으로 성별 하신 것을 제거함으로써 사단에게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므로 파문은 세례나 성만찬 못지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남용에서 야기된 타락을 제거하고 그것을 다시 정당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해야 마땅하다.

 

”때가 이르면~~~~~~” ;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나타나셔서 우리의 명분과 그의 명분을 변호하실 때까지 잠시 동안 우리의 선한 양심을 굳게 지키는 가운데 압박을 견디어 내도록 하자. ]


"3.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  - 본 구절은 5:21의 반복으로 예수는 2절에 기록된 광신적인 핍박자들의 열심이 영적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지나친 열심이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에게 계시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고백했다(갈 1:13, 14). 이 무지는 이성적인 지식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데서 기인함으로써 종교적 독선과 아집 및 편견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행 3:17;고전 2:8). 어느 시대에서든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성경 지식만을 소유한 사람은 바리새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종교적 독선과 편견으로 인해 형제를 핍박하는 무지에 빠질 수 있다.

 

[Calvin주석]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 ; 그처럼 광포하게 나오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처럼 자주 반복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책을 완화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그들의 맹목적인 광포를 무시하게 하려는 뜻에서 이아기되고 있다. ]


"4. 이 말을 이른 것은...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 예수께서는 종종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 말을 이른 것'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2:22;13:19;16:1 ). 특히 13:19에서는 이 표현이 제자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지만 본절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있을 제자들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제자들은 앞날에 닥칠 자신들의 일들을 미리 예수로부터 직접 들은 후 실제로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큰 위로와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성령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14:26) 그들은 핍박을 당할지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  - '처음부터'(* , 여스 아르케스)란 표현은 '아프 아르케스'(* )와 같은 의미로 예수의 공생애 시작 또는 예수가 제자들을 만난 시점을 의미한다(H. R. Reynolds). 그런데 그때부터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있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활동하면서 그가 행하시는 일들뿐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핍박을 목격했으므로(11:8) 구태여 그러한 핍박에 대해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2) 예수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핍박의 대상이 예수 자신이었으므로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이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므로 제자들이 핍박의 대상이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을 때가 많았으며(14:8, 9)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14:5). 처음부터 핍박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면 그들은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5. 지금"  - 예수가 7:33에서 '조금 더 있다가'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직 하던 일이 남아 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지금'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제자들에게 암시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 여기서 '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파고'(* )는 14:2에서 '가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 )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문자 그대로 '떠나 가다'라는 의미가 강조된다. 그런데 예수는 목적지가 없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집'을 향해 가시는 것으로(14:2), 본절에서는 자신을 '보내신 이' 곧 아버지에게로 간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보내신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자신이 이땅에 사명을 받고 오셨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간다'라는 표현은 그 사명을 다 이루시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가리킨다.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 이 말은 13:36에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말한 베드로의 질문과 14:5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한 도마의 질문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처럼 보이는 이 표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 본문에서 '묻다'라는 용어가 부정 과거 형태인 '에로테세'(* )로 쓰였다면 그 의미는 묻는 자가 과거에도 없었다는 의미가 되겠지만 요한은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예수가 말씀하고 계신 그 시점을 강조한다. 즉 예수는 자신의 교훈에 대한 제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6. 도리어...근심이 가득하였도다"  - 14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책망하신다. 이 책망은 제자들의 영적 무분별과 관련이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했으나(15:11),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이 가득찼다. 그들이 예수가 떠나시는 목적과 의도를 명백하게 이해했다면 슬픔에 잠기지 않았을 것이다(14:18).

"7. 실상을...너희에게 유익이라"  - '실상'(* , 해 알레데이아)이란 말은 단순히 거짓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실 자체만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롬 9:1). 그러나 이 말은 예수께서 유대인들과의 논쟁 속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8:45)라고 책망하실 때 사용하신 '진리'와 같은 용어이다. 그런데 개역 성경은 본 구절에서 '알레데이아'의 의미를 약화시켜 번역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도 약화 되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실상'보다 '진리'로 번역함이 타당하며 따라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진리를 펼쳐 보이시겠다는 강화된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예수의 떠나심은 세상에 오심과 같은 유익을 제자들에게 준다. 여기서 '유익하다'(* , 쉼페레이)라는 말은 (1) 유익의 근거와 (2) 유익하게 되는 대상 없이는 매우 막연한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는 본절 하반절에서 이 두 가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 '보혜사'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유익의 근거이며 '너희'는 유익하게 되는 대상을 지칭한다. 보혜사는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전에는 오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더욱 영광스럽게 하며 더욱 풍성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 오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께서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신 후 성부께 가기 전에는 결코 오시지 않는다.

"8.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본절에서부터 예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설명하신다. 14:26에서는 성령의 가르치며 생각나게 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으나 본절부터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14:26의 대상은 제자들이지만 본절에서의 대상은 세상이다. 세상은 메시야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게 된다. 여기서 '책망하시리라'로 번역된 '엘렝크세이'(* )는 '엘렝코'(* )의 미래형이다. '엘렝코'는 '훈계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잘못을 꾸짖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행 2:36, 37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과 같이 '죄에 대해 깨닫게 하는 것'(convict)을 의미한다.

(2) '어떤 잘못에 대해 꾸짖는 것'(reprove)을 의미한다(KJV).

(3) '세상의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J. Knox).

(4) '허물을 드러내는 것'(NIV 난외주) 또는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는 것'(Jerusalem Bible)을 의미한다.

(5)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공동번역).

 

이처럼 제자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하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세상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러한 성령의 드러내는 사역에 의해 세상 중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판단은 단호하다. 그러나 성령의 단호함이 곧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판단하시는 것 역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세상의 죄를 폭로함으로 그리스도의 죄없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거짓된 의를 드러냄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의를 선포하며, 세상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미 심판에 처해졌음을 드러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