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 15: 13 ~ 17)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3)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4)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7)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3.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우리의 구원에 대한 보장을 보다 더 잘 설명하는 뜻에서 자신의 사랑의 위대성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그의 본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들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양자를 하나로 묶는다. 곧 그는 우리가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믿음으로 깨닫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다음으로 그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사랑하는 일에 힘쓸 것을 권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다(엡5:2).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희생하심으로써 그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직접 증거하셨는데 이 방법이 아니고 그에게 더 최선의 방법이 따로 있었더라면 그는 말씀 한 마디나 간단한 소원으로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이 비길데 없는 신령한 사랑에 의해 마음이 누구러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마음은 무쇠나 돌멩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해하시기 전에는 원수들이었는데 어떻게 그가 그의 친구들을 위해서 죽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곧 그는 그의 죽음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슬퍼하신 다음에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 관계를 철폐하셨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제 3장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죄악이 말소되기 전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불화가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되었던 은혜의 원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었으며 이 사랑으로 그는 그의 원수들까지도 사랑하셨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들(strangers)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는데 이것은 그가 그들을 이미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14. 너희가......곧 나의 친구라" ; - 이것은 우리 자신의 무슨 공로에 의해서 이 큰 영광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들에게 그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그의 친구로 삼아주시는 조건을 상기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앞에서 이미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과 세속적인 욕정을 부정하고 이 세상에서 검소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 것(딛2:11)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은 복음을 사악하게 멸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에게 반기를 들고 있으며 그의 우정을 배척하고 있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 그는 친구간에는 친밀한 의사 소통이 있기 마련이듯이 그의 마음을 그들에게 충분하게 열어 제쳐놓으셨다는 점을 이야기 함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말씀의 내용은, "나는 인간들이 통상 그들의 종들을 상대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친근하게 너희들을 공손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하늘의 지혜의 비밀을 너희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는 이 사실을 나의 너희들에 대한 사랑의 표적으로 삼도록 하여라" 하는 뜻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열려 있는 복음이 있어서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의심스럽거나 애매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실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구름 위로 올라가거나 땅 속을 파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 복음에 담겨 있는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로 만족하도록 하자. 복음은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다. 모세는 옛날 백성들에게, "하늘 아래 어떤 민족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느냐?"(신4:7)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완전히 허용하셨다는 이 점에서 우리의 영예는 더 높다. 따라서 복음의 놀라운 지혜로 만족하지 않고 교만의 열성을 쫓아 신기한 사상으로 날아 가는 자들의 배은망덕과 사악은 그만큼 더 큰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 물론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알고 계셨던 것을 다 알고 있지는 않았으며, 그러한 수준에 다다를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불가해한 만큼 그리스도께서는 각자에게 그들의 지식의 분량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것을 허용하셨을 뿐이다. 그러면 왜 그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나는 이것이 중보자의 인격과 임무에 국한된다고 대답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두시는 것은 그는 우리에게 낱낱히 전해 줄 것들을 하나님의 은밀한 성소에서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계되고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의 유일한 지도자와 스승(Master and Teacher)으로 예정되셨던 만큼 그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 가운데 그의 제자들에게 충실하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겸손하게 배우려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그렇게 될 때 복음을 가리켜 인간을 완전하게 하는 지혜라고 부르는 바울의 말이 옳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골1:28).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 여기서 그는 그들이 그처럼 큰 영예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의 은혜 때문이라는 점을 보다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곧 그들이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들 자신의 재주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 없다. 흔히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 일정한 상호 작용이 있는 것으로들 생각하지만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지 내가 너희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다"하는 말씀은 통상적으로 말하는 그와 인간의 구별이 그리스도에게만 완전하게 (in solidum) 적용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기 전에는 자발적으로 그를 찾을 생각을 않는다"하는 말씀과 같다.
물론 이것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 일반적인 선택이 아니라 그가 그의 제자들을 복음 전파의 임무에 예정하신 특별한 선택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거저 사도직에 선택 받았다면 진노의 자녀요 저주받은 후손인 우리를 그의 영원한 상속으로 삼는 선택 역시 값 없이 주신 것임에 틀림없다. 더우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도로 선택한 그의 은혜와 그들을 교회의 몸으로 접붙여 준 이전의(earlier)선택을 서로 하나로 묶고 있다. 분명히 이 말씀에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모든 위엄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특별히 사도직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곧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 권고의 근거로서 그리스도는 그가 그들에게 베푸신 값없는 사랑을 들추어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더욱 더 열렬하게 그가 우리에게서 요청하시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천박하고 배은 망덕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추구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거기에 따르는 모든 축복이 그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흘러 넘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것도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말씀의 진실성을 우리는 그가 누구보다도 부적격한 자들을 사도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통해서 그의 은혜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를 세우고자 하셨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인간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께서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그러한 사신의 역할(embassy)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적격자일 수 있겠는가?(고후2:16). 아니, 어느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을 그의 선택에 따라 적격자로 만드시는 분은 그리스도 뿐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은혜에서 나온 것으로 말하고 있다(롬1:5). 그리고 그는 또 그가 모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점도 선언하고 있다(갈1:15).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모두가 무익한 종들인 만큼 다른 모든 사람들에 비해 더 없이 뛰어나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먼저 선택받기 전에는 가장 천한 소명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보다 더 높은 존귀를 받을 경우 그는 하나님에게 힘입은 바가 그만큼 더 많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 것이다.
" ......세웠나니" ; - 선택은 한 사람이 그가 이미 예정되어 있던 직무를 받을 때에야 비로서 나타난다. 앞에서 인용한 귀절에서 바울은 그가 모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말을 하고 나서 그가 사도로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자신의 좋은 시기에 가서야 마침내 예언자의 직무를 감당하도록 부르시면서도 그를 모태에 있기 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다(렘1:5). 물론 가르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이 직무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아무도 미리 필요한 은사를 구비하기 전에는 부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교회의 질서의 일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양자의 원저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행동하시고 그는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소명은 똑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 속한다.
"이는 너희로 가서" ; - 그는 이제 왜 그의 은사를 언급했는가 하는 이유는, 곧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일에 더욱 더 열성을 보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도직은 무슨 한직(閑職)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없이 큰 어려움을 당해야 할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숱한 수고와 당황 그리고 위험에서 물러 서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채찍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목적에서부터 이론을 전개하는 식이라고 보겠다. 그러나 '과실을 맺게 하고'라는 말슴은 결과에서부터 이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수고가 열매를 맺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 일을 성심성의껏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 한 그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곧 그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소명에 관련되는 것과 거기에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말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냉담하거나 무기력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성공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오늘날 날마다 부딪치는 그 숱한 시련에 대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헛수고 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우리의 노력이 결코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도와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도록 하자. 이 약속은 특별히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때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의 현대 지성과 세상에 현명한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우리의 노력을 하늘과 땅을 뒤섞으려는 공연하고 무분별한 시도라고 하면서 비웃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반대로 일의 보상이 잠시 동안은 숨겨져 있지만. 꼭 따르고 말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는 만큼 우리 모두 세상의 조롱에 상관 없이 우리의 임무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자.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왜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라"는 말로서 이 열매가 영원할 것으로 선언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복음 전파가 뭇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 열매의 영속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씀을 교회가 세상 끝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 해석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수고는 오늘날도 열매를 맺고 있으며 우리의 전도는 한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계속 증가시켜가는 것이요 우리가 죽은 후에도 새로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 과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 열매가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만 바울은 물을 뿌리거나 심는 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다(고전3:7). 물론 교회 창설의 영광을 인간의 것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탁월한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인간들의 손을 빌어 나타내고 있는 만큼 그들이 헛수고 한 것으로 생각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자신에게 특유한 것을 기쁘게 그들에게 양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이처럼 친절하게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뜻에서이며 그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 - 이 귀절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문맥과 무관한 귀절이 아니다. 가르치는 일이란 원래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인 만큼 사단으로부터 수 없이 공격을 받기 마련이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저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사전에 베푸시고 있다. 곧 그는, "그 일이 너희들에게 벅차서 임무를 성취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내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을 복음의 사역자로 임명할 때 이미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면 언제고 그는 그의 손을 뻗치사 너희들에게 도움을 베푸시기로 보장이 되어 있다"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나태한 가운데 뒷걸음질치거나 낙심하는 가운데 완전히 패배하고 마는 것은 그들이 기도의 임무에 소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호소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일의 결과가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는 점을 고백하는 자들만이 그 일을 그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바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의 근면성만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막상 일에 부딪칠 때 창과 방패를 내던지거나 아무런 소득없이 그저 바쁘게만 돌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잘못, 교만과 불신을 경계해야 겠다. 이 세상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단호하게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를 통해서 싸우고 있으며 그의 깃발을 들고서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굴복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 - 사도들에게 무엇보다도 서로간의 사랑이 요청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건설하게 하려는 뜻에서인데,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일만 하고 각 개인이 자신의 일을 공동체(common pool)에 가져오지 않는 것 보다 더 큰 장애물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이 서로 간에 형제로서의 교제를 키워 나가지 않을 경우 어떤 대집단을 세울 수는 있지만 그 집단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요 결코 교회(Church)가 세워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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