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5:1 ~ 18)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1)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2)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3)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4) 거기 서른 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5)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6)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8)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9)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0)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1) 그들이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2)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3)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4)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5)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7)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8)
2. 묵상 (박윤선박사주석)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 - 비록 복음서 저자가 이것이 무슨 명절이었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 기록된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신 직후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명절이 오순절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유월절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그 후 사마리아을 지나가시는 동안 주님은 추수할 때까지 넉달이 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리에 들어오셨을 때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셨다. 복음서 저자는 이 명절이 이 모든 일에 있은 다음에 있었다고 부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적인 순서를 볼 때 우리는 이 명절을 오순절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다해도 나는 이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명절 때에 예루살렘에 큰 무리의 사람들이 운집할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할 기회라 생각하시고 명절을 기해 예루
살렘에 들어오셨다. 우리 모두를 율법의 굴레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율법에 순종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
"2.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 - 복음서 저자는 일이 일어났던 곳을 밝히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이 기적이 비밀이 아니었으며 또 소수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님을 추리할 수 있다. 행각 다섯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장소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임을 암시해 준다. 이것은 양문이 성전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갖가지 병을 가진 병자들이 거기 누워있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지명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식이 있는 사람들을 베데스다 대신에 베데더(Betheder)라고 보는 제롬(Jerome)의 억측을 거부한다. 그는 그리고 이 집을 양무리의 집이라고 번역한다. 못은 양시장(羊市場) 가가이 있었던 것으로 여기에 언급되어있다. 이 장소를 벧세다(Bethesda), 즉 '물고기의 곳'이라고 읽는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부음(pouring)의 장소라고 이곳을 설명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더 큰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 (에쉐드)는 흘러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당시의 습관대로 Esda라는 아랍어 발음을 쓰고 있다. 나는 물이 제사장들이 길을 수 있도록 도관(道管)을 통하여 그 곳에 전달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파이프를 통하여 물이 흘러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웠는지도 모른다. 내 의견에는 제물로 바쳐질 짐승이 그 곳에서 취한 바 되었기 때문에 양문(sheep gate;羊門)으로 불렸다고 생각한다.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 - 병자들은 예배하러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 구걸하기 위하여 행각 안에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제물로 드릴 짐승을 대개 이곳에서 사게 되어 있었다. 각 명절 때마다 하나님께서 몇 사람씩 고쳐 주심으로, 율법에 명시한 예배와 성전의 거룩함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종교가 전성기에 있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읽을 수 없고 선지자의 시대에까지 기사가 보통 행해지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부패하고 거의 황폐되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기사와 표적을 통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은 조금은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지자들 안에 내재하시던 성령님은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증거해 주셨기 때문에, 그때에는 종교에 다른 확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율법은 완전히 적절한 표적에 의하여 확증되
었고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령한 예배를 수많은 증거로 승인하시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출현했을 때는 그들에게 선지자가 없었고 그들의 상태는 참으로 처참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갖가지 유혹이 그들을 억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겐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렸다고 낙망해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이와 같은 비상조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말라기가 선지자 중 마지막 선지자라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말4:4) 모세가 전해 준 율법을 기억하라고 당부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을 끝맺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부터 선지자를 빼앗아 한동안 불타도록 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더욱 큰 경외심으로 그를 맞이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성전과 제사와 예배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이 그들로부터 유래되도록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직 그들에게 병고침의 은사를 남겨 두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열방으로부터 헛되이 구분해 두신 것이 아님을 인식하도록 하셨다.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늘에서 손을 뻗쳐 보여주신 것처럼, 그들이 율법의 명령대로 행하는 예배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다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표적으로 구속의 때가 가까이 옴을 일깨우기 위해 이미 가까이 와 계심을 경고
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시대에는 표적에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유대인들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알게 하여 그들로 율법을 순종하는 가운데 서게하려 함이요, 둘째는 그들도 새롭고 비상한 관심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소령,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주님께서 고쳐주신 병은 그저 평범한 병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 그들이 어떠한 병자들이었는가를 소개
하고 있다. 인간적인 치료법으로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를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의 무리 가운데서 그와 같은 많은 종류의 병신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잘 정돈된 군대 내에서 보다 거기에서 더 밝게 빛났다.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이 자연의 결함을 시정하고 회복시켜 줄 때보다 더 장엄한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자비 가운데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실 때보다 더 아름답고 더 즐거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장소가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있는 무대가 되기를 원하셨다. 이미 암시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임재하심을 자기의 손을 펼쳐서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은 성전의 영광과 경사가 아닐 수 없다.
"4. 이는 천사가" ; - 병자를 고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들의 손을 쓰는데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천사를 명하여 이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그래서 천사들은 '권세' 또는 '권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을 천사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하늘에서 놀며 앉아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천사들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하심으로 주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높이 선포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사들 스스로가 무슨 능력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악하고 편벽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천사들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것이 그의 목적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천사들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 그들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은혜를 구매해 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고 한 플라톤의 어리석은 변론을 경계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직접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주님의 인도와 보호와 명령에 따라 천사들을 우리의 구원의 사역자와 일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가끔"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꺼번에 그리고 단번에 모두 고쳐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적에는 목적이 있었던 만큼 거기에는 또한 한계가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상기시켜 말씀하시기를 엘리사 시대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오직 한 아이가 살림을 받았고(왕하4:32) 그리고 가물었을 때에 많은 과부가 기근으로 고생했지만 오직 한 과부만이 엘리야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왕상17:9, 눅4:25). 그래서 주님께서는 몇 사람의 병자에 관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증거해 주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된 치유방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물이 동한다 해도 거기서 무슨 치료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와같은 방법을 쓰심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바로잡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일지라도 우리의 이성에 맞는 것이면 따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로 순종케 하기 위하여 우리 앞에 이성에 상치되고 모순되는 것을 가끔 보여주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우리의 눈을 감고 말씀만을 따를 때에 참으로 가르치심을 받을 자세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아람사람 나아만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5:10). 선지자는 그의 문둥병을 치유시키기 위해 그를 요단강으로 보낸다. 처음에 나아만은 이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과 상치되게 일하심으로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희롱하는 분이 아니심을 알게된다. 물을 동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소(elements)를 자기가 원하는 뜻에 따라 자유로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일의 결과를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은 인간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동하는 물에서 치유의 원인을 구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외적인 상징을 통하여, 병자들이 상징을 봄으로 은혜의 원천이 되시는 분을 바라보도록 하셨던 것이다.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 - 복음서 저자는 이 기적이 확실함을 입증할 만한 여러가지 내용을 수집했다. 병이 너무 오램으로 병자는 치유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치유하는 물에 자신이 접근할 수 없음을 불평한다. 그는 종종 물 속에 들어가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늘 허사로 끝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은 더욱 더 밝게 빛난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한 것은 그가 오직 그리스도의 축복에 의해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자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갑자기 과거에 무기력하던 지체를 힘있고 건강하게 움직일 때,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일깨워 줄 것이기 때문이다.
"6. 네가 낫고자 하느냐" ; - 주님은 병자가 참으로 낫기를 원하는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에게 내릴 은혜에 대한 욕망을 불붙일 목적으로, 그리고 다른 데 마음을 두고 있어 표적을 보지 못했을 환자들의 시선을 끌 목적으로 이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런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다른 데 마음을 쓰다가 이를 놓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서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7.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 - 이 병자는 우리가 거의 다 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자기 자신의 견해에 따라 제한하고 있으며 자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이상의 기대를 자신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연악함을 용서해 주는 데서 우리는 우리가 눈 앞에 있는 방법에 몰두할 때 매일 경험하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비쳐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희망에 반해서 숨은 곳에서 그의 손을 뻗치셨다. 주님께서는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편협한 믿음을 얼마나 능가하는가를 보여주고 계시다. 뿐만 아니라 이 본보기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준다. 38년은 주님께서 그의 축복을 지연시킨 기간으로는 긴 기간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아무리 오래동안 우리로 기다리게 하신다 할
지라도, 우리가 고통과 신음하는 중에도 그 시간의 지루함에 지쳐 기진맥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모든 장애물을 쉽게 부셔버리는 놀라운 구원자가 되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9. 이 날은 안식일이니" ; -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그 병자가 짐을 지고 활보하는 것을 볼 때에 큰 죄목을 들고 나설 것을 잘 알고 계셨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떠한 짐도 지지 못하도록 엄금하고 있기 때문이다(렘17: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위험을 무시하고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셨다. 첫째는 그 표적이 더욱 널리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그가 곧 이어 행하셨던 놀라운 설교를 할 수 있도록-말하자면-계기를 만들려 함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적에 대하여 아는 것은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는 것은 대담하게 간과해야 했다. 또한 약한 자들에 의하여 아직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정당한 변명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님께서 그들의 중상모략을 넉넉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 세계가 분노로 들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일을 선포한다는 원칙을 지켜야겠다. 내가 언급한 목표를 지키기만 한다면 일의 결과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걱정하고 실망해서는 안될 것이다.
"10.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 - 안식일은 모든 사람에 의하여 준수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사람을 정당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변명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그들 자신이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다. 이유가 알려졌을 때 그는 무죄선고를 받았어야 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깨에 짐을 지워주셨고 그의 권위로 그를 밀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성급한 판단을 경계하고 각 행동의 원인이 충분히 알려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없이 정죄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분별없이 많은 말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우리의 질문과 결정은 건전하고 신중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완악한 견해로 편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신중히 알아
볼 만한 끈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분별과 중용에 대한 가능성을 닫아 버렸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 배울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더라면, 그들의 과오도 제거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그들은 복음을 알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유대인들이 타당하고 분별있는 해명을 받아들이지 아니함으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했는가를 알 수 있다. 변명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아무 것도 자의로 하지 않고 다만 명령할 권세를 가진 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것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비록 그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그분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는 그의 능력을 경험했으며 그로부터 그리스도께서 권위를 위임받은 분임을 알았고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적이 그로 하여금 율법을 순종치 못하게 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고침을 받은 병자가 그들의 비난에 강력하게 논박하지 못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특별한 표적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과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을 들을 때까지 그들의 판단을 미루지 아니했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잘못을 범했다.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 -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그와 같이 위대한 기적의 영광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표적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전에 그 표적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외모와 관게없이 그 사실 자체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잠시 뒤로 물러 나셨다. 이로써 우리는 사람의 믿음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사람은 병고침을 받은 후에도 자기를 고쳐준 의원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에 그는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해진 것처럼 보인다. 나 자신으로서는, 그 사람 안에 어떤 보이지 않는 믿음의 동작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문맥상으로 보아 그에게 확고한 교리나 분명한 빛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자하심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지도록 잠시 자신을 숨긴 것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주님께서 이제 자의에 따라 공중석상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그 표적이 먼저 알려지고 난 후에 자신이 그 기적을 행한 장본인임을 알리려고 의도했을 뿐이다. 이제 이 말씀은 아주 유용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우리가 감사할 줄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함부로 남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그에게 베푼 은혜를 내세우지도 않고 다만 그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토록 구세주 하나님을 예배 하도록 그가 나음을 입었음을 그에게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채찍질하심으로 회개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주님은 그의 인자와 관용으로 우리를 회개토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과연 우리를 구속한 목적과 하나님의 은사의 목적은 우리를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심판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평생토록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지 않는다면 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권고는 또한 우리가 당하는 모든 병고는 우리의 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채찍질하기 위한 수많은 채찍이다. 그렇다면 우선 우리는, 우리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우리의 불행이 어떤 맹목적인 운명의 장난이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인자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받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우리의 죄를 미워하시는 경우가 아니면 우리를 가혹하게 징계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명하실 때 그는 모든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다만 그의 이전 생황에 비추어서 더 죄를 범치 말라고 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정신을 차리고 그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 - 만일 하나님께서 아주 친절한 아버지가 온화하게 자식을 징계하는 것처럼 우리를 다루는 데에도 우리에게 진전이 없다면 그는 새로운, 말하자면 낯선 성격을 지닌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수 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경고하고 있는 것처럼(레 26:114, 신 28:15, 시 32:9), 우리의 완악함을 길들이기 위하여 채찍을 잡으신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이와 같은 말씀은 수없이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 계속 우리를 억압한다면, 우리의 완악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루기 힘든 말이나 노새와 같을 뿐만 아니라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과도 같다. 작은 처벌이 효용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어떤 극심한 처벌로 우리를 부서뜨린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정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꺽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처벌은 앞으로 우리를 보다 더 조심스럽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다. 만일 한두 번 맞았을 때에 우리가 완악한 마음을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일곱 배는 더 심하게 때릴 것이다. 우리가 잠시 회개의 징후를 보이다가 다시 옛 성품으로 돌아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게으르고 변덕스러운 경박성을 더욱 날카롭게 때릴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관용으로 참으시는가를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노년에 들어섰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경우 그는 아주 젊은 청년기에 병이 들었거나 어린 유아기부터 병고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제 이와 같이 여러 해 계속되는 처벌이 그에게 얼마나 쓰라리고 괴로왔을까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반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 사람을 그와 같이 오랫동안 쇠약하게 버려두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너무하셨다고 책망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보다 더 가벼운 처벌을 받을 때에,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무한한 자비 가운데 그의 처벌의 손길을 절제하시기 때문임을 알자.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받는 처벌은 더욱 더 엄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우자.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될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 놓음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섭고 혹독한 고통을 자초할 때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내게 쌓이고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신32:34)"라고 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에서 유익을 얻는 속도가 느림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권고가 그냥 목적없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이는 그 사람의 영혼이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씻음을 받지 않았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악의 뿌리는 우리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서 하루 이틀 동안에 이를 뿌리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것도 단기 치료로 쉽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이는 예수라 하니라" ; -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느낌을 밝혀 준다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속이 그런 느낌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귀절은 그가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격분하여 날뛸 염려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의도는 선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를 고쳐준 그리스도에게 마땅히 영광을 돌려드리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원한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한다고 힐난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인하여 그에게 지독한 공격을 퍼붓고 극단적인 비난을 가하였다.
"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일을 변호하고 있는가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안식일에 대한 율법은 임시적인 것이어서 이제 폐한 바되었다고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는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나타나심으로 그림자적인 의식을 끝낸 것은 사실이다. 바울도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이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인간은 자신의 하던 일에서 안식하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인 할례는 안식일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일은 모세의 율법이 명한 거룩한 안식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행동만을 변호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도 변호하고 있다. 자리를 들고 간 것은 보충적인 것이었으며 말하자면 기적의 일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송축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로 간주된다면, 손과 발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안식일을 더럽히는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더 많은 적개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기가 병자에게 회복시켜 준 건강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며, 자기는 아버지와 같이 행하신다고 주장하고 계시다. 나는 지금 안식일의 용도와 안식일이 명해진 이유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어지럽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족하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왜 사람으로 그의 일을 멈추라고 말하고 그의 모든 지각을 하나님의 일을 상고하는 데에 자유롭게 사용하라고 일러주겠는가? 그러므로 안식일에 하나님의 일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는 안식일을 의곡하고 거짓되이 풀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을 보이심은 사람으로 일곱째 날에 쉬게 하려 함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사람은 쉬는 날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닮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세상의 혼동된 일에서 손을 멈추고 하늘에 속한 안식을 추구할 때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은 활동의 정지(靜止)가 아니고 잔잔한 평안의 상태를 동반하는 본질적인 완성이다. 그리고모세가 말한 내용은, 즉 하나님께서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다고 한 것은(창2:2) 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는 일을 마치시고,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묵상하면서 보내도록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친히 만든 세상을 붙드시고, 그의 지혜로 세상을 지배하시고, 그의 자비로 세상을 지키시고, 그의 뜻에 따라 땅과 하늘에 있는 만물을 관장하
는 일을 멈추신 것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육일 동안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상을 다스리는 정사는 계속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이는 바울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고 가르친 것과 같다. 다윗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갔다"(시104:29)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자연을 유지하는 것은 일반적인 섭리에 의한것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부분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장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기의 돌보심과 보호 아래 취해들인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지키고 보호해 주신다.
"나도 일한다 하시매" ; -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본 사건을 변호하는 일을 멈추시고 기적을 행하신 목적을 설명하신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알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셨다. 그의 모든 행위와 말씀 이면에는 자기가 구원의 주인임을 나타 내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제 그가 스스로 주장하는 바는 그의 신성(神性)에 관계되는것이다.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히1:3)계신다. 주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는 이유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자신이 그리스도의 직분을 수행하려 함에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주로 자기가 세상에 내려온 목적을 알리기 위하여 하늘로 부터 세상에 오셨음을 확인하고 계시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 - 그의 변명은 유대인들의 분노를 잔잔케 한 것이 아니라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강철같은 고지보가 악의에 찬 적개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첫째 목표는 우선 거기에 있던 자신에게 속한 자 몇몇을 도와주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악의를 만천하에 공개하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본을 보여주심으로, 비록 온 세상이 우리를 비난하여 물리치려 한다 할지라도, 악인의 분노에 굴복할 것이 아니라 필요할때는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해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 못한다 해서 낙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만큼, 사단이 더욱 광분한다 할지라도 전혀 놀랄
것이 못된다.
복음서 저자가 이 귀절 앞부분에서 유대인들이 주님께서 안식일 범했다고 그를 적대시 하였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안식일을 범하지 아니하셨음을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그들이 분개한 첫째 이유는 주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시한 데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보통 사람과 구별된 위치에 있음을 주지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되심을 알리려 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심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시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부인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를 더욱 더 분명하게 확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