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1. 성경 (요14:16~24)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6)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7)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8)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19)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0)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1)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3)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24)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 그는 그들이 그의 부재중에 느낄 슬픔을 달래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는데 권고만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 비록 그가 몸으로는 떠나 있겠지만 그의 영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도움이 없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성령을 가리켜 '아버지의 선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그의  기도를 통해서 얻을 선물이었다. 다른 곳에 보면 그가 손수 성령을  주시마고  약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성령의 은혜를 받는가 하면, 그는 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은혜를 직접 베푸신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두 말씀은 참되고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아버지께서는  나를 너희들에게 보혜사(Comforter)로 주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제는 내가 나의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다른 보혜사를, 그것도 잠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너희들과 함께 있을 보혜사를 주십사하고 기도할 것이다."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보혜사'(Paracletus;파라콜레투스)가 그리스도와 성령  모두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양자의 임무가 그들의 보호를 통해서 우리를 권면하고 인도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백성에 대한 보호자였으나 그 후에는 그들을 성령의 보호와 지배에 위탁하셨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Sub Christi cliemtela)있지 않는가 하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리스도는 계속적인 보호자이지만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방법을 이용하지는 않고 있다. 그가 이 세상에 계실 동안에는 그는 자신을  그들의 보호자로 공공연하게 드러내셨다. 이제 그는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각자에게서 받는 축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임무는 세상 죄를 속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인간들을 사망에서 속량하며 의와 생명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임무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자신에게 동참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과 성자는 서로 다른 인격인만큼 여기서 이 둘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도 잘못이 없을 줄 안다.


"17. 진리의 영이라" ;  -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을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진리의 스승(magister veritatis)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가 그를 통해서 내면적으로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우리의 모든 마음은 허영과 거짓에  휘말려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  - 그의 의도는 세상이 빼앗기고 있는 은사가  보통 은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대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  받은 백성들에게만 베푸시는 은혜의 탁월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도(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나타나리니"하는 말을 외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특이한  특권을  통해서 교회를 온 세상보다 뛰어나게 하실 때 그의 교회에 대한 자비는 더욱 더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세상이 흔히 육신의 모습에 따라  그렇듯이-자만에 빠지지 말것을 권고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를  생각할것을 단단히 당부하고 있다. 지상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성만 의지하고 하늘의  조명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성령에 대한 성경의 모든 귀절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성령의 빛을 할 수 있는 한 불식하는 이 교만이 온 사방에 깔려  있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빈곤을 의식하고 건전한 이해에 속하는 것은 모조리 다른  근원에서 흘러 나온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에 관계된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배울 수 없으며, 그는 오직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세상은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감당할 수 없으나, 너희들은 그가  너희들과 함께 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알고 있다"고 하는 식으로 그는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 주시는 분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는 알려지지 않은 그대로요, 이해할 수 없는 그대로 남아 있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  - 이 귀절은 성령의 보호를 받지  않는 인간의 상태와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온갖 종류의 시기와 불공평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는 자신을 지배할 수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는 고아인 것이다. 그와 같은 엄청난 연약성에 대한 유일한 대비책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제자들이 그들의 연약성에 대해서 지적받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불신하고 그리스도의 보호를 의존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대비책을  약속하는  것이요, 그들에게 그에 대한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너희에게로 오리라"하는 말씀으로 그는 그가 그의 백성들 속에 거하시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방법을, 곧,  그의  영적 능력을 통해 그렇게 하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하게 된 것은 성령의 은혜가 그의 신성에 대한 뛰어난 증거라는 점이다.


"19. 조금 있으면" ;  - "내가 세상이 보기에는 물러 가지만 그러나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하는 말씀으로써 그는 앞에서 말한 특별한 은혜를 계속 추천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제자들의 마음의 슬픔이 누구러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제거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비밀한 모습을 향유(享有)하려면 우리는 그의 임재나 부재를 육적인 안목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그의 능력을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비록 그들이 육체적으로는 그와 멀리 있지만, 항상 그의  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며 그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내가 살았고" ;  - 이것은 두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곧 이것은 앞절의  확증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신자들이 살것이라는 의미도  따로 읽을 수도 있다. 나는 전자의 의미를 택한다. 물론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의 원인이라는 다른 교의를 유추할 수도 있다. 먼저 그는 왜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는 보이고 세상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인가 하는 구별의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영적인 생활을 통해서만 보여질 수 있는데 세상은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죽음과   관계되는   눈먼상태(morscaecitatis)가 그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살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당장에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주어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고 그것을 우리의 생명의 샘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를 지향해야 하며 그의 생명이 우리에게 신앙을 통해  양도되고 그 결과 우리의 양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살아 계시는 한 우리가 모든 파멸의 위험과 상관없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지체들이 죽어 있다면  그의 생명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불변의 사실이다.


"20. 그 날에는" ;  -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오순절날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적 능력을 제시하는 시간부터 최종적인 부활까지를 하루로 경산 할 때 이 동안의 끊임이 없는 과정을 지시한다. 그들이 그때부터 알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께서 아직 그들에게 그처럼 강력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 능력은,  말하자면 연약하고 초보적인 것이었다. 이 귀절의 의도는 우리가 쓸데 없는 사변을 통해서 우리와 그와의 성스럽고 신비한 연합, 그리고 그와 아버지와의 연합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성령의 은밀한 효력을  통해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주실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말한대로, 신앙의 체험이다.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이 증거를 악용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참여와 은혜를  통해서만(only by participation and grace)하나님이시라는 점을 증명한다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이런 헛소리를 반박하는 문제는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원한 본질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타났던 신령한 능력을 천거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 속에 모든 충만한 축복을 두셨듯이 아들은 자신을 완전히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여진 가운데  그의 모든 의와 모든 축복에의 참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그가 그의 영적 효력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의 주(主)이신 원인이 되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시고 있기 때문이다.

 

"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  - 그는 우리의 그에 대한 사랑의 확실한  증거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데 달려 있다는 앞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이  점을 그처럼 자주 반복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이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육적인 태도에 빠져 들어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6-17절에서,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하고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나의 계명을 가진다'는 말은 계명에 대해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활을 그 원칙에 따라 맞춘다는 뜻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니" ;  -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인간이 사랑하는데  있어서  하나님보다 앞서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 화해시키셨다"(롬5:10)하는 말씀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4:10)하는 말씀에 비교하면 이것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변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지는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선행한다는 추론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그를 사랑하는 자는 모두 그와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므로 복이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그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 이 귀절 역시 동일한 의도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지식이 사랑보다 선행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지키는 자들이 매일매일 신앙에 진전을 보도록 허용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나에게 더 친근하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의 열매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발전이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곧 가진 자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그는 위선자들을 배척하실뿐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온 마음으로 받아 들이며 그것을 순종하는데 온 생활을 바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신앙의 진전이 있도록 해 주신다. 바로 이렇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며, 열 사람중 한명 비율로도 정도(正道)이 발전을 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줄 만한 가치가 없다. 여기서
또한 명심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식이 우리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대한 특별한 보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랑이  얼마나 귀한 보화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  - 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비취는 의의 태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의 빛을 한정하는가 하는  질문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다. 곧 그가 오직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빛을 비춰 주시고 그의  광채를 구별없이 온 사방에 쏟지 않는 것이 일관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왜 극소수에게는 자신을 계시하면서 대부분의  인간들에게는  자신을 숨기는가 하는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같이 똑 같은 상태에 있음을, 곧 그에게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음을 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 하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원수들 가운데서 사람을  선택해서  마음을 움직여 그를 사랑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이런 구별을 두고 다루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의도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의 의도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경건에 전념하도록 권면해서 신앙에 큰 진전을 보도록 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의 가르침을 지키는 이 표적을 통해서 세상과 그들을 구별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이 표적은 신앙의 시작 뒤에 이어지는 것이요, 신앙은 그들의  부르심의  결과이다. 후에 가서 그는 그들에게 이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에게 그의 가르침과 경건에 전념할 것만을 명령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여러 임무와 외적인 행동이 그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올 때만이 복음을 제대로 순종하는 것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있어서 외적인 지체를 다스리기 전에는 손발, 및 온 몸은 헛수고만 할 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만 가능하지만 그의 명령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만큼 따라서 그에 대한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에 이르려고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순종을 기뻐하신다.


"23.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  -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둘째 자리에 놓인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사랑의 원인인 우리의 경건 뒤에  오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그에게서 계속 새롭고 풍성한 선물을 기대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저에게 와서" ;  - 이 말씀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 속에 내주(內住)하는 것을 느낄것이요 날마다 하나님의 여러 선물을 더욱 더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우리가 태어 나기 전에, 아니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졌던 영원한 사랑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입양에의 참여자로 만드시면서 우리의 마음에 날인하는 그 사랑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더우기 그는 처음 조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하는 말씀에 따라 계속적으로 신자들이 발전해 가야 마땅한 신앙의 단계를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이 이 귀절에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우리를  중생시켜 주기 전에 우리가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사랑때문에 중생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이곳 저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을 가르치지 않고, 아니 소리쳐 외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곧 그와 아버지께서 오셔서  신자들이 계속 그의 은혜를 신뢰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  -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과 섞여 사는 가운데 마치 풍랑이 극심한 바다에서 온갖 폭풍에 시달리듯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이권고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못된 본을 보고 곁길로  흐르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세상을 보거나 거기에 기대지 말라. 거기에는 언제고 나와 나의 가르침을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한번 받은 은혜를 끝까지 고수하기만 하라"는 말씀과 같다. 하지만 그는 이 말씀에서  세상이 눈먼 가운데 멸망하는 것은 세상의 배은망덕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은 진정한 의를 멸시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불경건한  증오심을 들어 내기 때문이다.


"너희의 듣는 말은" ;  - 제자들이 세상의 외고집 때문에 낙심하거나 방황하는 것을 막는 뜻에서 그는 다시 한번 그의 가르침이 인간적인 고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의 인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요 우리는 오직 그의 영원한 진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세상이 제 아무리 추태를 부리며  광기를 발한다 해도 우리는 모두 천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자. 그는 이 말씀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써 자신을 제자들과  한  위치에 세우고 있다. 그것은 마치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을 뿐이므로 이 말씀은 인간적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느대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듯이 그만이 모든 가르침의  원천이요  유사 이래 모든 선지자들은 그의 영에 의해서 말한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