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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1. 성경 (요14:1 ~ 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2)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5)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6)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 그리스도께서는 마침내 그의 제자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무장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힘들고 처참한 투쟁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볼 것인데  이것은 특이한 시험이요 절망 밖에 가져다 주지 않는 광경이었다. 더 없이 깊은 비탄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그는 그들이 완전히 압도되어 삼킨 바 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에게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그들에게 끝까지 인내할 것을  권면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말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구원을 가져 올 힘이 충분히 있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을 때 신앙에서 용기를 얻을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우리는 언제고 이 말씀이 이야기된 때를 주목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만사가 완전한 혼란 속에 휘말려 든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용감하고  담대하게 서 있을 것을 바라셨다. 우리도 그러한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패를 사용하여야겠다. 물론 우리가 여러가지 동요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설령 우왕좌왕 하는 일이 있더라도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따라서  신자들이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아주 큰 어려움을 통해서 시련을  받는다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입장을 꿋꿋이 그리고 한결같이 버틴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 - 이 문장은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하는 식의 명령법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가 더 어울리는 일반적인 독법(讀法)이다. 여기서 그는  앞에서도 내가 이야기했듯이 인내하는 방법을, 곧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신앙을 고정시키고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손을 펴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먼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놀랍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만큼 우리는 먼저 그를 바라 보아야 옳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내려 오신 목적도 우리의 신앙이  그에게서 시작해서 하나님에게 이르도록 하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점은 모두들 인정한다. 아니 그것은  모두가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동의하는 확정된 격언이다.

 

그러나 실제로  믿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아 보기 어려운데 이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위엄이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사단이 온갖 종류의 구름을 중간에 뿌려 놓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의 영광과 접근 불가능한 광채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우리의 신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쉽게 안주할 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함 임마누엘이요, 우리가 신앙으로 그를 찾을 때 우리 가운데 응답하시는(intusnobis respondet)분은 그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한분만 바라보아야지 다른 곁길로  방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과 또 이 신앙은 그분에게만 고정되어야지 여러가지 유혹에 빠져 방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주요 신경(信經)가운데 한 조목이다.

 

그리고 이 신앙의 참된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서 주어진 약속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로마 가톨릭 학자들도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논쟁,  아니 쓸데 없는 헛소리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만 언급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의 소리에 맛을 들인 사람들은 산들바람만 불어 와도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교만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낮추심을 수치스럽게 여기며 따라서 하나님의 불가해(不可解)한 신성으로 비약한다. 그러나 신앙은 그것이 낮추신 하나님인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결코 하늘에 가 닿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연약성에  그  기초를 두지 않을 때에 견고할 수 없다.

"2. 내 아버지 집에" ;  - 그리스도의 부재 때문에 그들이 슬퍼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들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요, 하늘 나라에 그들의 자리가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그가 아버지에게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그의 제자들을 땅에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신다는 생각을 제거하셔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그리스도께서 하늘 나라에서는 영예가 서로 다르다고 가르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는 그저 거할 처소가 많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곧 그 집이 서로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충분한 집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거기에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그의 제자들을 위한 방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 - 여기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간에 의견이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미 너희들을 위한 거소가 마련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거소를 마련하려고 가노라 하고 말했을 것이다"하는 식의 한 문맥으로 읽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곧 "하늘의 영광이 나 혼자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너희들을  속이지 않고 내 아버지 집에는 나 혼자 밖에 다른 사람이 있을 곳이 없다고 미리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너희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먼저 간다"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이것을 이렇게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곧 이어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하는 말씀이 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뜻은 그의 떠나심의 목적이 자신의 백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혼자 계시려고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그곳이 모든 경건한 자들의 공동 상속처가 되고 이렇게 함으로써 머리가 지체와 연합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죽은 조상들의 상태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흔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승천과 함께 장소가 예비될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이 림보(limbo)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하다. 이 장소는 부활의 날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인류는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되어 있지만 하늘의 유일한 상속자이신 성자께서 그들의  명의로 이것을 소유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또한 그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즉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엡1:3)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이미 소망으로 하늘을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가 하늘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이 큰  축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죽은 이후의 상태는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과 우리를 위해서 한 장소를 예비하셨으며 마
지막 날에 가서 그는 모두를 그곳으로 영접하실 것이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의 믿는 영혼들은 말하자면 망루(watch-tower)에 안치되어 약속된 구속을  내다보고  있었으며 이제 그들은 이 구속이 완성될 때까지 복된 안식을 누리고 있다.

"3. 가서......예비하면" ;  - 이 조건 접속사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 해석해서  "내가 가서......한 다음에 너희에게 다시 올 것이다"하는 식으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이 귀환을 성령의 오심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  제자들에게  성령 안에 있는 자신의 새로운 임재를 증거하고 있지 않으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후의 심판날을, 곧 그가 최종적으로 그의 백성을 모으러 오실 그 날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전체 몸을 생각한다면 그는 날마다 우리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늘에 들어가는 적합한 날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4. 내가 가는 곳에" ;  -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오랜 격리 기간을 참을성 있게  인내하려면 우리에게 불굴의 정신이 필요하므로 그는 또 다른 확증을 덧붙이고 있다. 곧 제자들은 그의 죽음이 멸절이 아니라 아버지에게로의 통과라는 점과 그들이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서 따라야 할 길을 알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두 귀절은 면밀한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의 하늘의 영광과 복된 불멸에 대한 신앙의 눈을 통해서 바라 보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그가 우리의 생명의 첫 열매요 그가 우리에게 닫혀 있던 길을 열어 제쳐 놓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5. 도마가 가로되" ;  - 얼핏 도마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의 의도는 그의 스승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그리스도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이유와 그 설명 방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지식에 혼란이 생기는 수가 더러 있다. 그러기에 선지자들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진정한 신앙의  이해와 결부시켜 예언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것이 그들에게서 감취어진 신비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떠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이 나라를 획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가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고 있다는 도마의 지적은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그 길이 더욱 더 애매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우리가 길을 출발하려면 사전에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6. 내가 곧 길이요" ;  -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않고 있지만 알아야 할 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략하지 않고 있다. 먼저 치료해야 할 것은 도마의 호기심이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아버지와의 장차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설명하는 대신에 좀더 진실한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도마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가셔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더 듣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러한 교묘한 상상에 대해서 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구와 노력을 다른 곳에, 곧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저 복된 부활에의  참여자가  될것인가 하는 문제에 쏟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 그의 말씀을 종합하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획득하는 자는 아무런 부족도 없으며 그분 한분만으로 만족하지 않는자는 완전 이상의 것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세 단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나는 처음, 중간 그리고  나중이다 하고 말슴한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시작하고 그분과 더불어  계속하며 그분 안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우리는 우리를 영생으로 이끄는 것 이상의 지혜를 얻으려고 발버둥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을  얻는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것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여러 면으로 분들어 주는 의미에서 곁길로 나가는 자들에게 손을 뻗쳐 내밀며 젖먹이 아이까지를 손수 겸손하게 안내하시고 있다. 자신을 지도자로 제시한 이상 그는 경기 도중에 자신의 백성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진리의 동참자가 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로 하여금 더  없이  뛰어나고 기쁨이 되는 진리의 열매로 만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 되시므로 연약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그들이 버림을 받고있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는 진리요 생명이신만큼 그는 가장 완전한 자들까지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바로 앞에서 내가 말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축복을 밝히 말씀하고 있다. 모두들 인간의 축복은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가운데, 말하자면 그를 그의 참되고 본질적인 신성에서 격리시키는 바로 그점에서부터  잘못을 범하고 있다.


"진리요" ;  - 이 진리를 하늘의 지혜의 구원하는 빛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생명과 모든 영적 축복의 본질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제 1 장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하는 말씀과 같이 이 본질을 그림자와 상징에 대조적인 것으로 본다. 나는 이 '진리'를 신앙의 완성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길'이 신앙의 시작이자 초보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귀절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돌이킨다면 그는 곁길로  갈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어떤 사람에 그에게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바람과 허영을 먹고  살수 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표를 그리스도 이상으로 잡는다면 그는 생명 대신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 이 귀절은 앞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길 되심은 그가 우리를 아버지에게 인도하시기 때문이요 그가  진리와 생명이 되심은 그 안에서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문제로 말하자면 어느 기도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기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스스로 깊은 구덩이를 파는 처사에 불과하다는 간단한 의미로 이해하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이라고 입증하시는 것은 우리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는 신학은 모두 공허할 뿐 아니라 미친 속임수에 불과하다. 철학자들이 종종 그러듯한 말을 내뱉는 수가 있지만 그러나 그 말은 순전히 덧없는 것이요 의곡된 잘못 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