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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

1. 성경 (요13:12 ~ 20)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2)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6)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7)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0)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  - 여기서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영적인 씻음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의 주제에서 떠난 일종의 객담과 마찬가지였다. 베드로의 반대가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만민의 선생이요 주되시는 그가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따르도록 하나의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것은 아무도 자기 형제나 동료를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천박한 일일지라도, 그것을 몸소 허리를 구부려가며 실천하는 것을  짐으로 여기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취하신 행동이다. 사랑이 무시되고 있는 이유는 각자가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거의 대부분의 타인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겸손을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이러한 사랑의 법칙을 규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서로 봉사하게 하는 데 있다. 이웃을 돕는 데 있어서 자발적인 봉사가 없다면  거기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너희가 아느냐" ; -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당분간 어둠속에  있도록 하신 것은 그가 그들의 순종을 인내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적당한 시간이 되자 그들이 먼저 알았을 경우 도움이 되지 못했을 일을  계시하셨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그는 그들이 묻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가는 길이 설혹 사람들이 가보지 못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의 손길의 안내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동일한 체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  - 이것은 보다 큰것에서 부터 보다 작은 것을 입증하는 논리다. 우리는 교만 때문에 우리 사이에서 성행해야 하는  평등을 조장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 모두 보다 훨씬 뛰어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심으로써 자신들의 위치와 처지를 망각하고 형제로서의 교제에서 스스로  빠져 나가는 자들의 교만을 꺾고 있다. 자신의 형제들의 짐을 나눠 지는 것을  마다하고 그들의 숩관에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한 마디로 교회의 연합을 도모하는 여러 임무를 실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도대체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천해 보이고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친절하고 상냥하게  순응하면서  약한 형제들과 연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명심할 점은 자기가 본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그의 모든 행동을 무분별하게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순절의 단식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실 때 그것이 제자들로  하여금  본 받도록 하는 규범으로서의 본인가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행동을 모방하는 것은 하늘에 날아 올라가겠다는 처사와  같이 사악한 짓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처럼  흉내만 내고 있다. 해마다 그들은 거창하게 발씻는 행사를 치른다. 그들은 이  허례허식을 치르고 나서는 그들의 임무를 멋있기 다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나서 자기의 형제들을 미워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우기 그들은 열 두 사람의 발을 씻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그리스도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처사다. 이 의식적인 희극은 여기서 매년 마다 의식으로 지킬 것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서 우리 형제들의 발을 씻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도록  당부하고 있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 이것은 물론 현재의 상황에도  적용되어야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는 경고의 귀절이다. 여기서 이 말씀을 일반적인 말로 취급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권면하시는  것으로 보는 자들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잘못이다. 그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이  경구(警句)를 그의 의도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는 다음에 그들이 이것을 알고 행한다면 '복이 있을 것이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지식이란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하지 않을 경우에는 참되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하는 일들을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우리가 형제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생인지 아닌지 확실히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고 모든 면에 있어서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은 없으며 사랑이 여러 임무에 있어서 게으르고 냉담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신앙의 완전한 빛이 얼마나 부족한가 하는 점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 - 그는 다시 제자들 가운데 실제로 제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다로 하여금 더욱 더 핑계의 여지가 없게 하려는 뜻에서일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로 하여금 유다의 타락을 보고 동하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는  그들이 유다의 타락에 상관없이 그들의 소명에 집착할 것을 권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가  말한 복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닌 만큼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진지하게 구하며 그 안에 더욱 확고하게 머물러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들이 인내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그들의 선택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주님께서 그의 손길로 인간의 힘을 붙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이 약한 힘은 산들  바람만  불어도 이리 저리 흔들리며 더 없이 하찮은 동요에도 넘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선택하신 자들을 인도하시고 있는 만큼 사단이 유도하는 모든 전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요지부동하게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견인 뿐 아니라  그들의 경건의 시작까지도 선택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헌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끝까지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한번 시작하는 일을 완성하기까지 한결같이 지속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짧게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의 차이점은 전자는 양자(養子)의 영에 의해서 구원으로 이끌림을 받지만 후자는  그들의 육신에 의해서 파멸로 이끌려감을 당하며 어떠한 구속도 마다 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들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앎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값없는  입양(入養)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말고 자기들과 유다의 차이점은 오직  은혜에 달린 것이지 그들의 덕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게 하려는 뜻에서 그러 하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모든 단계는 이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그는 다른 곳에서는(요6:70) 유다를 택한 자의 숫자에 도합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상이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거기서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해서 특별한 임무를 맡기시는 잠정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왕으로  선택받았지만 버림받았던 사울에게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생명으로  예정하신 그 영원한 선택을 두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버림받은 자들도 때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의 은사를 부여 받아 그가 그들에게 맡기시는 임무를 실천한다. 그러기에  사울에게 잠시동안 왕의 덕이 비취었으며 유다도 그리스도의 사도에 어울리는 뛰어난 은사에 의해 구별되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그의 친 자녀들에  대해서만  허용하시는 성령의 성화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지성과 마음을 모두 새롭게 하시어 자신이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잡을 데가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양을 두고 후회하시는 일이 없는 만큼 그것은 그들에게 깊숙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파기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에 일생에 걸쳐서 그것을 따를 경우 이것이 신령한 선택의 은사라는 점은 명백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만이 우리가 버림받은 자들로부터 구별되는  우리의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다.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비참하게 멸망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안내자로서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의  손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부축해 주신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그는 자신을 선택의 원저자로 제시하고 있다. 곧 내가 앎이라 하면서 말씀하시는 지식은 하나님에게만 특유한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증거는 더 강력하다. 곧 그는 창세 전에 선택받은 자들이 바로 자신에 의해서 선택 받았다는 점을 그는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신령한 능력에 대한 이러한 뛰어난 제시에서 성경이 그를 가리켜 수백번  하나님 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감명을 받아야 마땅하다.


"발꿈치를 들었다" ;  - 는 비유적인 표현은 우정을 가장하고 덤벼 들었다가 상대편이 방심할 때 공격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의 머리요 귀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것을 그의 지체인 우리는 참을성 있게 견뎌 내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교회 역사상 거의 모든 세기에 걸쳐서 집안 식구 보다 더 위험한 원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로 고민하지 않으려면 미리부터 배신자들을 두고 참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 참 신앙을 부여 받지 않은 사람이 그처럼 존귀한 자리에 선택 받았다는 것은 모순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왜 사도로 삼을 자를 선택하지 않았는가? 아니, 왜 그는 그처럼 악하게 될 줄 알면서  그를 사도로 정했는가? 하는 반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예언되어 있었던 일인 만큼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아니 다윗도 똑같은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소한 일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예언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고 보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비교로 본다. 곧  다윗이 자기 집안의 원수에게서 배신을 받았듯이 이와 비슷한 상태가 하나님의 아들에게도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이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그 의미는 "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악하게 자기 선생을 배신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 처음  일어나는 배신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성경이 옛날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을 오늘날  체험하고 있다"하는 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보다 더 완전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다윗에게서 윤곽만 그려졌으므로 나는 이것을 다윗이 예언의 영에  따라 미리 말한 것에 대한 엄격한 성취로 보는 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시41:9).  어떤 사람들은 이 문장은 주동사를 보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이 끊긴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적으로 읽는다면, 곧 "성경이 성취되려고 나의 빵을 먹는 자가 내게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하는 식으로 읽으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다.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  -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한 버림 받은 사람이 그들과의 교제를 저버리더라고 그것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교회가 당한 고난과 투쟁에 대한 예언이 우리 눈 앞에 제시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 모든 예언이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체험과 일치할 경우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며 우리가 그의 섭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을 더욱 더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더우기 "내가 그인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다"라는 귀절은 그가 바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뜻이다. 이것은 유다의 배신이 제자들을 믿게끔 만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사실을 체험하게 되자 그들의 신앙이 더욱 큰 발전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가지 면으로, 곧 그가, 아무 것도 그에게는 숨겨진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믿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모든 점이 그에게 하나도 모자란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두 해석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만큼 어느 것을 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독자들의 선택에 맡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 여기서 요한이 문맥이 끊기는 새로운 가르침을 서술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죄악에서 일어날 실족사건을  예언하고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항상  순서대로 정리하는 것은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단편적인 말씀을 한 군데  모으는 수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실족을 막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우리가 나쁜 본을 보고 상심하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들  아는 그대로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의 인내는 한 사람에게 감화를  끼치지 못해도 한 사람의 실수는 나머지 200명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그들의 신앙을 불식시키고 만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눈 앞에 극악무도한 죄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이 새로운 사건에 압도되어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의  손을 펴서 그들을 붙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는 이들만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고 뒤따라 오는 모든 자들을 또한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유다를  생각할 경우 오늘날 우리는 심한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귀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를 통해서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이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경우 사역자들에 대한 싫증이나 멸시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이 교훈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행동이 악하고 죄악스럽기 때문에 그들의 불경건이 드러난다 해서 그것이 결코  사도적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
역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마땅하며 그에게서는 결코 멸시받을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에 의해 유일한 교사로 임명받은 가운데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복음의 사역자들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자는 그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배척하는 셈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것을 들어 자신들을 자화자찬하고 자신들의 독재를 추켜  세우는데 이것은 어리석고 터무니 없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전혀 무관한 이상한 옷으로 자신들의 몸을 장식하고 있다. 둘째로 물론 제자들이  사도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엇지만 우리는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리를  인간에게 양도한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보내는 자들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그들이 그들에게 위임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