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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요13:26)

1. 성경 (요13:21~3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1)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2)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3)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4)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6)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7)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8)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29)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0)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 사도직의 성결성과 탁월성을 생각하면 유다의  배신은 더욱 더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위엄이  밝히  드러나야  할  성직(sacrum ordinem)이 한 사람의 지독한 사악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서 그리스도마저  경악을 금치 못하셨다. '증거하여'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에서 덧붙여진 귀절이다. 곧 그것은 너무도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얼핏 들었을 경우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민망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저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로만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이  괴로롸 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spirit)은 마음이나 영혼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의 격렬한 충동에 이끌린 나머지 이 말씀을 쏟으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의 모든 감정이 이 영의  지배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복음서 기자의 의미는 전혀 다른 데 있다. 곧 그리스도의 고난은 내면적인 것이었으며 꾸밈이 없는 그대로였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겠다. 곧 그리스도의 열정을 본받아 하나님과 그의 교회의 거룩한  자리(sacrum ordinem)를 뒤엎는 극악한 일들을 대할 경우에는 깊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다.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  - 아무런 내용을 모르고 있던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동요하기 시작하고 있다. 유다만이 혼자서 자신의 악의에 집착한 나머지  덤덤해 하고 있다. 제자들 가운데서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권위란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생각없는 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은  유다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경외심을 제외하여 버렸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마치 절벽과  같아서 온갖 권고를 뒤로 던져 버렸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잠시 동안이나마 무고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이 불친절한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종류의 불안은  그들에게 필요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리는 심판을 전해 들을 때 자신들도 역시 고민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반성하고 위선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곧 그들 자신과 그들의 생활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당연하다.


  이 귀절은 또한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을 당장 지적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끌어 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교회에는 우리가 숨겨서는 안될 그러한 은밀한 병폐가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의 사악이 아직 드러날 정도로 무르익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이 중간 노선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23. 그의 사랑하시는 자" ;  -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가지셨던 특별한  사랑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사랑할 경우 그것이 언제고 기독교의 사랑(carites)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에 뛰어난 그만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목적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다르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허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자는 아무도  없을  정도이다. 인간들 서로 간의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을 지향하고 있지 않을 경우 제대로  조정할 수 없다.


  요한은 "그가 예수의 품에 기대고 누웠는지라"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오늘날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식사 습관이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식탁에 앉은 것이 아니고 신발을 벗고  다리를  쭉  뻗은  다음에  긴  소파(couch)에 기대고 누웠다.

 

"26.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 -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하게 배신자의  이름을 지목할 수도 있었는데 빵조각을 적시어서 지적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이 몸짓은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알려 주었을 뿐 당장에 그들 모두에게 폭로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요한이 후에 적당한 때에 가서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증거 하는 데 있어서 유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유다의  가면을 벗기는 것을 지연하신 것을 보고 우리 역시 위선자들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그들이 숨겨 있는 것을 참아야겠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그는 이미 심판관의 입으로 정죄를 받은 사람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로  행세하고 있는 자들 역시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27.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 유다는 처음부터 사단의 꼬임을 받아 그러한 죄악을 생각해 냈음에 틀림없다. 그러면 왜 이제야, 곧 이미 사단이 유다의 마음을 휘어 잡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사단이 그에게 들어갔다고 기록되고 있는가? 이미 신앙이 있는 자들이 그 신앙에 더 확신을 가질 경우 우리는 그들이 믿는다고 말하듯이 그들의 신앙의 증대를 가리켜 신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유다가 완전히 사단에게 버린 바 되어 격정에 휩쓸려 과격하게 나가는 지금 사단이 그에게 들어 갔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점차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은사를 더  받을 경우 우리는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을 하듯이, 불경건한 자들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의 분노를 자처하는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그의 영,  이성의  모든 빛,아니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박탈하시고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버려진 마음 상태 그대로 버림 받는 가운데 금수와 다를 바 없이 되는 것,  아니 금수마저 몸을 움츠리는 그러한 죄악으로 돌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처참한  심판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악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극복해 버리고  말 경우 마침내 그가 우리를 사단에게 넘겨 주는 비참함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를  경외하는 가운데 조심성있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빵 조각을 건네 주는 동작과 함께 그를 사탄에게 넘겨 주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다가 그 빵 조각을 받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완전히 사단에게  넘겨준 셈이다. 그것은 계기었지 원인이 아니었다. 유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크나큰  친절에 누그러졌어야 마땅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강철보다 더 단단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심판 가운데 그의 마음을 사단을 통해서 더욱 강퍅케 하시는  것은  그의 절망적인 불치의 오만에 대한 보응이다. 우리가 원수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가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모닥불을 피울 경우, 만약에 그들이 절망적일 경우에는, 그들은  오히려 그 불에 태워지고 만다. 그러나 이 때 우리의 친절이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누그러져 우리를 사랑했어야 옳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빵조각이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만찬 이후에 유다에게 건네졌기 때문이다. 더우기 여기서 유다에게 마귀의 본질이 들어갔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무니 없는 소리다. 복음서  기자는 마귀의 능력과 영향력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여러 축복을 무시할 경우 모두에게 기다리는 처참한 처벌이 무엇인가를 역력히 알 수 있다.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  -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에게 재촉하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혐오의 말씨다. 지금까지 그는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를 돌이키려고 노력하셨지만 유다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그래, 기어코 죽겠다니 죽어봐라"하는 투로 말씀하고 있다. 이 경우 그는 물론 심판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이 심판관의 자리는 자신의 편에서 파멸을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실수로 파멸되어 버린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사형에 처하는 그러한 자리와 같다. 짧게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에게 멸망의 필연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선언하고 있다.


"28.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  - 이것은 요한이 그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은 내용을 아직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들의 마음의 평정을 상실했거나 둘중에 하나다. 아마 요한 자신도 거의 넋을 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오늘날 종종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신자들이 주님께서 우렁찬 목소리로 정죄하고 있는  위선자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29.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  - 그리스도의 지독한 가난에 대해서는 다른 귀절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그렇지만 그는 없는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셔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는 점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 아니었더라면  사도들은 그가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추측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