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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13:10)

1. 성경 (요 13:1 ~ 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2)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3)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4)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5)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7)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0)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1)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 유월절 전에" ; - 요한은 마태와 다른 저자들이 서술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여러 가지를 일부러 생략하고 있다. 대신 그는 발 씻기는 이야기와 같이 그들이 취급하지  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뒷부분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가 하는 점을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상징을  통해서 제자들에 대한 그의 처음 사랑이 한결 같고 영원하시다는 점을 증거하셨으며,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빼앗기더라도 죽음마저 이 사랑을 소멸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내용으로 이 서론을 시작하고 있다. 이 확신은 또한 오늘날 우리 마음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사도들이라는 말을 이렇게 완곡한 표현을 써서 사용하는 것은 그들 역시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어려운 전투에서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더욱 더 보살펴 주셨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표현에서 그가 우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을 배우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졌던
동일한 태도를 오늘날도 여전히 품고 계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하늘 나라로 향하시는 길임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말하는 중요한 귀절이다. 그가 그곳을 향해 급히 가시면서도 그의 백성에 대해서는 전과 다름없이 사랑을 베푸셨다면 오늘날도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제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 받아 들이시므로 이 죽음의 정의는 역시 교회 전체에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곧 그 길이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인데

사람들이 이 길을 떠나서 방황하고 있다.

 

"3. 저녁 먹는 중" ;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의도와 이  이야기의  성과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실질적인 말을 눈여겨 보도록 하자. 요한은 유다가 이미 그리스도를 배신하기로 마음에 결정을 내렸을 때 이 발씻김이 있었던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참을성, 곧  그처럼  사악하고 흉칙한 배신자의 발을 묵묵히 씻어 주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가까와 오자 생존시의 마지막 행동을 실천하는 뜻에서 이  시간을  의도적으로 선택 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배신하려는 유다의 결정이 마귀의 자극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죄악의 극악성을 증명하는 말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없이 비참하고 소름 끼치는 사악으로서 거기에 사단의 능력이 역력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이 행하는 악은 모두 사단의 유혹에서 시작되지만 죄악이 더 반항적이요 저주스러울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자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마귀의 횡포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격정(concupiscentia)이  사단의 풀무에 의해서 불이 확 달아 오른다지만 그것 자체로서도 화로(furnace)다. 곧 그  자체에 이글거리는 불이 있는데 풀무의 바람을 게걸스럽게 받아 들인다는 말이다.  따라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아시고" ;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마음의 평정의 근원에 대한 설명으로 본다. 그는 이미 사망에  대한  승리를 확보하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곧 이어질 영광스러운 개선을 바라 보고 있었다. 인간이란 공포에 사로 잡히게 되면 크게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곧 유다의 배신을 받으실 예정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당황이 그에게는 없었다는 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나타내고 있다. 혹 어떤 사람이 그는 왜 피땀을 흘릴 정도로 비통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양면이, 곧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그가 두려움 없이 중보자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대답한다.


"4. 겉옷을 벗고" ;  여기서 말하는 옷은 어디까지나 상의(上衣)이지 통옷(tunic)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동양인들은 긴 옷을 입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지는 "...... 제자들의 발을......씻기기를 시작하여"라는 표현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외형적인 행동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음을 나타낸다. 그러기에  복음서 기자는 그가 베드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6.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   이 말은 어리석고 무가치한 것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에게 무슨 그런 일을 하시려느냐는 투로, 말하자면, 자기 손으로 예수님을 떠미는 셈이었다. 이 겸손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어떠한 봉사나 존대보다도 순종이 더귀하지 않다면 칭찬을 받을 만도 했다. 아니 하나님께  순종하며 우리의 모든 의식을 그의 선한 뜻에 내어 맡기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이라고 선언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 참되고 유일한  겸손의 법칙이 아니라면 이것은 칭찬을 받을 만도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언제 어느 때고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항상 지체 말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7. 나의 하는 것을" ;  -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시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더라도 그저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잘 정돈된 집 안에는 가장 한 사람에게만 결정권이 있고 나머지 종들은 그를 위해 손과 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 그 명령에 순종에 대한 이유를 모른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사람은 너무나 오만불손하다. 그러나 이  권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당분간 숨기시고자 하는 문제를  우리가 모르고 있다 해서 걱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현명하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경우 우리의 이러한 종류의 무지는 그 어떠한 지식보다도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8.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지금까지 베드로의 사양은 물론 완전히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용서할 만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꾸중을 듣고도 굴복하지 않고 있는 데에 더 큰 죄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오만에 흔히  따르는 과오다. 이 사양은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그럴듯한 변명을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를 공경한다는 핑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신앙의 진정한 지혜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올바르고 적합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드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드는 데 있어서 그 밖에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본래부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육신은  계속 불평을 일삼을 것이요, 강요를 받기 전에는 그에게 그의 몫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재량권을 포기하기 전에는, 그가 제 아무리 하나님을 존귀하게 모시려해도, 겉 모양만의 겸손 밑에는 언제고 교만이 깔려 있기 마련이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  그리스도의 이 답변에는 아직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로 결정한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영혼에 해당한 내용을 신체에 비교하심으로써 그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을 결코 자신에게나 그의  역할에 있어서 신기하거나 생소하지 않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베드로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주님께서 우리와  다투기 시작할 때는 언제고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 잠잠히  계신다  해서 인간들은 그들이 그분과 천지차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에게 있어서는 단 한 마디로 이 모든 그럴듯한 이론을 반박하시는 것보다 더 수월한  일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주요 선생인 만큼 그가 그의 발을 씻어야 한다는 문제가  베드로에게는 모순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봉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의 핵심을 거절한 셈이다. 물론 이 귀절에는 일반적인 교훈도 담겨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얼룩을 씻어 주시기 전에는 더럽게 오염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씻어 주시마고 자청하고 있는 만큼 각자는  자신의 더러움이 씻겨지도록 자신을 내어 바치며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겠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씻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로, 또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새로움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양자에 다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나는 맨 마지막 견해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씻는다는 것은 그의 희생제사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의 죄악을 말끔히 씻어 버림으로써 이것이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성령을 통해 육신의 타락하고 악한 욕망을 제거하시는 것을 가리켜 그가 우리를 씻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서 그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중생의 은혜라는 점이 곧 판명될 것이므로 나는 여기에 꼭 사죄의 씻음이 포함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9.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  -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청결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을 경우 자신은 잃어진 사람이라는 말씀을 듣고서야 마침내  자신을  길들일 주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반대 입장을  포기하고 온 몸까지도 씻겨 달라고 나선다. 곧 자신이 태어날 적부터 요염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일부분만 씻음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경솔하게 그가 이미 혜택을 무가치한 것으로 돌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성화가 전혀 그에게 없었다는 식으로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과거에 그에게 베푸신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꾸짖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모든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기억할 뿐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또한 곰곰히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먼저 그는 신자들의 온 몸이 '깨끗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순결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 아무런 오점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지배가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중심 부분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의가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육체가 어떤 병으로 감염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것을 가리켜 완전히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만이 모든 그의 백성의 청결의 원천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모두 생명의 새로움을 통해서 그의 제자됨을 선언해야 한다.


  더우기 현재의 사건에 다른 비교가 적용된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발씻는 문제를  어리석은 것으로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머리부터 발까지 씻겨 주시는 만큼 그가 이미 깨끗하게 해 주신 자들은 아래 부분만 날마다 씻음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첫 날  완전히 중생해서 하늘의 생활을 사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육신의 잔재가  그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일생에 걸쳐서 투쟁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발이란 우리가  날마다 이 세상과 접하면서 대하는 모든 욕망과 염려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오염과  관계가 없겠지만 우리는 육적이요, 땅에 살고 있는 만큼 최소한 우리의 발은 진창을  밟지 않을 수 없으며 그 정도에 한해서 불결한 것은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서는 언제고 우리에게 청결케 해야 할 것이 있음을 발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죄의 용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점차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육신의 욕망에서 완전히 구원하는 갱신이다.


"10. 너희가 깨끗하나" ;  - 이것은 삼단논법의 소전제와 같은 것이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것이 그들에게 적합하다는 결론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자신을 검토 하도록 하는 뜻에서 곧 혹시 유다가 회개의 감정을 느끼는가 하는 점을 보기 위해서 예외  조항이 덧붙여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그들이 곧 뒤이어 나타날 죄악의 극악성을 보고 염려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미리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을 다지는  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그의 이름을 지목하지 않는 것은 그에게 회개의 문을 완전히  봉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절망적이었으므로 이 경고는 그의 죄책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제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곧 경고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들에게 더 완전하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들은 또한 순결이 결코 성령의 평법한 은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