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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요21:17)

1. 성경 : 요21:15 ~ 2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6)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0)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2)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3)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4)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 복음서 기자는 여기서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존귀한 자리에 다시 앉게 되는가 하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배역적인 부인은 도무지 그의 사도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며 어떻게해서 그처럼 천하게 신앙에 반기를 든 사람이 신앙의 올바른 기수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지되지 않을 수 없다. 사도로 부름받은 것으로 말하면 유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위치를 이탈한 순간부터 사도직의 영예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에는 그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상실했던 가르치는 자유와 권위가 그에게 회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실수의 수치가 더 이상 그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씻어버리신다. 그러한 원상복귀는 베드로와 그의 청중들  모두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곧 베드로의 경우에는 자신에게 부과된 소명을 확신하고 그의 임무를 더욱 더 정력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했고 그의 청중들에 있어서는 그 사람에게 있었던 오점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멸시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필요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사랑하느냐” ;  그러므로 목사가 이 직분을 한결같이 감당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한 나머지 자아를 망각하고 온전히 그에게 바치는 가운데 온갖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하는 말로써 자신의 태도가 그러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도록 부름받은 자들이 각자의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이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을 그처럼 조심성 있게 목사들에게 천거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모든 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의 자리에 목사들을 앉히고 계신다는 말씀에서 적잖은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일한 가르침은 교회의 통치를 전복하는 거짓 교사들에게는 큰 경종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자신이 그러한 자들에게서 치욕을 받고 계시며, 그들에게 몸서리치는 재앙을 내리실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성경에서 말하는 ‘먹이다’는 다스림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영적 통치이므로 목사의 직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결코 쓸데 없는 위엄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도 인간 스스로의 기분에 따라 멋대로 행사할 그러한 통치를 부여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10장에서 본대로 교회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왜 이 명칭을 자신에게 부여하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기서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그가 영혼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양식이기에 구원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의 양떼를 다스리고 그들을 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복음 전파에 잇어서 인간들의 노력을 사용하시는 만큼 그의 자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주시고 있다. 아니 최소한 그들과 함께 나누어 쓰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머리로 삼고 말씀의 사역에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는 그러한 사람들만이 목사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부과하신 짐이 무엇이며 무슨 조건으로 자신의 양떼를 다스리도록 임명하고 계신가 하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16 내 양을 치라” ;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무분별하게 모든 사람을 먹이라는 임무를 부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의 양들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시다. 다른 곳에 보면 그는 그가 자신의 양무리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곧 “나의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를 것이지만 타인의 음성은 듣지 않을것이다” 라고 그는 말씀 하신다. 물론 신실한 교사들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모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양과 들짐승을 구별할 수 없으므로 양보다는 이리 같은 자들을 길들이는데 온갖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그들의 수고는 오직 선택받은 자들을 아들에게 순종하도록 넘겨 주는 하늘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온유하고 가르침을 받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구원을 받도록 양육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귀절의 가르침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공연히 그의 제자들을 순진한 양에게 비교하신 것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영께서는 본성적으로 곰이요 사자인 자들도 길들인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17 베드로가 근심하여~~~~” ;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질문을 반복해서 물으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대답에 잘못이 있어서 간접적인 꾸중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대로 이 반복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헤아릴 수 없는 역경을 극복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느 정도 깊게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하는가를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후에 가서 오랜 체험이 있은 뒤에야 그는 그러한 시험이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체득했다. 그리고 교회를 다스리는 임무를 수행할 사람들 역시 베드로를 통해서 자신들을 건성으로 살필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여된 열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철두철미하게 점검해서 도중에 움츠러들거나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훈을 듣고 있는 셈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욱 더 가혹하게 시험하신다 해도 우리는 참을성 있게 묵묵히 거기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해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 데 있어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자기 양을 치라고 당부하신 다음에 임박한 전투에 대비해서 무장을 시켜주신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에게서 충성과 근면 뿐 아니라 위험에 대처하는 불굴의 용기와 십자가를 짊어지는 인내까지도 요청하신다. 한 마디로 그는 그에게 필요한 경우에는 죽을 각오를 당부하신다. 오늘날 모든 목사들이 이와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경고는 어느 정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젊어서는 네가~~~~” ; 젊어서 자기 뜻대로 살았던 그가 늙어서 타인의 지배를 받고 심지어 포악한 압제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더우기 베드로는 우리의 공통적인 처지에 대한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기 전에도 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누린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편에 합세하고 그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순간부터 혹은 적어도 언젠가는 그들은 어려운 투쟁, 고통스러운 생활, 크나 큰 위험,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말려들게 된다. 비록 이 상태가 어렵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가볍게 하셔서 그들의 힘이 성숙할 때까지는 잠시 동안 쉴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세상에 살아계실 동안에는 마치 결혼 잔치를 베풀고 계신 것처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셨지만 후에는 그들에게 배고픔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마9:15)

 

”남이 네게 띠 띠우고” ; 이것을 그의 죽음의 모습으로 곧 그가 팔을 쭉 벌린 채 매달려 죽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말하는 ‘띠우다’란 단순히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전 생애를 규제하는 모든 외형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네가 스스로 띠띠고”라는 말씀은 “네가 좋아하는 대로 옷입었지만 네가 입고 싶은 옷을 선택하는 권리가 박탈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당한 처형의 양식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우화를 믿는 것 보다는 알지 못하는 편이 훨씬 낫다.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 이것은 베드로가 자연사 한것이 아니라 폭력과 칼에 의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죽음이 자발적이 아닐것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얼핏 모순되어 보일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뜻에 반대해서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려 가는 것을 칭송할 만한 순교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들이 스스로 내부에서 느끼는 육신과 영의 대결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육신이 우리를 마치 밧줄로 묶듯이 묶어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유익한 교훈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떠나서는 사망의 공포를 결코 이겨낼 수 없으므로 기도할 것을 우리에게 권면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그의 지배에 순순히 굴복하는것 뿐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가눌 수 있으며 설령 여러가지 핍박 속에서 방황한다 해도 영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9 어떠한 죽음으로 ~~~~가리키심이러라” ; 이 완곡법은 아주 중요하다. 곧 모든 신자들 앞에 세워진 목표는 죽으나 사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하지만 요한의 의도는 바울이 말하는대로(빌1:20), 자신들의 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증하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자들의 죽음을 특별한 칭송의 말로 장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베드로의 죽음이 낳은 추수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이 동일한 목표를 고수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대한 우리의 나태는 책망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말씀을 하시고~~~~” ;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왜 그가 포악한 죽음을 예언하셨는가 하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그것을 끝까지 이겨낼 각오를 갖추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이것은 마치 “너는 나처럼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네 지도자를 따르라”하는 말씀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십자가로 부르실 때 그가 더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하는 뜻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지도자로 제시하고 있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호기심의 예를 본다. 곧 우리는 남에게 신경을 쓰는 바람에 자신의 임무를 잊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기 보다는 타인의 생활을 뒤적이며 거기서 쓸데 없는 구실을 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 이 완곡법이 여기에 삽입된 것은 베드로가 여기에 기록된 질문을 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22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 그 의미는 “그것은 너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네 동료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물을 권리가 네게는 없다. 네 자신이나 생각하고 네 부름받은 곳을 향해 갈 준비나 갖추도록 하거라”하는 식이다. 

 

“23 이 말씀이 ~~~~나가서” ; 복음서 기자는 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식으로 제자들에게 오해되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24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 지금까지는 자신을 제3인칭으로 말해 욌지만 이제 요한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목격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