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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1. 성경 (요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1)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2)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9 저녁 때에 ~~~~~~~” ;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섭리의 권위가 더욱 더 확실하고 신빙성 있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저녁 때가 넘도록 그들을 불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상냥하게 대하셨다는 점이다. 더우기 그는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지만 새 생명의 보증을 가져오심으로써 그들을 깨우치고 있다.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신앙의 표시, 아니면 최소한 경건한 태도의 표시였다. 물론 그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요컨대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무서움을 타는 경우가 있지만 당시 제자들의 경악한 태도는 그들의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항을 주목해야겠다. 곧 그들이 마땅히 용감하게 행동했어야 옳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연약성에 굴복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은신처를 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용기를 내서 함께 모여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요, 어누 누구 하나 서로를 돌아 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육신의 연약성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며 우리에게 배도할 것을 유혹하는 공포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집합해 있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열성을 축복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의 경우 그리스도의 모든 형제들에게 허용된 은혜를 박탈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문을 닫았더니~~~~~~” ;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담겨 있기에 일부러 덧붙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가 그리스도가 들어 오도록 문고리를 따놨기 때문에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복음서 기자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방에 들어가실 때 제자들에게 그의 신성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도록 하는 뜻에서 기적을 베풀었다고 보아야 한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귀절은 “모두들 즐겁게 잘 있지!”하는 말과 같다. 내가 굳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제자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을 뿐인데 여기서 평화가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하며 쓸데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잇기 때문이다. 그져 히브리인 사회에서 평범한 인사일 뿐이다.

 

”20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 어떻게 해서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점을 알리는 뜻에서 이 확증이 필요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에게는 아직도 상처난 옆구리와 찔린 자국의 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상처는 사도들이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을 충분히 확신하기까지 잠시 동안만 유용했던 것이다. 사도요한은 제자들이 ‘기뻐하다라’하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들에게 안겨 주었던 모든 슬픔이 그의 새 생명에 의해서 말끔히 씻겨졌다는 뜻이다.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것은 주께서 다음에 하실 말씀의 중대성과 심각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말씀하신 것 같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자리에 사도들을 정식으로 임명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이미 전 유대 지역으로 파송을 받은 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최상의 교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뜻에서 파송된 선구자의 입장이었지 가르침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도의 입장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그의 사신으로 임명해서 세상에 그의 나라를 설립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여기서 처음으로 복음의 일반 사역자로 임명받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도록 하자. 그의 말씀의 요지는 곧, 지금까지는 그가 교사의 임무를 수행해 왔지만 이제 그는 그의 길을 다 마쳤으므로 그것을 그들에게 위임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당분간은 나머지 사람들을 인도하지만 후에는 자신의 부재를 대신할 자들을 자기 자리에 앉힌다는 조건 밑에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교회의 교사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파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로 세워서 세상 끝까지 교회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다(엡4:1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비록 그는 당분간 가르치는 직분을 맡았지만 복음 전파는 잠시 동안에 걸친 일이 아니라 영원한 일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22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 유한한 인간치고 그러한 어려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의 은혜에 의해서 사도들을 세우고 있다. 사실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며, 영원한 구원의 사신 역할을 담당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인간들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일은 인간적인 능력 이상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별로 놀라운 말이 아니다. 성령께서 그 혀를 다스려 주시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으며(고전12:3) 어느 누구도 그러한 탁월한 직무의 모든 일을 충실하게 수행 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교사들로 임명하는 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의 영광 뿐이다. 요컨대 성령의 충만이 그리스도에게 부어졌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각자에게 무한히 베풀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그의 교회의 유일한 목자이지만 그는 그가 들어 쓰시는 사역자들에게 그의 영의 능력을 불어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는 사도들에게 숨을 내쉬는 외형적인 상징을 통해서 이것을 입증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이 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복음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이 귀절에서 연관되고 있는 가르치는 직분과 사죄의 능력을 구별해서는 안된다. 바로 얼마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는 이 사명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를 선언하시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 곧 성령을 허락하시면서 자신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주셨다. 복음 전파의 첫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은 사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 그리스도께서 이 둘째 절을 첨부하시는 것은 그의 복음의 멸시자들을 위협하며 그들이 이 교만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는 구원과 영생에 대한 사명이 위임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제공된, 구원을 배척하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재앙이 예비되어 있었다(고후10:6). 그러나 이 귀절이 마지막에 놓인 이유는 복음 전파의 진정한 목적이 먼저 제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불신자들이 영원한 죽음의 선언을 받는다는 사실은 비본질적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앞서 인용한 귀절에서 불신자들에게 재앙을 위협하면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된 다음에”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만민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지만 그것이 누구든지 파멸을 가져올 경우 그것은 부수적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