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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20:17)

1. 성경 (요20:11~18)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1)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2)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3)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5)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7)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여인들이 무덤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리 크게 칭찬받을 일은 못된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어느 정도 위로와 기쁨을 안고 돌아갔지만 여인들은 쓸데없이 울고만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을 무덤에 잡아둔것은 미신과 육적인 감정의 혼합이었다.

 

”12 흰옷 입은 두 천사가~~~~” ;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그의 동료들의 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친절을 베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천사들을 보내고 마침내 사도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자신을 내보이셨는데 이것은 결코 평범한 영예가 아니다. 사도들과 여자들이 모두 동일한 질병에 걸려 있었지만 사도들의 몽매가 더 핑계를 면할 수 없는 것은 자신들이 받은 교훈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가운데 유익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먼저 여자들에게 현시하시기로 택하신 것은 사도들에게 창피를 주려는 뜻에서이기도 하다.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 보다 더 관심을 요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예비적인 사항을 통해서 그의 나라의 영광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천사들이 그의 무덤을 장식했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치욕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위엄을 빛나게 하고 있다. 

 

“13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천사는 이 밖에도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증하는 데에 필요한 개요만을 제시하는데서 그치고 있다. 천사의 말에는 꾸중과 위로가 뒤섞여 있다. 곧 천사는 마리아가 그때에 어울리지 않게 울고 있는 것을 꾸중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울필요가 없다는 말로써 기쁨을 주고 있다.

 

”14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 여기서 마리아는 어떻게 해서 그토록 잘 알고 있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그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잘못이 여자들의 눈에 있었다고 보고 싶다.  이것은 누가가 전하는 두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눅24:1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프로테우스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장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눈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좋으실대로 그 눈의 시력을 약화시키셔서 그들의 눈이 보기는 보되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공통적인 실수를 보게 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 눈 앞에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여러가지 모습을 고안해 내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의 의식은 참된 그리스도와 거리가 먼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 마음의 눈은 그 자체가 불완전 할 뿐 아니라 세상과 사단의 유혹을 받기 때문에 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15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 ; 여기서 말하는 ‘주여’는 히브리 백성들의 호칭법에 불과하다.  곧 이들은 농부나  그밖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대할 때 ‘여보세요’라고 부른다. 마리아는 오직 지상적인 것에 집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원한 것은 단지 그것을 무덤에 가두어 두려는 의도에서일 뿐이다. 그는 가장 중요한 문제, 곧 그의 신령한 부활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우둔한 태도 때문에 그녀의 눈에 막이 덮이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16 마리아야~~~~” ;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실수를 당분간 허용하신 것은 그녀의 신앙의 확신을 위해 유익했다. 이제 그는 단 한 마디로 그녀의 실수를 바로잡고 있다. 그는 과거에 그녀와 말을 나누었지만 그의 말씨는 낯선 사람의 말씨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제 그는 스승의 신분으로 돌아가 그의 제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것은 선한 목자는 그의 양무리의 이름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10장의 말씀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이 목자의 음성이 마리아의 마음에 와 닿자 그녀는 눈을 뜨게 되고 모든 의식을 되찾으며 당장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는 우리의 소명에 대한 좋은 본보기이다. 곧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은 먼저 그가 우리를 알아차린 다음에 친근하게 우리를 자신에게 초청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 때 그의 초청의 음성은  모든 사람들의 귀에 무분별하게 울려 퍼지는  일상적인 음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 주신 양들을 특별히 부르는 그 음성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데, 아니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는데 (갈4:9)”라고 말씀하고 있다.

 

”17 나를 만지지 말라~~~~~” ;  우리는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노라 하는 그의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으로 그는 그가 아직 하늘의 영광에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그의 부활의 목적을 제시하셨다. 다시 말해서 부활의 목적은 그들이 생각하던대로  그가 부활하셔서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오르셔서 그에게 약속되 나라를 소유하시고 그의 영을 통해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그가 하늘에서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기 전에는 그의 부활이 완성되지 않는 만큼 여인들이 그의 부활의 반쪽 부분만 가지고 만족해 하며 그의 임재를 세상에 제한 하려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데 있었다. 여기에는 두가지 유용한 교훈이 담겨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찾는데 있어서 곁길로 들어서지 않으려면 그들의 마음을 높은데 두는 것이요, 둘째는 그에게 나아가려는 자는 모두 육신의 지상적인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리 권하는 것이기도 하다(골3:1). 

 

“형제들에게 가서” ;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에게로 올라간다~~~~” ; 그는 하나님께 올라 가신다는 말씀으로써 사도들이 그의 떠나심에 대해 품으맂도 모를 슬픔과 불안을 제거하고 있다. 요컨대 이것은 그가 그의 신령한 능력을 통해서 그의 백성과 함께 언제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자신과 우리 모두의 아버지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앞서 지적한 형제적 연합의 결과와 효력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분명리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다른 곳에 보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모든 축복에의 참여자가 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는 모든 축복의 근원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는 것이다. 신자들이 마음 놓고 확고하게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말 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라고 구별하신 것은 그는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오직 입양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