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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요19:31)

1. 성경 (요 19: 28 ~ 42)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28)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29)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0)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1)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2)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3)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4)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5)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6)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37)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8)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39)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0)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1)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2)

 

2. 묵상 (Calvin 선생의 주석 요약본)
”28 그 후에 예수께서~~~~” ; 사도 요한은 포도주가 담긴 그릇이 있었다는 말을 예사롭게 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에 달리는 비참한 사람들이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을 때 죽음을 재촉하는 뜻에서 주는 음료로 보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을 대 이루기 전에는 마실 것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그의 측량할 수 없는 보살핌을 입증하고 있다. 얼마만 한 고통을 맛보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는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공의를 성취하기 전에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부분, 곧 그의 죽으심은 아직 남아 있었는데 어떻게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요한은 뒤에 곧 이어질 내용을 포함시켜 말하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 부활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향해 나가는 길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내다보셨다.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 시편 69편 21절의 말씀은 다윗에게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을뿐 아니라 그의 고통을 잔인하게 증대했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은유법이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희미하게 드러난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다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실체와 비유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30 다 이루었다~~~~” ;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가장 기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전체 성취와 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그의 죽으심에 담겨 있다는 점을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그의 부활과 죽으심의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자신에게 묶어두어 그것이 결코 우왕좌왕하는 일이 없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인간의 구원에 기여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결코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담겨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조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을 옛날 제사와 모든 그림자와 대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율법 시대에 실천된 것 가운데 스스로 죄를 속량 하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거나 칭의를 획득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참된 구원이 세상에 들어와 제시되고 있다”하는 식의 말씀과도 같다. 이 가르침에 의하여 율법의 모든 의식이 철폐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에게 실체가 있는데 더 이상 그림자만 쫓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한 그의 죽으심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당연하며 다른 곳에서 도움을 청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영혼이 떠나 가시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건한 자들은 모두 신실하시며 일단 보호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실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들의 영혼을 안전하게 위임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버림받은 자들의 죽음의 차이가 이것이다. 곧 버림받은 자들은 생각없이 운명하지만 신자들은 부활의 날까지 소중하게 영혼을 보호하실 하나님에게 맡기는 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영혼’은 불멸의 ‘영’을 두고 하는 말이다.

 

”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손상을 입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물과 피만 그의 옆구리에서 쏟아진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니 큰 날이므로~~~~~~” ; “그 안식일은 중요한 날이었다”는 의미이다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 하나님 아버지의 은밀한 경륜이다.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 그리스도께서 운명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이다.

 

”피와 물이 나오더라” ;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 양자가 상징하는 것에서 샘을 보는 식으로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물을 퍼 올릴 때만이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오염이 정결함을 받으며 사망으로부터의 속량과 정죄로부터의 구출을 받아 거룩한 생활을 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 

 

“36 그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하리라~~~~” ; 유월절 어린양을 상징한다.

 

”37 그들이 그 찌른자를 보리라” ;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스가랴를 통해서 유대인들이 자신의 마음을 찔렀고 불평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보여주고 잇는 것이다. 그의 백성의 죄악 때문에 특별히 그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오만불손한 경멸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다는 의미이다.

 

”38 아리마대 요셉이~~~~~” ; 요한은 여기서 누가 어디에 얼마나 정중하게 그리스도의 장사를 치렀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무덤에 안치한 사람의 이름을 둘 언급하고 있는데 요셉과 니고데모이다. 그 중에 전자가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했는데 그렇지 않았더라면 군인들의 뜻에 맡겨졌을 것이다. 마태는 그를 부자로, 누가는 공회원, 곧 상원의원급으로 말하고 있다. 니고데모에 대해서는 3장에서 취급한 바 있지만 그는 그의 동족 가운데서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또한 이 혼합 향유를 사는데 큰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도 역시 부자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재산 때문에 그리스도의 편에 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로도 그들은 재산 때문에 그처럼 증오와 수치의 대상인 신앙고백을 못할 수도 있었다. 복음서 기자는 요셉이 이 두려움 때문에 공공연하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고백하지 못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의 민족을 상대로 쉴 새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두려워서 그에게 마땅한 존경을 드리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듯이 그의 시체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늘의 충동에 따라 이루어진 일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바를 향품을 가져오고 있는데 그들이 먼저 그의 죽으심의 향기를 흩뿌림을 받고 거기에 젖지 않았던들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지녀야 할 임무가 무엇인가를 배워야겠다.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신앙을 입증하는 뜻에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위험을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릴 뿐 아니라 용감하게 그를 무덤으로 모시고 있다. 그가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이 그에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그것은 천하고 수치스러운 나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자신들의 반역적인 위선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니고데모의 본을 내세우는 악행 역시 핑계가 있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은 한 가지 면에서는 그와 같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장사하는 데 있어서는 용의 주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사의 시기는 지났으며 그들 아버지의 우편에 오르셔서 천사와 인간들보다 높임을 받고 있으며 모든 혀가 그의 지배를 선포하고 있다 (빌2:9,10)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구하매” ; 이 공포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공포는 여호와 영께서 요셉의 마음에 가져온 거룩한 확실성과 대조되고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독재자들이나 복음의 원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뜻에서 품는 모든 공포심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무서워서 취소될 경우 신앙의 약점이 드러날 경우에 국한된 말이다. 우리는 항상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며 그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명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도중에서 그만두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샘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명령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 역시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복음서 기자는 요셉이 아직 겁에 질린 나머지 세상 앞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그에게 제자의 명예와 명칭을 부여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의 백성에게 친절하게 대하시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점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사이비 니고데모의 경우 그들에게는 자화자찬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내면적으로 감출 뿐 아니라 불경건한 미신에 동의함으로써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극구 부정하고 있다.

 

”40 유대인들의 장례법 대로~~~~~~” ; 그리스도께서는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장례를 존귀하게 준비하셔서 그것이 그의 부활의 영광에의 서곡이 도게끔 하셨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많은 비용을 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낭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41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 이 거룩한 사람들은 그저 장소가 가까운 것으로 만족하는 가운데 안식일을 범하지 않는 문제에 집착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던 것을 그들에게 허용하시고 있다. 곧 그의 아들의 장례를 일상적인 것과 구별하는 데 있어서 그는 특정한 표를 사용하고 있다. 이 장소의 편의성은 또한 그의 부활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어서도 보템이 되었으며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