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14:7 ~ 15)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7)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9) 나는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3)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4)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5)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 - 이 말씀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하는데 이것은 어리석고 악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바로 앞의 말씀을 확증하는 셈이다. 인간들은 하나님 지식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들과 밀접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상을 따라 방황하며 그들에게 가까이 계실 때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분을 구름 저편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안에서 신성의 충만함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점을 들어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너희들이 내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아버지의 생생한 모습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아직까지 나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 온 것이나 다름 없다"하는 말씀이다.
"이제부터는" ; - 이 말씀을 더하시는 것은 그의 책망의 엄격성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곰곰히 생각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배은망덕과 게으름을 비난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씀으로 그는 그들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을 추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그들이 그들의 눈을 뜨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하는 뜻이다. '보다'라는 단어는 신아의 확실성을 표현한다.
"8.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 - 사도들이 계속해서 주님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얼핏 모순같이 보일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여기서 빌립이 질문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기에 나열되고 있는 그들의 잘못된 점이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데에 있어서 열성을 보이고 있다고 스스로 공언한다. 그러나 정작 그가 우리 눈 앞에 자신을 제시할 경우에는 우리는 눈이 어둡다.
"9.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 - 그리스도께서는 빌립에게 명백한 신앙의 안목이 없다는 점을 들어 책망하고 있는데 옳은 일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존재하고 계셨지만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방해한 것은 그의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날도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쓸데 없는 공상에 따라 하나님을 찾아 헤메기 때문에 복음에 있어서 전혀 진전이 없다. 이 어리석은 욕망은 그리스도의 천하심에 대한 멸시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이 더 없이 부당한 것은 그가 바로 이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 -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령한 본질이 아니라 계시의 방법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은밀한 신성에 관한 한, 아버지에 비해 우리에게 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뚜렷한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 지혜, 그리고 능력이 본질적으로 그 안에 나타나 있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는 증거로 제시하는 옛날 주석가들도 잘못을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시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가 그를 누구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만큼 이것은 그의 본질보다는 그의 능력을 기록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 안에 충만한 신성이 거하며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말씀은 그의 신령한 능력을 통해서 그가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 - 앞에 나온 원인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을 자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곧 그는 그의 천상적이요 참으로 신령한 가르침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증거요 밝은 거울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모든 선지자들로, 그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신령하게 말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의 저자가 하나님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취급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 된다면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곧 선지자들은 그들의 제자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신에게 머물게 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히브리서 1장에서 사도가 하고 있는 말, 곧 하나님께서 과거에는 모세를 통해서 땅에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그이 아들의 입을 통해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 - 이 말씀은 '인간으로서, 인간적으로'라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그의 영의 능력을 가르침 속에 제시하시면서 그의 신성이 그 안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하는 말씀을 기적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앞에서 있던 말씀, 곧 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의 위엄이 명백하게 계시되어 있다는 말씀의 계속이다. 이것은 마치,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일이니 너희들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하는 내용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믿으라" ; - 그는 먼저 제자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자신의 주장을 믿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우둔했으므로 그는 그들의 무감각을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는 "나의 말이 믿어지지 않고 나를 얕보기 때문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형상인 능력을 생각해 보라"하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하신 내용을 한 마디도 남김없이 주저 하지 말고 받아드려야 했는데도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은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주제에 관해서 수 없이 많은 교훈을 들었는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점에서 제자들을 책망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신앙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것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씀은 쓸데 없는 반복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헛된 호기심에 대해서는 언제고 솔깃하다는 것을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순간 우리에게는 우리가 만든 우상 밖에 우리 손에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신령하고 우리들 하나님 안에 머물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말씀이었다는 뜻에서 감정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이 덧붙여지지 않았더라면 이 위로는 하나의 완전한 위로가 될수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우리의 기억은 하나님의 혜택을 오래 간직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예를 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축복을 가득 채워 놓으시고 한 보름만 쉬신다면 우리는 그가 더 이상 살아 계시지 않은 것으로 상상해 버린다. 그러기에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당시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그의 당시의 능력을 언급할 뿐 아니라 장차 그것을 계속 깨닫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사실 그의 신성은 그가 지상에 살고 계실 때만 입증된 것이 아니고 그가 아버지께로 가신 후에도 신자들은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성이나 악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 속에 계시는 그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일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못한다.
사도들이 "이보다 큰 것도 하리라"하는 말씀에 대해서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상적인 대답에 대해서는 모두 생략하고 한 가지만 말하겠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입증한 능력은 결코 그의 육체적 임재에 국한 된 것이 아니므로 그의 부재 중에도 더 많고 큰 예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의 승천에 뒤이어 세상의 놀라운 회심(admirabilis conversio mundi)사건이 일어나서 그가 인간들 가운데서 살고 계시던 때보다 더 강력하게 그의 신성이 드러났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신성의 입증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온 몸에 충만하게 퍼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행위(doing)는 오직 사도들에게나 소수의 경건한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 제자들이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할 이유는 그가 그의 나라를 소유하러 들어 가셔서 하늘에서부터 그의 능력을 더욱 더 완전하게 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신 후에 그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사도들이 더 뛰어난 일을 했다해서 결코 그의 영광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여기서 명백하게 된 점은 그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신 것은 모든 무릎이 그의 앞에서 꿇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사실이다. 좀 더 뒤에 그는 그가 사도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질 모든 것의 원천이 되실 것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 - 하고 그는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당시 인간들이 아버지에게 기도하려면 거쳐야할 중보자가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나는 그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이후에 중보자의 임무를 더욱 더 분명하게 수행하셨다고 대답하겠다.
"이는......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 이 귀절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하는 바울의 말과 일치한다.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선언되고 있는 것은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참된 방법이니, 곧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곧 비록 하나님의 위엄 그 자체는 우리에게서 숨겨져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취고 있으며 그의 손길은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여러 축복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구별할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라"하는 말씀 그대로다.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 - 이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모두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친듯이 돌진하는 가운데 무모하고 오만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댄다. 그러다가 모두는 내가 지적한 무가치성을 생각하고서 스스로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에게 초청하시면서 그는 우리 앞에 오직 한 중보자만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분만을 통해서 그는 청을 들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간의 사악한 마음은 난폭하게 흘러가고 만다. 곧 대다수의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서슴없이 내팽개치고 고행의 길과 곁길을 통해 가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천박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다른 잘못이 관련된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며 우리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만 부름을 받고 있다는 점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지적된 말씀이 불충분하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기도해야 한다는 두번째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손을 우리에게 펼치시면서 우리가 쓸데 없이 다른 중보자들을 찾는데 헛된 노력을 기울이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 - 제자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참되고 진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흔히 그렇듯이 이들의 사랑에는 어딘가 미신적이 것이 있었다. 곧 그들은 그를 이 세상에 붙잡아 두고자 했는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러한 잘못을 교정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사랑을 재정립할 것을, 곧 그가 그들에게 주신 계명을 준수하는 일에 집착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듯한 사람들 가운데서 올바르게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참으로 유용한 가르침이었다. 아니 시시한 짓거리를 해 놓고 자화자찬하며 기만에 빠지는 우리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참사랑은 그의 가르침을 유일한 척도로 지킬 때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인 순수한 순종과 결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흠투성이 이므로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죄악스러운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경고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