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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요14:31)

1. 성경 (요14:25~31)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5)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6)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7)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8)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29)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31)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25.  내가......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  - 물론 그들은 이 말씀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덧붙이신 말씀이다. 그는 가르침의 씨앗을 뿌렸었지만 이것을 당시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잠시 동안 잠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게 필요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 가르침이 열매를 맺히고 말 것이므로 그때까지 소망을 갖도록 당부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그들이 이미 들은 가르침 속에는 풍성한 위로가 담겨 있으므로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게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면적인 교사(interior magister)인 성령께서 동일한 것을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실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 것을 그는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내용을 당장에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교만한 마음에 압도되어, 애매모호한  것에쓸데 없이 헛수고 할 필요가 뭐냐는 식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권면은 모두에게 아주 유익하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순응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곧 우리가 하나님의 도장에서 제대로 발전해 나가려면 열심히 듣고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가 종종 헛 읽고 헛 들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  것을 명백하게 깨우쳐 주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을 당장 이해하지 못할 경우 배움에 대한 열성이  식어지거나 절망에 빠지는 것을 막는 뜻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것을" 마침내 "생각나게 하시리라"하는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이사야는 불신자들에게는 벌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할  수  없는 책(closed book)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여호화께서는 그의 백성에 대해서도 이 방법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말씀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참을성있게 계시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그의 입에서 이미 들은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 성령의 특수한 점을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외형적인 가르침에 성령의 가르침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귀를 울려 주시기도 하고 성령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는 이 두 방법을 그의 생각에 따라 좋으신대로 동시에 적용하기도 하고 각각 다른  때에 적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성령이 가르쳐 주실 것으로 약속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것"을 상기시켜 주실 것으로 그는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새로운 계시의 건설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한마디로 우리는 사단이 처음부터 성령의 권위라는 거짓 이름 밑에 교회에  들여온 모든 착상들을 반박할 수 있다. 모하멧과 교황은 성경에는 완전한  교의가  담겨있지 않으며 보다 높은 차원의 것이 후에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었다는 원칙을  똑같이 고수한다. 오늘날의 재세례파들과 자유사상가들(Libertines)역시 그들의 광기를  동일한 구덩이에서 파내고 있다. 그러나 복음에 위배되는 착상을 도입하는 영은  사기군이요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지 않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마치 그것에 서명이라도 하듯이, 확증할 성령을 약속하고 있을 뿐이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보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  -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서로 만나거나 헤어질 때 주고 받는 안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히브리어에서 말하는 '평안'의 의미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나라의 일반 습관에 따라서, '잘 있거라'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이 평안이 그저 격식을 갖추는 의미에서 입술로만 말하거나,  또 그것을 진심으로 말한다해도 그것을 실제로 줄 수 없는 대부분의 인간들의 것과  다르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은 허황한 소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실제적인 효과가 따른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장이다. 즉, 그의 몸은  떠나지만 그의 평안은 제자들과 함께 남아 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은  그의 축복으로 항상 행복할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  - 여기서 다시 그는 그의 떠나심에 대한 제자들의  경악을 바로 잡고 있다. 곧 그들은 그의 육체적 임재만 빼앗길 뿐, 그의 진정한 임재는 성령을 통해 계속 누릴 것이므로 놀랄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 또한 이러한  종류의 임재로 만족할 것이지 언제고 하나님을 외형적인 착상과 결부시키는 육신에게 굴복하지 않도록 하자.


"28.  나를 사랑하였더면" ;  - 물론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마땅히 그를 사랑했어야 하는 수준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사랑에는  어딘가 육적인 것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분과 헤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들이 그를 영적으로 사랑했더라면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아버지에게로의  귀환을  열망했을 것이다.


"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  - 이 귀절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곡해되어  오고  있다. 아리우스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도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점을  입증한답시고 그가 아버지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한 중상 모략에 대한  핑계를  완전히 제거하는 뜻에서 정통적인 조상들은 이것을 그의 인성에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에서 이 증거를 악용했다지만 조상들의 해결책 역시 옳지 않으며 그것을 적용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의  인성이나 영원한 신성을 두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성을 생각하시고  자신
의 위치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높이에 따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곳에 들어  올리려고 내려 오신 것이다. 그의 말씀의 요지는 "너희들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들이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하는 뜻이다. 이 말씀으로써 그는 그가 어떤 면에서 아버지와 다른가 하는 점이 아니라 왜 그가 우리에게 내려 오셨는가를,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오셨음을 보여주시고 있다. 우리가 이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길가는 도중에 서있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반(半)  그리스도(Semi-Christ)와 불구가 된 그리스도(Mutilated-Christ)로만  상상하기  마련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2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하실 것이다"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비슷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인성으로 통치하실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육신으로 계시된 하나님이기에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성은 그때 가서는 그에게서 공공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신 시간부터 비취기 시작한 신성한 광채의 완전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를 더 명확하게 얘기하는 뜻에서 좀 더 직설적으로 얘기해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아버지의 신성과 자신의 신성의 차이를  비교하거나 그의 인성과 아버지의 신령한 본질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와 그가 곧 누릴 하늘의 영광을 비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너희들은 나를 이  세상에
잡아두려고 하지만 내가 하늘에 올라가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육신을 입고 낮추신 그리스도를 보며 그가 우리를 복된 불멸의 샘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바라도록 하자. 그는 우리를 달이나 태양권으로 데려 가는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만드실 지도자이시다.


"29.  이제 이 일이 이루기 전에" ;  - 이것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그처럼 자주 경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이 인간의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앞으로 일어날 것을 미리 말하는 것은 그것이 정작 일어날 때 그들이  그것을  믿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밝히 말씀하고 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입에서 들은  사건들이 직접 그들의 눈 앞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예언을 되새겼을  때  이것은 그들의 신앙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절을 일종의 양보절로 읽어서, "너희가 지금은 이 심오한 신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날때 까지는 그대로 참아 주겠다. 그러나 그때 가서 발생하는 사건은 그 자체가 이 가르침을 설명하는 해설가의 역할을 할 것이다"하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소 귀에 경 읽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후에 가서는 그의  말씀이  바람에
날린 것이 아니라 흙 속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여러 사건의 성취를 하나로 묶어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신앙을 낳는 것은 그의 죽으심, 부활, 승천 사건이 모두 그의 말씀과 연관되어 하나가 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  - 이 말씀으로써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히 간직하기를 바라셨다. 포식은 대개 염증(dislike)을 가져오기 마련이요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이나 곧 사라지고 말 것에 대해서는 더 열성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그의 가르침을 열심히 귀담아 듣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는 그가 곧 떠나실 것이라는 점을 광고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일생에 걸쳐서 쉬지 않고 우리를 가르치시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짧은  만큼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기회를 잘 붙잡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  - 그는 직접 대놓고 그가 곧 죽는다는 점과 그의 죽음이 시각이 가까와 오고 있음을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바꿔 언급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전에 굳세게 해 주시는 것은 그들이 그처럼 참혹한 죽음에  기겁을  한 나머지 졸도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를 믿는다는 것은 지옥에서 생명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먼저 그는 이 능력이 사단에게 허락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다음에 그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 순종하기  때문에 떠나야 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마귀를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마니교에서 생각하는 것처럼-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나라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그가 이 세상에서 그의 독재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명칭이 마귀에게 적용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겠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는  말에는 온 인류가 포함되어 있으며 인간들이 제 아무리 뽐내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의 영에 의해 중생하기 전에는 마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처참한 노예살이에서 우리를 건져 내고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한 구원자뿐이다. 이 처벌이 인류에게 부과된  것은 첫 인간의 죄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죄악때문에 날마다 더 악화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죄악을 미워할 줄 알아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발적인 이 노예살이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단의 지배에 꼭 매여 있다. 여기서 불경건한 자들의 활동이 마귀의 짓으로 얘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만큼 그들의 모든 행동을 그의 일로 간주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 사단이 사망의 나라를 휘어잡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 편에서의 자발적인 복종이 없이는 아무 흠이 없으신 그분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주석가들은 사단이 그리스도에게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에게는 죄악의 흠이 하나도 없는 만큼, 그에게서 죽음의 원인을 전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순결성뿐 아니라 죽음에 굴복할 수 없는 그의 신성한 능력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제자들의 그의 능력에 대한 신앙에 구김이 가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가 연약해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선언한 것은 적절했다. 물론 이 일반적인 말씀 속에는 그가  사단에게 이끌려 억지로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말씀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우리 대신에 죽음에 굴복하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  -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세상으로 알게 하는 뜻에서......일어나, 여기를 떠나자"하는 식으로 한 문장으로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귀절을 따로 읽는 가운데 무엇인가가 중간에 빠져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의미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나는 독자들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든 상관 없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경륜을 여기서 최상의 것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횡포에  질질 끌려 죽어갔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위배된다는  생각을 못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사실이다. 곧 그의 아들을 화해자로 정하시고 세상의  죄악이 그의 죽음을 통해서 속죄받도록 하신 쪽은 하나님이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사단이 잠시동안 그에게 승리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의 경륜을 순종하는 뜻에서 사단에게 아무런 저항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그의 이 순종을 우리의 의를 위한 대가(pretium)로 제시하고 있다.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  -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곳을 떠나셨으며 다음에 나오는 것은 그들이 걸어가는 동안에 이야기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요한은 뒤에 가서야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나가셨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그가 그때 당장 그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간것으로  보기보다는 그들이 그에게서 본, 뛰어난 순종의 본보기를 하나님에게 바칠 것을 권면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