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4)

1. 성경 (요15:1~5)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1)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2)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3)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5)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1.  내가 참 포도 나무요" ;  - 이 비유의 핵심은 이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져 그에게서 새롭고 다른 힘을 끌어 들이기 전에는 우리는 본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른 나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암펠로스)를 포도나무(vitis)로 (클래마타)를  가지(palmites)로  번역한다. 그리고 바이티스(vitis)는 포도나무가 있는 밭(vinea)이 아니라 나무 자체로 보는  것이 옳다. 물론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vinea로 쓰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키케로의  '빈민들의  소작지와  조그만  포도밭'(pauperum  agellos  etviticulas)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팔미테스(palmites)는 그  나무의  땅위로 뻗는   가지다.   그러나 (클래미)가 '포도나무'를 의미하고 (암아로스)가 포도원을 의미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포도나무가 심겨진 밭에, 우리를 이 포도나무들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는 의견을따르고 싶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누구하고 토론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독자들은 문맥에 따라서 더 가능한 쪽을 택하기 바란다.


  먼저 생각할 것은 모든 비유에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특성을 낱낱히 조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 적용하시는 목적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에는 세가지 주요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에게는 그에게서 오는 능력을 제외하고는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 둘째,  우리가 그에게 우리의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전지(剪枝)하시며 키우신다. 셋째, 그는 열매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셔서 그것을 불에 던지고 태워  버리신다.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뻔뻔스럽게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에게 허락되는 보편적인 은혜(universalem gratiam)가 마치 그들에게 본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중요한 수액(sap)은 자신에게서만 흘러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에는 열매가 없으며 모든 선이 결핍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이 그  안에 접붙혀지기 전에는 그에게 포도나무의 본성이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것은  특별은혜를 (speciali gratia)통해서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의 손으로 심어 주시며 모든 축복을 내려 주시는 주(主)이신 아버지이시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볼 때 생명의 시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롯된다.   그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정말로 그 포도나무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힘을 찾으려 하는 것은 헛수고 일 뿐이다. 쓸만한 열매는 나 외에 다른 무엇을 통해서도 맺어질 수 없다"고 하는 말씀과 같다.


"2. 무릇......가지는" ;  - 열매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나무에서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불안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악의적으로 억제하거나 태만으로 그것을 질식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접붙혀진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사람 보기에는 포도나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포도나무에 뿌리를 박지 못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포도나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  - 이 말씀으로 그는 신자들이 타락하지 않으려면 계속적인 재배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항상 같이 계셔서 일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 은혜를 베풀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가 입양의 참여자가 되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다. 전지하는  문제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육신은 필요 없는 것들, 해악스러운 것들로  가득할 뿐 아니라 그 분야에 있어서는 비옥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한없이 뻗어 나가고 말기 때문이다. 열매를 더  풍성하게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들이 전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으로써 그는 경건한  사람들의 경건한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진전이 필요한가를 가르쳐 주시고 있다.


"3. 너희는......이미 깨끗하였으니" ;  - 이것은 그들이 이미 그의 말씀하신 바를 체험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그분 안에 심겨졌으며 또한 깨끗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청결의 방법으로써 가르침을 지시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그의 입에서 직접  들은  말씀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가 틀림없이 외적인 전도를  두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 그  자체에  그만한 효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작용하시기  때문이다. 곧 우리의 음성 그 자체는 청결케 하는 도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도는 사도들이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들의 체험을 그들에게  제시함으로써 거기서 은혜의 지속이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점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은혜의 열매로서의 복음의 가르침을 강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은혜를 계속적으로 생각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은혜는 마치 불결한 것을 청결케 하는 정원사의 칼과 같기 때문이다.


"4. 내 안에 거하라" ;  - 그리스도는 다시 제자들에게 그들이 부여받은 은혜를 지키는 데 정성과 열심을 품을 것을 권하고 있다. 이것은 육신에 대한 격려에 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우리를 보호해서  우리가 무관심에 이끌려 가거나 파멸의 길로 덤벼드는 것을 막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가 도중에서 그만 두려고 우리의 구원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뜻에서 우리가 성령을 훼방하지 않는 한 이 성령이 항상 우리 안에서 감화를  끼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내 안에 머물러 있거라, 나도 너희들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겠다"하고 그는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저가 내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하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다. 이 말씀으로 그는 그에게 산 뿌리를 박고 있는 사람은 모두 열매가 풍성한 자들이라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  - 이것이 전체 비유의 결론과  응용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떠나 있는 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는 도무지 선한 일을 할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말씀을 약화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고 만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아예 기피하고 만다. 왜냐하면 비록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부족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받을 경우에는 여기에 협조할 수 있는 그러한 기능(faculty)이 우리에게 있다는 몽상을  펴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 무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용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그렇게 쉽게 기피할 수 없다. 가톨릭의 착상을 종합하자면  이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의 도움을 받을 경우 그의 은혜말고 우리 자신 속에 뭔가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정반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가지가 절로(스스로는)과실을-전혀-맺을 수 없다"고 그는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지 그의 은혜의 협조를 극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오지 않는 모든 능력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따라서 '나를 떠나서'라는  말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닐 경우에는'하는 뜻이다.   여기에 또 다른 잘못된 소리를 덧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접목하는 가지 자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포도나무에 접붙혀진다 해도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 가지 자체에 타고 난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변론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지기 이전의 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  연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지가 되기 시작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사실 성경은 우리가 그 안에 있기 전에는 무용하고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