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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5:12)

1. 성경 (요15:6 ~ 12)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6)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7)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9)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0)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1)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2)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  - 그는 또 배은망덕의 처벌에 그들의 관심을  기울이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인내할 것을 자극하며 격려하고 있다. 이 인내야말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선물이지만 여기에 두려워 하라는 권고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반역적인 육신은 우리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말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잘리워 나간 사람들이 '시들어서' 썩은 장작처럼 되고 마는 것은 처음 기운이 그에게서 올 뿐 아니라 그것의 끊임없는 지속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라도 끊어져 나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잠시 동안은 그럴듯하게 잎이 무성하며 또 풀잎이 만발하지만, 후에 정작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가서는 주님의 소망을 꺾고 마는 위선자들이 많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  - 신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풍성한 열매를 내는 풍부한  자양분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빈곤한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든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에게서  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빈곤에 대한 대비책은 언제고 마련되어 있다"하는  말씀이  덧붙여지고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에 대한 열성을 훈련시키시려고 종종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시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아주 유익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에게 속히 다가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의 구하는 바에 대해서  궁핍을 느끼지 않을 것이요, 그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그의 무궁한  보고에서  충당해주실 것이다(고전1:5).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 이 말씀은, 우리가 신앙으로 그의 안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하는 뜻이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에서 떠나는 순간 그리스도를  다른  곳에서 찾는 셈이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우리의 무절제한 요청을 다 들어 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고 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 사항을 그처럼 쉽고 풍성하게 양보하신다면  그는 우리의 구원을 잘못 관리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올바른 기도의 원칙에 제한하고 있다.  그의 백성은 육신이 어리석게 열망하는 부와 영광,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원하지(will)않고 열매를 내는 성령의 진액(vital sap)을 원한다는 것이 본문의  의도이므로  앞서의 주장은 문맥의 확증을 받고 있다.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  - 이것은 앞 문장의 확증이다. 곧 그는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결실을 맺기를 바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크게 영화롭게 하는 것임으로 들어주시고 만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목적 내지는 결과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 속에 선을 행하려는 욕망을 불어 넣어 주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우리에게 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 이 귀절도 동일한 내용이다. 곧 그의  양무리  가운데는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을 그는 밝히 선언하고 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 그는 보통 이상의 뛰어난 사상을 표현하고자 하셨다. 여기서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항상 성자에 대해서 가졌던 은밀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요점을 벗어난 논리다. 그보다는 우리의 가슴에 우리에 대한 신령한 사랑의 확실한 담보를 놓아 두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였다. 그러므로 성부께서 항상 성자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셨다는 교묘한 생각은  이 귀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사랑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교회의 머리로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이다.  중보자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심연에 빠진 나머지 올바른 길은  고사하고 출구도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령한 사랑의 담보되시는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완전히 쏟아진 것은 그것이 그를 통해서 그의 지체에게 흘러 넘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는 이미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명칭을 일찌기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목적을, 곧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려는 뜻에서 그에게 그런 명칭을 허용하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그 안에서, 마치 거울을 통해서 보듯, 우리가 하나님의 우리 모두에 대한 부성애를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따로 사랑을 받거나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와 그를 아버지에게 연합하려는  뜻에서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오히려 더 낫다. 그는 그가 일단 우리를 감싸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계속적으로 누릴 것을 원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이것을 박탈당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 많고 그들의 손에 한번 쥐어졌던  것을 내던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그리스도의 은혜에 받아들여지고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때문에 거기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여기서 우리의 인내의 뒷받침이 없는 한 하나님의 은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끌어낸다. 나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요구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힘이 모자랄 경우에는 그것을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활동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주시는 분에게 우리를 그의 사랑 안에 확고히 세워 주십사 하고 기도해야한다.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한 것같이" ;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부리심에 대한 생생한 형상이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을 여기서 귀감으로 내세워서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본받게 하고 있는 것은 정당하다. 그의 말씀의 요지는,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비슷한 예가 나를 통해서 비취고 있다. 너희들이 보는대로 나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일과 이 길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 않느냐? 그도 또한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의 나에 대한 사랑은 순간적이거나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그러한 사랑이다"하는 뜻이다. 신자들은 항상 머리와 지체 간의 이 일치를 명심해야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귀감을 따르도록 노력할 뿐 아니라 그의 성령을 통해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향해 날마다 새롭게 되어질 것을 믿고 끝까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 - 그는 여기서 그의 부르심을 따라 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시고 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롬8:4) 행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값없는 사랑을 깨닫는 믿음과 선한 양심 및 새로운 생명은 언제고 같이 묶여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아버지에게 화해시키는 것은 그들이 벌을 받지않고 방종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을 그의 영에 의해 다스리심으로써  그들을 그의 아버지의 손길과 지배 아래 두려는 뜻에서이다. 여기서 진정한 순종을 통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점을 입증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모두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있는 셈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이러한 견해를 끌어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대답하겠다. 신자들이 그에게 드리는 순종은 그가 그의 사랑을 그들에게  지속하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그의 사랑의 결과이다. 그들이 그들의 양자됨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거저 베푸신 입양의 영이 그들을 활동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천사의 순결성을 부여받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글자 그대로 우리의 역량을  초과하는 완전한 의를 필요로 하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준수하는 조건이 우리에게 부과된  것은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살려는 마음을 말씀하시면서 그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조항, 곧 의의 값 없는 전가(imputation)를 결코 배제하지 않고 있다. 우리의 임무  자체로서는 불완전하고 불결한 것으로 배척을 받아 마땅하지만 사죄를 통한 이 전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에게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전념할 때, 비록 그들이 그들의 목표에 훨씬 미달한다 해도,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자들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엄격한 율법으로 부터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 경건한 자들이 신앙으로 그의 사랑을 깨닫는 가운데 마음의 복된 평안을 누리기 전에는 그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혀 알려지고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을 그는 여기서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기쁨은 거저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포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바탕이 허용되고 있으며 여기에 따라 평안한  마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여기서 이 기쁨이 그리스도의 것이면서 또한 우리의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데 이것은 각 각 다른 의미에서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것인 이유는 그가 그것의 저자와 원인으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 기쁨의 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평화에 대한 징계가 그에게 부과되었을 때 우리는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이 기쁨의 주(主)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영에 의해서 우리 마음의 공포와 불안을 파괴하시며 여기서 평화스러운 기쁨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이야기는 다른 각도에서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것을 누리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쁨이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가 이 말씀을 하셨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는 만큼 이 말씀에서 혜택을  받는 자들은 안심하고 믿어도 좋은 그 무엇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있어'(remain;머물러 있어)라는 말씀은 그가 말씀하는 기쁨이 순간적이거나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결코 사라지지 않을 그러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생사 간에 흘러 넘치는 구원의 보장을 찾을 수 있어야 겠다.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 그는 이 기쁨이 근본적이요 충만한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신자들이 모든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쁨의 바탕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어떤 공포와 불안과 슬픔도 그들을 결코  삼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도록 허락 받은 자들은 생명이나 죽음이나, 그 어떠한 불행이 닥쳐 오더라도 그 슬픔을 이기고 승리하고 말 것이다.


"12. 내 계명은......이것이니라" ;  -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의 방향을 세워야 하므로 먼저 우리는 그의 뜻, 곧 명령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가꾸어 나가는 것을 그가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서상 먼저 오지만 그것에 대한 진정한 증거는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므로 그는 특별히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는 일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어서 자신을 귀감으로 제시하셨듯이 여기서는  우리들이  특별히 따라야할 사랑에 있어서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그의 모든 백성을 보살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뜻에서 였기  때문이다.  그가 왜 이 귀절에서 불신자들을 사랑하는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가 하는 점
은 이미 14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